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항이 내려다 보이는 무허가 집들. 그곳이 지금은 관광지가 된 논골담길이다.
돈 없는 전국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들어 산비탈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것은 집에 관한 모독이다.
지붕도 없다. 설계도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한낱 플라스틱 훌라후프 750개를 묶어 집을 만들었다. 링돔이다.
뉴욕 소호에서, 밀라노에서, 요코하마에서 집 밖에 있던 고리집이 서울에서는 집 안(전시장 플라토)을 굴러다니고 있다.
언제든지 부술 수 있고 어떤 장소에서나 다시 조립할 수 있다. 공간은 미미하다. 천장도 벽도 바닥도 따로 없다. 사방으로 뚫린 원형 구멍들, 그뿐. 며칠이 지나면 집은 사라진다.
분명코 이것은 집에 관한 능멸이다.
콜로라도 덴버. 바람으로 지은 집이 사흘을 머물러 있다가 증발했다.
비닐막으로 만든 건축물이 꿈틀거리다 못해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다. 기둥들은 고정되지 않은 채 무심히 부유한다.
집 이름 공기숲. 로키산맥이 불어 내려오지 않으면 집은 쭈그러들고 만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집이 저 혼자 어디론가 가고 있다. 역시 설계도는 없다. 공사 기간 사흘.
단언컨대 이것은 대지 위에 군림해 왔던 집에 관한 노골적인 무시다.
서울시청 앞 광장, 풀밭 위 허공에 빛 막대기들이 우산살 모양 펼쳐져 있다.
봄 궁전. 발광다이오드 서까래 1300개가 고작이다.
색이 변하는 뼈대만 있는 빛살을 엮은 이는 스물 몇 해 전 대학 3학년생으로 이 광장에 서 있었다. 결코 하루도 운동권이 아니었던 학생 이름 조민석. 그날 삐라가 날아오르고 있는 공간은 기름처럼 끓고 있었다.
87년 7월이었다. 이한열 장례식 노제. 먼 훗날에야 그는 그 벗의 장사를 이렇게 치를 수 있었다. 기억의 궁전을 희미하게 지어서.
세 집 모두 설계도도, 하물며 번지수도 없다. 관조와 구경거리와 과시로서 건축은 기대하지 마시라.
이 공간들은 유동적이고 제자리에서 떠돈다. 정주와 보호, 차단과 밀폐라는 집에 관한 관습은 찾을 길이 없다.
도리어 집 자체가 몸짓과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 그 공간들은 모종의 주파수를 내보내면서 제 본래의 존재에서 한껏 탈주한다.
조민석은 이렇듯 근대 이후 공간에 대한 질문을 유쾌하게 재조직하고 있는 참이다. 세 집은 장소성보다는 시간 위에 지은 집이다.
그림은 보이지 않는 걸 그려야 하고, 음악은 들리지 않는 걸 들리게 하고, 문학은 문자화할 수 없는 것들을 기록해야 한다.
건축 또한 지을 수 없는 걸 지어야만 하는 운명을 벗어날 길이 없다. 사람은 집을 짓지만 그 집은 사람을 길들인다.
모든 인위적 공간은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이다. 그가 베네치아로 끌고 간 평양의 건축가 김정희와 서울의 건축가 김수근, 그 건축주 김일성과 건축주 박정희의 광장, 권력기관, 학교, 사원, 가막소뿐이겠는가.
일상 공간으로서 한반도의 주거는 아파트와 함께 문득 수직으로 일어섰다.
동시에 수평공간은 낙후한 모욕이 되었다. 지붕 위에 지붕을 얹는 수직체계는 주거 서열을 층층이 위계화하면서 거대한 숭배를 지속해왔다. 수직은 집약과 속도, 단순화와 효율을 목표로 기계시대의 권력을 집행한다.
조민석은 이 수직에 저항해 왔다. 고층을 빗금친 양 어긋나게 기울이거나 그 공간 내부에서 골목을 생성 시켜내는 창조적 역행을 통해 기꺼이 용적률 따위를 넘어선다.
빅토리아 호수나 톤레삽 호수 선상가옥 사람들은 주소가 적어도 둘씩이다.
여름 겨울 물 높이에 따라 지번이 바뀌는 까닭이다. 인간적 유대와 인연이야말로 동적인 번지수다. 거기 집이 있다.
그대가 살고 있는 곳은 과연 지번이 어떻게 되는가.
까마귀 눈으로 그려내는 오감도는 건축 양태뿐 아니라 지상 구조물들이 행사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경계로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하여 기계시대의 집들이여, 더 모독받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