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은 갈렙
수 14:6-15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수 14:6-15 / [갈렙이 차지한 땅] 하루는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유다 사람들과 함께 길갈로 여호수아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어르신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가데스바네아에서 어르신과 저에 대한 일로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 말입니다. 7) 여호와의 종 모세가 저를 정탐꾼으로 가데스바네아에서 보내실 때 저는 마흔살이었습니다. 저는 탐지하라고 보낸 그 땅을 자세히 살펴보고 돌아와서는 그곳의 사정이 어떠한지 사실대로 모세에게 말씀드렸습니다. 8) 하지만 그때 저와 함께 땅을 살펴보러 올라갔던 형제들은 돌아와서 오히려 우리 오히려 용기를 꺽는 소리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저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뜻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9) 그래도 그때 제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말씀드렸기에 모세가 저에게 이렇게 맹세하였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만 네가 밟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네가 영원히 차지할 몫으로 주겠다. 그 땅을 대대로 네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유산으로 삼도록 해주마. 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10)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지 어느덧 4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 겨레 이스라엘이 광야를 떠돌아다닌 지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지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지가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저를 지금껏 살려 주시어 올해로 저의 나이가 여든다섯이나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하신 약속을 저버리시지 않고 그것을 지키시려고 여지껏 이것의 목숨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지요. 11) 이것 나이가 어느덧 이렇게 되었어도 모세가 이것을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똑같이 기력이 왕성합니다. 그뿐인가요? 싸움터에 나가서 싸우라고 하신다면 나가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일을 하라고 분부하신다 해도 해낼 자신이 있습니다. 나이는 먹었어도 여전히 힘은 젊었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12) 그러니 이 산악지방을 제가 물려받을 땅으로 주십시오. 제 형제들과 함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여호와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대로 말입니다. 그날 어르신께서도 그 자리에서 우리가 보고 드린 말씀을 분명 기억하실 겁니다. 그 땅에는 아낙 사람이라고 하는 거인족이 살고 있고 또 그들이 사는 성은 어찌나 견고하고 크던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하는 얘기 말입니다. 그곳의 상황이 그렇다 하여도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어째서 그들을 몰아낼 수가 없겠습니까?' 13)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에게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가 차지할 몫으로 주었다. 14) 그런 까닭에 헤브론은 지금까지도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몫으로 지정되어 대대로 물려 내려왔다. 그 모든 것은 갈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15) 헤브론은 옛날에 `아르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기럇아르바라고 불렸다. 이 아르바는 거인족인 아낙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사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이 없이 그 땅이 평화로웠다.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의 갈렙이 모세에게 약속받은 헤브론 땅을 유다 지파의 분깃 외 땅으로 요청합니다. 1-6절은 땅을 분배하는 방법이라면 6-15절은 약속하신 땅을 어떤 자세로 취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네 발로 밟는 땅이 너의 기업이 되리라(6-9) 갈렙은 45년 전에 가나안 정탐을 하고(민 13:22) 보고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그의 신앙으로 모세 앞에서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약속받았습니다.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신 1:36)라고 하신 것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땅 헤브론을 기업으로 약속을 받을 수 있었던 인물로, 그가 보여준 신앙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대하여 성실하여 보고 듣고 확인한 바를 믿음으로 보고한 것입니다. 갈렙과 함께 올라갔던 다른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의 외모와 환경에 사로잡혀 두려워하고 믿음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한다’라는 구별된 신앙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구별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결과인 구별된 복의 분깃을 받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10-12)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함께 하시므로 광야에서의 45년 동안 생존할 수 있었고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나의 생명의 근원되시며 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앙은 곧 우리가 이 땅에서 강건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유다 지파의 지분이 있음에도 헤브론 산지를 개인적으로 요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험한 산지여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갈렙만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이라는 믿음을 소유한 자신이 행할 몫으로 여긴 것입니다. 갈렙은 확신을 가지고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13-15) 여호수아가 갈렙에게 축복하며 헤브론을 주어 기업으로 삼게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헤브론이 그의 기업이 된 것은 갈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더는 세상의 것을 좇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좇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영원할 것입니다.
적용: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13) 당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일에 성실하게 충성하며 살고 있습니까?
성도가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입에 넣어주는 떡을 그냥 받아먹기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가 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땅이 주어졌다는 그 자체가 이미 갈렙에게는 축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완전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 싸워야 할 과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아니하면 실제의 그 산지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설 교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수 14:6-15 / 김종민 목사
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너고, 그리고 40년이라는 기나긴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리고를 비롯하여, 가나안 땅을 하나하나 정복했지만, 그들에게는 아직까지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에, 갈렙이라는 사람이,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자신의 기업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갈렙은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이 산지는 내 기업이니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갈렙의 나이가 85세였습니다.
갈렙은 이 산지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기로 약속하셨으니, 이 산지를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넣어주신 비전은 무엇입니까?
비전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을 이루어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갈렙이라는 사람은 비전을 이루게 해 달라고 구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비전을 그의 나이 85세에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 나이에 비전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요?
첫째, 갈렙이라는 사람은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드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6-1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까?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만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갈렙은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고 말했으며,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그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4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들려주셨던 약속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또한, 갈렙은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라고 말했습니다.
45년의 세월 동안,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갈렙은,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이기에, 그 산지를 자신의 기업으로 달라는 직접적인 요구였습니다.
여러분! 갈렙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항상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 인생의 황혼을 달리고 있을 때에나, 변함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비전이란, 젊고 패기가 넘치는 젊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그 마음에 약속의 말씀이 살아 있으면, 얼마든지 비전이 넘치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넣어주신 비전을 이루고, 꿈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갈렙처럼,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약속의 말씀을 변함없이 붙들고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꿈을 이루게 됩니다.
민수기 23: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당장 그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룬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견고하게 붙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 나이에 비전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요?
둘째, 갈렙이라는 사람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붙든다 할지라도,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없다면,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을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약속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갈렙은 자신에 대해서,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온전히 충성하는 믿음의 소유자”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갈렙은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라고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충성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정복해 가는 땅입니다.
갈렙이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성실하게 순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렙은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을 만족시킬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순종하던 믿음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계획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걸음을 옮기던 성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포기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성실하게 충성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을 수가 있었습니다.
비전을 이루고 꿈을 이루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갈렙처럼,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께만 온전히 충성하는 성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충성하는 성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갈렙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 나이에 비전을 이룰 수가 있었을까요?
셋째, 갈렙은 언제나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아멘.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달라고 구하던 헤브론 산지에는 아낙 자손들이 큰 성읍을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낙 자손은 거인들로서, 고대에 큰 용사들이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이들을 보고, 간담이 녹을 정도로, 그들은 장대한 무적의 용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장담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들도 두렵지 않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5년 전, 그의 나이 40세였을 때에도, 갈렙은 사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정탐꾼들과 똑같이 아낙 자손을 보았으나, 그 때도 갈렙은 아낙 자손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45년 전, 가데스 바네아에서, 약 2년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이스라엘은 12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어 그 땅을 탐지하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탐지하던 열 명의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을 보고, 그만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다음에,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밤새도록 통곡했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속았다고 여기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기에, 모세와 아론은 그들 앞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에, 갈렙이 여호수아와 함께 옷을 찢으며, 백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민 14:1-10)
갈렙은 하나님이 가장 두려우신 분이니,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상대할 사람들은 분명히 그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기골이 장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눈에는 그들은 그가 정복해야 할 땅에 살고 있던 밥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쳤습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먹는 밥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밥을 보면서, 무서워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상대할 세상 사람들은 우리보다도 훨씬 더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충분히 하나님이 약속하신 산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달라”고 구했던 것처럼 이 밤에 우리도 그렇게 구해야 합니다.
이 땅은 분명히 아낙 자손들과 같은 거인들이 사는 땅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비교한다면, 그들은 기골이 장대한 용사들이며,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나약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기에, 우리가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 땅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진정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며,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놓치지 않고 차지하기를 원하십니까?
세월이 지나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말씀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며, 충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또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업을 차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수 14:6-15
지난 주간에 단골로 가는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는데, 그날 따라 유달리 흰머리가 많아 보입니다. 바닥에 떨어지는 흰머리의 비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는 “흰머리가 많네요.” 그랬더니 미용실 원장이 그럽니다. “그러네요. 안 그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는데, 뒤에는 더 많아진 것 같아요.”
제가 이제 54살이 되었습니다만 작년에는 어깨가 그렇게 결리고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마사지를 하면서 만져도 보고, 병원에 가서도 그 비싼 근육 주사 같은 것도 맞아보았습니다만 어깨 통증이 사라지지를 않습니다. 이제 시간이 좀 지나서 좀 덜하다 싶었는데, 이제는 오른쪽 어깨가 또 그렇습니다. 아내가 하는 말입니다. “오십견인 모양이다. 안 그래도 오십견은 한쪽씩 온다더라.” 그간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현상들이 제 몸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게 다 노화에서 오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드니 좀 서글프기도 합니다.
2022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나름 크고 작은 계획들을 세웠습니다만 우리네 생각에도 오십견이 있지는 않는지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은연중에 언뜻 ‘잘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노화 현상이 육체에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오나 싶고, 내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나를 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물안경을 쓰고서 바다에 들어가면 백화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밑바닥이 흰색으로 뒤덮여 있는데, 사막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고기도 찾아볼 수가 없고, 이미 죽어버린 조개껍데기들 같은 것들만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무섭습니다. 이런 백화현상이 우리네 심령에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살아있어야 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흥미가 없어집니다. 재미가 없습니다. 어릴 때는 재미 없는 것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재미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게 그거지.’ 싶고 ‘그런 것을 꼭 해야 되나.’ 사춘기 여고생 때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그렇게 웃음이 나고 그랬는데 말이지요.
웃음기도 사라지고 흥도 나지 않습니다. 멋도 사라지고, 기백도 꺾이고, 꿈도 꾸지를 않습니다. 낭만을 찾아보기도 힘듭니다. 새해가 되어도 이제는 아예 계획조차 세우지 않습니다. 그러니 김빠진 사이다처럼 사는 맛도 없고, 부드러운 알맹이 속살은 없고 백화현상이 일어난 바다에서 보는 것처럼 딱딱한 껍데기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쪽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갈렙이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입니다. 저희 고향 동네에서는 ‘동그랑땡’을 가리켜서 ‘갈랍’이라고 부릅니다만 갈랍이 아니라 갈렙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갈랍을 만들어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만 갈렙도 아주 멋스럽습니다.
갈렙이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나아옵니다. 그때 그의 나이 85세입니다. 10절, 11절 말씀에서 보면 ‘이제 보소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리니.’
그러면서 크고 견고한 성읍이요 거인족 아낙 자손이 거하는 헤브론 산지를 자기가 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물맷돌로 쓰러뜨린 자가 골리앗입니다. 그 큰 신장을 가진 자들이 바로 아낙 족속입니다. 그 산지를 자기들이 취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이미 그의 나이가 85세입니다. 적은 나이가 아니지요. 자기와 같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여호수아와 함께 제일 나이가 많아요. 그 나이면 골골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기운과 기백이 넘칩니다. ‘잘할 수 있을까.’ ‘더 할 수 있을까.’ 해야 되는데 그런 것은 아예 찾을 수조차 없습니다. 자기가 묻힐 무덤 자리 하나 보러 다녀야 할 것 같은데, 누구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거친 산지 헤브론을 취할 수 있게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늙으면 약해진다고 하는데, 갈렙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인가 봅니다.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 고등학교 친구 목사가 장로님이신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줍니다. 하루는 저녁때쯤 해서 가족들이 모여 있는데, 아버지가 씩씩거리면서 들어오시더니 다짜고짜 오토바이를 탈 때 쓰는 화이바를 쓰고 검정색 가죽 장갑을 끼더라는 겁니다.
그래서는 “왜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지금 바깥에서 젊은 놈들이 깽판을 치고 있는데, 자기가 나가서 이놈의 새끼들 손 좀 봐주고 와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는 친구가 “아버지, 지금 연세가 얼마인데, 그러시느냐.”고 억지로 말렸다고 합니다. 갈렙의 기질이 있었나 봅니다.
때로는 20세 청년보다도 70세 노년에게서 청춘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나이가 더해진다고 해서 사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시인 ‘새뮤얼 울먼’은 ‘청춘’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읊고 있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네. 장밋빛 뺨,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늠름한 의지, 빼어난 상상력, 불타는 정열, 삶의 깊은 데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선함이라네. 청춘은 겁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이라네. 때론 스무 살 청년이 아닌 예순 살 노인에게서 청춘을 보듯 나이를 먹어서 늙은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어서 늙는 것이라네.]
성경의 말씀에서 보듯이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리겠지만 하나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그 어떤 누구라 하더라도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루하루가 새로움으로 가득 찰 수 있어야 합니다. 신선함으로 가득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나이 80세가 되고 죽음이 가까웠을 때 “내 늙은 몸속에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느끼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늙으면서 허무만 얘기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리더쉽 강사인 ‘존 맥스웰’이 한번은 노인의 건강을 연구한 의사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100세 이상의 장수 노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결과였습니다. 그는 그 기사를 읽기 전에 당연히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이 건강식 요법이나 규칙적인 운동 등과 같은 것일 거라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그 고령자들은 공통적으로 목적이 있는 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견지하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일은 온전히 익었을 때에 제일 예쁘고 맛이 있습니다. 곡식도 거두게 될 때에 제일 황금빛으로 물듭니다. 햇빛도 서산 낙조가 정말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 오늘이 제게 있어서 제일 젊은 날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감하고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 주님 앞에 부름을 받는 그때가 생애의 최정상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나이 든 그 순간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절정이 되게 하옵소서.’
그날 미장원에 들렀을 때입니다. 먼저 온 고객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던 원장 미용사분을 봤더니 미용실 상호가 찍힌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야, 미용실 유니폼을 깔끔하게 맞춰서 입으셨네요.” 했더니 그럽니다. “잠시 있으면서 미용 일을 배우는 다른 한 분과 옷을 세트로 해서 입기로 했어요. 그런데 입으려고 하니 너무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듯 한마디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그분이 제가 가서 입을 털어주면 참 좋아합니다. “내가 나를 좋게 보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좋게 봐줄 거라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입고 있는 거를 보니 있어 보이고 멋져 보여요.” 했더니, 건네준 말을 곱씹으면서 좋은 표정을 짓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이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자신과 관계된 것들에 대해서 시원찮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이나 자기가 하는 어떤 것들이 별 게 아니고 별 볼 일 없다는 식입니다. 스스로를 작게 여긴다고나 할까. 자기는 누군가에게 시시하게 보일 것이라 여기고, 없어 보일 것이라고 여기고, 늙어 보일 것이라고 여기고 바보처럼 보여질 것이라고 여기면서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입니다.
실제 한 연구 결과에서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없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가진 게 없고, 배운 게 없고, 실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거기에다가 믿음도 없어서 아무것도 아니고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식입니다. 그런 의식 속에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어떤 변화나 역사를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메뚜기 콤플렉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정탐을 하게 되었는데,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총 12명이 40일간의 정탐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본 것을 말하는데, 10명의 정탐꾼들이 그러는 겁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1-33)
이게 바로 메뚜기 콤플렉스입니다. 자기들은 자기들이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아 보이는데, 상대방도 자기들에 대해서 그렇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 콤플렉스에 빠지게 되면 심리적으로 이미 위축되어 말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눈도 한번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어깨도 제대로 펴보지 못한 체 뒷꽁무니를 빼면서 도망쳐서는 숨어 버리기에 십상입니다.
행여 우리가 이런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악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자기 파괴적인 행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에 나오는 죄악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잘 살펴야 합니다.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졌던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한 발자국도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가지 못하고서 허우적거리고 헤매다가 쓰러져 죽어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정적인 보고를 전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을 했습니다.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1-3)
여러분, 부정적인 것들이 훨씬 그 파급력이 빠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백성들의 간담이 녹았다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그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 접어들면서 기분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습니다. 먹을 것에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마실 것도 그랬습니다. 출애굽을 해서 가면 애굽과는 다른 신세계가 펼쳐질 것이라 여겨겠지요. 푸른 풀밭은 아닐지라도 이 정도일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황량한 광야였습니다. 그 광야는 사람이 살 곳이 못되었습니다. 그로 감정이 격해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10명의 정탐꾼들이 한다는 말이, 자기들이 장차 이르게 될 곳에는 거인족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크고 견고한 성읍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이고 그들도 우리를 그렇게 볼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속에 천불이 나 있었는데, 10명의 정탐꾼들이 기름을 갖다 부어버린 것입니다. 그랬더니 밤새 통곡하고 원망을 하다가는 다른 한 지도자를 세워서 서둘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그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르게 하실 곳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인데도, 다시 종살이 하던 그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인지요. 얼마나 목이 곧고 심령이 강퍅한 자들인지 모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로 회귀하려고 합니다. 앞으로 내딛지를 못합니다.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 재미난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한계가 없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한 게 없다.’
그들 백성을 보면서 새삼 알게 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부정적인 이슈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을 하는지 모릅니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만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험담, 모함, 음담패설, 비방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서 귀를 쫑긋 세웁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러한 거짓되고 악한 것이 그들 속에도 이미 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매사에 긍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지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눅 6:45) 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의 됨됨이, 신앙과 인격,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 가치관과 세계관, 영적인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도인의 이야기입니다. 자기더러 처녀에게 아이를 배게 했다고 대드는 부모에게 “아, 그러냐.”고 한마디하고, 그 후에 오해가 있었음을 알아 사과하는 그들에게 “아, 그러냐.”라는 말 한마디만 했다는 것이지요.
닭이 물을 한 모금 물고서는 목을 뒤로 젖힙니다. 그것을 보고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 보기가 참 딱하다. 저렇게라도 해야 먹을 수 있으니 참 먹고 살기 힘들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한 모금의 물을 마시고서도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감사를 하니 참 보기가 좋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이십니까.
갈렙은 예나지나 그의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45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85세가 되었습니다만 그의 믿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성실함과 충성과 온전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45년 전,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뚜기 콤플렉스에 빠져서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막아서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했습니다.
그랬었던 그가 여전히 4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8절 9절을 다시 보면,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그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바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45년이 지났지만 그가 받은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식언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모세를 통해서 주신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대로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장장 45년의 세월이 그에게서 흘러가 버렸지만 믿음은 그 세월 따라 가버리지 않았습니다. 광야의 모래바람이 불어닥쳤을 때에도, 살을 에는 듯한 한밤의 추위와 살을 다 태워버릴 것 같았던 한낮의 그 뜨거운 열기에도 그의 믿음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그는 자기와 동시대를 살았던 출애굽 1세대들이 다 쓰러져 죽어가는 그때에도 여전히 생존함은 물론이요 여전히 강건함으로 믿음의 빛을 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멋지지요. 이렇게 살다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내게 주셨던 그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가고 있습니까. 한번 말씀을 드렸겠습니다만 제가 한맘에 와서 헤매고 허덕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기도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날 밤에도 사택 작은 방에 홀로 있으면서 힘듦을 감내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뇌리에 강하게 찾아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참아 기다리라.” 그 말씀으로 인해 그 힘들 때를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참아 기다릴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그때 그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말씀을 붙들고 계십니까. 그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붙들고 있는 그 말씀이 처지를 이기게 합니다. 신세 한탄을 멈추게 합니다. 내 발에 등이 되어 주고 내 길에 빛이 되어 줍니다. 그 말씀이 혹독한 겨울도 지나쳐가게 합니다. 외로운 밤도 버티게 해 주고, 흐르는 눈물도 닦아 줍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 줍니다. 붙들고 있는 그 말씀이 오히려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원합니다.
12절에,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그를 축복하며 그 산지를 내어주지요. 14절,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그렇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음으로 아낙 족속들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주실 그 산지의 그 어떤 크고 견고한 것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자취를 감추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취해야 할 산지는 무엇입니까. 일찍이 가보지 못했고 밟아보지 못했지만 꼭 취해야만 산지는 어떤 곳입니까. 우리 앞에는 유형무형의 산지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을 것입니다. 그곳에는 거인족이 살고 있을 것이요, 크고 견고한 성읍이 꽈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갈렙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산지를 우리에게 반드시 허락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갈렙처럼 사는 삶
수 14:6-15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러한 약속이 수백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모세의 후계자, 예호슈아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완성되려는 순간이다.
갈렙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섬긴 자였다.
1) 그의 나이 40세에 모세가 정탐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그는 믿음으로 또한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정탐하여 그 땅이 복된 땅이며 정복할 수 있는 땅이라고 믿었다. 그러한 결과로 그가 가나안땅에서 밟는 지역을 주겠다고 모세가 약속하였다.
2) 사십오년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성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였다.
3) 이제 가나안땅에 들어와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인, 85세에도 강건하여 전쟁에도 참여하고 집밖출입을 자유스럽게 할 수 있었다.
4) 믿음으로 그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난공불락의 산지를 달라고 요청한다. 여호와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면 능히 그들을 내어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5) 결과적으로 그는 받은 땅에서 아낙족속을 몰아내고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갈렙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적지 않은 나이 40살에 부르심을 받은 갈렙은 강한 믿음과 행동의 사람으로서 행동하였다는 점이다. 확고한 믿음과 신앙의 결단과 바른 행동은 젊고 혈기많은 나이에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의 청년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비록 그 나이 40세였지만, 그는 여호와를 믿는믿는 바른 믿음으로 약속의 땅을 정탐하였다. 우리가 어느 때에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는가보다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떻게 믿음으로 행동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위대한 믿음의 결단은 일회적으로 끝나서는 않되며, 인생에 있어서 끝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한번 잘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과 결단을 지속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계속해서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전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장장 45년간을 그러한 광야의 역경을 성공적으로 헤쳐나갔다. 그가 결단하게된 40년에서 45년을 더한 곱절의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적으로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계속되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믿음으로 행했다. 그는 40살때에 정탐하면서 다른 정탐군들이 가나안이 거인족속들이 살고 있으므로 정복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능히 정복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 여겼던(민 13장) 바로 그 아낙 족속들을 자신이 정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삶은 항상 적극적이었고 진취적이었으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 그는 노년에 안식과 편한 일을 찾지 아니하고 40세때의 동일한 믿음과 동일한 힘과 동일한 비젼을 갖고 있었다. 여호와와 함께 하는 그에게 두려움이 실패는 없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서 했으며,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꾸준한 믿음과 진취적인 행동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갈렙의 승리의 비결
수 14:6-15 / 김양흡 목사
갈렙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헤브론이라는 강력한 성을 정복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자신의 나이가 85세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운 상황을 승리로 장식하였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1. 강하다고 하는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갈렙은 그의 나이가 85세 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강력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1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민14:24, 30, 본문 8,9절).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갈렙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보고를 하였고, 그 결과로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는데(신1:36) 그것을 확실하게 믿은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있는 말씀인데 어찌 안 믿겠습니까? 약속에 대한 확신, 그 확신에 따른 자부심을 갖고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2.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12절). 육신적으로 보면 안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능력을 소유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갈렙은 이전에 광야에서 45년 동안 함께 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10-12절).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낙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빌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라는 큰 기쁨이 임하게 됩니다.
3. 전적으로 여호와를 따랐습니다.
갈렙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충성하였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랐습니다(8, 9, 14절). ‘온전히(fully)’라는 말은 부족함이 없이 충만한 것을 말합니다. 부분적 의지가 아닌 전적인 의지입니다. 승리라는 기적을 체험하려면 전적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동의가 안 되도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갈렙은 자기 계산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는 사람은 무엇이 달라도 다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걸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을 너무 생각해 주느라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믿음 없음을 고백하는 말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합니다.
4. 지혜를 총동원하였습니다.
갈렙은 헤브론을 점령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총동원했습니다. 기도하는 만큼, 의지하고 따르는 만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기도만 했다면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기도만 했다면 유대인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만큼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갈렙은 기도만 하지 않고 지혜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먼저 올라가는 자에게 자기 딸 악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수15:16). 지휘권 승계를 약속한 것입니다. 결국 옷니엘이 그 성을 정복하였고(수15:17-19), 그 땅의 전쟁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핑계를 대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종은 자신의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여 승리를 거둔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기도하되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승리하자.
†결론을 맺습니다.
갈렙은 내적, 외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곳은 도피성으로(수20:7), 그 다음은 레위 족에게(수21:11), 변두리는 자신들이 사용했습니다(수21:12). 승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됩시다.
생존의 의미
수 14:6-15 / 김성덕 목사
리차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이란 유명한 작품이 있습니다.
갈매기 조난단은 수 만년 동안 살아온 생활법칙에 도전을 합니다. 남들이 떼 지어 모여 노는 곳에 가지 않고 다들 떠들어대며 생선 머리를 쪼아 먹을 때 같이 주둥이를 내밀지 않고 언제나 홀로 더 멀리, 더 높이, 더 멋있게 날려고 연습을 합니다. 물론 조나단이 하는 일이 자신의 기본적으로 생존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나단은 오직 남들보다 다르게 살기위해 노력하다가 결국은 딴 갈매기들에 의해 재판에 회부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통적 관습과 가치관에 도전하여 다른 갈매기들을 선동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는 갈매기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잠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며 모든 집단 속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행동 통일을 합니다.
리차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은 바로 우리 인간의 생활양상을 일깨워 주는 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쉽게 편하게 사는 방법은 남이 날 때 자기도 날고, 남들이 떠들 때 자기도 떠들고 남이 짝을 찾아 날 때 자기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존을 위한 방법은 될 수 있으나 생존에 의미를 주는 삶의 방식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산다는 것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생존의 의미가 없는 삶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의 의미란? 어떻게 살아남느냐? 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살며,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 는 문제입니다.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간청하는 갈렙의 신앙모습 속에서 생존의 의미를 발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7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 처절한 영적 전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남아 있음으로 나이가 많아 늙은 여호수아는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나머지 땅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우시리라고 용기 주시고 격려해주심으로 여호수아는 자신의 마지막 사명인 땅 분배의 사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미 요단 동편의 땅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분할되었으니, 요단 서편 땅을 나머지 아홉 지파와 또 다른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분배할 지역의 경계를 정하고 나누어주는 일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오늘 수14:1-5절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과정에 대한 서론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분배하시는 과정에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
2) 부모의 믿음이 자녀들에게 축복으로 돌아옵니다.
4절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3) 땅보다 더 큰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4절하반절 [ 레위 사람에게는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재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 ]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 수14:6-15절 말씀은 이렇게 요단 서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할 때 당시 85세가 된 갈렙이 유다족속들과 함께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전에 모세가 자기에게 한 약속대로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사오니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청원한 일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럼 갈렙이 유다 자손과 함께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하면서 먼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떠 올리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1.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회상하며 이야기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6-8절)
지금 갈렙은 여호수아 앞에서 민13:에 나오는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7절에 [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 하였고 ]
8절[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
그럼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 무엇입니까?
민13: 14: 에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열두 지파에 한 명씩 정탐꾼을 뽑아 먼저 가나안 땅을 탐지하라고 보냅니다. 그런데 갔다 와서는 보고가 서로 상반됩니다.
열 사람은 [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그들은 아낙 자손 대장부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으니이다 ]
그러니 온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찌 칼에 망하게 하는고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 ] 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14:9절 [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백성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 합니다. 의역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저버리지 아니하면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갈렙은 이렇게 지금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상기 시키며 지금까지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 ] 는 것입니다.
어느 설교자는 갈렙을 가리켜「영원한 젊은이, 갈렙」이라고 합니다. 갈렙이 이렇게 영원한 청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온전히 좇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헌신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일을 맡기실 때 바로 학벌, 문벌,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아 헌신되어졌느냐? 를 보십니다.
40세에 부름 받아 지난 45년 동안 온전히 헌신되어진 갈렙 이것이 그가 젊게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가 90회 생일을 맞이해서, `앞으로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하는 질문에 `산맥은 깊습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새 산에 올라야지요`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영적인 청년입니다. 항상 새로운 비전으로 살아가는 사람, 세월의 무게에 눌려 안주하지 않는 사람, 주님이 주시는 삶의 새로운 목적을 발견하고 거기에 헌신되어진 사람, 이런 사람은 나이게 상관없이 청년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특히 갈렙이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떠 올리며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숨어 있는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갈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갈렙 혼자서가 아니라 항상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이름으로, 늘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진 조연으로, 부록처럼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으로 다녀와서 여호수아와 함께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믿음의 인물입니다.
그 후로,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고, 성경의 영웅으로 기록되지만, 갈렙은 무대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제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 늙었고, 갈렙의 나이도 85세가 된 지금 갈렙이 다시 한번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똑같았는데, 똑같은 한 사람의 정탐꾼이고, 똑같이 하나님의 편에서 세상을 볼 줄 아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똑같이 미래에 소망을 둔 사람이었는데, 그 이후의 과정에서는 전혀 다른 위치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민족의 지도자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성경의 중심인물로 기록되었고, 또 한 사람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묻혀 있는 무명씨로 남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갈렙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지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용맹한 용사였고, 여호수아의 동지였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원로가 되었습니다. 갈렙과 같은 이름 없는 용사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지파에 따라 땅을 나누는 일만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그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청합니다. 정복한 땅의 노른자 위를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산지 헤브론 땅을 자기에게 달라는 겁니다.
갈렙은 평생을 이름 없이, 드러나지 않은 채 살아왔지만, 불평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았습니다. 동기생이라고 할 만한 여호수아가 저렇게 영웅이 되어 있는 동안 그는 철저하게 무명이었습니다.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물러앉아 국가 유공자 행세나 하면서 지내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아직도 할 일이 있으니, 더 일하겠다고 합니다.
그냥 앉아서 죽지는 않겠다는 거지요.
누가 갈렙을 단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한 장면으로, 갈렙은 지금까지 주연이었던 여호수아에 전혀 못지않은 감명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이렇게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 조연만 한 갈렙이지만 그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 줄 알았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높이려 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는 무명으로 단역으로 남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예수의 이름을 드러내고 예수를 높이려고 힘쓰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가장 크고 귀한 역할일 것입니다.
눅14:11절 [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아주 가까운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라면서 같은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수도원에서도 형제처럼 가까이 지냈는데, 한 친구는 학문을 쌓아 신부가 되었고, 또 한 친구는 수도원에서 노동을 하며 수도사의 길을 갔습니다. 수도사는 친구인 신부가 설교할 때마다 언제나 제일 앞자리에 앉아 친구를 바라보며 그의 설교를 경청했습니다. 신부는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하여, 명설교가로 멀리까지 이름이 알려져 마침내 큰 도시에 있는 유명한 성당으로부터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구였던 수도사는 수도원에 계속 남아 수도원의 살림을 보살피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큰 성당에 간 친구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설교를 준비하여 강단에 섰으나, 웬일인지 설교에 힘이 없고, 당황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큰 교회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해 보기란 처음이어서 긴장해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차츰 자신감을 잃어갔고, 결국 건강을 잃게 되어, 그 교회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에 돌아온 그는 다시 설교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를 듣기 원하는 오랜 친구의 권유로 그는 다시 강단에 섰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던 허전함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처음 설교하던 날부터 지금까지, 항상 앞에 같은 자리에 앉아 누구보다 열심히 자기의 설교를 경청하던 친구를 이제 다시 그 자리에서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하는 일도 수도원에서 막노동을 하는 평범한 수도사에 불과했지만, 그는 항상 친구가 설교할 때마다 무언의 응원을 보내며 자신 있고 확신에 찬 설교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 후로 신부는 평생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만 설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설교를 들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으로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각기 자기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기 역할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현재 역할보다 좀 더 두드러지고 비중이 큰 역할을 맡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게 다른 역할을 탐내기만 한다면, 공동체는 전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오히려,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숨은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내는 것이 공동체를 위해서 더 큰 일을 하는 것일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역사는 그런 이들을 기억합니다. 갈렙은 바로 이런 인물이었기에 자기 자리에서 온전히 여호와를 좇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은 갈렙과 같이 현재와 내일의 삶이 당당합니다.
2. 갈렙이 발바닥 사건을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9절)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말합니다.
9절 [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
갈렙은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 왔지만 가나안 땅을 온전히 정복하지 못한데 대한 짐을 앉고 있습니다. 이 짐은 바로 갈렙에게 사명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서 발바닥 밟는 곳 다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붙들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85세 노인 갈렙에게 아직 내일이 있고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딱 그렇게 기록한데는 없지만 주경가 <델리취>는 9절 말씀같이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가네스 바네아 사건 때 정탐하여 보고 온 헤브론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말이 실지 우리의 신앙의 삶에 적용한다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 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니 열 탐정꾼은 헤브론 땅의 아낙 자손을 보고 왔고 갈렙은 약속의 땅 헤브론을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자기는 그 말씀을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헌신된 일군은 그 어떤 장벽 앞에서도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발바닥 사건 지금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게 헌신되어진 삶을 살아간다면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복음과 함께 미래를 개척하는 발바닥 사건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갈렙이 지금 과거를 회상하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 시킵니까?
3. 왜 갈렙이 지금 과거를 회상하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 시킵니까?(10절)
그것은 생존의 의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10절 [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
여기서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갈렙이 가나안 땅을 밟게 된 것과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 내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남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생존케 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고전15:10절에서 바울은 [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하나님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수고합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것은 생존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생존케 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갈렙을 85세까지 생존케 하였나?
4. 하나님께서 갈렙을 왜 85세까지 생존케 했습니까?(11-12절)
이제 그의 동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지금으로 말하면 석유공사 사장이나 도로공사 사장 자리 하나쯤 차지하여 여생을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국가유공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11절 [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 12절 [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혹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은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
아직 정복하지 못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말은 아직 자기에게는 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톤은 [ 사람이 자기가 해야할 사명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 성자 <슈바이쳐 박사>도 93세의 나이로 임종하기 직전까지 모든 사람들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 이것이 나의 사명인데 ” 하며 할 일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생존하는 한,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을 발견하고 죽을 때까지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 내 나이 비록 85세이지마는 아직 싸울 힘이 있기 때문에 아낙 자손이 거하는 헤브론 산지를 내게 부쳐달라 ] 는 것입니다.
생존의 의미, 이것이 오늘 갈렙의 영원한 젊음의 비결이요. 하나님 백성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이요. 교회에서 사역하는 봉사자들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갈렙을 85세까지 생존케 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지를 내게 주소서 ! 정복해야할 산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생존케 했습니까?
바로 내가 정복해야할 산지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산지가 내 가정이 될 수도 있겟고, 이웃이 될 수 있겠고 나아가 특수 사역이 될 수 있겠고 선교지가 될 수 있습니다.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의 글에 실린 간증입니다. 한 치과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50이 되어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진정한 인생의 목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그는 조용히 자신을 굴복시키고 결심을 하고 재산을 하나, 하나 정리했습니다. 10년 동안 정성 들여 가꾼 산과 별장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꿈도 포기한 채 연변에 있는 조선족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주위에서는 꼭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산지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오십 평생 나를 위해서 이 만큼 잘 살아왔으니 후회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뜻대로 남은 생애를 바치게 되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나의 선택과 결정은 결코 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하고 가족들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순종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힘들고 험난한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그는 무척 행복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의 목표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존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에게 주신 산지를 정복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게 주신 산지가 무엇입니까?
생존의 의미를 깨닫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갈렙의 청을 들은 여호수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5. 갈렙이 받은 기업, 헤브론의 축복을 누리는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13-15절, 참조/12절)
13절 [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
14절 [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납니다.
성경은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주인공보다 감명 깊은 표현으로 갈렙의 일생을 평가합니다.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른 사람 갈렙, 그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 땅에 평화가 깃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갈렙이 헤브론을 고집했을까요? 헤브론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중에 중심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았던 곳이요 특히 창15:에 마므레 상수리 나무 근처 아브라함의 장막에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을 밖으로 불러내어 [ 하늘을 우르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 고 하시고는 [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라 ] 고 합니다. 그러니 헤브론은 가나안 땅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 후 아낙 자손들이 거하게 되었는데 민14: 에 여호수아 갈렙이 정탐하러 가서도 이 땅을 보고 돌아와 포도송이를 내어 보이며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때 모세가 너 믿음대로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한 후 갈렙의 기업이 되었지마는 헤브론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 거하는 성읍으로 도피성을 이곳에 세웁니다. 후에 다윗이 왕이 되고 맨 먼저 헤브론을 도읍으로 잡아 7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며 이스라엘의 기초를 쌓았던 곳입니다. 이렇게 헤브론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헤브론입니다. 창23: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이곳 막벨라 굴에 장사한 후 아브라함도 이삭도 리브가도 야곱도 레아도 다 이곳에 매장을 하게 됩니다. 갈렙이 헤브론을 고집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약속한 거룩한 땅이요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헤브론은 교회의 모형이요 천국의 모형임을 보여 주는 땅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생명이 다할 때까지우리의 영적 헤브론인 교회와 천국을 기업으로 차지하는 영안이 뜨여진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낙 자손이 거하기 때문에 중요한 곳인 줄 알고서도 감히 나서지 못할 때 갈렙은 생존의 의미를 깨닫고 눈이 뜨여져 헤브론 산지를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선견지명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남달리 먼저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이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은 먼저 앞을 내다봅니다. 미국의 오십 개 주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주는 알래스카 주라 합니다. 알래스카는 겉으로 보기에는 얼음으로 덮인 지역이지만 안에는 석탄, 석유, 금, 광석이 무진장 매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1867년도에 미국의 스워드 국방장관이 옛소련으로부터 720만 달러에 사려고 하자 항간의 많은 사람들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쓸모없는 땅을 뭐하러 사냐고 반대했습니다. 이때 `수어드의 어리석음`(Seward Folly)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그때에 스워드 국방장관이 외쳤습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백년이 지난 뒤에야 알 것입니다. 백년이 지난 뒤에야 그 평가가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이 알래스카 주에서 2년 동안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매년 추수감사절 때가 되면 일인당 천불씩 보너스를 지불합니다. 거기에 엄청난 보화가 매장되어 있는 것을 소련사람들은 몰랐기 때문에 미국에 720만 달러에 판 것입니다.
천국의 모형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엄청난 보화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차지한 것같이 우리도 교회를 기업으로 차지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결국 갈렙은 헤브론을 정복하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본래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고 이삭을 낳았던 곳입니다. 갈렙이 아브라함의 복을 차지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도 갈렙처럼 생존의 의미를 깨닫고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부르짖는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충성하라
수 14:6-15 / 박선준 목사
어떻게 갈렙은 노년에도 강건하였나?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줄을 믿음
하나님을 온전히 좇음
갈렙은 85세의 노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이었는데, 늙어서도 그 믿음이 변치않고 있었습니다.
그는 40살 때 이스라엘에 12정탐꾼 중에 한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하여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려던 때였습니다. 정탐꾼들은 몰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10명의 정탐꾼들이 악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 땅 사람들은 강합니다.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거인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은 낙심하여서 소리높여 울며 통곡합니다. 그 때 갈렙이 자기의 옷을 찢고 회중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면 우리가 이길 것입니다. 저들의 보호자는 이미 떠나갔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백성들이 도리어 돌을 들어서 갈렙을 치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십니다. 그 저주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로 돌아가서 거기서 모두 죽고 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던 갈렙과 여호수아만 살아남아 40년 후에 새로운 세대와 함께 다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가나안 땅 여러 곳을 점령하게 합니다. 세월이 지나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서 더이상 싸울 수 없게 되자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는데, 그때 유다지파의 대장인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합니다.
“제가 나이 사십 세에 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성실하게 보고하였지만 나와 함께 갔던 다른 정탐꾼들이 백성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충성하였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습니다. ‘네가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제 내가 그 땅을 취하기를 원합니다. 내 나이가 지금 85세입니다. 그러나 나의 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아서 얼마든지 싸움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갈렙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하고 가서 헤브론을 점령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헤브론은 아주 정복하기가 어려운 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은 크고 견고한 성일 뿐 아니라 아낙자손들이 사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낙자손들은 한마디로 거인입니다. 본문에 15절에 보시면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러니까 이 헤브론성은 거인족속이 사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라는 속담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85세 먹은 갈렙이 헤브론성을 치기 위해서 달려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 까요? 예14절에 나와있죠.
수 14: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 성이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렙이 거인 아낙자손을 완전히 쳐부순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도 겁이나서 갈 생각도 못하는데 어떻게 85세의 노인인 갈렙은 헤브론 성을 치고 완전히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45년 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네가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셨던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갈렙이 40여년 전에 정탐을 한 땅이 헤브론 땅인 것 같습니다. 갈렙은 헤브론 땅을 정탐하면서 분명히 헤브론 성의 견고함과 그 땅에 사는 거인 족속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을 기억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이죠.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것을 붙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마 5:18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이 400년후에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민족은 400년 후에 애굽에서 탈출하여 나오게 됩니다. 이사야선지자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700여년 후에 예수님이 처녀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시는데, 그 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또 사 53:6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예언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럼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무엇이 있을까요?
예 무어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이죠.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해 올라가시면서 내가 속히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바로 이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든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산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들로써, 죄의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2000여년 전에 죽은 예수가 다시 오기는 뭘 다시오냐, 죄의 심판 같은 게 어딨냐,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고 돈이나 열심 벌고 현재의 삶을 즐기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골몰하며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헤브론은 절대로 점령할 수 없는 땅이라고, 아무도 아낙 자손을 이길 수 없다고, 안된다고 하였지만 갈렙은 그런 소리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헤브론을 향해 달려 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던 그 예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하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따라서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 말씀을 따라 산 자들은 주님께 칭찬을 듣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며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잊지말아서 갈렙과 같은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갈렙이 노년의 나이에도 헤브론 성을 점령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여전히 강건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마음도 약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젊었을 때는 “나에게 이 산지를 주소서, 내가 저 헤브론 성을 점령하러 가겠습니다!!” 하고 소리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면 그 강한 마음이 약해지기가 너무 쉬운 것이죠. “아휴 안돼, 더군다나 헤브론 성은 견고하고 거기에는 큰 거인들이 살고 있는 성인데 이 늙은이가 어떻게 헤브론 성을 점령할 수 있겠어” 하고 뒤로 물러나기 쉬운 것이죠. 그러나 갈렙은 노년이 되어도 그 마음의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10,11절을 보겠습니다.
수 14: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수 14: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45년이 지났는데, 갈렙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힘이 같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과장이겠죠?
육체적으로는 4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쇠약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힘이 같다고 하는 것은, 지금도 헤브론 성을 얼마든지 점령할 수 있는 강건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85세의 노인이 된 갈렙은 어떻게 젊은이와 같은 강건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예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갈렙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헤브론성이 아무리 크고 견고하고 아낙의 거인들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능히 그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렙에게 바로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강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동사입니다. 그리고 항상 현재형입니다.
나도 예전에는 믿었었어, 십일조도 드려봤고, 전도도 해봤어, 그런데 이제는 안해~~ 여러분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살 때 하나님 지켜주실 줄을 믿고 헤브론을 향해 나갈 수 있었다면 85살이 되었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실 줄을 믿고 헤브론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믿음은 항상 현재형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일 매일의 삶이어야 합니다. 즉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14:23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갈렙이 40살 때나 85살 때나 변함없이 강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14절에 나와있죠.
수 14:14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헤브론이 갈렙의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에 85세의 나이에도 헤브론을 점령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온전히 라는 의미는요 가득 채우다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갈렙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렙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다는 것이죠.
여러분 갈렙의 45년은 어땠을 까요? 편안하고 즐거웠을 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갈렙은 억울하게도 이스라엘백성들과 함께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갈렙의 청춘시절을 광야에서 다 보낸 것이죠. 갈렙은 광야에서 자기의 동생들 동기들 형, 아버지 대의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불신했던 그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에서 지루한 세월을 보내며 죽어갔을 것입니다. 갈렙의 40년 광야 생활은 죽음이 가득하고 아주 지루한 광야 생활이었던 것이죠. 갈렙도 이런 분위기에서 불평 불만하며 지루하게 세월을 보내기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결코 그런 불신의 삶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채워나간 것입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저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광야에서 칼을 갈고 군사 훈련을 하며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데 힘을 쏟았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빌3:13절에 “나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하였던 것처럼 갈렙도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매일 매일 달음박질 한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땅에서 매일 매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달음박질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의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만을 추구하며 삽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하며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칫하면 우리들도 이 세상 염려와 근심에 빠져 썩어질 세상 것만을 추구하며 살기가 너무도 쉽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우리 삶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매일 매일이 영적전쟁입니다. 사탄은 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한 후 성도들을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무장하고 믿음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삼공이일 운동을 하는 것도 매일 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매일 30분 이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매일 성경2장 이상을 읽고 매달 한구절 이상 하나님 말씀을 암송하며 믿음으로 싸움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사탄이 너 어떻게 먹고 살래 염려를 던질 때,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을 온전히 따를 때, 우리도 갈렙처럼 10년,20년 30년 40년이 지나도 강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앞에 죽음이 찾아왔을때 우리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하여노라, 나는 이제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간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축복합니다.
복이 저절로 따라오는 사람
수14:6-15 / 최익수 목사
복에 관하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있습니다.평생 복을 쫓아가는 사람이있는가하면 복이 쫓아오는 사람이있습니다.우리는 복을 쫓아가는 사람이되지 말고 복이 쫓아오는 사람이되어야합니다. 복이 자기를 쫓아 오도록 만드는 사람이되어야합니다. 신28:1'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3'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4'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받을 것이며 5'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6'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7'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서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그들이 한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앞에서 일곱길로 도망하리라.8'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것이며 9'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것임이라 10땅의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너를 두려워 하리라 12'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어주지 아니할것이요 13'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니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라.'고 했다.
내가 복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이 나를 쫓아오는 것입니다.그림자처럼 내가 가는 곳마다 복이 나를 쫓아다니는 복된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있는데 오늘은 갈렙의 인생에서 왜 그가 복을 받고 살았는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렙의 이름이 제일 처음 거명된때는 가나안 정탐때이다.(민13:6(정탐꾼으로 선택),신1:36(하나님의 칭찬: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수14:6(갈렙이 옷을 찢고) 그러니까 갈렙은 출애급 1세대로써 광야 생활과 가나안 전쟁시대에, 너무나 어렵고 힘든 시대에 복받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산 사람입니다. 갈렙은 그니스 사람(수14:6)입니다. 그니스 사람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인 야곱의 후손이 아닙니다. 에서의 후손,에돔족속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어쩌면 잡족 취급을 받으며 왕따를 당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약점과 장애를 극복하고 축복의 주인공이되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살펴봅니다.
1. 갈렙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민13장(민13:6)을 보면 하나님은 백성들의 뜻을 따라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가나안 정탐꾼으로 보내는데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뽑혔습니다. 먼저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 정탐꾼들이 40일동안 정탐한 땅을 보고 합니다. 민13:27'당신이 우리를 보낸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하고 보이는데 포도송이가 달린가지를 둘이 막대기에 꾀어 메고 석류와 무화과를 가져왔다.(민13:27) 그러나 악평을 합니다. 28'그러나 그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뿐 아니라, 거기서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신1:28'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29'아말렉인은 남방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가에 거주하더이다.(이미 선점한 사람들,원주민,여러족속들이 있기에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1:21)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1:29) 신1:30'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신1:33'장막칠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것이며 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아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고 하는데 민13: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쉽게,)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믿음이 없는 10정탐꾼은 악평으로 백성들을 낙담케 했습니다. 그래서 민14: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급 온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앞에서 엎드린지라.
그러나 갈렙은 달랐다. 민13: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표준새번역]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진정시키면서 격려하였다.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민14:6'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매우 좋은 곳입니다.)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사랑하신다면,좋게 여기신다면,우리가 주님 마음에 들기만 하면) 우리를 그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이끄시고,데려가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배반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그들의 방벽은 없고,방호벽은 사라졌고,덮어주던 그늘은 떠났습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갈렙은 하나님을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하나님을 위대하신 전능자로 보았습니다.똑같이 가나안 땅을보고 똑같이 가나안 원주민을 보았는데 10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눈,사람의 눈으로만 보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그렇게 크게 보이고 무섭게 보이고 아낙 자손들은 너무나 위대하게 보이고 그 앞에있는 자기들은 너무나 초라하게,메뚜기처럼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눈,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갈렙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었습니다.하나님을 전능자로 보는 눈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도 가나안 땅을 보았고 아낙 자손을 보았고 그들의 크고 거대한 몸집과 군사력을 보았지만 그가 가진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가 체험해본 하나님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시고, 홍해 바다에서 바로의 군대의 몰살시키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키가 장대한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의 거인들, 가나안 사람들을 보지만 작게 보였습니다. 차려놓은 밥상처럼 보였습니다.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저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저들을 칠 수가있습니다.갈렙이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습니다. 고후5:7'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롬8: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것을 누가 바라리요'했다. 눅1: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영안의 밝아야 합니다.밝아지면 범사를 불가능한것중에서도 가능함을 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가능성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범사를 믿음의 안목으로 보고 항상 가능한 쪽을 생각해서 용기를 얻고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10정탐꾼들은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민14:3 “ ...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 ” 그들의 말대로 생각대로 되었습니다.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들린대로 행하겠다고 했습니다.(민14:26) 실패를 보고 실패를 생각하면 보고 믿는대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1:39'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고 들어갈것이라 내가 그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고했다.
믿음의 사람은 영안이 있어 복을 받습니다. 믿음의 눈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바울은 엡1:18-19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영안이 열리기를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엡1:18'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것)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약속하신 복)이 무엇이며,(쉬운성경]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것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지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믿음이 있으면 영안이 밝으면 앞으로 나가게 됩니다.범사를 미래 지향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자꾸 과거에 집착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과거로 움츠러듭니다. 예)10명의 정탐꾼들,민14:2절을 보면, 열 명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뭐라고 합니까? “ 2절...우리가 애굽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했습니다. 영안이 밝은 믿음의 사람은 염려,불안,두려움속에서도 약속된 미래의 축복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갈렙은 민14:8절을 보면, 민14: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에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고 했습니다.
예)바울도 믿음의 사람이니까 앞으로 앞으로 나갑니다. 빌3: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이런 미래 지향적인 태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갈렙에게서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수14:12에 보면 85세가 된 갈렙에게서 진취적인 모습이 등장합니다. 수14:12'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헤브론,예루살렘 남쪽 30km,에스골 골짜기가 있고,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매장지,다윗왕때 수도,애급소안보다 칠년전에 세워짐 (민13:22)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자손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85세 노구이지만, 가장 어려운 헤브론 산지에 도전하는 모습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 있기에, 그의 영안을 들어 바라보고, 전진했던 것입니다.
2. 그는 온전히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만 좇는 사람을 살았습니다.(14)
14'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 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모세는 신1: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했다.갈렙이 축복을받은 이유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온전히 좇았다" 라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오직 한 마음으로,전적으로 좇았다" 라는 것입니다. 90%만 좇은 것이 아니라, 100% 완전히 좇았다는 말이에요.
예)갈렙의 이름의 뜻은 개입니다. 개라는 뜻입니다. dog, 멍멍 짓는 개입니다.갈렙이 왜 개라는 이름을 가졌을까요? 아마도 부모님이 개처럼 충성스럽게 살라고 개라고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개처럼 주인되신 하나님을 온전히 쫓았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랬어요. 목숨 바쳐 충성했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세를 배신했습니다. 심지어 모세의 누나 미리암과 형 아론도 모세를 비방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끝까지 모세를 도왔습니다. 모세의 부족한 면이 보여도 끝까지 협조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쫓았다고 했습니다.(신1:3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지만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갈 특권을 주셨고, 기업도 많이 주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반쪽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한쪽, 하나님께 한쪽의 마음을 가지고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온전히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따르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있습니다.
예)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어느때까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갈렙은 온전히 쫓았습니다.여호수아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수14:7'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지도자인 모세가 갈렙,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수14:9) 9'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 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그런데 갈렙은 헤브론땅을 달라고 합니다. 따라합시다. 머뭇거리지 말자.온전히 따르자.
3. 주의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되어야합니다.(12)
갈렙은 "네 발을 밟는 땅을 영원히 갈렙과 그 자손들에게 주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가나안의 어느땅도 가질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기름지고, 아름답고, 경치 좋은 땅을 원할 줄 알았던 갈렙은 그렇지가 않았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공포의 대상인 아낙 사람들이 살고있는 헤브론 산지를 원했어요. 모두가 두려워 하고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이구, 거인들이 사는 저 헤브론 산지를 누가 점령할지, 걱정이야"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데, 이제 나이가 85세나 된 갈렙 할아버지가 그 무시무시한 아낙사람들이 살고있는 헤브론 산지를 점령하겠다고 합니다. 모든 지파 사람들은 조금더 편하게 더 기름진 좋은 땅을 차지하겠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정반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85세인데도 불구하고 하겠다는 것입니다.가장 힘든 땅, 가장 척박한 땅, 모두가 차지하기를 꺼려하는 땅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배짱이요. 얼마나 큰 믿음인지 모른다.이것은 갈렙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우리도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으려고하지 마세요. 주님 힘들지만 제가 하겠습니다. 이래야 합니다.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이 모든 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가있습니다.어떤 일이 주어 진다고 해도 피하지 말고 감당할 능력을 달라고기도합시다.
롬8: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것이니라.빌1:29'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딤후5:1'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고난을 받으라.벧전2:20'이를(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니 21'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갈렙이 받은 축복은 출애급 1세대로써 가나안땅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가장 역사적인 땅을 얻었습니다.85세에도 전쟁을 할수 있는 건강을 얻었습니다.명예로운 유다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그는 자녀의 축복을 받아 훗날에 그의 사위가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가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의 장인이 된것입니다.
믿음의 눈,전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주의 일에 앞장서는 믿음에 복을 주십니다.예)이삭은 야곱을 축복하면서 창27: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고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신28장은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말씀 그대로 지켜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복의 비결은 이 말씀에 종속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승리의 복이 있습니다.(7) 내 주위의 대적과 주위 열강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사업의 복을 주십니다.(8)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손대는 일마다 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강대국의 복을 주십니다.(9-10) 우리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보며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때를 따라 돕는 복을 주십니다.(12) 적절할 때 내려 주시는 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필요적절하게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울러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도자가 되는 복을 주십니다.(13)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리더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오직 성도의 유일한 삶의 원칙의 성경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면 그 복이 임합니다. 복은 좇아 다녀서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지켜 행하여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힘든 세상에서 복을 따라다니는 인생을 살지 말고, 복이 따라오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뭘해야 잘 될까 고민하는 인생보다, 뭘해도 잘되는 인생을 살기 바랍니다.
그러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갈렙처럼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렙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갈렙처럼 하나님의 일에 언제나 앞장 서는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조적 신앙
수 14:6-15
먼저 우리 민14:24절의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봉독하겠습니다. “오직 내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 아멘 -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 갈렙은 여호수아와 더불어 모세가 가나안의 정복에 있어서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 각 지파의 대표들을 뽑아 정탐을 보낸 12명의 정탐꾼에 속한 인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12지파, 더욱이 유다지파의 족장이라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으로 보았을 때, 순수 혈통의 사람으로 유다지파 중 대단한 가문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갈렙은 ‘그니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니스 사람은 본래 일찍부터 팔레스틴 주변에 거주하고 있었던 에돔 족속 중 하나(창 36:11, 15)로, 아마 이 족속 중 일부가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에 합류되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갈렙(Galeb)도 순수 히브리 혈통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의 섭리는 약속의 땅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 시대부터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향한 계획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 출신이, 그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출신이,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14:24절의 하나님의 말씀처럼 온전히 좇는자를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는 각자 너무나 다른 환경과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다른 분보다 뛰어난 분이 있는가 하면, 조금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관과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시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삼상16:7) 대표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종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행13:22) 이 말씀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다윗은 처음 부르시는 순간부터 평생을 한결 같이 하나님 제일중심으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도 인간인지라 많은 실수가 있었지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교훈이 들려질때 돌이켜 하나님께 항상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하시는 모든분들이 다윗과 같기를 원합니다. 실수와 실패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는 신앙, 세상 속에서는 왕으로 살아갈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부모에게 순종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같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을 귀하게 쓰시고 높이 세워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렙이 바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출신은 어떻게 보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세상의 환경을 보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당신의 일을 펼치십니다. 오늘 갈렙의 믿음을 통해서 창조적 신앙이란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처음사랑 그대로 한결같은 신앙입니다.(10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갈렙은 다윗과 같이 한결 같았습니다. 정탐 이후 45년의 세월 동안 그의 신앙은 한결 같았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약속의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믿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바로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묻고 싶습니다. 처음 사랑 그대로 오늘 나의 마음이 뜨겁습니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그 추운 동굴에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진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고 섬기는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계시록 21:8 보면 불못에 던져질 8종류의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그 첫 번째가 두려워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마13장 씨뿌리는 비유의 돌밭에 뿌려진 심령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돌밭의 심령들은 잠시 잠간의 환난이나 핍박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나 다른 쪽에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환난과 핍박은 있습니다. 실패가 좌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사랑을 지키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 아멘 - 그렇습니다. 계시록에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에베소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했다 하나 처음 사랑을 버리면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시겠다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리새인, 율법적 신앙입니다. 어느 순간에 신앙이 감동이 없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없고 형식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마음을 원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마음을 담지 못한다면 신령한 예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처음 사랑, 그 한결같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 갈렙은 주위를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는 믿음입니다(7절).
민수기13장 12명의 정탐꾼의 보고는 두 갈래로 나뉘어집니다. 가나안이 기름진 옥토이기는 하나 감히 이스라엘이 대적할 수 없다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메뚜기와 같다고 주장하는 부정적인 10명의 정탐꾼과 반면에 아무리 그들이 견고한 성읍과 거대한 체구를 가진 장사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들은 자신들의 밥이라고 주장하는 갈랩과 여호수아로 나누어진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다수가 주장하는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실제 여호수아와 갈렙은 돌로 맞아 죽을뻔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의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세상 속에서 인정받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냥 변해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중요합니다. 아니 하나님께 인정받으면 세상 속에서도 인정받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3. 온전히 좇는 신앙(8절)
민 14:24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친히 ‘오직 내 종 갈렙은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이라고 갈렙의 신앙을 칭찬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갈렙이 자신의 성실성을 내세운 것은 결코 자만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성실히 순종한 자로서의 진정한 긍지의 표현이며, 나아가 지금 요구하고자 하는 내용 역시 결코 사심(私心)이 없는 것임을 나타내고자 함입니다. 한편 여기서 ‘온전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레’는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란 뜻으로서, 곧 ‘온전히 좇았다’란 말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정도로 충분히 그분의 뜻에 순종했다’란 의미입니다.
4. 임마누엘의 신앙(9-10)
갈렙은 10절에서 자신의 생명이 45년 동안 보존되었음을 말했는데, 본절에서는 45년 전의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힘도 그대로 보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코아흐'는 단지 육체적인 힘만을 뜻하지 않고 정신적인 담력도 뜻한다. 따라서 갈렙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갈렙도 그러한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개념은 출 33:16;민 23:21;신 2:7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와 같은 임마누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즉 (1) 하나님께서 결코 저버리시거나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뜻(1:5, 7;3:7;신 31:6;왕상 8:57;대상 28:20), (2) 적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이(신 31:8;대상 28:20;대하 20:17) 언제 어디서나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는 뜻(신 31:23). (3)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뜻(신 2:7) 등이다.
5. 편안한 길을 가기 보다는 바른길을 가는 신앙(12절)
저는 갈렙과 같은 사람을 창조적인 소수라고 말합니다. 토인비는 일찍이 "인간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소수의 신념과 용기에 의해 이룩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마태복음 26에서 주님께 그 비싼 향유를 쏟아 부는 여인을 보게됩니다. 주위 사람들과 하물며 제자까지 아까운 짓을 했다고 질책할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온 천하에 복음에 전해지는 자리에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자리에 너무나 보잘것 없는 한 여인의 이름이 같이 기념되어집니다. 이에 대해 신학자 틸리히(P. Tillich)는 여인의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고 정의합니다. 이 거룩한 낭비가 역사의 추진력이었다고 규명합니다. 역사가 토인비(A. Toynbee)도 인류의 구원은 바로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합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여인과 같은 전적인 헌신의 사람들에 의해 존속되었고 또 부흥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인자의 고난의 비밀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향유를 쏟아 부음으로써 주님의 장례를 위해 큰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결과도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지만 이 여인 한 사람만은 예수의 말씀의 뜻을 헤아려 그에 대비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마26:6-13) 이 같이 창조적 소수는 세상의 사고대로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는 바른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갈렙 역시도 지금까지 그가 해왔던 전공과 위치를 볼 때, 이미 정복해 놓았던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10명의 정탐꾼이 두려워 했던 아낙자손이 있는 그 누구도 앞장서기를 꺼려 하는 곳을 향하여 자신과 유다지파가 가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편안한 길을 나누고 어려운 길을, 아니 바른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여기서 혹시의 원어 '울라이'란 말은 '만약', '혹시'라는 가정과 의심의 뜻도 있지만, 아울러 '정녕', '필시'라는 소망과 확신의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 뜻은 후자의 의미로 쓰여 갈렙의 확고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청년 신앙
수 14:6-15
1. 갈렙의 이력서
세상은 늘 1등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2인자에게 보낼 갈채는 없습니다. 그래서 2인자로 사는 것은 외롭고 어렵습니다. 1인자가 될 수 있는 바로 뒷자리에 있지만 가장 어려운 자리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투하는 교회에 바로 이렇게 평생을 2인자로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십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정탐꾼으로 선발되었던 갈렙이라는 사람 말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을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전투하는 교회의 수장이 되어 한 시대를 풍미하는 1인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갈렙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게 2인자의 아픔입니다. 빛이 밝을수록 바로 옆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여호수아라는 탁월한 리더가 세워지기 위해서 갈렙은 역사의 저편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그런 고단한 2인자의 인생을 살았던 갈렙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것은 무려 45년 만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2인자로 살았던 인생 때문에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슴 속에 분명한 비전을 키우며 확신 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그 비전을 향해 역동적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2인자 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비전이 없는 인생이 문제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갈렙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수1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갈렙이란 이름이 나오는 곳에는 늘 따라다니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입니다. 이것은 갈렙의 출신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니스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이방인 그니스족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에 함께 따라 나온 애굽의 노예였던 소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요. 대상2:9,18-19절을 보십시오. 유다 지파,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의 아들의 이름을 “글루베”라고 하고, 18절은 “갈렙”으로도 부릅니다. 이것은 유다 지파 헤스론의 딸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갈렙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갈렙은 모친이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유다지파로 인정된 것이지 실은 이방인입니다. 아! 갈렙의 출신이 이방인이라니....
그런 그가 어떻게 이렇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때부터 혈통을 중요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런 갈렙이 열두 정탐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그것도 유다 지파의 정탐꾼으로 뽑힌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이방인이지만 이미 공동체에서 믿음의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인생을 바꿨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출애굽 할 때 따라 나온 중다한 잡족 들은 주로 위기 때마다 원망과 불평을 일삼는 트러블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갈렙이라는 사람은 광야생활의 어려움, 이질적인 문화의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애굽에서 만난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기고 사랑했는지 정탐꾼의 일원으로 뽑힐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갈렙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에는 그의 놀라운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2. 갈렙의 신앙
자, 이런 갈렙의 신앙을 엿 볼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수14:7절에서 갈렙이 정탐꾼으로 파견될 때에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광야 생활이 38년입니다. 78세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수14:10에 “오늘 날 내가 85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78세에서 85세까지의 7년이 바로 가나안 정복에 들인 시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2인자 인생을 살았던 갈렙은 45년 동안 성경에서 사라졌다가 노인이 되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2인자로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무슨 일 때문에 역사의 전면으로 나선 것입니까? 갈렙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7-8절입니다.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두 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라는 표현과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라는 표현입니다. 두 표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상황에 요동하는 믿음이 아니라 상황을 뛰어 넘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요동하지 않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출신의 정탐꾼들도 모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고 있는 그때에 이방인 갈렙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40대에 가졌던 갈렙의 신앙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원리를 꾸준함이 능력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탁월한 재능보다 우선하는 것이 꾸준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평강에 평강으로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렙의 탁월함은 바로 그 신실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민13:33절을 보십시오. 10정탐꾼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그럽니다. 그리고 민14:4절에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합니다.
그러면서 반대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고 까지 하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갈렙은 민14:8-9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주시리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담대하게 고백했었습니다. 이런 용기와 믿음의 담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갈렙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 그가 45년이라는 시간을 침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여호수아를 공동체의 리더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대부터 그는 2인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믿음에 찬 보고로 함께 스타덤에 올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이지만 여호수아는 그대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수장이 되어 전투하는 교회를 이끌며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갈렙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는 잘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가 살아 있을 때에 모세를 섬기는 것은 쉬웠습니다. 왜요? 그는 믿음의 선배요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모세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다릅니다. 함께 가나안 정탐을 갔었던 동료이자 친구입니다. 나이도 동년배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전투하는 교회의 수장이 되어 빛나는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만약 갈렙이 사사건건 나서서 간섭하고 이의를 제기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나뉘고 아파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철저하게 침묵한 것입니다.
이 침묵이 얼마나 값지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그러나 갈렙이 생각이 없거나 비굴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45년이 지난 지금도 힘이 있었습니다. 청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비전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45년 침묵한 갈렙이 대단하기만 한 장면입니다. 이렇게 뜨거운 비전에 불타고 있으면서 침묵으로 여호수아를 섬긴 것입니다. 이런 2인자가 있었기에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1인자가 되어 빛나게 살아가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2인자로 소리 없이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더 높아지고 싶어 합니다. 이름을 내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45년 동안 묵묵히 2인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침묵했을지언정 가슴마저 늙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슴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그에 대한 비전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나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뜨거운 가슴으로 나선 것입니다.
45년을 하나님의 약속과 그 비전을 품고 2인자의 인생을 묵묵히 살아온 85세 노인의 진실하고, 당당하고, 존경스러운 모습을 우리는 진심으로 환영하고 박수를 쳐야 합니다. 어쩌면 이 모습 하나만으로도 갈렙은 우리 시대에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1등이 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세상에 2인자로도 이렇게 뜨거운 가슴으로 살아낼 수 있다는 것을 갈렙처럼 웅변적으로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꼭 1인자가 되지 않아도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꼭 영웅이 되지 않아도 뜨거운 비전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꼭 엄청난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귀한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갈렙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3. 청년 신앙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사람을 꼽으라면 우리는 주저 없이 갈렙을 꼽아야 합니다. 85세의 청년 갈렙! 그가 보여주는 신앙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9-10절입니다.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광야 45년 동안 마음에 담았습니다.
10절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지난 45년 동안 갈렙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꿈을 키워왔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보면 몸도 마음도 잘 관리했습니다. 85세지만 전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비전의 힘입니다. 마음에 꿈이 있는 사람은 노인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퇴직하고 난 후에 갑자기 노인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렙과 같은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퇴직한 후에 무엇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40세에 하나님이 꿈을 주셨고 그 꿈을 향해 달려오면서 늘 뜨거운 가슴을 유지해 왔습니다.
2인자로 살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14:10-12절을 보십시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 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렇게 마음에 품었던 때가 비로소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로 그 산지를 85세가 되어서 비로소 기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갈렙이 기업으로 달라고 한 곳이 어디입니까? 헤브론입니다.
그리고 이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뿌리와도 같은 곳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유일한 소유지인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고,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이 있었고, 이삭, 리브가, 야곱의 뼈가 묻힌 곳입니다. 요셉이 출애굽을 할 때에 내 뼈를 가지고 가서 묻어달라고 유언했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향이요, 뿌리이며,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이 숨 쉬는 곳이었습니다. 그 헤브론을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 85세 청년 갈렙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십시오.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강건하고 내 힘이 일반이라, 감당할 수가 있사온 즉,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합니다.
85세의 청년입니다. 청년 신앙입니다.
아직도 뜨겁기만 하고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비전을 향해서 꿈틀거리고 있는 절정을 달리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드셨다고 해서 신앙도 늙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신앙은 더 깊어지고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게 청년신앙입니다. 갈렙은 85세의 나이지만 아직 청년신앙이었습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합니다. 물론 내 힘과 능력으로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겠습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여기서 그 날은 언제입니까? 45년 전에 정탐꾼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말씀하신 이 산지, 헤브론을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갈렙은 그의 평생에 한 가지 그 하나님의 약속만을 견고하게 붙잡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2인자로 살게 한 힘이었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방자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 있는 사람은 2인자로 사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비전을 따라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45년의 침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 45년 동안 갈렙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가슴에 그 땅을 품고 기도했고 전투에 참여 했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 땅을 드디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거기는 산지이고, 거기는 크고 견고한 성읍이고, 거기 거하는 사람들은 아낙 자손입니다. 아낙은 목이 길다는 의미입니다. 거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45년 전 10정탐꾼들이 그들을 보고 질려서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꺼리는 그곳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아낙 자손들이 있지만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이 비록 크고 위협적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산지를 내게 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약속한 이래로 계속 사모하며 기다렸던 바로 그 산지입니다.
이것이 2인자로 45년을 침묵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비전이 있고 확신이 있는 사람은 2인자인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내게 주어진 인생을 하나님 앞에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 산지에 대한 소망이 갈렙을 45년의 침묵에도 변함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간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이방인인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2인자로 사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좇아야 할 산지가 있고 따라야 할 여호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45년을 2인자로 지내도 전혀 기죽거나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더 열정적으로 살아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갈렙이 2인자로 살면서도 청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보았습니다. 높아지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이루는 일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신실하게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전쟁에 나갈 때 갈렙은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 그도 치열하게 전쟁에서 싸웠을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몫을 감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을 좇아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갈렙은 청년의 뜨거운 열정과 믿음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4.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1인자가 되느냐 2이자가 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가치에 인생을 드려 평생을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느냐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 확고한 비전이 있는 사람은 2인자 인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갈렙이 45년의 인생을 살면서 내가 2인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고 믿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갈렙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비전에 평생을 걸었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인생을 거시겠습니까? 우리가 정복해야 할 이 산지가 어디입니까? 저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성도로 살아내는 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무슨 세상을 놀라게 할 엄청난 일을 하지 못해도 좋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이루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갈렙처럼 평생을 2인자로 살아도 개의치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무엇이 되었느냐에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1인자에게만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청년 신앙을 가지고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세속화되고 때가 더 묻습니다. 청년때 가졌던 그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비전이 있고 믿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말씀 앞에 살아온 사람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성실성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신실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갈렙에게서 평생을 청년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의 인생도 청년 신앙으로 살아낼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수 14:6-15 찬송 213장.
하나님은 이제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차지한 가나안 땅을 각 지파별로 분배하는 임무였습니다. 이 임무는 참으로 막중한 것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 과정에서 지파별로 갈등이 생길 수 있고, 그 빈틈을 이용해서 가나안 족속들이 공격을 감행해 온다면 이스라엘은 큰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의 지위를 내려놓습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대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택한 결정이기도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직접 전쟁에 나서서 일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14장 1절을 보면 대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의 이름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이 함께 협력해서 이스라엘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그 이름이 기술되는 순서에서 우리는 여호수아보다 엘르아살 제사장이 먼저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이스라엘의 지휘권이 엘르아살에게 위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것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장 최우선의 원칙으로 삼았던 여호수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모세가 먼저 그에게 보여준 아름다운 모범을 계승합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서편에서 취한 땅을 제비를 뽑아 각 지파에게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4장 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다시 말해서 갈렙은 지금 여호수아에게 45년 전에 모세의 지시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점탕했던 일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돌아와 우리는 결코 저 땅을 취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죠.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아니다. 저 땅은 분명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저 땅을 취하자, 우리가 그들을 능히 이길 것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군중들에게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열 명의 정탐꾼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어야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가나안 땅을 밟게 되리라는 축복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렙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 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지금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바로 이 점은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갈렙은 45년이 된 지금까지 잊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바로 45년 전에 자신에게 주셨던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를 생존케 하셨다고 확신했습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갈렙의 이 같은 고백을 듣기 이전에 전제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땅을 분배하는 것을 그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긴 땅을 나눠먹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땅을 분배받은 것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중심으로 그곳에 아직 머물러 있거나 그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나안 주민들과 전쟁을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직 가나안 땅이 온전히 이스라엘의 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전에는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로 움직여서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했다면, 이제는 각 지파가 독자적으로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을 중심으로 수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 갈렙이 땅을 요구하는 상황도 이러한 전제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갈렙의 본래 의도는 단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취하려는 세상적인 축복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그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1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갈렙은 자신에게 약속된 땅을 받고 그곳에서 편안한 노후를 즐기겠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헤브론 땅을 허락해 준다면, 그 땅에 거하는 이방족속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하나님의 땅으로 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헤브론에 거하는 족속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아낙자손들이었습니다. 아낙자손들은 강하고 장대한 민족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신 9:2)”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아낙자손은 45년 전에 모세의 지시로 가나안 땅에 정탐하러 갔던 열 명의 정탐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당시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절망했었습니다.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그런데 보십시오. 이후 45년의 세월이 지난 후 갈렙이 무엇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간담을 녹아내리게 했고, 누구보다도 강한 자들이었던 아낙자손들을 자신이 반드시 쫒아내고야 말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그의 전략은 간단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개인적인 욕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다면, 그래서 그 약속을 통해 단지 여생을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했다면 그는 결코 헤브론 땅을 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수아에게 간청합니다. 바로 그 땅, 헤브론 땅, 그 산지를 내게 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45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결코 꺾이지 않았던 갈렙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 이삭과 그의 아내인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그의 아내 레아가 묻혀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곳은 이스라엘에게는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였던 사라가 죽자, 그녀를 묻을 곳을 위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을 샀습니다. 이것이 그가 생전에 자신의 소유가 된 유일한 땅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지금은 비록 그 땅이 이방 사람들의 것이지만,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 땅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는 지역이었던 겁니다.
따라서 그 땅은 이스라엘에게 영적인 고향이었을 뿐만 아니라, 비전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갈렙은 그 땅을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었던 그의 선조들의 꿈이 살아 숨 쉬는 땅을 원했던 거죠. 결국 여호수아는 갈렙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땅을 그에게 허락했습니다. 그러자 갈렙은 지체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 하나 붙들고 헤브론으로 가서 아낙자손을 몰라내고 그 땅을 차지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14절의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그렇습니다. 갈렙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헤브론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꿈을 품고자 했습니다. 비록 노년의 나이였지만, 젊었을 때 품었던 그 믿음의 열정만은 전혀 식지 않았습니다. 그가 헤브론을 선택했던 이유, 그것은 그 땅이 아름답고 풍요로워서 살기 좋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지파도 그 땅을 기업으로 삼기에는 참으로 부담스럽고 망설여지던 지역, 가장 강한 아말렉 자손이 있었던 헤브론 지역을 자원해서 하나님의 땅으로 회복시키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졌던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결국 전쟁에서 승리해서 헤브론을 취하게 되고, 그곳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지만, 이후 헤브론이 도피성으로 선택되었을 때 갈렙은 기꺼이 성을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서 내주었고 자신은 그 주변의 들에 거주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은 개인과 공동체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평생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