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나들이는 한때다. 그 한때는 한곳과 짝을 이룬다. 예컨대 산수유는 전남구례 산동면, 매화는 전남 광양 다압면이다. 해서 구례와 광양은 이맘때면 인파로 북적인다.
당연히, 산수유와 매화는 구례와 광양에서만 피지 않는다. 그곳에서 약간만 벗어나도 느긋한 꽃 구경을 할 수 있다. 전북 남원 외용궁마을(산수유)과 경남 하동 먹점마을(매화)이 그렇다.
딱 하나만 포기하면 된다. '이름난 관광지'를 찾고 싶은 갈망이다. 정말 한때뿐인 '봄꽃 나들이'를 위해, 올해는 조금만 눈을 돌려보자.
전북 남원시 주천면, 지리산 구룡계곡 입구에 웅크린 마을은 넉넉히 한 시간이면 돌 정도로 작았다. 작되, 마을을 감싸며 둥글게 잇는 고샅길은 조용히 변하는 풍경으로 자꾸만 발걸음을 잡았다. 출발지는 300년 된 느티나무 옆 용궁정. 왼쪽으로 자생하는 대나무와 사람이 키운 소나무를 끼고 돌면 기왓장을 얹은 돌담을 마주친다. 돌의 형상을 지울 만큼 돌담을 뒤덮은 이끼와 버려진 축사는 세월의 흔적. 그 흔적 사이로 노란 산수유 꽃이 피었다. 마당에도, 대나무 사이에도, 시야가 끝나는 지평선에도 산수유다.
개별적으로 핀 산수유 꽃은 마을을 거의 돌아 나올 즈음 군락으로 뭉쳤다. 바로 산수유 밭이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 해 '시목'이라 불리는 거대한 산수유를 필두로, 50년 넘게 산 산수유가 까만 흙 위에 정렬했다.
이 고요한 정경의 마을에 한때 파근사(波根寺)란 절이 있었다. 뿌리가 흔들린 절이라니. 기이했다. 박근희(62) 이장이 그 연유를 설명했다. "본래 이름은 부흥사였지. 그런데 산수유 열매를 스님들이 따먹고 정력이 좋아진 게라, 그때부터 작폐(作弊)가 심해져 고승 선사들이 망하라고 절 이름을 파근사라 지은 거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전설을 간직한 마을, 바로 외용궁마을이다. 지금은 절도, 힘센 스님도 없이 다만 긴 세월을 버텨온 산수유만 남았다. 20여 가구, 80명도 채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3월 25일, 이 마을엔 가랑비가 내렸다. 비와 공기의 경계가 모호한 대기 속으로 산수유의 노랑이 어렴풋이 번졌다.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가 맑은 날 샛노랑으로 빛날 때 제일 아름답다면, 이곳의 산수유는 안갯속에서 자신의 중량감을 지울 때 오히려 오롯하다. 규모가 크지 않은 까닭이다. 오래된 돌담 사이, 바짝 열 맞춘 과수원 내에서도, 꽃 산수유는 그저 그림자처럼 노랗게 번져 흔들린다.
그러나 중량감이 없는 만큼 꽃이 쉽게 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산수유의 만개는 두 번의 개화를 겪는다. 먼저 20~30여 개의 꽃봉오리가 꽃눈을 밀고, 2~3일 뒤엔 봉오리가 다시 열리며 수술과 암술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상을 보려는 강한 의지로 만개하되,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고 다만 번진다.
그 모습은 외용궁마을 주민들의 삶을 닮았다. 작은 밭뙈기에 대파와 상추 등을 키우며 한편으론 과수원을 일궈 산수유를 키운다. 가을, 붉은 산수유 열매가 달리면 주민들은 일일이 열매를 따 씨앗을 버리고 과육만을 모은다.
▲ 산수유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위로 자라나지 않고 옆으로 가지를 넓게 드리운다. 그 넉넉한 품 안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노란 산수유꽃이 피었다.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의 가격은 작년 1만4000원(1㎏). 가장 많은 열매를 맺는 시목의 경우 30kg을 생산했으니, 1년에 42만원이다. 박 이장은 "지금이야 산수유 값이 많이 싸졌는데 수십 년 전만 해도 산수유나무가 대학나무로 불릴 정도로 값을 많이 쳐줬다"고 했다.
이곳 시목은 200~300년쯤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수원 한가운데 왕관처럼 두른 돌담으로 자기를 과시하는 이 시목의 소유주는 문태근(48)씨. 문씨는 "정유재란 때 남평 문씨 일가가 살기 시작해 한때는 주민 절반 이상이 문씨였다"고 했다. 지금은 세 집밖에 남지 않았으나, 산수유 시목이 문씨 일가의 오랜 역사를 증명했다.
산수유는 몇년 전엔 사라질 뻔한 위기도 겪었다. 일일이 손으로 열매를 따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았던 것. 외지인이 몇몇 마을 주민을 꼬드겼고, 5년 전부터 한두 그루씩 산수유나무가 반출됐다. 그것이 '산수유 마을'이란 용궁마을 주민들의 자존심을 자극해 2년 전 아예 반출을 금지했다. 올해 작지만 의미있는 산수유축제를 처음으로 치러낸 박 이장이 말했다. "우리 마을의 역사가 산수유의 역사인데, 지켜야지. 내년에도 축제를 열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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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 외용궁마을과 경남 하동군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은 19번 국도 중 봄꽃길로 대변되는 남원~구례~하동 구간의 양 끝자락에 있다.
외용궁마을에 들어서기 전 잠깐 길을 에둘러 에덴식당(남원 주천면 고기리 706·063-626-1633)에 들러 산나물비빔밥(7000원)으로 요기하자. 외용궁마을과 먹점마을 사이, 쌍계사 인근 단야식당(하동 화개면 운수리 207·055-883-1667)에선 들깨 국물에 메밀국수를 만 사찰국수(6000원)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