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한 두병이 아닌 박스로 쟁여 놓기 시작한것은 십오년전 쯤이었다. 우리가 살았던 동네는 작은 와이너리가 몇개씩이나 있는 그야말로 와인 익는 마을이었다 크리스마스철이 다가오면 각 와이너리들이 동네신문에 특별광고를 내고 그러면 기다렸다는듯 독일사람들은 일년 먹을치의 와인을 사러 와이너리로 모여들곤 했는데 꽤 먼곳에서도 사러올 정도로 와인애호가들에게는 이름이 난 동네였다. 시음을 겸한 와인판매는 주로 와인농부들의 일과가 끝난 주말저녁시간대로 조용한 동네의 주말저녁 와이너리앞 주차장은 언제나 와인박스를 실어담는 차량들로 북적이는 풍경이었다. 어느 겨울주말저녁 드디어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고 첫와인시음의 강렬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안면식정도 밖에 없던 와이너리주인의 환대와 함께 말로만 듣던 와인시음 말이 시음이지 종류별로 한잔 그득씩이었다. 자기가 생산한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한 주인이 줄줄이 와인병을 세워놓고 한 잔씩 따라주며 설명을 해주고는 우리의 품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와인 문외한이 정통한 와인맛을 알리가 있나 와인맛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영감이 할수 있는 말이라곤 마시는 족족 하루키식으로 "음 바로 이맛이야" 할 뿐이었다. 시음용이라고 먹다 남은것을 주는게 아니라 어떤것들은 병을 새로 따기도 하는데 미안한 마음에 한박스 맛있어서 한박스,주인장추천으로 한박스 주문서는 점점 길어지고 볼펜을 쥔 손아귀에 힘은 점점 빠지고 그해 연말 가뜩이나 돈 쓸일 많은 연말에 더 쪼들리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다른건 몰라도 독일사람들의 와인인심은 아주 후하다. 인색하고 과묵하기로 소문난 독일사람들이 (이런 일반화에 개인적으로는 절대 동의를 하지 않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서는 자랑을 아끼지 않으며 친절한 설명과 함께 술잔 권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것이다. 대부분 단골와이너리에서 일년 먹을 와인들을 지하창고에 저장해 놓고 마시는데 펠스 영감님네, 벤트케스씨네, 비르깃네도 그랬다. 각기 즐겨 마시는 하우스와인들이 있어서 와인이 맛있다고 하면 와인취향이 비슷한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맛보기용으로 몇병씩이나 안겨준다는것이다. 그 중 벤트케스씨부인은 손이 가장 큰 편으로 무려 박스째 안기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기들이 가는 와이너리를 소개 또는 동행을 자처하면서 와인종류별로 몇년도산이 좋다는 친절하게 팁까지 알려주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와인이라고 하면 리슬링이라는 화이트와인만 알려져 있지만 레드와인으로는 트롤링어Trollinger, 화이트와인은 케르너 Kerner, 뮐러 투르가우가 남부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는 포도품종이다. K 선생님에게서 들은 와인이야기 K선생님도 지하실에 유서깊은 와인저장고를 두고 계시는데 물욕 없으신 K 선생님도 매일 마시는 하우스와인에다 와인에는 욕심이 나신다며 이태리나 프랑스등지의 휴가지에서 가져온 좋은 와인들을 가득 저장해놓고 계셨다. 아 그때 남편의 표정이란 무슨 보물창고에라도 들어온 듯 남편의 부러운 눈빛이 와인저장고를 구석구석 훑고 있었다. "키안티 와인 이야기 들어봤소?" 검은 닭 로고가 그려진 오래된 와인병을 꺼내 들며 K 선생님이 이야기해주셨다. 옛날 지금의 이태리 토스카나 지역인 시에나 공국과 플로렌츠 공국사이에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자 해결책으로 새벽첫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것을 신호로 서로 말을 달려와 만나는 자리가 국경이 되도록 약속을 했다고 한다. 시에나에서는 새벽에 잘 울어대라고 하얀 닭에 살이 피둥피둥 오르도록 열심히 먹이를 줘댔고 플로렌츠에서는 검은 닭에게 반대로 먹이를 제대로 주지 않아 골골 마른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오자 플로렌츠의 굶주린 검은 닭이 새벽 일찍 꼬끼오 배가 고파 울어대니 기다렸다는듯 플로렌츠의 기마병이 출발한 반면 시에나의 배부른 암탉은 꼬끼오 울 기미를 안 보였다는것 플로렌츠가 훨씬 더 많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 영웅이 된 검은 닭 Gallo Nero를 그 지역에서 나오는 와인에다 붙혀 업적을 기리게 되었다는 전설이... 재미있는 이야기와 함께 K 선생님이 검은 닭 로고가 박힌 좋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인병을 우리 손에 꼭 쥐어주셨음은 물론이다. 오골계 와인이잔나 ㅋ 지난해 삼월 집정리를 하러 갔을때였다. 영감과 둘이서 동네 이태리식당을 들렀더랬다. 아덜놈들 없이 둘이서만 이 식당에 가는일도 처음이었다. 일을 처리해 놓고 헛헛한 마음을 안고 밤거리를 타박타박 걸어내려가 방문했던 이태리식당 먹은 음식은 기억에 없고 마신 와인은 기억에 남아있다. 오늘은 우리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니 특별한 와인을 추천해주면 좋겠다고 청을 넣자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를 닮은 셰프가 두번이나 함께 시음끝에 자랑스럽게 추천해준 와인이다. 특히 영감이 감탄으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는데 얼마나 이 맛을 잊지 못했는지 몇달뒤 다시 독일에 갈 일이 생겼을때 이 와인부터 수소문해서 호텔방에 챙겨두었다 들고 오기도 했다. 요즘식대로 표현하면 인생와인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ㅎ 그리고 좋은 와인이 생기면 꼭 기별을 주시는 S 선생님내외를 떠오르지 않을수가 없다. 이분들은 화이트와인을 즐겨 마시는데 조금 멀리 떨어진 프랑스 국경근처의 와이너리의 것이었다. 이 분들의 초대가 은근히 기다려지는 이유는 또 있는데 와인을 사러 가셨다가는 독일에서는 귀한 대서양굴이나 새우를 국경너머 프랑스수퍼까지 가서 사가지고 오신다는것 그 분들이 차려주신 환상적인 와인상을 어찌 잊을수 있을까 바덴지방의 화이트와인과 레몬을 짜서 뿌려먹는 대서양굴 굴껍질이 수북히 쌓일수록 빈 와인병이 줄줄이 늘어났음은 당연하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양손엔 와인이, 내손엔 귀한 식자재들이 들려 있었다. 게랑드소금, 각종허브들,프랑스과자 등등 선물하기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씀씀이 소복이 담겨있다. 사진들은 인생와인을 발견한 날이 아닌 아덜놈들과 셋이서만 갔던 늦봄 찍은 사진들이다. "엄마 와인 시켜 우리가 골라줄까" 식당에서 잔으로 파는 와인들은 와인가게의 좋은 와인 한병값고 맞 먹을 정도로 비싸 주저하고 있는 꼴이 아덜놈눈에는 안스런 모양이다. 아 사진속 건너편 아덜놈들의 낯익은 옷자락이 보인다 나는 어쩌자고 그날의 풍경들이 마치 어제 다녀온것처럼 생생할까.... 다른건 몰라도 집에 와인 떨어지는것을 무엇보다도 애석해 하는 영감덕에 여기와서는 멀리 의왕에 있는 와인가게까지 다녀오기도 했다. 갈때마다 교통체증에 걸리고 와인사러가는 일 또한 한국에서의 다른 많은 일상들처럼 몹시 피곤한 일이 되어버려 이제는 가까운 마트에서 해결하고 만다. 그것도 손님접대용으로나 게다가 가격은 또 얼마나 비싼지 소비자가는 수입원가의 무려 열배가 넘는다는 기사 와인 좋아하는 L네도 와인을 끊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고 했다. 지금 그 곳은 와인포도 새순이 막 돋아날수도 있겠다. 독수리 로고가 그려진 와이너리주인의 하얀 승합차는 이른 아침이면 얼마나 또 부지런히 포도밭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을까 포도밭가운데 수선화 튜울립들도 한창이겠다. |
출처: 빈티지 매니아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빈티지 매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