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천공의 하늘아래 갓바위 부처님 기도처엔 돌부처 갓바위 부처님은 없었다. 4층 빌딩
높이의 키가 크고 잘 생긴 중후한 비구스님 한 분이 바로 그 자리에 무쇠 육환장을 짚고 장엄하게
서 계셨다.
7부까지 닿는 회색 장삼 법의에 짙은 밤색 가사를 수하신 스님. 그분이 그대로 갓바위 부처님이
라는 것을 알았다.
기도처엔 아무도 없고 오직 나 홀로 기도하던 곳에 당신을 향해 서 있었다. 그렇게 중후하고 장엄
하신 큰스님은 손가락으로 갓바위 부처님이 앉았던 바로 그 돌 벽에 당신의 손가락을 하나 찔렀
다. 수도 꼭지정도의 구멍이 났는데 맑은 물이 펑펑 나왔다. 큰스님의 “얘야 이 물을 마셔라”는
자애로운 목소리에 너무나 행복하고 기뻐했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오는 새벽 도량석 목탁소리에 잠을 깨었다. 잠깐 동안 구만리 꿈 속에서
나와 똑같이 말하고 살아계신 갓바위 부처님을 아버지처럼 만났구나! 깨어보니 머리는 맑고 몸
이 새털처럼 가벼웠다. 꿈얘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새벽예불 후 기도회향을 하고 창녕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오지 않는 원룸에서 호랑이굴에 있는
것처럼 웅크리고 날마다 들어오는 신문으로 하루를 나고, 죽을 용기가 없어서 <금강경>에 오로
지 의지할 뿐이었다.
겨울방학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 생계수단까지 걱정해야만 했다. 살고 싶은 의욕이 머리카락
한올 무게보다도 없었다.
썰렁하고 힘겨운 1998년 겨울을 보내고 99년 1월. 신문에 서울 모 영어교육회사에서 전국대도시
학습지 사업부 지국장 모집 광고가 났다. 부산 총괄지국장으로 응시를 했다. 서류와 시험, 면접을
통과하는데 한 달 넘게 소요되었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학교에서 출강해 달라고 연락이 왔으나
거절했다. 자살할 용기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살리라 마음먹은 후 고향 땅을 등지고 긴 기다림끝
에 그곳의 합격통지서와 함께 팀장급으로 연수생활을 원만히 마쳤다. 서울과 울산, 그리고 나의
목적지인 부산지역 국장으로 인사이동이 있었다. 새로운 지역조직 경영자로서의 무대가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99년 늦은 봄이 지나고도 하혈이 계속되었다. 서울 본사에 병가를 내고 부산에 함께 일하
는 직원들에게 업무지시를 내리고 병원에 입원수술을 하기위해 창원 동네 아파트 인근 산부인과
에 갔다. 병원장은 대학교 선배였으며 나의 병명과 기록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검사를 하고나자 병원장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등에 사마귀 떨어져 나간 자리처럼 흔
적만 있고 근육종양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그랬다. “아, 참 희한한 일이네, 희한한 일이야” 라고
말하며. 제 1과부터 5 과장까지 다 모여 ‘완치와 이상없음’으로 결론내렸다. 그럼 왜 이다지도 아
랫배가 아프고 출혈이 있었는가는 정상적인 성인이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면 괜찮으나 호르몬
밸런스에 균형이 깨어졌기에 출혈이 있었고 배가 아팠을 뿐 종양은 감쪽같이 사려졌노라고. 한
달 동안 호르몬 제제를 이렇게 저렇게 먹으라고 조언을 했다. 수술하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왔는
데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의심하는 자신이 싫었다. 수술하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 시한폭
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파티마 주치의는 신기한 일이라고 하면서 자궁내막의 근육종양은 사
라졌고 부위는 깨끗하며, 이런 일이 거의 없는 일이라고 기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호르몬 불균형
으로 오는 현상이므로 호르몬 제제를 먹도록 권유하며 주사만 맞고 기분좋게 돌아왔다.
두 번 다시 병원에 가지 않겠노라고 결심한 뒤였는데, 이럴 수가. 정말 내게 팔공산 갓바위 부처
님이 그날 나의 기도에 감응하셨구나.
기도처에서 스님의 손가락으로 바위틈에서 나온 맑고 맛있는 물이 바로 나의 약물이었다는 신기
함에 몸을 떨었다. 아 이럴수가! 세상에 이런 기적이 있구나. 나도 모르게 나의 몸에서 완전한 병
의 치유가 일어난 것이다. 은행 부채가 너무나 괴로워 죽는 것이 더 행복하고 화평할 것 같았던
아픔의 기도가 팔공산 약사여래불 부처님께서 돈보다, 물질보다, 생명력이 우선이라고 나에게
생명력을 부여해 주셨구나. 한참을 가슴벅찬 기쁨으로 순수의 노래가 되어 눈물이 방울방울 떨
어졌다. 삶에 대한 회한의 눈물을 쓸어내리고 어느새 얼굴은 투명하게 밝아졌고 눈동자는 자신
감으로 빛났다.
그 이후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건강해져 산부인과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힘든 영어학원 근무를
접고 창원에 있는 대학에서 외국어를 강의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들이기에 제불 보살
님의 찬탄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수강생들에게는 영어의 국제적인 비전뿐만 아니라 맑고 향기
로운 선재동자의 <화엄경>을 이야기하곤 한다.
그 때의 어려운 시련이 지금껏 기도 생활의 연속이고 삶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사람살이
가 순간순간 안정되어 화평하고 순수하고 여여했다. 아침마다 올리는 예불과 다라니 300독, 기도
를 마치고 학교로 향하는 과정이 행복 그 자체였다.
창녕을 떠난지 어느덧 10년.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세상 속에 빚진 것 다 청산하고 이제는 옛터
에 돌아와 날마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행복이란 아등바등하는 사람에게는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을 편안하게 안정시키면 더 크게 다가오는 것도 알았다. 참으
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부귀를 원한다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숱한 날의 회한의 눈물과 참회의 통곡과 절실할 수밖에 없었던 간절한 하심으로 깨닫게 된 교훈
이었다. 삶이란 인생학교에서 우등생의 공부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부곡 국립병원에 있는 약제과의 법우는 정신병자의 최고의 명약은 ‘안정’이라고 말하곤 했다. 호
흡하고 있는 순간순간에도 참회하고 발원하면서 궁극엔 나 자신도 선재동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기에.
관세음보살님께 두손 곱게 모우고 합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