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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8월 16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태오 19,23-30 )
"Amen, I say to you,
it will be hard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Again I say 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pass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one who is rich to enter the Kingdom of God ."
말씀의 초대
기드온이 주님의 천사를 통해 판관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기드온이 자신의 연약한 처지를 아뢰자 주님께서는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하고 장엄하게 선포하신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의 책임자들을 부르실 때 주로 하시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부르신 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이들을 통해 백성을 이끄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신다. 그만큼 부자는 자신이 가진 것에 온 마음을 쏟으며, 주님께 마음을 두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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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똑같은 한자를 앞뒤로 바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그 뜻은 참 다릅니다. 출가는 어떤 큰 뜻을 목적으로 하여 집을 떠나는 것이고, 가출은 다만 집을 나가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출가는 내적 자유를 위해 세속적인 인연과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집을 떠나는 것이기에 종교적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가출은 어떤 짐이나 문제를 벗어 버리려고 집을 나가는 것이기에 도피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출가는 단순히 살던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며, 마음이 붙잡혀 있는 곳을 향하여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가짐에서도 어느 순간 또 다른 집을 짓고 그곳에 안주하고 싶은 순간이 옵니다. 살던 집은 떠났지만 어딘가에 다시 집을 짓고 거기서 머무르려는 순간부터 출가는 진정한 의미를 잃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출가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의 마지막 결론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입니다.
출가는 단 한 번 ‘집’〔家〕을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집’(執)에서, 집착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그저 가출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실 제자들의 출가는 그들의 집을 나왔을 때가 아니라, 주님 부활 이후 그 진리에 온전히 투신할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을 선택한다는 것은 굳이 사제나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집에 머물러 있어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가치대로 산다면 그는 출가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집을 떠나 있어도 세상 것에 대한 온갖 번뇌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는 가출한 사람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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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다고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진정한 부자는 만족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재물에 감사할 줄 모르면 부자 대열에 들 수 없습니다.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삶의 ‘첫자리’에 재물을 두고 늘 따라다닙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부자입니다. 낙타의 ‘바늘구멍 통과’에 비유되었던 부자입니다.
만족하지 않기에 부족을 느낍니다. ‘영적 빈곤’입니다. 재물이든 지식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곁에서 볼 때는 ‘참 많이’ 가졌건만 밝은 모습이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이지만 행복해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힘을 받지 못하면 그런 삶을 계속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언제라도 ‘주님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힘이 재물의 힘보다 강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적인 힘이 주어집니다. 만족할 수 있는 힘이 살아납니다.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생각이 마음을 바꾼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승과 저승에서의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주님의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희망을 느낍니다. 재물보다 강한 것이 있음을 믿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남이 없는 것
-윤원진 신부-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느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의사의 실수로 ‘중증 뇌성마비’의 장애를 안고 태어난 송명희 시인의
노래입니다. 그녀에게는 남들이 가진 ‘재물’도, ‘건강’도, ‘지식’도, 그 어느 것
하나 없었지만 그 부족함이 하느님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던 그녀에게 하느님은 ‘가능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불안함과 외로움, 그리고 절망은 자신만을 바라볼 때에 생겨납니다.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내가 비록 가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만 있으면 앞으로도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만인의 연인
-전삼용신부-
한 번은 한 중견 수녀님이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대부분은 함께 사는 동료 수녀님들과의 갈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이런 힘듦은 예전에 비교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수녀님께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고통이 무엇이었나 궁금해 졌습니다.
그 수녀님은 바로 ‘사랑’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신부님이 당신에게 빠져서, 그 신부님을 떼어내느라 매우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서 남자를 한 번도 사랑해 보지 않았던 그 수녀님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신부님을 계속 밀쳐냈고 결국 지금은 당신의 노력으로 그 신부님과 연락도 안 되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수녀님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하게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마음이 약간 씁쓸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욕심 많은 새를 잡는 방법입니다. 맛이 짠 먹이와 충분한 물을 함께 놓아두면 됩니다. 그 새들은 먹이를 먹고 물을 먹고를 반복하다가 자신들도 모르게 배가 불러 날지를 못하게 됩니다. 사냥꾼이 오면 짧은 다리로 퍼덕이며 도망을 가지만 몸이 무거워 손쉽게 잡힙니다.
이렇게 무엇에 집착하는 사람 역시 몸이 무거워져 하느님께로 날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에 오르기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가진 모든 것을 먼저 버려야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무소유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버린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받게 된다.”는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약속’이란 영화에서 보면 박신양이 술이 취하여 노숙자의 가방을 빼앗으려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노숙자는 자신의 전 재산인 가방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지만 결국 빼앗기고 맙니다. 가방을 털어보니 신문지와 옷 몇 개만 들어있습니다. 주인공은 웃으며 가방과 나머지 것들을 그 앞에서 버리고 대신 행려자에게 수표를 한 장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도 더 많이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집착하는 작은 것들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잡고 움켜쥔 손이 아니라 자유롭게 펼쳐진 손이 먼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버리는 것은 무엇이나 100배로 채워주신다면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를 내가 받게 되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버려본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버렸기 때문에 주님께서 맺어주신 수많은 부모님들이 생겼고 집을 버렸기 때문에 가톨릭 시설 어디에서나 잘 수 있게 되었으며 형제들을 버렸기에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에겐 애인도 100명이 있어야 당연할 것입니다.
만약 수녀님이 한 남자도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아직은 애인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수녀님의 참 애인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을 위해서 애인을 버렸다면 누구를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와 비교되는 애인의 자리엔 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과 성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지 사랑은 죄가 아닙니다.
정말 애인을 버리고 성소를 택한 사람이라면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애인을 버린 사람에겐 그 사람이 애인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와 혼인한 사람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 때 혼인이 위태롭게 된다면 그 남자는 처음부터 부인을 위해 모든 여자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서 다른 사람이 좋아질 때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흔들린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성의 사랑을 포기한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나 수도자들은 애인을 버렸다면 두려움 없이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합니다. 누가 봐도 순결하고 영적인 만인의 연인이 되어야 그리스도를 위하여 애인까지도 버린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영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해서 한 개인과 혼인하지 않고 교회의 신랑이 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위해 한 사람과의 혼인을 버리고 교회와 혼인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낙타도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 안소근 수녀-
어제 복음 묵상 마지막 구절이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한테도 그것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부터 예수님은 반전을 가져오십니다. 곧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살면서 가장 크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지금 내 모습이 그 가르침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볼 때입니다. 어제 복음에서처럼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제 삶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느껴집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세상에 증거가 되기보다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력함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낙타도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구원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늘 구멍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낙타’가 빠져나가는 것도, 우리 눈에 ‘꼴찌’라고 보이는 사람, 그것이 나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첫째’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씀이지만 우리에게 판단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나는 낙타가 아니라고, 나는 충분히 바늘 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고, 나는 첫째로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밥 두 그릇 수사(修士)>
-양승국신부-
한 수도원에 밥만 많이 먹던(아무리 아파도,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두 그릇씩, 그것도 고봉으로) 수사가 한 명 있었습니다. 많이 먹다보니 몸도 나게 되었고, 몸이 둔해지다보니 작업시간에 별로 도움도 안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기도시간에 졸기는 또 얼마나 조는지...
이를 늘 눈여겨보던 다른 한 수사는 매끼니 꼬박꼬박 밥 두 그릇씩을 게눈 감추듯 하는 그 수사가 무척 못마땅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밥을 한 그릇 이상 먹어본 적이 없었을 뿐더러, 언제나 철저한 극기와 절제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밥만 축내는 형제가 어찌나 미워 보였던지...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둘 다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고행에 열심이었던 "밥 한 그릇 수사"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천국에 들어가게 된 "밥 한 그릇 수사"는 여유 있게 천국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매일 밥만 축내던 그 수사, "지옥 아니면 적어도 연옥쯤 있으려니"했던 그 수사가 자기와 똑같이 천국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밥 한 그릇 수사"는 즉시 베드로 사도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따졌지요. "이거 해도 너무한 것 아닙니까?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 공평하신 하느님이라고 늘 강조하셨는데, 완전히 뻥이었네요."
묵묵히 듣고만 있던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상황을 설명하였습니다.
"자네, 혹시 단 한번이라도 저 친구 마음 깊숙이 들어가 본적이 있는가? 사실 저 친구, 적당량은 밥 두 그릇이 아니라 세 그릇이었다네. 원래 세 그릇을 먹어야 했었는데, 저 친구 그걸 참느라고 한평생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네는 모를걸세. 그렇다면 결과는 당연히 천국이지."
우스개 소리 같지만 하느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 하느님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상상이나 인간적인 사고구조를 완전히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뵙게 되는 날,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펼쳐질 상황은 너무도 뜻밖의 것이어서 기절초풍할 정도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인간적인 계산방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 인간의 사고구조를 훨씬 능가하는 특별한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첫째였다가 꼴찌가 되고 꼴찌였다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말 가슴 철렁한 말씀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들, 저희 같은 수도자들 성직자들, 봉헌생활자들, 봉사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섬뜩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제나 수도자들이라고 해서 공짜로 주어지는 선물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겉이 그럴 듯 해 보이는 사람들, 말 잘하는 사람들, 교회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선물 역시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겉은 비참해 보이지만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한 평생 가난과 병고, 갖은 장애로 시달리던 사람들, 철저한 소외와 좌절 속에서 끝없는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 그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을 충분히 소화해낸 사람들이며, 끝까지 견딘 사람들이니 하느님 나라 예약은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못할 만큼 큰 슬픔이나 뼛속까지 사무치는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실 그 영원한 안식과 다정한 위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요즘 자주 빼먹어서 죄송합니다. 한 몇 일 더 빼먹어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수도회 국제회의 참석 차 호주엘 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 건강히 잘 보내시고 주님 안에 늘 행복하십시오. 9월초에나 다시 뵙겠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임문철 신부-
본당대항 복사어린이들 축구시합 때의 일입니다. 한 엄마가 먹기 싫다는 아이를 붙잡고 “한 입만 더, 이것만 더…” 하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도
그 엄마는 아이가 잘 안 먹는다고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은근히
부아가 났습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그런데 더 못 봐줄 광경은 그 아이의 눈동자였습니다. 자기는 먹기 싫은데,
엄마가 하도 먹으라고 사정하니까 엄마를 위해서 먹어준다는 투였습니다.
“엄마, 나 이거 다 먹으면 뭐 사줄래요?”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위해서”라는 말을 달고 다닙니다.
주일미사도, 봉사도, 기도도, 성경공부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미사 한다고 하느님이 무슨 덕을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굶기라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을 위해’ 신부가 된 저는 사실 하느님을 만나면, “제가 아무리 잘못
살았어도 그래도 이것만은 갚아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한 묶음의
청구서를 내밀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구서는 분명 완불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불러주신 그 은총은 제가 어떻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분의 이름
-한명수 -
사범대학을 다니던 20대에 나는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길 바랐다. 왜냐하면 가톨릭 학교는 내가 기대하는 ‘좋은 학교’일 거라고 생각했고,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교회에서 배운 바를 잘 실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성이 잘된 선배들한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분홍빛 그리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가톨릭 학교에 발령을 받고 나서 내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교회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에 쉬는 교우가 많았고, 비신자도 많았으며, 학교와 교회(법인)를 자기 안위를 위한 쟁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가톨릭 학교 안에서 교회 이야기를 하면 즐거워야 할 터인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고 그들도 교회의 사람인데`…. 그리고 우리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곳에 왔는데, 왜 교회 이야기를 하면 모두 불편해할까? 나에 대한 경계와 따돌림의 시선이 조금씩 늘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 가톨릭계 교사들의 기본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왜? 참 고민이 많았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요즈음, 그 흐름 안에서 살아온 터라 나도 모르게 변해 있을 내 모습, 새로이 임용되어 오는 후배 교사들에게 내 모습은 어떻게 비칠까? 내가 그토록 고민했던 그대로, 그들이 나를 보면서도 같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선배 교사는 아닐까? 그분의 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분께 먹칠을 하지는 않는지 조용히 고개 숙인다.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임영숙-
성공한 기업인이 마더 데레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부자들은 자선행위에도 앞장섭니다. 미국의 최고 갑부 빌 게이츠는 자선금 기부에서도 해마다 1등을 기록합니다. 한국에서도 최고의 재벌이 사회 공헌에서도 최고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하늘나라를 살 수는 없겠지요. 극히 한정된 경험이지만 부자들을 만날 때 불편했던 것은 그들이 남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돈을 보고 접근한 탓이겠지요. 그러나 돈을 지키려다가 결국 재물을 섬기게 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재물이란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니까요. 재물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집착이 문제입니다.
더 갖고 싶어 집착하고 하느님 대신 섬김의 대상이 돼버리는 것은 재물만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명예욕은 재물에 대한 욕심보다 더욱 위험합니다. ‘데블스 애드버킷’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시성 추진 과정에서 성인 반열에 오를 분에게 문제점이 없는지 조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과 똑같은 제목이지만 이 영화는 변호사 일반의 문제점을 꼬집은 것입니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일지라도 갖은 지략을 동원해 무죄로 만들어 버리는 변호사들이야말로 영혼을 악마에 팔아버린 현대의 사교집단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변호사(키아누 리브스)는 우여곡절 끝에 악마(알 파치노)의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악마는 다시 살아나 징그럽게 웃으며 말합니다. “허영,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지.” 악마가 내세운 돈과 여자의 유혹을 물리친 주인공이 결국 명예욕에 걸려 넘어질 것을 암시하지요.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저는 소름이 끼쳤습니다. 저도 신문에 제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면서 명예욕의 위험을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언론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그 위험성이 느껴집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재물이든 명예든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하늘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최종수 신부-
신앙은 가난과 정비례하고 부와는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신앙이 약해지면 교회가 웅장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당 앞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건축한
베드로 대성전은 부패했던 중세에 건립되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컵에는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컵 스스로가 다른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컵은 스스로
다른 물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자는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물이 가득 차버린 컵이 아닐까요? 한번 더 물어보고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자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부자의 마음은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로 가득 차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요? 피리도 속이 텅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비운 자리만큼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
- 조명연 신부-
오늘은 제가 여러분에게 생활의 지혜 몇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스스로 체득한 것은 아니고요, 어떤 책을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이랍니다.
1. 상한 우유를 이용해 마루나 가구를 닦아보자. 우유가 상하면 세제처럼 약알칼리성으로 변해, 더러움을 제거하는데 효과가 있다.
2. 먹다 남은 소주가 든 병을 뚜껑을 연 채로 냉장고에 보관하자. 음식물 냄새를 말끔히 없애 준다.
3. 쓰레기통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면 신문지를 물에 적셔 덮어 두자. 신문이 냄새를 빨아들여 악취가 없어진다.
4. 김빠진 콜라나 사이다를 변기 속에 부어 놓았다가 30분 뒤 물을 내리면 변기 속이 놀랍게도 깨끗해진다.
어때요? 아마 주부들은 대부분 아시는 내용이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알뜰한 주부가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한 생활의 지혜였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다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버리는 것을 이용한 생활의 지혜라는 것이지요. 상한 우유, 먹다 남은 소주, 날짜 지난 신문, 김빠진 콜라나 사이다. 모두 필요 없는 것이고, 당연히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쓸모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렇게 놀라운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어떤 것도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찮게 여기는 것도 다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중한 마음 그리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모상과 당신의 숨을 불어 넣어 창조하신 우리 인간은 어떨까요? 우리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특히나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을 판단하고 단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스스로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조차도 주님 앞에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판단과 단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이 세상 것에 집착하면서 하느님 앞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즉, 그분과 대화도 전혀 하지 않은 채, 세속적인 부자만을 지향하면서 살아갑니다.
당신과 대화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는 당신과 대화를 좀 하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일 이렇게 계속해서 예수님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습은 아마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기가 힘든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하십니다.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 인간들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귀중한 존재가 더욱더 의미가 있기 위해서, 이제는 세상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행복입니다.
- 이재희신부-
나는 재산이 얼마이고,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나는 부자인가 아니면 가난한가? 재산을 얼마나 모아야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부자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부자가 아니다고
선을 그을 수는 없습니다.
신부인 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욕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 때문에 사람들은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점점 더 나누고 싶은 마음,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반감되고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면, 더 가지고 싶고, 그만큼 더 해이해지고, 나태해지고
무관심해지고 이기적으로 되고 남을 외면하기 쉽습니다.
부 혹은 부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태도가 문제일 것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씀은
부자를 경멸하거나 저주하는 것으로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일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입니다.
여유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여유 중에 가장 큰 여유가 나눌 수 있는 여유입니다.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의 부자입니다.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나눌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재산이 그리 많지 않다해도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부자는 나눌 수 있는 풍요로움이며,
재산에 얽매이지 않는 여유로움 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의미의 가난한 사람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난하게 사는 것 보다는 부자로서 사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나눌 줄 모르고 긁어모을 줄만 아는 사람은 그야말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이면서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자이면서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면서도 기꺼이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가난하면서도 나눌 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과 부에 대한 성서 말씀을 들을 때는 언제나 개운치 않고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주님은 무엇보다 사람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을 이야기 하시며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재산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게으른 거지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든 재산을 가지고 현세재물을 이용하며 사는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힘은
바로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힘은 다름 아닌 신앙의 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기를 내어 놓고 버리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 자신을 내어주시고 이해할 수 없는 편협한 사람들로 인해서
부당한 죽음까지 당하셨습니다.
신앙인도 예수님처럼 서슴없이 내어놓고 나눌 수 있어야 하며,
신앙인의 진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은 많이 갖고 적게 갖고 양적인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재물과 거기에 얽힌 마음 씀씀이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정당하게 많이 벌어 많이 나누는 삶이 더 적극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지만 마음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양승국신부-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富者)라고 하는지는 사람들마다 잣대가 다르겠습니다만, 오늘 복음을 읽는 어떤 사람들은 속이 좀 상하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처신해야하나 고민되기도 할 것입니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분들, 사는 게 그런대로 괜찮은 분들, 나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분들...‘뭐 이런 복음이 다 있나?’ 하고 의구심을 가질 만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겠다는 말씀을 한두 번도 아니고 거듭 되풀이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들어가기 어려운 정도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복음을 읽는 어떤 분들은 속이 많이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재산이 어떤 재산인데? 내 피와 땀이 어린 재산이 아닌가? 남들이 빈둥거리는 시간에, 남들이 세상모르고 잠자는 시간에도 두 눈 부릅뜨고, 코피 터지도록 일해서 겨우 겨우 모은 돈인데, 그래서 이제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었는데, 그렇게 노력해서 넣게 된 재산인데, 그 재산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말도 않되!”
맞는 말씀입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부정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산을 소유한 부자들과 성실하고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해서 재산을 모은 부자들은 당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강조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재산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재산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재산에 목숨 거는 사람들입니다. 돈이 최고라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없이 사는 분들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너무 교만해져서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기에 쉽게 남을 업신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스스로를 생각하기에 전지전능한 구세주라도 된 것인 양,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속에 별로 든 것도 없으면서 만물박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보고 있노라면 눈꼴사나워 참을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안 되고 자질이 없는 사람이 ‘한 자리’에 앉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갑자기 다가온 횡재 앞에 잠시 제 정신을 잃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재산이란 때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재산이 많다 하더라고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린 부자들도 있습니다.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린 사람들이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재산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섭리가 요구하는 대로 자신이 지닌 재산을 과감하게 사용할 수 있는 부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입니다.
제대로 되먹지 못한 사람, 악인(惡人)이 재산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악인의 재산은 죽음으로 직행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대로 된 사람, 선인(善人)이 재산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다시 또 없습니다. 선인이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본인에게는 선행과 공덕을 쌓는 도구가 되며, 하느님께서는 기쁨이 됩니다. 이웃들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진정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자발적 청빈’은 완덕으로 가는 가장 훌륭한 길입니다. 자발적 청빈은 복음의 길이며,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입니다.
재산과는 담을 쌓고 살아가는 저희 수도자들, 그리고 ‘재산의 축척’, ‘부자’ 이런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오늘 복음은 약간 다르게 해석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지나치게 집착하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게 됩니다.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자식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결과가 ‘마마보이’입니다. 그 결과가 부모 고생한 것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싸가지 없는’ 자식입니다. 그 부모들은 이 세상에서 지옥을 체험합니다.
자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연연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결과는 ‘대안이 없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착각하는 장기집권자, 독재자입니다.
건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결과는 ‘건강염려증’입니다. ‘병원순례증’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지나침은 덜함만 못합니다. 우리가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적당하게, 무리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집착에서 떠날 때, 우리는 ‘작은 천국의 체험’을 맛볼 수 있습니다.
- 김웅태 신부-
어제 복음에서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자, 그 청년은, "그런 것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장담하면서, 더 할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제가 완전한 자 되고자 한다면 가진 바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기에 필요한 예수님의 그러한 답변을 들었을 때, 그 청년은 구원의 말씀보다는 자신이 가진 재산에 더 집착했기 때문에, 슬픈 표정으로 예수님을 등지고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씀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은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경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낙타" 라고 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알고 있는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었으며, "바늘귀" 라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생활개념 속에는, 도시에는 성곽이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길이란, 이 작고 낮은 문뿐이었습니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인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 다닐 수 있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에게는 어떠한 험이 있길래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1) 재산의 부요함은 잘못된 자만심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재산을 부요하게 가진 자는, 세상의 무엇이나 다 값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원하는 것을 넉넉히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돈이 그것을 해결해 준다고 여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고, 돈만 주면 슬픈 일도 물리칠 수 있음으로, 하느님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고, 인생의 모든 문제도 재산이 모두 해결해 준다고까지 생각하고 믿는데에 잘못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마태 6, 21에 "네 보화가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재산의 부요함은 그 사람을 이 세상 것에 집착시키고, 하느님을 외면하는 잘못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3) 사람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지고 싶어하게 되고, 재물의 부요함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데 그 잘못이 있습니다. 더욱이 사람은 한번 재산으로 안락과 사치를 누리게 되면,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두려워하게 되고, 그것을 지키기에 긴장과 근심을 하게 됩니다. 즉, 재산을 생활의 평안과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하여, 이것을 더욱더 끌어 모으려는 생활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다른 곳에서 보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전연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루가 19, 9 .. 자케오는 에리코에게 제일가는 부자였는데도, 예수께서는 그를 천국으로 부르셨고, 마태 25, 57 ... 아리마태오 요셉도 부자였기에, 예수님의 시체를 묻을 무덤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요한 19, 39 ... 니꼬데모도 부자였기 때문에 예수의 시신을 바를 향액을 가져다 바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이 미덕도 아니며, 부요함이 그 자체로 죄악도 아닙니다. 또한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크게나 적게나 자신이 가진 재산에 대해서 그것을 지키기에 어떠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재물도, 그 이전에는 다른 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다른이의 손으로 넘어갈 날 이 있을 것이며, "주인이 바뀌지 않는 어떠한 보화도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
우리가 부자입니다.
-강종석 신부-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자칫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재물이 많은 부자는 숨도 못 쉬게 만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을 거부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다 부자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돈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인간적인 능력이 뛰어나서일 수도 직장이 탄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 안 아프고 아주 건강이 넘쳐서일 수도 지식과 인간적 지혜가 자신만만할 정도로 남들보다 뛰어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용모가 화려하고 빼어나서 자신감이 지나치게 넘쳐서일 수도 있습니다. 일이 많고 바빠서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갖가지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게 됩니다. 흠도 티도 없는 도덕적 인간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부자가 아니라 그것들에 사람들이 마음을 뺏겨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지 못하고 거부하거나 주님의 초대를 대수롭게 않게 여기게 될 때 사람들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자의 상징적 의미를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부자의 마음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를 쉽게 뿌리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돈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고 건강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입니다. 그러나 그 건강, 명예, 지식, 돈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즉 선을 가지고서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하느님보다 더 가치있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갈 때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물질적으로 보면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풍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제차를 타는 사람, 아파트 평수가 아주 넓은 사람, 남부럽지 않은 직장과 지식과 건강이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남들보다 많은 노력을 해서 이룩한 사람들도 많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부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주님께 나아가는 데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독이 되고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능력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매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세상 것에 코를 박고 매일 수밖에 없는 존재, 철저하게 지상적인 인간, 그래서 하느님의 구원과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능력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기쁘고 이 세상의 어떤 행복보다도 값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남이 알아주지도 않고 또 부족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닌 불쌍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됩니다. 잘 나가던 사람들이 어느 날 벽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깨달음을 얻고 주님의 초대에 응합니다. 어찌 보면 넉넉해서 주님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보다는 모자라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힘든 상황 때문에 주님을 찾게되고 주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 신앙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 나아가고 주님을 따르는 데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방해가 되지 않고 순조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든 적게 가지든 하느님보다 세상 것에 빠지게 되면 이미 부자 반열에 들기 시작한다는 표지입니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조건들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인, 즉 자기를 자유로이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오히려 자신의 조건에 끌려가는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의 비참함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드는 것을 거부하게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처럼 자칫 영적으로 위기에 빠지고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자가 될 것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어려워 주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못 견딜 정도가 되는 것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행복한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주님께 교만할 정도가 되기보다는 가진 것이 없어 주님께 겸손한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죄가 없어 주님 앞에 당당한 것보다는 죄 때문에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능력이 많아 주님 없이 홀로 서있는 것보다 무능력해 주님께 철저히 의존하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주님께로 들어가는 문은 마치 바늘구멍처럼 가늘어서 교만과 자기 자신감으로 크게 부풀려져버린 정신의 소유자는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린 겸손한 자들이 너무나 쉽게 가느다란 그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아멘!
- 홍성만 신부-
나의 힘을 다하는, 바로 거기에서 구원이 시작됩니다
어제에 이어진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이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에 제자들이 몹시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을 눈여겨보시며 이르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구원은,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은 나의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굳게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내 몸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며 몸과 마음을 다하는 바로 그곳에 영원한 생명 다시 말해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구원된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부자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예수께서 부자(富者)는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지만,
사실 하늘나라(天國)는 들어가는 곳(場所)이 아니라 누리는 것(現狀)입니다.
그러니까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로는 절대로 하늘나라를 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돈과 재물로 안락함과 향락을 살 수 있고, 권력과 지위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과 행복, 평화를 살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 재벌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수십억대의 재산을 가진 할머니가 한강에 투신(投身)한 일도 있었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들을 보십시오.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노래하며 행복합니다.
온 하늘이 제 집인 양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들에 나는 꽃들을 보십시오. 가진 것이 없지만 싱싱하고 푸릅니다.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늘나라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을 쌓아놓고 호의호식(好衣好食)하는 사람이 부자(富者)가 아닙니다.
하늘의 새와 들에 나는 꽃들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정말 부자(富者)입니다.
돈과 재물로 부자인 사람들은 향락을 누리지만,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하느님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하늘나라(天國)를 누립니다.
오늘도 하늘나라(天國)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영혼의 피리
-최종수 신부 -
신앙은 가난과 정비례하고 부와는 반비례하는 게 아닐까요?
또한 신앙이 약해지면 교회가 웅장해지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닐까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성당 앞에서 뒤에 있는 사람을 보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작게 보인다고 합니다. 면죄부를 판매해서 건축한
베드로 대성전은 부패했던 중세에 건립되었습니다.
물이 가득한 컵에는 더 이상 물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컵 스스로가 다른 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빈 컵은 스스로
다른 물을 받아들입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하느님도 신앙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부자는 더 이상 받아들일 공간이 없는,
물이 가득 차버린 컵이 아닐까요? 한번 더 물어보고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부자에게는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부자의 마음은 돈과 재물, 권세와 명예로 가득 차서 그런 건 아닐까요?
그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정의와 평화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건 아닐까요? 피리도 속이 텅 비어야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비운 자리만큼
그 자리에 하느님이 들어오실 줄 믿습니다.
†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따른다.
-박상대 신부-
갈릴래아에서의 선교활동을 마치신 예수께서는 유다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신다.(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태 19,1-20,34) 예수님을 따라 열두 사도들은 물론, 여인들까지 포함된 큰 제자단과 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린아이들까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예수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며, 마지막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마태오는 지난 토요일,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내용의 복음(19,13-15)에 이어 오늘과 내일 복음으로 ‘예수추종’에 관한 가르침(19,16-30)을 들려준다. 예수추종에 관한 대목의 가르침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① 부자청년이 재산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추종을 거부했다는 이야기(16-22절), ②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하다는 단언(23-26절), ③ 예수추종에 대한 보상에 관한 대담(27-30절)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주제와 한 가지 결론을 담고 있는데, 처음 것이 나중 것에 종속되고, 예수추종으로 종결된다고 하겠다. 그 과정은 부자청년의 질문을 계기로 전개된다.
첫 번째 주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계명을 준수하라는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10,17-22)과 비교하여 보면 마태오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을 약간 수정하였다. 이야기의 발단은 한 젊은이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선행(善行)에 대하여 질문한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서, 십계명(출애 20,12-16; 신명 5,16-20) 중에서 부모를 공경하라(제4계명), 살인하지 말라(제5계명), 간음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 거짓 증언하지 말라(제8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열거하신다. 마지막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레위 19,18)은 마르코에 없는 것을 마태오가 첨가하였다.
그 이유는 이미 산상설교(마태 5-7장) 안에 들어있다.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이 직접 언급된 바는 없지만, 이웃사랑은 예수님의 대당명제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충분히 부각되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율법학자와의 대담에서 하느님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의 계명을 율법서의 가장 큰 계명으로 천명할 것이다.(마태 22,34-40) 청년이 이 모든 계명들을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다고 하니, 그에게 영원한 생명은 보장된 셈이다. 그러나 영생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일까?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20절) 라는 청년의 질문이 계속된다. 마르코는 이 대목에서 예수께서 청년을 보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10,21)고 말씀하신다. 유대교에 의하면 사람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 완전하게 된다. 예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6개의 대당명제 끝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완전함은 유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율법의 근본정신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시는 인간의 완전함은 단순한 계명 준수를 뛰어넘는 것이다. 즉, 계명 준수와 함께 선행과 추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복음에서 보듯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뒤에 예수추종을 요구받는다.(21절) 그러나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풀이 죽어 떠나가 버린 것으로 오늘 복음은 끝난다.(22절)
계명을 지키며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 우리는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로서 계명을 지키며 살아 갈 수도 있고, 큰 재산 없이 가난한 자로서 계명을 따라 살아 갈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한번 계명을 지킨 것으로 영생을 보장받거나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해서 당장 완전한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계명 준수와 선행은 종말론적인 영생과 완전함을 위해 평생을 두고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덕행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과 완전함은 미래지향적이다.
부자청년은 지금까지 계명을 잘 지켜왔다는 결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듯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계명을 준수해야 하는 조건이 남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더욱 신나는 일이다. 완전함은 최종적으로 예수를 추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추종은 또다시 역으로 세속적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만큼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이 어제복음 묵상입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서 어느 부자청년이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함으로써 영생의 문에는 가까이 가 있었으나,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추종하라는 예수의 제안을 거절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많은 재산과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예수추종을 놓고 예수를 추종하기보다는 재산을 택한 것이다. 어찌 아깝지 않았으랴. 부자청년의 추종 거부(拒否)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인가? 오늘 복음은 ‘부자의 구원불가능성’(23-26절)과 ‘추종에 대한 보상’(27-30절)을 다루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하신다.(24절) 그러니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가능성 제로’, 즉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정령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라 자빠지며,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하고 묻는다.(25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뚫어지게 보시면서,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문제는 간단하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력(自力)은 물론이고 세상의 어떤 것, 그것이 재물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선행이든 어떤 것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다.”(사도 4,12)는 베드로 사도의 외침이 백 번 옳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외에는 어떤 것도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께서도 부자들을 저주(咀呪)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또한 구원하려 하신다. 단지 부자가 구원받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니,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태 6,24) 다시금 세속적 소유에 대한 과감한 포기가 강조되는 부분이다.
이제는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나서서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추종을 감행하였으니 무엇을 보상으로 받을 것인지를 묻는다.(27절) 예수께서는 세상종말, 즉 하느님나라가 서게 될 때 이스라엘 12지파의 심판과 백 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신다. 마르코복음의 같은 대목에는 현세의 보상과 내세의 보상약속을 함께 언급하고 있다.(마르 10,30) 학자들은 현세의 보상약속에 대한 마르코의 언급을 경솔한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는 생전에 한 번도 현세의 보상에 대하여 언급하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면 모든 것을 얻게 되기도 하겠다. 집도, 부모자녀도, 땅도 버리고 예수를 따랐으니, 세상의 모든 집과 자녀와 땅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작금의 그리스도교계 신흥종교들에서는 예수추종과 현세의 보상을 한데 묶어 신도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종종 신앙과 재물이 서로 결탁하는 모습을 본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생전에 한 번도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현세의 보상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는 점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자녀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고 청하면 현세에 필요한 것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현세에서의 필요한 재산은 그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노력하는 자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추종의 진정한 의미는 오히려 소유포기와 자기부정, 박해와 십자가에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