이유가 있었던 개발
독일(獨逸 Germany)이 합리적(合理的)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가진 나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19세기 말에서야 뒤늦게 통일(統一)을 이루었음에도 일사분란(一絲不亂)하게 국력(國力)을 신장(伸張)시켜 급속(急速)히 강대국(强大國)이 되었기에 관념적(觀念的)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선입관(先入觀)과 달리 행정(行政), 경제(經濟), 사회(社會) 시스템 등에서 쉽게 이해(理解)가 어려울 정도로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측면(側面)이 많습니다.
제2차 대전 중의 무기 분야(武器分野)는 가히 그런 혼란(昏亂)의 결정판(決定版)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느라 착공 19년 만에 개항한 베를린 공항, 이런 사례에서 보듯 생각보다 독일의 시스템이 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전쟁(戰爭)에서 패(敗)했기에 그런 문제점(問題點)이 부각(浮刻)된 것일지 모르겠지만 무기(武器)의 생산(生産) 및 공급(供給)에 있어난 난맥상(亂脈相)이 엄청났습니다.
기계(機械), 화학 공업(化學工業)의 선도국(先導國)답게 보편적(普遍的)으로 독일제 무기의 성능(性能)은 좋은 편에 속합니다.
그러나 수요(需要)를 충족(充足)시키지 못해 일선(一線)에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총체적(總體的)인 생산력(生産力)에서 미국, 소련에 뒤지기도 했지만,
스스로 공급 능력(供給能力)을 제약(制約)시키는 비효율적(非效率的)인 정책(定策)을 남발(濫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제 무기는 명성이 높았으나 공급 측면에서는 낙제점이었습니다
기갑장비(機甲裝備)를 예(例)로 들면 일단 종류(種類)부터 많았습니다.
물론 작전 목적(作戰目的)에 맞는 장비가 필요(必要)하나 독일은 유별(有別)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이것저것 만들었습니다.
반드시 이 때문이라 할 수 없지만 정작 필요한 장비의 생산량(生産量)이 부족(不足)했습니다.
전차(戰車)의 경우 미국의 M4나 소련의 T-34는 최고 성능(最高性能)은 아니었지만 수 만대 씩 전선(戰線)에 공급(供給)되었던 반면 독일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다는 4호 전차(↑)마저 1만 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여러 종류의 장비를 동시에 운용했습니다
무기의 종류가 과(過) 할 정도로 많다 보니 필연적(必然的)으로 생산성(生産性)이 떨어졌고 배치(排置) 후에는 보급(補給)과 정비(整備)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다못해 볼트, 너트도 호환(互換)이 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茶飯事)였습니다.
구형(舊型) 혹은 노획 장비(鹵獲裝備)를 재사용(再使用)하는 것과 별개(別個)로 관계자(關係者)들의 이해타산(利害打算)으로 이런저런 장비들을 계속 만들면서 생산 능력(生産能力)이 저하(低下)된 사례(事例)가 흔했습니다.
'4호 돌격포(Sturmgeschutz IV)'도 그러한 난맥상(亂脈相)을 보여준 무기 중 하나입니다.
↑폴란드 포즈난(Poznań) 전쟁박물관에 전시 중인 4호 돌격포
독일 특유의 기갑 장비였던 돌격포(突擊砲)의 시작(始作)은 1940년부터 배치(排置)된 '3호 돌격포'입니다.
3호 전차 차대에 4호 전차의 7.5cm KwK 37포(砲)를 결합(結合)한 형태(形態)로, 처음 명칭(名稱)은 그냥 '돌격포'였으나 이후 4호 돌격포가 등장(登場)하며 구분(口分)을 위해 3호 돌격포로 바뀐 것입니다.
애초 개발 목적(開發目的)이 보병 지원(步兵支援)이어서 운용(運用)도 포병(砲兵)에서 담당(擔當)했습니다.
그런데 1941년 독소(獨蘇)전쟁 발발(勃發) 후 대규모 기갑전(大規模機甲戰)이 일상이 되고 전차 공급량(戰車供給量)이 딸리자 상황(狀況)이 바뀌었습니다.
↑4호 돌격포는 불합리했던 독일의 무기 체계를 상징하는 장비가 되었습니다
3호 돌격포도 소련 전차와의 대결(對決)에 동원(動員)되었습니다. 결국 포구 속도(砲口速度)가 향상(向上)된 7.5cm StuK 40포(砲)를 장착(裝着)해 화력(火力)을 강화(强化)하기에 이르렀는데,
일선(一線)에서의 반응(反應)이 좋았습니다.
특히 1943년에 벌어진 크루스크(Kursk) 전투에서 많은 기대(企待)를 모았던 5호 전차가 신뢰성 부족(信賴性不足)으로 애만 먹였던 반면 3호 돌격포는 상당(相當)한 전과(戰果)를 올렸습니다.
낮은 전고(全庫) 덕분에 3호 돌격포가 방어(防禦)에 유리(有利)했다는 평가(平價)까지 나왔습니다.
↑일선에서 좋은 평가가 나온 3호 돌격포
그러자 히틀러가 4호 전차를 기반(基盤)으로 오로지 기갑전(機甲戰)에 특화(特化)된 '4호 구축 전차(驅逐戦車, Jagdpanzer IV)'의 개발(開發)을 지시(指示)했습니다.
4호 전차의 성능(性能)이 떨어져서 벌인 일종의 고육책(苦肉策)이었습니다.
4호 구축전차의 배치(排置)가 이루어지면 4호 전차의 생산(生産)을 점진적(漸進的)으로 줄이고 3호 돌격포(突擊砲)는 보병 지원용(步兵支援用)으로 회귀(回歸)할 예정(豫定)이었습니다.
그렇게 개발이 진행되던 1943년 11월에 3호 돌격포를 생산하던 알케트(Alkett) 공장(工場)이 폭격(爆擊)으로 대파(大破)되었습니다.
↑히틀러의 관여는 독일의 무기 체계가 복잡해진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아직 4호 구축전차의 개발이 완료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이는 심각(深刻)한 문제(問題)를 야기(惹起)했습니다.
이에 12월 6일, 히틀러가 직접 참석(直接參席)한 회의(會意)에서 알케트 공장의 복구(復舊) 또는 4호 구축전차의 양산(量産)이 시작되기 전까지 4호 전차 차체(戰車車體)에 3호 돌격포 G형 전투실(戰鬪室)을 결합(結合)한 4호 돌격포를 만들어 전력 공백(戰歷空白)을 막으라고 명령(命令)했습니다.
이후 비판(批判)의 대상(代償)이 되지만 사실 4호 돌격포의 탄생(誕生)만큼은 이유가 충분(充分)히 타당(妥當)했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