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의 컵*
버진로드를 행진하던 날
흘러내리는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지난 일을 고해하지 못했지
물구나무를 서면 감추고 있던 내가 쏟아질 것 같아
관계를 오염시키는 유리의 투명한 척하는 자세와
담아두기만 하는 대화는
명백한 나의 과오지만 애써 숨기려 하는 이유는
무덤이 되기도 하고
모자가 되기도 하는 받침의 이중생활에 대해
내성이 생겨서일 거야
수납장을 열면
마주보고 있는 컵들
어떤 모양으로 담겨야할지 망설이던 나는
아무데나 잘 담기는 거짓말을 따르다가 엎지르곤 했어
항상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투명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겠지
온갖 비밀이 쏟아질까 봐
물구나무 자세는 사절
그러니까 끝까지 감추려면
부르카를 벗을 수가 없는 거지
*컵과 사람의 옆모습을 이용해서 착시효과를 표현한 루빈의 그림
—계간 《시와사람》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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