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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슬
■ 카이로 (CAIRO)
아랍어로 승리를 뜻하는 카이로는 이집트의 수도이자 아프리카에서도 손꼽히는 가장 큰 도시이다.
헤롯 왕의 재난을 피하기 위해 바구니에 실려 나일강을 떠내려온 모세가 빨래하는 여인에 의해 건져진
북 이집트의 삼각주 어귀 게지라 섬에서 나일강의 왼쪽 언덕까지 뻗쳐있으며, 6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수많은 이집트 문명의 수도로서 오랫동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집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나일강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카이로는 이집트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옥한 델타인 카이로를 중심으로 권력 찬탈의 드라마가 전개되어 왔다.
왕조시대를 시작으로 고대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그 후 아랍이 진입, 십자군이 쳐들어왔는가 하면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권력 쟁탈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간섭을 받았으며, 끊임없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카이로는 곳곳에 역사가 살아 숨쉬는 역사의 도시로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공존의 도시이다.
◆ 아기 예수 피난 성당 (St. Sergius Church) (마태 2,13-14)
아기 예수 피난교회는 요셉, 마리아와 아기예수 성가족이 헤롯왕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하던 중 머물던 성스러운 장소에 건축된 것이다.
이들은 요셉이 이 지역 요새에서 일하는 도중에 이곳에 살았을 것이다.
건축 당시 이 교회는 AD 303년 시리아에서 로마 황제 막시밀란(Maximilan)의 손에 순교 당한 성자이자 군인인 Sergius와 Bacchus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아직도 초기 콥틱 교회(이집트 원주민의 기독교 교회)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성가족과 연관되어서 성지로 알려지면서 이 곳을 찾는 신자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집트에는 전설적인 아기 예수 피난 성당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으며, 이곳의 마타리야 콥트정교회 성당도 그 중의 하나이다.
헤로데의 아기들 학살을 피하여, 아기 예수를 모시고 이집트로 긴 여행을 떠난 성모님과 요셉은 파견된 추격자를 피해 여기저기 숨어 다녔다고 한다.
이 마타리야 콥트 정교회 성당은 아기 예수 일행이 이집트에 올 때와 이스라엘로 갈 때에 두 차례 들렀다고 하는 곳에 세워져 있다.
정문 위쪽에는 라틴어로 '이집트 피난 중의 성가정'이라는 표지가 있다.
AD 303년의 로마 황제 맥시밀리안 때에 시리아의 알라사파에서 순교한 서지우스(Sergius)와 바쿠스(Bacchus)를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며, 매년 6월 1일에는 이들 성인의 축일을 지키고 있다. 길이 17m, 폭 15m, 높이 3m 의 현재 건물은
AD 10~11세기에 재건한 것이다.
이 교회의 위치는 예수님 일행이 1개월간 피난 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져 있으며, 이집트의 초대교회 구성원들이
비밀회합을 가지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집트 비잔틴 바실리카 양식으로서 넓은 회중석과 2개의 긴 복도(통로)를 가지고 있다.
대리석 기둥은 고대 건축물에서 가져와서 사용하였으며 원주 부분이 검게 그슬린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기둥 중의 화강암으로 된 다듬어지지 않은 돌은 가롯 유다를 지칭한다.
예수님 일행이 피난하였던 동굴(the Crypt)은 현재 물에 잠겨 있으며, 그 들어가는 입구는 예배당 맨 왼쪽의 성소 안에
위치하고 있다.
매년 6월 1일을 축일로 지키고 있다.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2:13 ~ 15)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마 2:19 ~ 21)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 생활
애굽 체류 기간은 일반적으로 3년 6개월 ~ 7년까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예수님은 헤롯이 보냈을 자객과 이방인들의 위협이라는 이중적인 어려움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만 하였다.
예수의 이집트 체류에 관한 성경 이야기는 이집트 곳곳에 스며 있다.
나일 삼각주(델타)와 나일 강변에 있는 수많은 유적지들은 가족들이 숨어서 쉬기도 하고 그들 스스로를 정결케 했던
장소들로 알려지고 있다.
이집트의 인기있는 여신인 이시스가 적으로부터 그의 자식을 보호한 이야기와 동정녀가 헤롯을 피해 예수와 도망한 이야기
사이의 유사성은 신성하게 여겨온 수많은 유적지들이 있기 때문에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고한 종교 사회는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이집트 인들은 훨씬 더 오랜 전통과 더불어 기독교와 맺은 친밀성 떄문에 기독교를 기꺼이 채택하기에 쉬웠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이집트 기독교의 현재의 특징을 알게 해준다.
◆ 피라미드 (Pyramid)
이집트의 상징이며 신비에 쌓인 피라미드는 현재 약 35개가 남아 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물인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국의 전성기인 기원전 2700년경에 만들어졌다.
피라미드의 가장 경이로운 점은 아마도 그 거대한 구조물의 방향일 것이다.
각 능선이 거의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 대 20세기의 건축물로도 따라갈 수 없는 정확성은
도저히 인간의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이다.
105m 높이의 '상승통로' 는 완벽한 배열에서 1㎝도 벗어나지 않은 놀라운 배열로 미루어 보아, 피라미드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고, 해시계이며 달력이고, 동시에 천문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피라미드 : 기제(Gizeh)의 피라미드
기제의 피라미드를 보지 않고는 이집트를 말하지 말라. 흔히 기제의 3대 피라미드를 보고 하는 말이다.
기제(Gizeh)는 카이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13km 가량 떨어져 변두리, 사막과의 경계에 홀연히 웅대한 피라미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쿠푸 왕의 것을 비롯하여 이곳 기제의 3대 피라미드는 약 4500년 전인 BC 26세기경에 건조 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까이 가보면 겉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 드러나 보이지만, 건축할 때에는 화장석으로 겉을 마무리해서 매끄럽게 되어 있으나,
풍화와 약탈 따위에 의해 표면 화장석이 벗겨져서 지금과 같아졌다.
◆ 스핑크스 (Sphinx)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기제의 스핑크스도 수많은 순례자와 여행자를 매료시켰다.
1735년 마예는 스핑크스를 '사자의 몸통, 여자의 머리'라고 생각하고 처녀와 사자가 한 몸을 이룬 12궁일지 모른다. 고 적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려진 스핑크스는 모두 모래 위에 불쑥 튀어나온 기념비적인 머리의 형태만이 묘사되어 있다.
스핑크스 중에 가장 오래되고 큰 것으로 유명한 것은 제 4왕조의 카푸라왕의 피라미드에 딸린 스핑크스이다.
이것은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조각한 것인데, 군데군데 보수되어 있다.
이 스핑크스는 지평선 상의 매 를 나타내고, 태양신의 상징이라고 한다.
스핑크스는 고대 동양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서 사람의 머리와 사자의 몸체를 가지고 있다.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이집트, 앗수르에서 볼 수 있다.
이 스핑크스의 전설은 여러 민족에 퍼져 있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것으로, 테베의 바이산 부근에 살면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 다리고,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내어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을 잡아먹었고, '사람'이라는 정답을 맞추자 스핑크스는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이 스핑크스의 크기는 높이 20미터, 길이는 80미터, 입의 폭이 2.5미터, 얼굴 높이가 4.5미터이다.
◆ 모세기념교회 (Ben Ezra Sinagogue)
이 곳은 모세가 물에서 건져진 곳이기도 하고, 모세가 광야로 나갈 때 기도한 곳이라고 하여 '모세기념회당'으로도 불리우고 있다.
오늘 겉모양은 흡사 회교사원과 같은데, 내부는 유대교 회당이다. 이집트와 이스라엘과 분쟁이 있을적마다
회교의 공격을 받아서 겉모양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이 회당 안의 대리석 건조물은 AD 12세기 때의 것으로 모세의 기도 장소를 상징하고 있다.
이 장소가 갖는 의미는 모세가 살았던 장소, 출애굽때에 이집트 델타 동남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출발장소로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43 ~ 47) 는 느부갓네살 왕 (BC 606 ~ 538) 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알무알라카 교회의 부속건물로서 AD 4세기에 지어져 AD 9세기까지는 미카엘 교회(성 미카엘교회) 또는
가브리엘 천사 교회로 불렸었다.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인 이븐 툴룬 왕조 (AD 868 ~ 905) 때인 이집트의 제 56대 교황 (주교)
미카일 3세 때 아흐메드 이븐 툴룬이 '이븐 툴룬 모스크' 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독교도들에게 금 2만 디나르의
고액의 세금을 부과하자 몇 개의 예배당을 매각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로 유대인들이 매입하여 회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알하킴 (AD 996 ~ 1021) 때에 다시 파괴 되었다.
AD 1115년 예루살렘에서 랍비 아브라함 벤 에즈라가 방문한 이후에 재건하였기 때문에 이 이름이 유래되었고,
당시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까닭에 아라베슼크 문양을 하고 있다. 이후 이 회당은 현대의 아랍, 이스라엘 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AD 1965년 까지 천여년 동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이집트 잔존 유대인들의 수는 100여명 정도이고 이들의 약간이 시내 중심지의 샤리아 아들리 (아들리가)에 있는 회당에서 모이고 있다.
이 회당이 다시 지어진 당시에는 주위에 29개의 사원과 20개의 예배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133,000명의 무슬림들과 10.000명의 콥틱 기독교인, 42명의 유대인들이 올드 카이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종교가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가족 공동체처럼 살았었다고 기록들은 말하고 있다.
이 자리에 세워졌던 최초의 회당 건설은 BC 350년경이며 당시의 이름은 선지자 예레미야 시나고그였다.
그러던 것이 BC 30년 경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아랍에 의해 로마의 통치자로부터 탈환된 이 지역에
콥틱 교회에서는 새로이 예배당을 지었던 것이다.
회당에는 AD 1890년에 발견된 퀘니자문서 (Geniza Document) 가 있다. 이 문서에는 AD 11 ~ 12 세기 당시의 유태인들의
생활상이 기록되어있다.
이 문서는 중세 이집트의 유대인의 문화를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학자 에스라가 발견한 모세의 토라 (기원전 475 ~ 6세기 경) 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회당 안에 있는 대리석 건조물은 AD 12세기 때의 것으로 모세의 기도 장소를 상징하고 있다.
이 건물 뒤의 계단을 내려가면 '메크바'로 불리는 900년 정도 괸 샘이 솟고 있다.
이 회당의 관리인은 '나단 아브라함 모이쉐 코헨'으로 1960년대 중반이 후 이곳에 머물고 있는 유태계 아랍인 이다.
이 장소가 갖는 의미는 모세가 살았던 장소, 출애굽때에 이집트 델타 동남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출발장소로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43장 ~ 47장 참조) 는 느부갓네살 왕 (BC 606 ~ 538) 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 (The Egyptian Museum)
이집트 5천 년의 역사를 집대성한 고고학 박물관으로, 수집의 충실도 는 세계의 어떤 박물관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집트 박물관은 카이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박물관은 1857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프랑스인 이집트 학자 오거스트 마리에트가 당시의 지배자 사이드 파샤에게
유언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박물관은 1층은 왕조 연대별로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고, 2층은 투탕카멘왕의 황금 마스크 및 왕의
묘에서 발굴된 매장품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문을 통과하면 정면에는 연못이 있고 상 이집트(지금의 카이로 지역)의 상징인 파피루스와 하
이집트(지중해 룩소르 지역)를 대표하는 로터스가 심어져 있어 상 하 이집트, 즉 전 이집트를 나타 내고 있다.
◆ 모하메드 알리 모스크
2개의 높은 첨탑과 거대한 돔이 시선을 끄는게 특징이며, 다량의 석고가 건축에 쓰였기 때문에 '앨러배스터 모스크' 라고도 부른다.
모스크 외곽의 위로 나서면 카이로 시가에서부터 나일 강, 그리고 기제의 피라미드까지 보이는 웅대한 조망이 펼쳐진다.
◆ 초기 그리스도 교회
올드 카이로에는 콥트 시대의 옛 교회들이 여럿 남아 있는데, 이들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건립된 것과,
10세기에 재건된 성 기르기스교회, 성바르바라 교회, 성조지 교회, 알무알라가 교회 등이다.
◆ 콥트 박물관
시마이카 파샤의 개인 컬렉션을 1910년에 공개한 것이 이 박물관의 시초인데, 1933년부터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전시품은 4~11세기 이집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것으로서, 고대 왕조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며,
콥트교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일파로서, 그리스 정교회에 속한다.
■ 카이로 구시가 (Old Cairo)
이집트 기독교의 그 오랜 흔적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올드 카이로 (Old Cairo : 마스를 아디이마) 이다.
이곳에는 1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이집트 고대 초대교회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 지역은 당시에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구별된 장소였었다.
심지어는 무슬림이 다수가 된 시대에도 수만명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밀집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들 교회에서는 매주 수,금, 주일 오전 9시 ~ 12시 사이에는 전체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올드 카이로의 모든 콥틱 건축물들은 코린트 양식과 바실리카 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움마이야드 왕조 (시리아에 기반을 둠 : AD 750) 때에 칼리프 마라완 이븐 무함마드가 그의 적인 압바스 왕조 (이라크에 중심을 둠 : AD 750 ~868,
이 시기는 콥틱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기독교인들이 빈번하게 폭동을 일으킴)에 패배한 다음에 750년 도성 알푸스타트
전 지역 (지금의 올드 카이로)이 소실되었다.
이후 AD 1168년 11월 에는 예루살렘 왕 아말릭 1세에 저항하면서 이 지역을 파괴하였다.
■ 바벨론 성채
최초의 건축은 아마도 이집트의 26왕조의 느고왕(기원전 605~593년)이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세워 졌고, 여기에 AD 98년에 로마의 트라얀 황제가 비잔틴 양식을 덧붙여 개축하였다.
돌과 벽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은 지극히 로마식이다. AD 395년 아르카디우스가 재건한 나일강 위의 성채이다.
망대 사이의 입구는 수문이며, 발굴의 결과 현재의 지표면보다 6m가 낮은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지역 (현지명 : old cairo)을 아주 오래 전부터 바벨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가?
이와 관련한 설들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13세기 초 람세스 2세 (BC 1290 ~ 1224) 에게 붙잡혀 왔던 페르시아인 들이 람세스 2세를 대항하여
멤피스 방향의 하빈 시타델을 점령하고 항전하자 람세스 2세가 이들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한 다음에
이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고국의 수도를 그리워 하며 '바벨론'이라 이름지었다.
이것은 마치 미국의 차이나타운, 코리아 타운이 형성되는 것과도 흡사하다.
26왕조의 느고 2세가 (BC 609 ~593)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이 시작하여 27왕조 (페르시아 왕조 : BC 525 ~ 338)를 거쳐 다이우스 1세때 완성되었다.
이 수로공사를 위하여 바빌로니아의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잡혀온 이들이 그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름을 바벨론이라고 불렀다.
Bab Li On : The Gate to On 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고대 이집트의 이름이거나, '헬리오폴리스(온)에 있는 '하피 신의 처소' 라는 옛말이다.
페르시아의 황제 캄비시스 (Cambyses : BC 525 ~ 521)에 의해서 세워 졌다.
※ 3 종류의 바벨론 : 현재의 이라크 지역의 바벨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벨론, 우상의 도시로 언급되는 로마의 바벨론,
이집트 구 카이로 (Old Cairo)가 그것이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러하니라 (벧전 5:13)
■ 여행상식
[관광제안]
카이로의 많은 문화시설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집트 (국립)박물관,이슬람 미술박물관,국립도서관이며,
그밖에 많은 사원과 바자(bazaar 市場)가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들과 새로 지은 시멘트 건축물은 신구의 조화를 이루어 마치 다를 세대를 사는 듯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공항안내]
카이로 국제공항에는 2개의 터미날이 있다터미날1은 국적기인 이집트 항공사및 이스라엘/중동/아프리카 지역 취항 항공사.
터미날2는 대한항공을 포함 기타 항공사 전용 터미날. (터미날 1과 2의 거리는 약 2Km,셔틀버스 미운행으로
이동이 상당히 어려우므로 공항 출 발전 터미날 확인을 반드시 한다.)
터미널,취항하는 항공사도착하는 곳과 출발하는 곳이 같은 층에 있다.
공항내의 주요시설 은행, 우체국, 식당, 커피숍, 경찰, 수하물 위탁소, 주차장, 안내소(INFORMATION COUNTER) 면세점,
토산품점, VIP ROOM
[택시]
영어를 아는 운전수가 많으므로, 미리 요금을 흥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가지를 쓴다.
미터기는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시내에는 빈 택시가 적으므로 나일 힐튼등 고급호텔 주변의 관광택시를 시간당 얼마로 정해 이용하는 것이 좋다.
[여행상식]
▣ 한국과는 달리 관광지에서도 화장지를 갖추어 놓지 않은 화장실이 있기 때문에, 화장지를 가지고 가던지 아니면
고급호텔을 이용하는 편이 좋다.
▣ 이슬람력의 아홉번째 달은 라마단이라고 불리는 단식의 달이다.
이 달에는 30일동안 해질 때 까지 물도 마시지도 않고 아무 것도 먹지 않는다.
이 기간 중에는 3성급 이상의 호텔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레스토랑이 영업을 하지만,
시중의 레스토랑,카페는 문을 닫아 버려 거리가 조용하다. 해가져야 그들은 첫 식사를 한다.
▣ 이집트의 카이로 하면 무엇보다 고도로 발달된 건축물이 유명하다.
건축구조에 대한 상식을 알고 여행을 한다면 더 큰 여행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카이로의 건축은 고대 이집트,로마,중세의 아라비아와 터키,그리고 보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어우러져 풍부하고 다양하다.
멤피스 근처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이 대도시의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카이로에는 등록된 사적이 400개가 넘어 아프리카나 중동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모두가 130년부터 19세기초 사이에 건립된 것들이다.
[즐길거리]
카이로의 가장 오래된 3개 지구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슬럼가가 되었으며, 이 슬럼가들은 서구화된 중핵지대를
에워싸고 있다.
이 3개 지구 가운데 가장 큰 지구는 파티미드 시로, 이곳에는 바이바르스 1세 사원과 살라딘의 성채를 비롯한
역사적인 건물이 많다.
현대화된 도심지(알아즈바키야)와 도심지 근처의 우아한 상업, 주택 지구들은 빈민지역들과 매우 심한 대조를 보인다.
가장 큰 길인 알쿠르니시 중앙로는 강과 평행으로 뻗어 있으며,길 양쪽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나일 강에 있는 섬들인 앗자말리크와 알루다는 주로 주택과 휴양을 위한 구역이다.
중하류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는 구역의 남쪽에는 '사자(死者)의 도시'로 알려진 지대가 있다.
초기 종교지도자들의 절묘한 성골(聖骨) 사원과 영묘들이 있어 사자의 도시로 불리는 이곳에 카이로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밀집해서 모여 사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주택난을 알 수 있다.
몇몇 관광버스사가 오전,오후 관광코스를 마련해놓고 있으나 시내의 주요 관광에는 리무진이 최적이다.
주요 호텔 앞에서 탈 수 있고, 요금이 정해져 있으며 운전수 영어가능하다.
차는 벤츠, 자유 행동가능 등의 이유로 권할만 하다.
오전중에 기자의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견학하고 오후에는 이집트 박물관을 방문한 후,함하리리나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면
좋다.
밤에는 기자에서 소리와 빛의 쇼를 즐기는 코스는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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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이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