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9일 [연중 1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6,1-6.16-18
매일 이 세 가지를 실천하지 않으면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도 산상수훈이 이어집니다.
특별히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2천 년 동안 삼구, 곧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사순절 동안 실천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은 왜 세워질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수확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곡식이 저절로 자라기는 하지만, 물을 주고 풀을 뽑아주고 거름을 주는 등의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나의 노력은 이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평생 유지할 기도, 자선, 단식의 매일 루틴을 결정한 자는 이미 믿음으로 삼구와 싸우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은 비록 종교인만이 아닌 모든 꿈을 좇는 선한 이들이 매일 하는 일입니다.
우선 꿈이 있는 사람들은 매일 독서, 명상, 감사일기 등을 씁니다.
우리로서는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승호 회장은 책 100권 읽기를 하였고 원하는 것을 매일 100번씩 썼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독서, 감사일기를 하였고 트위터 공동 설립자인 잭 도시는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김연아 선수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묵주반지를 끼고 대회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꿈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들은 또한 자신의 육체적 욕망이 꿈의 성취를 방해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일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싸웁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간 단식한 것과 같습니다.
잭 도시는 간헐적 단식을 하였고 긴연아 선수는 “야식이 뭐예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기 육신의 욕망을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연예인 중 유재석이나 박진영 씨의 몸 관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자기 육체를 괴롭힐까요?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드웨인 존스가 왜 굳이 매일 새벽에 운동을 몇 시간씩 하겠습니까?
자기를 이기는 게 곧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꿈이 있는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자선입니다.
매일 자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으로 살 수는 있습니다.
왜 굳이 김연아 선수가 많은 돈을 기부하였을까요?
돈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더 나은 성과가 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잭 도시는 코로나 구호 활동 및 기타 자선 활동에 10억 달러를 기부하였습니다.
10억 달러는 1조 3천억 원 정도 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재단까지 설립하여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하고 주윤발 씨는 자신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도 1조 원 가까운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였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적은 돈이 아닙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돈으로 퇴색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루카 복음 6장 20~23절 행복 선언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배고픈 자는 복이 있으며, 지금 박해받아서 우는 이들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속, 육신, 마귀를 이긴 이들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않고는 ‘사랑’이라는 목표가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삼구는 사랑과 반대 욕구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 나라의 목표를 지니고 있다면 매일 삼구와 싸우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곧 기도-자선-단식을 매일 실천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이 없다면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 자선, 단식을 하지 않아도 천국을 원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9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6,1-6.16-18
우리가 살아가며 짓는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주님께, 그리고 이웃에게, 또한 자연에게 별의별 과오와 실수를 저지르며 죄를 쌓아갑니다.
때로 이 산더미 같은 죄 어떻게 보속해야 되나,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숱한 죄를 기워 갚을 수 있는 비결 3가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죄를 보속하고 청산할 길이 있으니 천만다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자선•기도•단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진정성있는 자선•기도•단식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들’의 모습을 배격하라고 크게 외치십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위선자들, 거짓 신앙인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허영심과 허세,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했던 부자들은 쥐꼬리만한 적선을 하면서도, 그것을 크게 떠벌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예의바르게 자선을 베풀지 않고, 공개된 자리에서, 플래카드도 크게 내건 다음,
사람들 잔뜩 불러놓고, 그렇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의 자선을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아니었습니다.
궁핍한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를 이용해, 은근히 자신들의 관대함을 과시하면서, 스스로를 높이 치켜세우는 가장 비인간적, 비신앙적인 이벤트를 펼쳤던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 앞에 당대 위선자들이 펼쳤던 치졸한 자선의 행태는 차마 견뎌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아주 날카롭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 2)
우리는 자선•기도•단식의 실천에 있어 위선자의 반대편, 대척점에 서 있는 누군가를 찾아봐야겠습니다.
그 사람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이겠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베풀었던 작은 사랑의 실천 앞에 언제나 겸손해야겠습니다.
진실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칭찬한다면 이렇게 대응해야겠습니다.
“저는 보잘 것 없는 종일 뿐입니다. 솔직히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함께 한 동료들, 이웃들이 도와줘서 가능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자선을 베풀 때, 우리는 한 가지 진리를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자선을 베풀려는 상대방은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천사들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부(富), 그리고 또 다른 부인 시간, 재능, 경험과 연륜 등등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온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 하느님께로 되돌려 드린다는 마음으로 자선을 베풀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강론>
(마태 6,1-6.16-18)
위선, 나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아는...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1)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위선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누가 위선자라고 비판하면, 화를 내면서 그것을 부정합니다.
위선은 그 자체로도 죄가 되지만, 위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누구에게나 아주 위험한 함정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 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이방인들의 음식을 부정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는 안티오키아에서 이방인계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위선인데, 이방인계 신자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이고, 유대인들 쪽에서 볼 때에도 위선입니다.
<아마도 이방인계 신자들은 그 일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일을 직접 본 바오로 사도는 몹시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라는 말은, “평소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잘 했으면서”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라는 말은,
“당신의 행동은 유대교 율법과 관습을 지켜야 한다고 이방인계 신자들에게 강요한 것과 같다.” 라는 뜻입니다.
어떻든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은, “당신은 위선자다.”입니다.
<사도들마저도 그렇게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은, 위선이 그만큼 위험한 함정이라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 일이 어떻게 수습되었는지, 베드로 사도가 그 비판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안티오키아에서 있었던 그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그 회의에서 ‘네 가지 필수 사항’(사도 15,29) 외에는, 유대교 율법들과 관습들을 모두 폐지하기로 공식 결정했습니다.>
2) 위선자들도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실제로’ 냅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고마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돈이 아니라 그 돈을 내는 사람의 속마음을 보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분명히 도움을 받았는데도 전혀 고맙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움을 준 쪽에서 생색을 내거나 고마워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태도를 보일 때, 그렇게 됩니다.>
–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연기(演技)’입니다.
즉 기도하는 척 하는 것이고, 가짜 기도입니다.
– 위선자들도 단식할 때에는 ‘실제로’ 밥을 굶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선의 경우처럼 ‘굶는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하느님께서 속마음을 보시고 그 단식을 단식으로 인정하지 않으시면, 굶는 사람은 쓸데없이 헛일을 한 것이 되고, 죄만 지은 일이 됩니다.
3)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숨은 일’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뜻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본인도 모르는 일’이 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자선을 베풀 때에는 그 일이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하라는 뜻인데,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면서도 그것이 사랑과 선행인 줄을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하느님께서는 그 일이 사랑과 선행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 일에 대해서 상을 주십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