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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규 소설
동래읍성 ‘편지’
그리운 당신, 당신과 헤어진 후 또 수많은 세월이 물같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아직도 내 곁에 서서 그 깊고 서늘한 눈매로 내 얼굴을 이윽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어쩌자고 여직도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당신의 그 조용한 웃음과 가만가만한 목소리가 더욱 간절해지는 것일까요. 어쩌자고…….
당신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이렇게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만약 이 편지가 당신에게 무사히 배달된다면 당신은 또 알 듯 모를 듯한 그 묘한 미소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가슴에 보얀 등불이 켜지는 느낌이랍니다. 그러나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길이 너무 멀어 이 편지가 당신의 손에 도착하지 못하리란 생각을 하면 가슴이 도로 캄캄해집니다. 나는 정작 당신의 주소도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요.
갑자기 웬 편지 타령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그래요. 왜 갑자기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을까요. 그건 다른 사람의 편지를 보았기 때문이랍니다. 그것도 4백여 년 전에 어떤 이가 쓴 편지 말입니다. 그 오래 된 편지를 읽는 순간 나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더군요. 들어 보실래요? 그 편지에 얽힌 이야기를…….
내가 부산대학교 어문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기억하시겠지요. 어제는 희순이가 연구소로 전화를 했더군요. 제 친구 희순이 알죠? 왜 커다란 뿔테 안경을 끼고 야한 농담을 해놓곤 낄낄대길 잘하던 선머슴아 같은 애 있잖아요. 그 애가 그래 봬도 경남문화재연구원에 학예사로 있답니다. 그 애는 요즘 매일 지하철 3호선 공사장에서 두더지처럼 땅을 파고 있다는 군요.
수안로터리 근처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공사 도중 옛 동래읍성을 둘러싼 해자垓子의 일부가 발견되었어요. 신문에 크게 나기도 했죠. 그래서 현재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 애는 그 발굴 팀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답니다. 며칠 전에는 전화를 해서 피곤해 죽겠다고 투덜거리더니만 어제는 목소리가 사뭇 흥분돼 있더군요.
“얘, 얘, 숙아. 빅뉴스야, 빅뉴스. 이건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아직 발표할 단계는 아니라서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 절대 얘기해선 안 돼. 알았지?”
“너한테 빅뉴스가 아닌 게 있니? 또 누가 이혼이라도 했니?”
나는 이 흥분하기 잘하는 친구가 또 무슨 일로 이러나 싶어 심드렁하게 받았죠. 나의 그런 반응에 그 애는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한층 목소리를 높이더군요.
“얘, 얘, 그딴 얘기와는 차원이 다른 거야. 이건 학술적인 이야기라구.”
“무슨 학술씩이나……. 너답지 않게.”
“얘, 얘,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말야. 이건 고고학에선 엄청난 뉴스거리야. 센세이셔널하다구. 뭔가 하면 말이야. 햐, 이건 술 한 잔 얻어먹고 알려줘야 하는 건데 아깝다. 뭔가 하면 말이야. 아이고, 아까워. 며칠 전에 우리 발굴 팀이 해자의 축대 돌 틈에서 조그만 가죽주머니를 발견했지 뭐야.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말야. 돌 틈 사이가 마른 진흙으로 메워져 있어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려했다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그게 오래 전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모양새더란 거지. 그래서 조심스레 파내어 보았다는 거야. 그랬더니 그 마른 진흙 속에 가죽주머니가 들어 있더란 거야. 그것도 거의 완전한 형태로 말이야. 놀랍지 않니?”
“그래서?”
나는 속으로 발굴을 하다보면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이 나오기도 하고 그런 거지, 계집애가 별 유난을 다 떤다 싶어 덤덤하게 받았었죠.
“넌 이게 놀랍지도 않다는 거야? 아이고 무식하면 용감해져요. 그게 4백 년 전, 임진왜란 당시 물건인데도?”
희순이는 내가 놀라지 않는 게 더 놀랍다는 듯이 호들갑을 떨었어요. 나는 그제야 조금 흥미가 동하기 시작하더군요.
“주머니 속에 뭐가 있었는데?”
“왜? 별 관심 없는 것 같더니만?”
“너 자꾸 뜸들이면 전화를 끊는 수가 있어.”
“기지배, 성질머리하고는……. 들어봐, 잘 들어봐. 이게 진짜 정말 중요한 건데 말이야. 그 주머니 속에서 한글 편지 두 통이 나온 거야. 근데 그 편지가 거의 완벽한 형태인 거 있지. 글씨가 좀 번지긴 했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야. 이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그렇지 않어?”
“무슨 내용인데?”
“그래서 내가 지금 너한테 전화하고 있잖아? 기지배야. 부부 사이의 편지인 건 분명한데 워낙 고어체에다 흘림글씨라 내용 파악에 시간이 걸리나봐. 연구원에서 급하게 초벌 해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 몸이 널 강력하게 추천했지. 어때 잘했지? 초벌 해독 그거 아무에게나 맡기는 거 아니다, 너. 대단한 영광인 줄로 알아아. 술 한 잔 사야 돼. 알었냐?”
그렇게 생색을 내면서 희순은 원본 편지를 찍은 사진을 파일로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부부 사이의 편지라는 바람에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4백 년 전의 옛날 편지라는데 대한 전문적인 관심도 컸지만 –내 대학원 전공이 15세기 국어학인 건 아시지요?- 부부 사이의 편지라는데 더 마음이 끌렸습니다. 갑자기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던가 하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한데 거짓말처럼 우리는 이태껏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더군요. 하긴 전화와 메일이 이처럼 발달한 세상에서 누가 편지를 쓰겠습니까만, 아쉬운 마음이 들었어요. 당신의 필체로 직접 쓴 편지가 한 통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무튼 저는 희순에게 파일을 빨리 보내라고 오히려 재촉해댔습니다. 희순인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득의만만해서 거듭 술사라는 다짐을 놓더니만 몇 시간 뒤에 파일을 보냈더군요. 저는 무엇에 쫓기듯이 급하게 파일을 열었답니다. 파일은 수십 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한지에 접이식으로 된 편지는 화학처리를 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바스라진 부분과 먹이 탈색되어 글씨의 흔적만 남아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사진은 한 페이지씩 찍은 것과 두 줄씩 가로로 찍은 것이었습니다. 희미하거나 알아보기 어려운 글자는 한 글자씩 크게 촬영했더군요.
편지의 겉봉은 발견되지 않았는지 발신인과 수신인의 인적사항은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얼핏 보아도 아내의 편지와 거기에 대한 남편의 답신인 걸 알겠습디다. 아내의 편지 글씨는 곱고 단아했습니다만, 흘림체여서 쉽게 알아보기 어려운 곳도 있었습니다. 저는 고어사전을 꺼내놓고 한 단어씩 풀어나가기 시작했지요. 제가 풀이한 것이 정확하다면 아내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학이 아버지, 당신이 집에 다녀가신지 벌써 두 달이 흘렀습니다. 오늘 낮에 동래부 관속 李某가 당신 서간을 지니고 찾아와 얼마나 놀랍고 반갑던지요. 당신을 본 듯 정신이 혼미했답니다. 금방 읽고 싶었지만 식구들 앞이라 짐짓 무심한 척 하느라 혼이 났었지요. 식구들이 모두 잠든 지금에야 희미한 등잔 아래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 편지를 읽습니다. 당신이 쓴 글자 한 자 한 자가 제겐 너무 소중합니다. 그래서 당신 글씨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읽었답니다. 그러다보니 또 감정이 격해져 울 뻔하였지요. 그렇게 마음이 여려서 어떻게 사누 하고 당신이 걱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요. 그래도 당신 앞에선 전 여린 사람이고 싶어요.
여기까지 해독하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어사전을 뒤적이며 끙끙거려서 겨우 풀이해냈지만 풀이한 내용을 다시 읽으며 나도 울 뻔하였답니다. 지아비를 그리워하는 한 지어미의 마음이 간절히 가슴에 와 닿아서일까요. 그건 아마 4백여 년 전 한 지어미의 마음이 시공을 초월하여 제 가슴에도 고스란히 되살아났기 때문이겠지요.
학이 아버지,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건안하시옵고 무탈하시옵니다. 선이 아기씨는 양촌 마을 유씨 집안과 혼담이 오가고 있삽니다. 우리 학이는 이제 옹알이를 시작하였고 방바닥에 배를 대고 기어 다니게 되었답니다. 학이 눈매가 점점 당신을 닮는 것 같아 전 그게 너무 흐뭇하지요. 일전에 인편으로 보낸 평복 두루마기는 품이 잘 맞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덴 무심한 양반이 동정 마름새엔 까탈스런 그 성미를 생각하면 속으론 웃음이 나지요. 무슨 남자가 그래요. 끼니 섭취가 어떠한지 그게 늘 시름이어요.
주인 할멈이 손끝이 맵다니 퍽 걱정은 덜었습니다만, 내 손으로 장만하지 못하니 맘이 모자라요. 학이 아버지, 새벽에 때때로 당신 기침소리를 듣고 잠이 깨어요. 아무도 없는 마당을 보고 꿈속에 들은 소리에 또 속았구나 하고 혼자 부끄러워요. 그래도 얼마나 서운하던지요. 당신은 그렇지 아니한가요. 나만 그러한가요. 학이 가지고 입덧할 때 식구들 몰래 부엌에 들어와서 내 손에 가만히 쥐어주었던 자두 두 알이 지금도 생각나지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벅차올라 어쩔줄 모른답니다. 무뚝뚝한 양반이 그런 얄망스런 데가 있는 줄 그땐 깜짝 놀랐지요…….
편지는 거기서 그쳐 있었습니다. 그 이후론 습기가 먹고 글씨가 번져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희순이의 설명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만 읽고도 나는 가슴이 먹먹하여 한동안 모니터만 멍하니 바라다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여자의 마음이 4백 년 전이나 오늘날이나 어찌 그리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지……. 나는 다시 남편의 답장을 풀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저께 관속 李某가 당신의 서간을 전해 주었소. 당신과 식구들 모두 무탈하다니 그런 다행이 없소. 읽은 후 곧 답장을 쓰려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소. 그저께 밤에 황령산 봉수대에 봉화가 올랐소. 왜구들이 큰 무리를 지어 몰려와 부산성을 공략 중이라 하오. 왜선들이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덮었고 왜구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하오. 송 부사 나으리가 급히 군관과 병사를 사열하고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동분서주하였으나 무섬증으로 울부짖는 아녀자들의 참상이 성중에 가득하였소. 어제는 기어코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파발이 왔소. 그러고 오늘이라오.
이미 도적떼들이 남문 다리를 건너 성을 둘러싸고 있소. 도적의 깃발과 창검이 숲을 이루고 기괴한 함성이 천지를 덮었소. 적이 공격을 개시하기 전 촌음을 빌려 급히 당신에게 서신을 남기오. 이 서신이 당신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지만 기약은 하지 않으려오. 어젯밤 송 부사 나으리와 모든 군관이 한 잔 술로 맹세하였소. 대장부 한 목숨 나랏님을 위해 바치는 것도 아깝지 않다고. 내 군관의 몸으로 내 아끼는 군졸들과 함께 도적과 싸우다 죽을지언정 경상좌병사 이각 놈처럼 도망가지는 아니할 것이오. 다만 당신의 가만가만한 눈매를 볼 수 없고 그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 부드러운 몸매를 다시 안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학이를 잘 부탁하오.
당신 상상할 수 있나요.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전해질 수도 없는 편지를 쓰는 4백 년 전 한 사내의 심정을. 그리고 그는 아내의 편지와 자신의 답장을 주머니에 넣어 가슴에 품고 적과 싸우다가 죽음이 임박한 순간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걸 진흙덩이에 싸서 축석 사이에 끼워 넣었겠지요. 그 애틋한 마음이 지금 제 가슴을 칩니다.
당신도 그러하였나요. 출장길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가면서 또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그 혼미한 정신 속에서도 내 생각을 하셨나요. 전 그랬으리라 믿습니다. 그곳엔 우체국이 없어서 이 편지를 부칠 수가 없습니다. 담에 이 세상 삶 다 산 후에 내가 직접 가지고 가겠습니다. 우리 그때 함께 손잡고 4백 년 전 부부를 찾아가 봅시다. 그 부부도 그곳에서 다시 만나 살갑게 사랑하며 살고 있겠지요. 그때까지 잘 있어요. 당신의 아내가.
[註] 동래읍성 전투
東萊邑城은 부산 동래구 안락동 칠산동 복천동에 걸쳐 있는 성으로 東將臺가 있는 忠烈祠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西將臺가 있는 東萊鄕校 뒷산의 구릉지까지 이어져 있다. 읍성은 지금의 동래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역에 전형적인 平山城 형식으로 축조된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邑城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이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동래읍성은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東萊府使 宋象賢 公을 위시한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임란 초기의 최대 격전지이다.
임란 이후 방치되어 있던 읍성을 1731년(영조 7) 동래부사 鄭彦燮은 나라의 관문인 동래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邑城을 쌓았는데 이때 쌓은 성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東萊邑城 戰鬪는 1592년 4월 14일 오전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동래와 다대포로 진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동래는 부산진과 가까운 거리였고 또 부산지역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다. 당시 동래부사는 문관 출신의 송상현이었다. 송상현 부사는 수성 계획은 일차적으로 지역의 兵權을 가지고 있던 경상좌도의 군사와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싸울 예정이었다.
당시 경상좌도 병사의 군사책임관이었던 경상좌도 병사는 李珏이었다.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러 왔다가 일본군의 군세가 막강함을 보고서는 뒤에서 계속 지원하겠다고 하고서는 성문을 열고 도망하였다. 그리고 직접 부사의 명령계통은 아니었지만, 부산지역 해안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의 수사는 朴泓이었다. 그는 부산포에 적이 들이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나 梁山郡守 趙英圭는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달려가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우기로 하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송상현 부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일본군은 이미 부산진성 전투 에서 朝鮮民의 굳센 항전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대군을 동원하여 일시에 동래성을 포위·공략했으므로 격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동래성전투는 15일의 경우 시간적으로 보면 부산진성전투보다 전투시간이 짧았다. 대격전은 우리 측에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마침내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당시 송상현이 남긴 戰死易 假道難이라는 글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국난극복의 중요성과 충직한 삶의 자세를 일깨워 준다. 동래읍성은 현재 옛 성벽의 일부만 남아 있었으며, 시가지역은 도로, 주택 등으로 변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한 도시정비계획에 따라 성벽과 각종 문루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 일부인 망미루, 동래독진대아문 등은 금강공원 입구나 공원에 옮겨져 있다. 그러나 동래읍성의 성역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2005년 부산지하철 3호선 2단계 공사를 하던 중 수안동사거리 지하구간에서 동래읍성 기초 초석이 발견되어 문화재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군관민이 일치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하였던 동래읍성의 모습은 그림으로서만 볼 수 있어 안타까울 뿐이다. 동래읍성을 복원하자는 여론이 없는 것은 아니나 복원에 따른 막대한 예산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권 침해,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라는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