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水湖誌) - 70
제7장 청풍산의 두령들
제31편 번갯불 진명 31-3
진명이 분명한 어조로 말하자 화영이 그를 붙들고 말했다.“총관의 마음 잘 알았소.
이제 연회가 끝나면 군복과 무기들을 돌려드리겠으니 그리 아십시오.”
진명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 날 그는 갑옷과 투구와 말과 빼앗겼던 낭아봉을 받아들고 바쁘게 산에서 내려갔다.
청풍산을 떠나 청주를 향해 10리 길을 달려가니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연기가
자욱하며 인적이 끊기고 없었다.그는 괴이한 생각이 들었다.
청주성 가까이에는 본래 가옥이 수백 호가 있었다.이윽고 성문에 도착했으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루에는 조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성 위에는 군사들이 깃발을 들고 있었다.
나무토막과 돌들이 가득히 쌓여 한바탕의 격전을 치른 싸움터의 형상 그대로였다.
“어서 적교를 내리고 문을 열어라.”그때 성 위에서북소리가 나면서 와아 하는
함성이 들였다.“진총관이다. 어서 문을 열라.”그가 크게 외치자 성 위에서 모용부윤이
나타났다.“이 도적놈아.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네놈이 간밤에 도적떼를 몰고 와서
성을 치고, 수천 명의 죄 없는 백성을 죽이고, 수백 호의 인가에 불을 질러 태우고도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문을 열라고 하느냐. 네놈은 천만 번 도륙을 내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진명은 모용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공조, 그게 웬 말씀이오?
나는 도적을 치러 갔다가 군사를 잃고 산채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제야 겨우 산에서
탈출하여 도망쳐 내려온 것이오. 간밤에 내가 성을 치다니 그게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까?”“이놈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이 바로 그 말을 타고 그 투구와 갑옷에
낭아봉을 들고, 도적들을 지휘하여 성을 치고 불을 지르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네가 이제 네 가족들 생각이 나서 그 따위 수작을 부리는 모양인데,
내가 네 처자와 권속들을 그대로 두었을 것 같으냐! 자아, 자세히 보아라.”
이어 군사들이 진명의 처자와 가족들의 머리를 창끝에 꿰어 내보였다.
진명은 끔찍한 광경에 눈앞이 캄캄하고 기가 막혀 가슴이 미어졌다.
그순간 성 위에서 화살이 빗발지듯 날아왔다.진명은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눈앞에 보이는 빈 벌판에서는 붉은 불길과 검은 연기가 아직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지경을 당하고 내가 더 살아서 무엇 하랴.’진명은 죽을 곳을 찾아 와력장을 지났다.
그때 숲속에서 군마들이 달려 나왔다.앞장선 사람은 송강, 화영, 연순, 왕영, 정천수였다.
송강이 진명에게 물었다.]“총관은 어찌하여 청주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방황하십니까?”
진명은 노기가 등등하여 말했다.“천하에 용납 못 할 어떤 도적놈이 내 모습으로 변장하고,
간밤에 청주성을 들이치고, 인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죽여서 내 가족들도 몰살당했소.
이제 하늘에도 길이 없고 땅속에도 문이 없는 신세요. 만약에 그놈을 만나면
이 낭아봉으로 가루로 만들어 버리겠소.”송강이 위로한다.“총관, 부디 고정하시오.
부인이 돌아가셨다니 내가 좋은 규수를 찾아보겠소. 어서 산으로 올라갑시다.”
진명은 갈 곳 없는 몸이 되어 그들을 따라 산채로 갔다.
어느 틈에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다.취의청에 오르자 진명을 중간 교의에 앉히고
송강을 비롯한 다섯 두령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엎드렸다.
송강이 입을 열었다.“어제 저희가 총관을 산채에 머물러 계시게 하려고 말씀을 올렸으나
총관께서 끝끝내 듣지 않으시기에 하는 수 없이 우리 졸개 놈 가운데 총관의 몸체와
비슷한 자를 뽑아 총관의 갑옷투구를 씌우고 낭아봉을 들려 총관의 말을 타고
졸개들을 거느리고 바로 청주성으로 가서 치게 하였소.
사람을 죽이고 불을 놓은 것도 총관 때문이었소. 이제 우리가 총관 앞에 죄를
청하는 것이오.“진명은 한동안 말을 못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나를 붙잡아두려는 호의는 잘 알겠지만 계교가 참으로 지독하시오.
그로 인해 내 처자와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지 않았소?”
“그러나 총관, 그렇게 안 했으면 어떻게 우리가 총관을 얻겠소. 이번에 부인을 잃으셨지만
마침 우리 산채에 재색을 겸비한 매씨가 한 분 있으니 제가 중매를 서겠소.
어서 마음을 푸시오.”“
- 71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