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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4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루카 14,12-14
믿음이 있다면 선행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갚을 수 없으므로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보답할 수 없다면 당신께서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잘한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고는 배기지 않습니다.
선행이 알려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칭찬받지 못했다면 부모는 10배로 더 칭찬해 줍니다.
우리가 선행을 숨겨야 하는 이유가 이와 같은 원리입니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자선 활동은 그의 거대한 부와 성공에서 비롯된 ‘책임감 있는 부의 사용’이라는 원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9세기 미국 철강산업을 이끌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는 결국 역사상 가장 큰 자선 활동 중 하나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평생의 재산을 교육, 예술, 도서관 건립, 과학 연구 등에 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자선 활동으로는 미국 전역에 약 2,500개의 공공 도서관을 설립한 것과 카네기 멜런 대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을 세운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자선 활동이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남기기 위한 수단이었음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물과 기관을 설립하며 이를 통해 스스로를 기억되게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카네기 홀(Carengie Hall), 카네기 재단 등의 이름에서 보듯이 그의 자선 사업은
자신의 이름을 영구히 남기려는 목적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카네기의 자선 활동은 한편으로 그가 축적한 부의 이면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네기는 대규모 철강 회사인 카네기 스틸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을 극도로 착취했습니다.
그가 철강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는데, 그는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과 긴 노동 시간을 강요하며, 심지어 무력으로 파업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그가 쌓은 부가 진정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자선으로 환원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수십억 달러를 기부했지만, 그의 자선 활동은 여전히 자기 명성 추구와 도덕적 갈등이라는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그는 ‘영웅적인 자선가’와 ‘냉혹한 자본가’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한 기업가들이 제일 존경하는 롤모델로 꼽을 때 앤드류 카네기보다는 찰스 피니(Charles ‘Chuck’ Feeney)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자신들이 기부하게 된 롤모델로 주저 없이 척 피니를 듭니다.
피니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서 가난하게 자랐으며, 그의 삶과
자선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병원 간호사로,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고 항상 남을 돕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은 어린 피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자신의 부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신념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남을 도울 때 가톨릭 신자답게
자신이 한 행동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어린 피니가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참다운 선행은 드러내는 게 아니야. 그러면 상대가 부담스러워하잖아.”
피니는 성인이 된 후 듀티 프리 쇼퍼스 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을 공동 창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를 과시하지 않고, 철저히 검소한 삶을 살며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기(Giving While Living)’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재산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돕는 데 사용하기 위해 1982년 애틀랜틱 필랜스로피스(The Atlantic Philanthropies)를 설립하고, 교육, 과학, 의료 분야에 약 8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피니의 기부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졌고, 1997년 우연히 나라에서 감사받게 되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집과 차도 없었습니다.
집도 임대 주택이었으며 시계도 2만 원짜리, 비행기도 이코노미석만 탔습니다.
그가 이렇게 살면서 행복했을까요? 피니는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다면 불행하다.”라고 말하며, 타인을 돕는 것이 자신의 행복의 원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기부하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럽고 재미있는 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굳이 자선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일부러라도 드러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어머니가 보고 계시고 하느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플 때 부모는 그 아픈 자녀에게 더 마음이 갑니다.
하느님도 보상받지 못한 선행에 대해 직접 당신이 나서서 성령을 주십니다.
이 맛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선행을 알림으로써 성령의 보상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됨을 택할 수 있겠습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같이 식사합시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 어린 시절 걸인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 다리 밑 같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깡통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밥 좀 주이소!’라고 외쳤습니다.
재수가 좋아 마음씨 좋은 마나님을 만나면 밥과 반찬을 좀 얻어서 대충 요기를 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가장 기쁜 날은 혼례 날이나 회갑, 칠순 잔칫날이나 아니면 상이 난 날이었습니다.
그런 날 잔치의 주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이나 걸인들에게도 넉넉한 한 상을 차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인들은 나름 달력을 하나 만들어 이 마을 저 마을 잔칫날을 미리 메모해서 허기를 달래곤 했습니다.
식사 한끼 함께 나눈다는 것, 별것 아닌 듯 하지만 엄청난 위미를 지닙니다.
식사를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주로 가족들과 함께 합니다.
살짝 범위를 넓히면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과 마음 편히 하는 것이 식사입니다.
유다 전통 안에서 식사(食事)에는 아주 큰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잔치나 축제 때에는 ‘ㄷ’자 모양의 식탁이 준비되었고, 3면에는 의자가 놓였습니다.
비어있는 공간으로는 종들이 드나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포크나 나이프같은 식사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음식을 먹었기에, 식사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었습니다.
식사 전후 기도는 필수였습니다.
별도의 개인 접시는 준비되지 않고, 큰 그릇에 빵이나 요리가 담겨나오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스프나 국은 빵에 적셔 먹었습니다.
잔치집에서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한다는 것은 큰 친밀함과 친교의 표현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잔치상에 이왕이면 귀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14장 13~14절)
사실 과거 유다인들에게 있어 장애인들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될 비상식적이고 비인간적인 규정으로 인해, 당시 장애인들이 받았던 싱처와 고통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공식적인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지체장애인들은 꿈란 공동체에 편입될 수 없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청각장애인들은 성전에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일이 금지되었습니다.
초세기 교회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바오로 사도께서 크게 분노하신 흔적이 서간 안에 남아있습니다.
코린토 교회 신자들의 경우, 만찬 식탁에서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벌어졌습니다.
폭식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굶주린 채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이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코린토 전서 11장 20~22절)
잔치집 식탁에서 벌어지던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께서는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초대를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사심없는 봉사를 실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모든 것을 주면서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을 베풀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 사심없는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큰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라는 은혜로운 선물이 상급으로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피안(彼岸)에서의 보상을 기대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시선이 부단히 이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 고정시키라고 당부하십니다.
지상의 권세는 하느님의 때가 오면 약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반대로 지상에서의 약함은 하느님의 때가 오면 그분의 힘에 의해 큰 권능으로 바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나약하고 부족해보이는 사람들이 내적, 영적으로는 하느님 앞에 훨씬 부유한 능력자 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을 강하게 해주시고, 신앙의 빛은 그들에게 참 지혜를 선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운영하는 피정 센터가 가장 환대하고 극진히 모셔야 할 첫 번째 VIP 손님들은 과연 어떤 분들이어야 하나?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1. 4. 월)(루카 14,12-1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편 가르기와 차별 대우는 ‘큰 죄’입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ㄴ-14).”
1)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마태 5,46-47)”
참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은 편 가르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도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편 가르기’ 라는 문제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신자들을 엄하게 꾸짖은 일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에 분파도 있어야 참된 이들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한데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2).”
부자들끼리만 어울려서 배불리 먹고, 가난한 이들은 배고픈 상태로 소외된다면, 그것은 공동체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거스르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들‘만’ 부르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보답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베풀지 마라. 보답을 받을 생각으로 베풀지 마라.”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는, 그들‘도’ 초대하라는 뜻입니다.
굳이 순서를 따진다면, “소외계층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여라.”, 또는 “함께 초대하여라.”입니다.
<‘나중에’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부유한 이웃들과 가난한 이웃들을 ‘함께’ 초대해서, 나의 집에서 그들이 모두 함께 어울리고, 함께 기뻐하게 된다면?
그러면 ‘하느님 나라의 기쁨’이 나의 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는 부유한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어떤 차별이나 소외 같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3)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는, “그들은 너에게 보답할 수 없겠지만, 너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소외계층 사람들을 초대한 일은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 ‘의로운 일’을 실행한 사람들은 의인들이고,
의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일 하나만으로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고, 진짜 의인이라면 평소에 늘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사랑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고 실천하기’입니다.
내가 차별을 당하고 소외당하는 입장에 있다면?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한 마음과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의 모습인가?
베푸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형식적으로 조금 하고 나서, 자기들은 사랑 실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뿌듯해하면서 자아도취에 빠지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