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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일 [연중 제31주일]
마르코 12,28ㄱㄷ-34
이웃보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에게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계명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그러면 계명은 왜 주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치는 이유와도 같습니다.
그래야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이 세상에서부터 행복할 수 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2023년 38년 동안 중증 장애인인 딸을 돌보다가 수면제를 먹인 뒤에 살해한 60대 어머니에게
법원이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선처했습니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는데, 어머니는 최후 진술에서 “버틸 힘이 없었고 끝내자는 생각이었다.”라면서, “딸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혼자 살아남아서 정말 미안하다.”라고 오열했습니다.
분명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랑이 저절로 솟아나면 부모에게 키워질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사랑은 실체가 없고 개념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더라도 그들도 부모에게 사랑받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성장할 수 없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아야만 줄 수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라하고 하실 때 중요한 부분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그 부족한 부분을 이웃에게 채우려 해서 나중에 본인은 사랑했다고 말하겠지만, 자녀들에게나 이웃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최고야 원장의 『벼랑 끝, 상담』에
이런 사례가 나옵니다.
20대 중반에 무역회사에 다니며 이미 팀장의 자리까지 오른 능력 있는 여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어렸을 때 항상 부모의 싸움만 보며 자랐습니다.
그중에서도 피해의식이 컸던 엄마가 큰 문제였습니다.
엄마는 모든 분풀이를 딸에게 해대고 있었습니다. 딸이 수학 95점을 받아 반에서 1등을 하고 기뻐서 엄마에게 내밀었을 때 엄마는 그 시험지를 찢어버리며 “내가 이런 점수 보자고 이 고생하며 키웠냐?”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은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죽도록 공부만 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직장에 취직해서 독립했을 때도 딸을 찾아와 괴롭혔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런 스트레스가 폭발할 때면 자해하며 풀었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어서 남자친구는 쉽게 사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하던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했고 그렇게 많은 남자가 떠나갔습니다. 남자가 떠나려는 기미가 보이면 자해하며 피 흘리는 모습의 사진을 보냈습니다. 유일하게 지금 이 남자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었기에 여자는 이 남자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최고야 원장은 그녀에게 남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집 안에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그 안에 남자친구가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자유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잘 됐을까요? 나중에 다 부숴버렸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면 남자친구 사랑받아야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이것에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이고 지금으로 말하면 ‘십일조’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자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행복한 아내가 되어야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에 ‘아내의 겨울’이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노동으로 하루살이 하던 정호는 경기 침체로 넉 달째 일을 못 나갑니다.
그 남편을 위해 고깃집에서 일하다가 사장이 줬다며 아내가 불고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보다 먼저 남편에게 주었고 그 안에 씹다 버린 껌이 노란 종이에 싸여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자녀 몰래 그 껌을 집어삼켰습니다.
남편은 숫기 없는 아내가 몰래 남들이 먹다 남긴 고기를 모으느라 고생했을 생각 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배부르다며 밖으로 나온 남편은 아내의 구두를 닦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자녀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기에 순수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자녀들의 자존감을 높여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이고 그 나라의 행복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3일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 신명기 6,2-6
제2독서 : 히브리서 7,23-28
복 음 : 마르코 12,28ㄱㄷ-34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장거리 운전중에 하도 잠이 와서, 휴게소 들러 그 유명한 7080 가요 시디 한장을 사서 듣기 시작했습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스무곡 가까운 노래들 가운데, 사랑을 주제로 하지 않은 노래는 단 한곡도 없었습니다.
틈만 나면 사랑이란 단어가 반복되었습니다.
끝사랑, 바보같은 사랑, 거지같은 사랑, 중독된 사랑, 금지된 사랑, 그 잘난 사랑, 사랑없인 난 못살아요...^^
따지고 보니 우리는 틈만 나면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가르치고, 사랑을 추구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한 노력은 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저 유행가 가사 정도의 통속적인 사랑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젊은이, 신앙과 성소 식별’이란 주제로 시노드를 개최하셨는데, 폐막 미사 강론에서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을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행여나 젊은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또 우리 마음을 열지 않은 채 젊은이들 귀만 가득 채우려고 했다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생각할수록 우리 양떼를 향한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인듯 합니다.
그분의 말씀 속에 참사랑,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잘 녹아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속적인 사랑, 유행가적인 사랑을 넘어서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우선 참사랑은 상대을 향해 마음의 창을 여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아주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의 말을 잘 경청합니다.
오늘 참사랑의 전문가요,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도 빈약한 사랑으로 인해 늘 허전해하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우리의 사랑이 좀 더 큰 사랑, 좀 더 사심없는 공평한 사랑, 좀 더 폭넓은 사랑, 좀 더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랑, 참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사랑이란 보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나가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원치 않는 행동을 자제하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마음 안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통해서 상대방의 이름으로 행하여 주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최인호 베드로, ‘사랑의 기쁨’)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일 강론>
(2024. 11. 3.)(마르 12,28ㄱㄷ-34)
<사랑은, 이미 받은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1) 사랑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에’ 했었다는 말이나, ‘나중에’ 하겠다는 말은 아무 의미 없는 말입니다.
‘전에는’ 사랑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에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 하는 것을 보고, 사랑하겠다.” 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어떤 조건을 걸고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나 목적이나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바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특정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은 성당에 있는 동안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는 “지금은 먹고 살기가 너무 바빠서 여유가 없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은, 주님에 대한 사랑도 없고 자신의 영혼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뿐입니다.
지금 없는 사랑이 나중에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 사는 것이 너무 편하고 좋아서 주님을 아쉬워하지 않고, 아예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지면 그때서야 잘못했다고 주님께 빌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미신과 다르지 않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2) 사랑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남에게 시켜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사제 카야파가 이런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49-50).”
이 말은, “민족을 위해서 예수를 죽입시다.” 라는 뜻입니다.
만일에 그가 참으로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내 목숨을 바치겠소.” 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바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고, 남을 희생시킬 생각만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판관 입타’의 경우도 같은데, 그가 정말로 하느님을 믿고 사랑했다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남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판관 11,31).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아니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서약 자체가 무효입니다.
사랑은, 목숨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아낌없이 내주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ㄱ).”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은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면서
당신의 아드님만 희생시키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사랑 실천이 ‘계명’으로, 또 ‘해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하기 싫어도 하여라.” 라는 강제 명령은 아닙니다.
만일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계명 실천도 아니고 사랑 실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큰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우리에게 주기 때문에,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계명이어서 의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쁘고 행복하니까, 또 내가 원하는 일이니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고,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5,9-17).
형제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1요한 4,20).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