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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가난한 개인이 그 자체로 세계가 되는 문화기술지에서
빈곤은 부단한 과정이자 고된 분투로 등장한다”
당연한 의존을 문제 삼고 삶을 끝없는 불안으로 포위하는
빈곤 통치에 가려진 세계와 가능성을 찾아서
―인류학자가 동행한 빈곤의 과정과 확장되는 빈자의 외연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빈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우선 나와 내 가족의 삶에 달라붙을 수 있다. 배고픈 삶, 전망 없는 삶에서 기어 나오는 공포, 분노, 무력감이 자기비하로, 피붙이에 대한 폭력으로 치닫는다. 쪽방촌, 고시원, 다세대주택, 임대아파트 단지에 살면서 지척의 가난을 보고, 듣고, 냄새 맡는다. (…) 어디 인간뿐인가. 자연에 대한 수탈과 착취에 따른 비인간 생명의 아우성은 전염병, 홍수, 산불 등 인간이 포착 가능한 형태로 번역되어 극히 일부분일지언정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은 인류학자인 내가 경험적 연구를 통해 빈곤을 학술적·실천적 주제로 등장시켜온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여러 현장을 기웃거리면서, 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빈곤을 새롭게 발견하고 쟁점화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무허가 판자촌, 공장지대, 슬럼화된 노동자 거주지 등 빈곤의 전형성이 도드라진 현장에서 전형적이지 않은 빈곤의 역사성과 관계성에 주목했고, 대학 수업, 이주자들의 공간, 국제개발과 자원봉사 무대처럼 서로 이질적인 현장에서 빈곤이 실존의 불안으로 현상하는 공통성을 포착했다. (…) 인구 다수가 불평등 구조의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계 없는 불평등’의 시대, 다른 한편에선 금융자본주의와 팬데믹을 거치면서 부의 양극화가 가파르게 진행 중인 시대에 빈곤을 긴요한 정치적·윤리적 의제로 소환하려면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_「서문」
📝 저자 소개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빈곤의 지형을 탐색하고 복수의 세계들을 연결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The Specter of “The People”: Urban Poverty in Northeast China》, 편서로 《헬조선 인 앤 아웃》,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역서로 《분배정치의 시대》가 있다.
📜 목차
서문
1부
1장 고인 가난
2장 의존의 문제화
3장 노동의 무게
4장 집으로 가는 길
2부
5장 글로벌 빈곤과 접속한 청년들
6장 실존의 결핍을 메우기
7장 빈곤 전염의 공포
8장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
3부
9장 인류세의 빈곤
주
참고문헌
찾아보기
📖 책 속으로
사실 삶에서 의존만큼 당연한 행위도 없다. (…) 건장한 성인이라고 의존에서 자유로울까? 그의 삶이 의존과 무관해 보인다면, 이는 살면서 의존할 기회와 자원이 누구보다 그에게 넉넉했음을 뜻한다. 그가 독립적이라 느낀다면, 자신의 의존 경험에 무심했던 까닭일 확률이 높다. (…) 복지가 직업화·제도화·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온’ 역사다. 그룹홈의 부모가 영재한테 의존하면서도 그에게 낙인을 씌우듯, 복지 종사자들 역시 빈자에게 기대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심판자를 자임한다.
---「의존의 문제화」중에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 쑨위펀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한때 나는 그의 ‘집’이 계속 헷갈렸다. 태어난 고향인가, 시댁이 있는 빈현인가, 아니면 친정 식구가 모인 하얼빈인가? 지척에 농사지을 땅이 있는 가옥인가, 편리하고 현대적인 아파트인가? 쑨위펀은 토지를 찾으러 빈현에 갈 때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더니, 토지를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떠날 때도 “집에 돌아가자” 했다. 집은 결국 특정 장소로 가리킬 만한 ‘어디’도, 건조물로 지칭할 만한 ‘무엇’도 아니라, 세계 속 자기 ‘자리’를 만드는 부단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언제 헐릴지, 쫓겨날지 모르는 상태를 벗어나 맘 편히 누울 자리, 섭씨 영하 20도에 볼일을 보러 공중변소를 찾지 않아도 되는 편한 자리, (…) 몸이 아프고 돈이 없어도 괜찮은 자리, 서로 돌보고 의지할 존재를 곁에 둔 자리……. 하지만 쑨위펀이 자리를 만드는 과정은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조차) 자격을 의심받고, ‘자격 없음’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과정이었다. (…) 자격 없음의 판정은 가까이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심지어 가장 친밀한 사람들에 의해 계속됐다. 동행하면서 주저하기를 반복했던 나도, 거듭 노력하고 거듭 ‘부적절한’ 존재임을 확인받으며 점점 움츠러든 쑨위펀 자신도 예외일 수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중에서
“미묘하지만 놓칠 수 없는 현상” “자질구레한 일들” “사사롭고, 친밀하고, 내면적인 측면” 등은 윤리적으로든 방법론적으로든 외부인이 섣불리 다루기에 벅차다. 그럼에도 이런 점액질의 구체적 삶을 진지하게 검토할 수 있다면, (…) 나는 우리의 공론장이 동료 시민을 머나먼 이방인, 두려운 괴물, 가망 없는 주류로 쉽게 거부하지 않고 지구 속 취약하고 불완전한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기를 바란다. 지구생활자-파괴자가 품어온?감각, 세계상, 열망의 총체로서?발전의 꿈이 ‘그’라는 존재와 등치될 만큼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문화와 상징, 이데올로기, 제도와 정책, 교육과 미디어, 일자리와 사회보장 등이 얼기설기 엮이고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발전의 꿈이 아닌 다른 꿈을 꾸는 것이 어떻게 막히고 불온시되었는지, 어떤 감당하기 힘든 규범과 질서를 강요하고 낙인을 부과했는지, 그렇게 집요하게 추구했던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되고 또 좌절되었는지 각자의 생애 경험에서 출발하여 말하고, 쓰고, 읽고, 대화하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인류세의 빈곤」중에서
🖋 출판사 서평
빈곤은 과정이다
―미궁과 진창 속 자기 자리를 찾아서
이 책은 빈곤을 과정으로 본다. 그 과정 속에서 ‘빈곤이란 무엇인가, 빈자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나 미결인 상태로 남는다. “어디에나 있다”고 했던 빈곤은 주변을 둘러보면 다시 “어디에도 없는” 것이 된다. 돈 없고 집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상태, 물질적 결핍과 경제적 고립, 약자이자 피해자, 수급자이자 의존자 따위의 전형적 분류로 답변되어왔던 이 질문에 간단히 답하기를 부러 실패하고 내려진 답을 거듭 번복하면서, 빈곤은 빈자에게 그렇듯 독자에게도 과정이 된다. 그것은 어떤 과정일까?
도시 빈민, 공장노동자, 수급자, 불안한 청년, 농민공, 이주자, 여성, 토착민, 노예, 그리고 역사 이전부터 착취당해온 비인간까지…… 이 책에 소환되는 빈자에는 경계가 없다. 빈민의 외연은 이 사회의 통치 방식과 그에 연루된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계속 확장된다. 가난한 이의 생활을 일정 기간 지켜보고 그의 생애 발걸음에 보폭을 맞추다 보면 물질적 궁박함으로 표상된 빈곤이란 상태가 실은 실존의 결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어진 조건이 어찌됐건 취약한 존재가 세계 속에서 진정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 그것이 빈곤이라고 지난 20년간 빈곤을 연구해온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 나라는 내가 진정으로 어떤 인간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117)
이 책의 문화기술지에 등장하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말은 빈곤 과정의 본질을 정확히 꼬집는다. 이 사회에서 누가 빈자인지를 가려내고 그의 빈곤을 처리하는 것―그의 의존 상태를 자립 상태로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것이다. 빈곤 과정에의 동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며, “별 볼 일 없는 일상을 함께 견디며, 그럼에도 누구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내-자리를 확보할 자격이 있음을 서로 배우는”(398) 것이 인류학자인 저자가 빈곤과 동거해온 방식이다.
빈민을 구성하고 빈곤을 배치하는
빈곤 통치와 빈곤 산업
진짜 가난, 가짜 가난이 따로 있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가난 논쟁의 불씨가 되어왔다. 2019년 어느 설문조사에선 “나는 가난하다”고 응답한 이의 11퍼센트가 연봉 6000만 원 이상, 자가 소유자가 52퍼센트였는가 하면, 20억짜리 집을 소유하고도 “전형적인 하우스푸어 중산층”을 자처한 글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는 가난하다고 이야기한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도둑맞은 가난」부터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까지, 가난이 무엇인지 안다면 아는 우리에게 가난 서사에 이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가난이라는 서사에 억울해할 수 있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으며, 심지어는 그러한 분투에 좌절 내지 열광까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타인의 가난은 여전히 마주치고 접속하기 어려운 것으로 남아 있다.
이런 세계에선 누구도 빈곤의 천태만상을 멀찍이서 바라만 보는 위치에 있을 수 없다.(5)
“살면서 빈곤을 본 적이 없어요.”(6)
누구도 방관자 되기에 그치지 못한다는 이 말은 모두가 불평등의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경계 없는 불평등”의 시대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안을 위치시키는 것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빈곤 감각, 빈곤 인식을 갖기를 주문한다. “생활고를 비관해 목숨을 끊은 가족, 엄동설한에도 전기장판을 마음 편히 들여놓을 수 없는 쪽방 주민, 코로나로 인한 봉쇄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바이러스 감염보다 굶주림에 더 시달리는 이주자의 이야기”(4)……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가난은 현실의 복잡함·지난함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의 가난 서사는 가난의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알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개별 서사를 뭉뚱그린 ‘빈곤 문제’의 해결이 앞세워진다. 통치 체제가 빈곤을 분류하고 관리해야 할 문제로 삼으면서, 빈곤을 모두의 정치적 의제로 삼고 그에 맞서는 비판·저항에 동참하는 일은 오히려 요원한 과제가 됐다. 그 배경에는 ‘의존’이라는 당연한 존재 양태를 문제화하는 빈곤 통치, 빈곤 산업이 자리한다.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105)
“가난은 동서고금의 현상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를 ‘빈곤’이란 개념으로 문제화하고, 이에 개입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빈민the poor’을 구성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28)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가난을 물질적 결핍에 기반해 생각한다면 인류 역사는 가난의 역사이고, 가난을 벗어나 목숨을 지키려는 생존의 역사다. 약육강식의 전쟁도, 함께 살아내려는 나눔도 이 역사의 일부다. 벗어나길 갈망한다는 점에서, 가난에는 부정否定성이 짙게 배어 있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자발적 가난이라고 예외로 봐야 할까. 중세 유럽을 연구한 학자들은 기독교의 등장이 빈곤과 자선에 종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이 시대에도 빈곤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실천으로서의 빈곤은 찬양받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빈곤은 죄의 대가이자 신의 처벌로 여겨졌다.”(28~29)
요컨대 빈곤은 구성되는 것이다. 기초생활수급제도가 마련되고 사회보장 수준이 개선되는 와중에도 이러한 구성에 의해 가난은 ‘증명해야 하는 것’으로 남고, 실업 질병 노령화 등 삶의 취약성은 ‘노동능력 상실’이라는 문제가 되며, 의존은 ‘지긋지긋한 결함’으로 낙인찍히고, 변화는 ‘통제 가능한 수준’에 고착된다. 여기서 노동은 가치판단의 절대 기준이 되곤 한다. 노동 대 빈곤, 노동자 대 빈자라는 이분법은 이런 구성 속에서 후자의 열위를 정당화한다. “역설적으로 봉사자, 활동가, 정책 실무자, 연구자, 예술가, 기자 등 빈곤을 어떤 식으로든 재현하고 쟁점화하는 매개자?대화자 집단은 빈곤 문제의 해결이 요원해 보일수록 역설적으로 증가했다”(5)는 점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정부의 선별적 포섭·보호·배제는 수급자, 난민·이주자 등 특정한 체계로 식별되고 등급화된 ‘빈자’와 그들을 돕는/관리하는/재현하는/옹호하거나 비난하는/외면하는 ‘관계자’를 곳곳에 배치시켰다. 『빈곤 과정』은 이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는 빈곤의 어셈블리지에 주목한다.
관료-기계는 일정한 양식에만 열려 있다. 양식은 그 자체로 입력물(질병, 장애, 집, 가족, 일, 빚 등)에 조작을 가하여 “어떤 조직적인 소통 매체로 변환하는 기계”다. 사전에 규정된 특정 기준에 따라 양식에 적시된 것만 전달 가능하므로 “우리의 사람됨, 우리의 처지, 우리의 삶은 양식에 의해 사전에 규정된 범주에 따라 분쇄되고 걸러진다.”(45)
살면서 ‘어떤 의존을 하는가’를 묻기보다, 노동을 척도로 ‘의존이냐 자립이냐’를 판별하는 흐름이 대세가 되었다.(69)
‘사회적 공장’은 노동자들을 단순히 기계, 노예, 짐승으로 억압하는 대신 이들의 열망을 한껏 부추기는 방식으로 가치를 수탈한다. … 폭스콘 공장에서의 조립 공정, 커뮤니티 센터에서의 자원봉사, 보험 판매, 가사와 돌봄노동의 전 과정에서 부단히 가치를 만들어냈지만, 그러는 동안 소외의 경험도 동시에 누적됐다. 그래도 삶은 질기게 이어졌다.(141-142)
가난한 사람이 무엇을 바랄 수 있는지를 제지당하거나, 자신을 부단히 검열하는 상황… (152) 가부장 국가뿐 아니라 남편의 혈연 가족도 가난한 여성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자격’에 의문을 던졌다.(168) 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186)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 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212) 이제 청년의 몸은 경제 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거쳐온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환부’가 아니라, 글로벌과 지리적, 문화적, 제도적으로 교섭하고 자기계발과 세계시민적 감수성을 동시에 벼리면서 새로운 지식, 아이디어, 정동을 창출해내는 ‘프런티어’가 되었다.(214-215)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는 인간 생명체와 접촉하는 순간 삶이 뒤틀린다.(357) ‘인간/사회’와 ‘자연’을 분리하고 후자를 외부화하여 우리가 지구의 물질적 조건 위에서 삶을 영위해왔다는 점을 망각하게 하는 과정, 더 나아가 땅과 물처럼 우리한테 익숙한 자연환경은 물론 식민화된 인간 집단(여성, 토착민, 노예 등)까지 ‘인간’ 유럽인의 반대편에 ‘자연’으로 등장시킨 과정, 이 인간 및 비인간 자연을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는 프런티어를 부단히 만들어온 과정이 바로 자본주의의 역사다.(363)
다른 빈곤을 출현시키고 싶다면
다른 배치를 만들어야 한다
「서문」에서 밝히듯 이 책에서 저자는 “물질적 결핍이란 조건과 가난함에 대한 인식 및 감각 사이의 불일치에 주목하면서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 빈곤 경험의 지층들을 헤집고, 빈자의 외연을 확장”(8)한다. 이 책의 첫 두 장은 빈곤이 ‘복지’라는 레짐에 포획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룬다. 빈곤이 오로지 복지와 결합하면서 노동, 발전, 자립·자활, 의존에 관한 지배적 규범을 재생산하고, 빈자에 대한 낙인과 폭력을 강화하는 과정을 담았다. 1장 「고인 가난」에서는 사회보장의 역사를 검토하고 저자가 2001년부터 연구지로 삼아온 서울 난곡 지역의 사례를 토대로 기초법과 수급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관료-기계로 작동하며 가난에 대한 감각, 인식, 서사, 논쟁, 투쟁을 마름질하고 빈곤의 정치적 의제화를 곤경에 빠뜨리는지를 살핀다. 2장 「의존의 문제화」 에서는 의존이 삶의 고유한 양태임에도 사회적 ‘문제’로, 빈자의 품행과 습속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기제로 작동하게 된 맥락을 살핀다.
의존이 낙인이 된 것은 역사적으로 자연스러운 경로도, 불가피한 귀결도 아니었다. 생활 세계에서 의존의 의미는 계속해서 변화하며, 자활自活은 한국 빈민운동사에서 상호의존으로 번역되었었다. 3-4장은 저자가 오랜 시간 동행한 두 중국 여성에 관한 문화기술지ethnography다. 이 글들은 개인을 그 자체로 세계로 조명하며 가난이 어떤 식으로 사회적·실존적 분투의 과정이 되는지를 들여다본다. 타인, 제도, 지식, 매체 등과 연결되는 과정에서 빈곤을 더 무겁게 짊어지게 된 이들, 소외에 저항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다 새로운 소외에 직면한 이들은 손쉽게 분류되지도, 약자 내지 피해자로 낙인찍히지도 않는다.
2부는 빈곤 산업과 빈곤 통치의 현장에서 물리적 결핍에서 실존적 결핍으로 빈곤의 외연을 확장한다. 5-6장에서는 21세기 글로벌 빈곤 통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피며, 실존의 불안을 호소하는 청년들이 각국의 개발 프로젝트에서 빈곤의 퇴마사를 자임하는 역설을 논한다. 전략적 이익에 몰두하는 기업, ‘진정성 게임’을 반복하는 실무자, 타인의 빈곤보다는 자신의 불안을 치유하고 싶어하는 한국 학생, 빈곤산업의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는 중국 학생이 뒤엉킨 현장은 빈곤 레짐의 통치성에 대한 정돈된 비판을 거스른다. 7-8장은 이런 실존의 결핍을 불안정성에 대한 논의로 확장한다. 7장 「빈곤 전염의 공포」는 중국 둥베이 선양의 한인타운에서 하향 이동과 실패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한국인 이주자들에 관한 문화기술지다. 상호의존이 절실한 이주자들 사이에서 의존이 오염의 표지로 등장한 맥락을 한국인 영세 자영업자, 조선족, 탈북민 관계의 부침 속에서 살핀다. 8장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엔 저자가 대학교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마주한 취약한 존재들 간의 마찰과 위계가 담겼다. 교육·문화 자본을 갖춘 청년의 불안에 깃든 우울과 열망은 도시 빈민의 취약성과 긴장 속에서 마주친다.
마지막으로 9장 「인류세의 빈곤」은 다시 과정으로서의 빈곤이라는 인식으로 돌아가, 우리 시대의 빈곤을 ‘어디로 가게 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지구생활자-파괴자가 치열하게 붙들어온 ‘발전의 꿈’과 인간의 취약성·유한성이라는 공통의 숙명을 대조하며, 저자는 느린 시간 감각 속에서의 동거를 제안한다. 그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질문에 답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면서 다만 과정에 부단히 동참하는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