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4)...고성 이씨 안동시 법흥동 일대에 500년을 세거해온 固城 李氏. 임청각으로 더 유명한 이 집안은 경상남도 고성이 관향으로 일명 鐵城 李氏라고도 불리운다. 안동 입향조는 성종 연간에 진해와 영산현감을 역임한 李增(1419~1480)이다. 이증은 세종때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 李原(1368-1429)의 여섯째 아들이다. 용헌 이원은 성남시 도촌동에 그 묘가 있으며, 서울 강남에는 종친회가 운영하는 용헌 회관이 있다. 우리 나라 상고사의 귀중한 자료인 ‘한단고기’의 ‘단군세기’편을 저술하고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杏村 李嵒(1297~1364)은 좌의정 이원의 조부가 된다. 입향조 이증은 경상감사 李暿의 사위가 된다. 익재 이제현의 현손인 경상감사 이희는 안동으로 순시를 왔다가 학질로 객사하게 되어 안동시 남선면 현내리에 그 묘가 있다. 李增은 안동으로 낙향하여 학덕있는 안동 선비 12명(안동 권씨 3명·흥해 배씨 4명·영양 남씨 4명·안강 노씨 1명)과 함께 1478년 우향계를 조직하고, 회원 13명의 직역·성명·본관·아버지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한 명부와 당시 문호인 서거정(1420∼1488)이 칭송한 7언시의 頌詩가 첨부된 ‘계첩’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는데 후손들은 대를 이어 지금까지 선세의 우의를 계승하고 있다. 이증의 아들 이굉이 그의 아우 매부 및 다른 회원의 子壻 등 15명과 함께 ′진솔회′를 조직하였으며, 우향계와 진솔회를 '계축(契軸)'으로 만들어 회원이 나누어 가졌는데 그 원본의 하나가 권정우가 소장하고 있는 우향계축(보물 제896-1호)이다. 입향조 이증의 아들 6형제는 모두 재주가 있어, 장자 泙은 평택현감, 차자 歸來亭 浤(1441-1516)은 1480년 문과에 급제 개성유수가 되고, 3자 임청각 洺은 형조좌랑에, 4자 沼가 留守, 5자 淸과 6자 衍은 각각 생원시에 합격하고 손자대에는 더욱 영달하게 된다. 장자 평택현감 泙의 맏아들 쌍매당 胤은 1486년 문과에 급제 부제학이 되고, 둘째 망헌 冑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1488년 문과에 급제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며, 셋째 전은 지례현감, 네째 育은 안기도찰방, 다섯째 膂도 1510년 문과에 장원급제 수찬이 되었다. 그리고 3자 임청각 李洺의 맏아들 요와 둘째 勝은 각각 군수가 되었고, 세째 반은 1512년 문과에 급제 금산군수에, 다섯째 고는 청풍군수, 여섯째 肱은 예빈시별제가 되었으니, 이와 같은 자손들의 현달은 임동면 수다산에 있는 입향조 이증의 묘소가 ‘와우형국’의 명당에 들었기 때문이라 전해온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로 쌍매당 胤이 피화되고, 1504년 갑자사화로 망헌 冑가 사사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는 입향조 이증의 묘소 案山 전방에 있는 바위를 깨뜨려버렸기 때문이라는 전설도 있다. 이증의 둘째아들인 李浤은 1513년 개성유수를 사직하고 경치 좋은 와부탄 옆에 歸來亭을 건립한다. 귀래정의 공간배치는 아주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안동의 성진골이 남쪽의 귀래정을 향해 凹모양을 이루고 있다면 귀래정의 형상은 성진골이 있는 북쪽을 향해 凸모양을 이루고 있는 셈이어서 자연히 귀래정의 형상은 남근을 세우고 있는 모습으로 그 구조가 독특하기 때문이다. 1998년 4월 귀래정 주변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미라’와 ‘원이 엄마의 편지’가 발굴되어 화제가 된 바 있는 주인공 원이 엄마는 귀래정 이굉의 고손자 이응태의 부인이다. 셋째아들인 李洺 역시 형님을 따라 와부탄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1519년 의흥현감을 사직하고 법흥동에 臨淸閣을 건립한다. 귀래정이나 임청각이나 모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陶淵明의 歸去來辭 중 臨淸流而賦詩의 ‘臨’자와 ‘淸’자를 취한 것이라 한다. 富貴非吾願 帝鄕不可期 부귀는 내가 원하는 바 아니며 극락왕생도 바라지 아니하네 懷良辰以孤往 或植杖而耘 좋을 때 홀로 거닐다 때론 지팡이 세워두고 김도 매고 登東皐而舒嘯 臨淸流而賦詩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지으리. 聊乘化以歸盡 樂夫天命復奚疑 살다 때가 되면 그 곳으로 돌아가 기꺼이 천명을 받으리라. 李 洺의 여섯째 아들인 李肱도 산수간에서 유유자적하던 선대의 핏줄을 이어받아 귀래정 옆에 ‘갈매기와 벗한다’는 뜻의 伴鷗亭을 건립한다. 李 肱의 아들인 이 李容도 반구정에서 만년을 보낸다. 李 洺, 李 肱, 李 容 3대가 벼슬을 버리고 반구정에서 은거한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반구정 앞에는 ‘固城李氏三世遺墟碑’라는 3대 귀거래사 실천 기념비가 있다. 현재 안동일대에 계거하는 고성 이씨는 입향조 이증의 차자 귀래정 浤의 후손과 3자 임청각 洺의 6자로 반구정을 건립한 예빈시별제 肱의 후손들이다. 귀래정 浤의 후손은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류하는 정상동 정하동 일대에, 반구정 肱의 후손은 법흥동 일대에 계거한다. 500년 임청각 집안의 계보를 보면 입향조 李增-洺-肱-容-復元-遲-宗培-賁-後榮-時成-00-00-宗岳-宜秀-00-00-承穆-相龍-濬衡-炳華-恒曾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입향조의 4대손 이복원은 제봉 고경명과 사돈지간이다. 서울에서 같이 벼슬할 때 친교가 있었고, 그 인연으로 임청각 주인 이복원의 딸과 제봉의 큰아들 고종후가 혼인을 했던 것이다. 이후 고성 이씨 중에서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한 사람은 李後榮이 1684년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 고성군수를 지냈으며, 1721년 이시항이 문과에 급제 병조좌랑을, 이시항의 증손 이주정이 1795년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다. 이외 생원 진사 합격자 17명을 배출했다. 임청각 출신으로 과거급제를 한 사람은 이후영이 유일하다. 동족인 李适(입향조 이증의 아우인 이지의 5대손)이 인조반정후 난을 일으킴에 따라 오랫동안 사진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에서는 알아주는 명문가로 자리매김 한 것은 임청각을 건립한 이명부터 석주까지 주손 20명 모두가 문집을 내는 등 학문하는 집안으로 명문가를 유지했다. 임청각의 11대 주손인 虛舟 李宗岳(1726~1773)은 우리 나라 최초의 낙동강 유람기인 ‘虛舟府君山水遺帖’을 남겼다. 허주에게는 5벽(癖)이 있었다고 한다. 즉 古書癖, 彈琴癖, 花卉癖, 書畵癖, 舟遊癖이다. 옛 책을 모으는 취미, 거문고를 타는 취미, 꽃을 기르고 감상하는 취미,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취미, 배타고 낙동강의 절경을 유람하는 취미이다. 평생을 해도 이 중 하나라도 제대로 못하는데 허주는 이 다섯을 모두 전문가 수준에 다다랐다고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경상도 그것도 안동지방에서 화첩이 발간된 것은 임청각뿐이 아닐까 생각된다. 固城 李氏 上系圖
고성이씨는 안동 좌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집안이다. 안동에서는 유림의 최고 명예직인 유향좌수와 도산서원 전교에 뽑히는 것을 최고로 친다. 유향좌수를 이해하는데 있어 좋은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하루는 서애 류성룡 선생이 싱글벙글하며 선조 임금과 마주하자 이를 궁금하게 여긴 선조가 ‘왜 그리도 기분이 좋은가’ 라고 물었다. 서애 왈 ‘내가 안동 유향좌수로 천거되어 기뻐 그런다’고 대답하자, 선조 왈 ‘유향좌수가 일국의 영의정보다 더 지위가 높으냐’고 물었다. 서애가 대답하기를 ‘유향좌수는 양반들의 대표로 안동에서는 영의정보다 더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자리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유향좌수는 유향소의 수장이다. 유향소는 토착 양반들로 구성된 자치기구로 향리의 악폐를 막고 지방의 풍기를 단속하던 곳이다. 다른 군현에서는 진짜 양반은 유향좌수에 오르는 것을 기피했으나 안동의 선비들은 이를 가장 명예롭게 여겼다고 한다. 유향좌수에 오르는 데는 학식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품이 있어야 된다는 의미다. 고성 이씨는 본손보다 사위와 외손중에 현달한 인물이 많다. 고성 이씨 사위로는 양촌 권근, 만석부자 조효종, 동호 변영청, 성남 장문보, 겸암 류운룡, 제봉 고경명의 장자 고종후가 있고 외손중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피난 간 대구 서씨 藥峯 徐성(1558~1631), 흥선대원군 때 폐정개혁을 주창한 좌의정 梅山 柳厚祚(1798~1876)가 있다. 서성과 류후조는 모두 임청각의 외손들이다. 임청각의 16대 주손 李相龍(1858~1932)은 삭풍이 몰아치던 1911년 1월 5일, 52세의 나이에 50여 명의 식솔들과 함께 만주로 떠나면서 위패를 전부 땅에 묻고, 망명길에 올랐다.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는 것이 망명의 변이다. 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와 내 살을 에는데 살을 깎이어도 참을 수 있고, 창자가 끊어져도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밭 내 집을 빼앗고 또 다시 내 처자를 넘보니 차라리 이 머리를 잘릴지언정 무릎 꿇어 종이 될까보냐 임청각은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 빛날 기라성 같은 인물들과 관련 깊은 곳이다. 한말 의병의 선봉장이자 석주의 외삼촌이었던 권세연(봉화 닭실)을 위시하여, 석주의 아들과 사돈간이었던 의병장 왕산 허위, 애국시인이자 의열단의 투사였던 이육사․이원기․이원조 형제들도 종고모가인 임청각을 드나들며 민족혼을 키웠고, 석주의 처남 백하 김대락과 월송 김형식 부자 그리고 안동에서부터 만주까지 일생을 함께 한 투쟁의 동지 일송 김동삼 그 모두가 임청각을 벗삼아 민족의 내일을 불밝히고 독립의 기치를 드높인 곳이다 이상룡은 우선 동지들과 자치기구인 耕學社를 조직,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고 한인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지위 보장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본 그는,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폴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간도에서의 벼농사는 이때 韓人들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상룡이 경학사 창설 이래 가장 심혈을 이룬 사업은 남만주 일대에 소학교를 세워 동포의 자질 향상을 꾀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무력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광복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위해, 동지들과 합의 하에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문무를 겸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는 그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후일 항일 전선에 앞장서게 된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扶民團(1912)과 韓族會(1919)로 개편 발전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에 기여했다. 1919년 4월, 만주의 한인 대표들이 모여 군정부를 조직하자 이상룡은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렵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 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 있어야 한다'는 이상룡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 만주의 非武力 독립운동 단체 및 무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의 활동이 돋보이는 것은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들의 단결을 추진한 그의 노력 때문이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했다. 이에 그는 임시정부의 내분을 막고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9월 24일에 국무령 취임식을 거행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석주는 우선 일본군과의 접전 속에서 항일운동의 전위에 위치하고 있던 중국 동삼성 지역의 金東三, 吳東振, 金佐鎭 등을 국무위원에 임명하여 임정이 다시금 활발한 항일무장투쟁을 이끌기를 바랐으나, 그들 대부분이 사양하여 그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상해와 간도는 각기 처한 독립운동의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내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이상룡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1928년 5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正義府와 參議府 및 新民府의 三府統合運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滿洲事變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그해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상룡의 행적을 언급하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처가에 관한 것이다. 석주의 처남 白下 金大洛(1845~ 1914)에게는 세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에게 출가하였고,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하여 한일합방 때 단식으로 자결한 響山 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분이 바로 3.1운동 때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여성 독립운동가 金洛 여사다. 김대락은 이미 6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빼앗긴 경술년 엄동설한에 석주와 함께 만삭의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백하의 집안도 석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임청각은 석주선생이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석 재산을 다 팔고 그것도 모자라서 집까지 세 번이나 판 것을 고성 이씨문중에서 매번 다시 구입했다고 한다. 일제가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중앙선 철로(1936년 착공 1942년 개통)를 놓으면서 아예 집을 없애려는 것을 지역사회에서 결사적으로 반발하여 그나마 현재의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1990년 임청각(臨淸閣)의 옛 주인 석주 李相龍의 유해가 중국으로부터 봉환되었다. “슬퍼말고 옛 동산을 잘 지키라, 나라 찾는 날 다시 돌아와 살리라”는 고별시를 남긴 채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을 떠난 지 79년만의 조용한 귀국이요, 귀가였다. 선생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돌석 장군 휘하에서 의병운동을 시작한 李相東(1865~1951), 만주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낸 李鳳羲(1868~1937), 만주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한 李承和(1876~1927), 만주 유하현 경학사에서 활동하다 1942년 일제의 팽창에 실망하여 자결한 李濬衡(1875~1942), 신흥학교 군관 양성 자금조달과 비밀결사 신흥사에서 활약한 李衡國(1883~1931), 서로군정서 특파원을 지낸 李運衡(1892~1972), 재만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을 지낸 李光民(1895~1946), 압록강 연안 일본 경찰 주재소와 세관을 무장 공격한 李炳華(1906~52)가 모두 임청각의 후손들로 한 집안에서 9명이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안동의 강남 정상동에는 李浤이 축조한 귀래정과 李肱이 축조한 반구정, 용헌 이원과 망헌 이주를 제향하는 명호서원이 있고, ‘원이 엄마’의 사랑을 기리는 비가 정하동 안동법원앞에 세워져 있다 법흥동 일대에는 임청각을 비롯, 탑동 종택과 李宗周가 구축한 北亭이 있다. 임청각으로 대표되는 안동의 고성 이씨는 안동 남인 세력의 구심점으로 ‘노블리스오블리제’ 를 실천한 명문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굉(李浤) 1441(세종 23, 신유) ~1516(중종 11, 병자)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자는 심원(深源). 호는 낙포(洛浦)․귀래정(歸來亭)․ 연생당(戀生堂). 영산현감(靈山縣監) 증(增)의 제2자. 1464년(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0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후 군위현감(軍威縣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공조정랑(工曹正郞)․청도군수(淸道郡守) 등을 역임했다. 이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상주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한 뒤 1504년(연산군 17)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굉필(金宏弼)의 일당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후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역임하고 1513년 나이가 많아 사직한 뒤 안동에 내려와 낙동강변에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 燕山君日記․國朝人物考․永嘉誌 이명(李洺)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영산현감(靈山縣監) 증(增)의 제3자. 1486년(성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역임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조카 주(冑)가 처형되면서 온 집안이 화를 입어 영덕(盈德)으로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의흥현감(義興縣監)으로 부임했다가, 1513년 형 굉(浤)이 사직 은퇴함에 같이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 영남산(映南山) 기슭에 ‘임청각(臨淸閣)’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 永嘉誌․嶠南誌 이반(李胖)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자는 중숙(仲叔). 형조좌랑(刑曹佐郞) 명(洺)의 제3자.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급제하고, 1514년(중종 9) 문과별시에 급제했다. 관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금산군수(金山郡守)를 거쳐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司馬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이주(李冑) ? ~ 1504(연산군 10, 갑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자는 주지(冑之). 호는 망헌(忘軒). 사온서령(司醞署令) 평(泙)의 제2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88년(성종 19)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를 지내고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으로 호당(湖當)에서 사가독서(賜家讀書)를 했다. 1498년(연산군 4)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있다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진도(珍島)에 유배되었고, 이어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사형되었다. 성당(盛唐)의 품격을 갖춘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내(市內) 정상동(亭上洞) 명호서원(明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망헌집(忘軒集)』이 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燕山君日記․安東鄕土誌(宋志香) 이여(李膂)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고성(固城). 자는 강재(强哉). 사온서령(司醞署寧) 평(泙)의 제5자. 영산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형 주(冑)의 옥사에 연좌되어 귀양갔다. 중종반정 후 151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헝문관수찬(弘文館修撰)․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校誌 이희(李暿)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호는 청호(淸湖). 익재(益齋) 제현(濟賢)의 후손으로 1423년(세종 5)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서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남원부사(南原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1443년(세종 25)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 재임 중 안동부(安東府)에 순시차 왔다가 병으로 객관(客舘)에서 죽었다. 영산현감(靈山縣監) 이증(李增)의 외구(外舅)이다. ■참고문헌 : 嶠南誌․安東鄕校誌 권근(權近) 1352(공민왕 1, 임진) ~ 1409(태종 9, 기축)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안동(安東).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초명 진(晋). 검교정승(檢校政丞) 희(僖)의 자.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했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했다. 조선 개국 후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13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 나라에 들어가 양국의 관계를 호전시켰다.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사병(私兵)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 확립에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대사성(大司成)․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했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저서에『양촌집(陽村集)』『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경기체가(景幾體歌)인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참고문헌 : 高麗史․朝鮮王朝實錄․永嘉誌 유운룡(柳雲龍) 1539(중종 34, 기해) ~ 1601(선조 34, 신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응견(應見). 호는 겸암(謙唵). 시호는 문경(文敬). 관찰사 중영(仲郢)의 장자로 하회(河回)에서 태어났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형으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경학․행의(經學行義)로 이름이 높아 1572년(선조 5) 음보로 전함사별좌(典艦司別坐)가 되고, 이어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으로 있을 때 유능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인동현감(仁同縣監)․한성판관(漢城判官)을 거쳐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이 되었고, 이듬해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하여 토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웠고, 1595년 벼슬이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이르렀다. 저서에 『겸암집(謙唵集)』이 있고, 풍천(豊川) 화천서원(花川書院)․예천(禮泉) 상리(上里)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陶山及門諸賢錄․安東鄕校誌․安東鄕土誌(宋志香) 고종후(高從厚) 1554(명종 9, 갑인) ~ 1593(선조 26, 계사)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準峰). 시호는 효열(孝烈). 전남(全南) 광산(光山 : 現 光州) 출생. 의병장 경명(敬命)의 장자.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임피현령(臨陂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자 귀가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싸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으며, 성이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3부자(三父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부 경명(敬命), 동생 인후(因厚)와 함께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진주(晉州) 충민사(忠愍祠)에도 제향되었다. 임란 때 가족을 데리고 안동 천전(川前)으로 피란왔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湖南人物誌․安東鄕校誌 서성(徐渻) 1558(명종 13, 무오) ~ 1631(인조 9, 신미)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대구(大邱)).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함재(涵齋) 해(嶰)의 자로 일직(一直) 소호리(蘇湖里)에서 출생했으며, 외조(外祖)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으로 1586년(선조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했다. 159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명에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정랑(兵曹正郞)․성균관직강(성균관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綎)을 접대했다. 그 후 암행어사(暗行御史)를 역임하고, 제용감정(濟用監正)에 특진되었으며, 이어 5개도의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직하여 형조(刑曹)․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이인기(李麟奇) 등과 남지(南池: 耆老會)를 조직,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대구(大邱) 귀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고, 문집에 『약봉집(藥峯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國朝榜目․海東名臣錄 유심춘(柳尋春) 1762(영조 38, 임오) ~ 1834(순조 34, 갑오)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상원(象遠). 호는 강고(江皐). 상주(尙州) 낙동(洛東) 출생. 성룡(成龍)의 후손. 광수(光洙)의 자로 백부 발(潑)에게 출계. 1786년(정조 10) 생원시에 함격한 후 영달의 뜻을 버리고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했다. 1795년(정조 19)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가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거쳐 익위(翊衛)가 되었다. 이후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의성현령(義城縣令)을 역임했다. 1830년(순조 30) 왕이 하교를 내려 3대가 과거에 급제한 것을 치하하고 돈령부도정(敦寧府都政)을 제수하였다. 1854년(철종 5) 아들 후조(厚祚)가 급제하므로 다시 통정대부(通政大夫) 올랐다. 평소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을 탐독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1841년 청백리(淸白吏)로 뽑혔으며, 장수(長水) 도암서원(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正祖實錄․國朝人物誌․안동하회마을(徐守鏞) 유후조(柳厚祚) 1798(정조 22, 무오) ~ 1875(고종 12, 을해)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풍산(豊山). 자는 재가(載可). 호는 매산(梅山)․낙파(洛坡). 시호는 문헌(文憲). 성룡(成龍)의 8대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政) 심춘(尋春)의 자. 상주(尙州) 낙동(洛東)에서 출생했다. 1837년(헌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858년(철종 9)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영상(領相) 김좌근(金佐根)의 추천으로 공조참의(工曹參議)․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承旨)를 역임했다. 이어 형조참판(刑曹參判)․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가 1864(고종 원년)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조참판(吏曹參判)․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866년(고종 3) 우의정에 이르렀다. 이해 가례책봉주청사(嘉禮冊封奏請使)로 청 나라에 다녀와서 중국에 와있는 서양인들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1867년 좌의정(左議政) 올랐으며,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참고문헌 : 哲宗․高宗實錄․安東鄕土誌(宋志香)․안동하회마을(徐守鏞) [출처] 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4)...고성 이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