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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달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朴晙瑛(元陽)
女中君子 張桂香과 음식디미방의 宣揚事業 연구과제
女中君子 張桂香과 음식디미방의 개요
1.위대한 어머니 장계향(1598-1680) 소개 내용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이자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입니다.
세상은 당신을 "위대한 어머니"라 부릅니다.
가슴을 울리는 시 아홉수를 남긴 시인입니다.
맹호도와 산수화에 조예가 깊었던 화가입니다.
당대 초서의 대가 정윤목이 절찬한 서예가입니다.
책보다 생활속의 실천을 중시한 교육자입니다.
수신공경 퇴계학풍을 이어온 사상가입니다.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듬어 안은 사회사업가입니다.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과학자입니다.
10남매와 남편을 일으켜 세운 현모양처입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품었던 여중군자 장계향님을 후세는 당신을 위대한 어머니라 부릅니다.^-^
2.장계향의 업적
*10남매를 출중하게 성장시키고 부군 석계 이시명을 일으켜 세운 현모양처.
*빼어난 시 9수를 남긴 시인.
*사나운 호랑이를 섬세하게 표현한 '맹호도'와 산수화를 남긴 화가.
*당대의 서예대가 정윤목의 절찬을 받은 서예가.
*재주보다 선행을 강조하여 일곱 아들을 7룡으로 불리우게 한 교육자.
*경당 장흥효와 부군 이시명의 학연 속에 수기안인의 길을 모색한 사상가.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속에서 민초들을 다함없이 구휼한 사회사업가.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과학자.
3.女中君子 張桂香의 '桂香'이란? 이름 이야기
* 蘇東坡소동파 赤壁賦적벽부 나룻배의 桂樹계수나무 '노'와 '木蘭목란나무 상앗대'
(桂櫂蘭漿계도란장)에서 따오듯 蘇東坡소동파의 삶과 사상을 투영시킨 이름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헤쳐 나가는'노'가 계수나무이고 계수나무는
오래 될 수록 단단해 지고 향기가 짙어 진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蘇東坡소동파가 유배지의 동쪽언덕 東坡에서 농사지으며 어려운 세월을 견뎌냈듯이 敬堂경당 선생은
어려운 세월을 견뎌낼 자신의 동네를 '봄을 가꾸는 마을春坡춘파'이라 하였고 그 곳에서 딸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희망을 갖었다.
임란후 귀향한 서애 류성룡 선생에게서 백성의 삶을 돌보는 구체적 해결책과 고난에 맞서는 마음가짐의
방법을 배워 어린 딸 桂香계향에게 학습 시켰다.
*참고문헌
-경당 선생문집 일기편
-여중군자 장계향 선양사업
종합계획/영양군 발간 2017
* '桂香계향' 이름의 뜻
'禮記예기' "월령편"에 "필유초목지자강계지위야"라는 글귀가 나오는데.계수나무'桂계'자는
"강남목백약지장"이라 했다. 온갖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 되는 나무가 계수나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값이 비싸고 귀하면 형편이 나쁜 사람은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누구든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약이어야 한다.
그것은 향기(향기향香)이다. 코로 숨 쉬면되는 것이다.
이 향香도 약이름 향香이면 더욱 좋은 약이 되리라 생각했다.어떤 병이든 아무리 위중한 병이든
마음가짐이 바르고 깨끗하면 이미 절반의 병은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을 '계향'이라 지어 주었다.
세상의 마음의 병을 낫게 해 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누구의 이름일까? 바로 340여년 전에 한글로 '음식디미방'이라는 양반가 음식 요리책을 쓴
'여중군자 장계향.정부인안동장씨'의 이름에 담긴 뜻이다.
-출처:나눔과 사랑으로 세상을 치유하다'장계향 조선의 큰어머니' (정동주 지음.한길사 펴냄) P90~91
4.君子의 뜻
유교에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일컫는 말. 유교에서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성인이란 최고의 인격자, 즉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달한 사람을 말한다. 이를테면 공자와 이에 앞서
있었던 요(堯)·순(舜)·주공(周公) 등을 말한다. 그런데 공자는 “성인은 내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군자만이라도
만나 보았으면 한다”(論語, 述而篇)고 했다. 따라서 유교는 누구나 노력에 의하여 도달하는 표준의 인물을
군자에 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군자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며, 「이래야만 되겠다」는
사람의 한 본보기로 군자라는 말을 썼다. 이렇게 본다면 군자는 유덕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cid=42126&categoryId=42126&docId=510170
5.인생지미人生至味 - 책이름'飮食知味方음식디미방'
여러분께서는 인생의 지극한 맛(人生至味)을 보셨는지요?
앞 만 보고 달려온 우리들입니다. 그 일직심(一直心)이 있었기에 오늘의
풍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겁지겁 달려온 인생이 돌아보면 인생의
지극한 맛을 모르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참으로 억울한 인생이 아닌지요! 지금이라도 우리들 인생의 맛과
멋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중용(中庸)》4장 <지미장(至味章>에 이 인생의 참 맛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子曰 道之不行也 我知之矣 知者過之 愚者不及也/
道之不明也 我知之矣 賢者過之 不肖者不及也/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도가 행하여지지 않고 있는데 나는 알겠다/
안다는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
도가 밝지를 못하는데 나는 알겠다/
현명하다는 사람은 지나치고 불초한 사람은 미치지 못한다/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맛을 아는 자는 드물다/
이 공자님의 말씀은 도(道)는 넘치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관점에서 근시안적 모습만을 보기 때문에 과하거나
불급하는 것이죠.
인생의 맛을 제대로 아는 것은 고수(高手)의 영역이며 도적(道的)인
성향과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맛을 알기 위해서는 오감(五感)이 제대로 살아 있어야 하며
자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중용이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중국 남송(南宋) 때의 유학자 주희(朱熹 : 1130~1200)는 이 ‘지미至味’에서
네 유형의 사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앎이 지나쳐 도를 더 이상 행할 것이 없다고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은 앎에 미치지 못하므로 행해야 할 근원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도가 항상 행해지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행함이 지나쳐 이에 더 이상 도를 알 것이 없다고 여기고,
못난 사람은 행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또한 알아야 하는 근원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이 도가 항상 밝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이다.”
그리고《중용》4장(章) 말미에「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죠.
바로 ‘지미(知味)’의 철학인 것입니다.
맛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것은 인생을 살면서 삶의 참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며 오래 사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이제 100세 시대입니다. 그런데 생리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도 인생의
맛(味)를 모르고, 그저 나이만 많이 먹는다면 장수(長壽)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 인생의 참맛을 알며 사는 지미(知味)의 인생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아마 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이라는 사람은 어느 날 늦은 저녁 밤하늘의 달을 보고,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인생의 가장 맛있는 순간이라고 읊으면서 그 일상의 맛을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라고 정의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에서 나만이 느끼는 맛이 지고지미(至高之味)라고 할 수 있지
않을 런지요?
그 ‘지고지미(至高之味)’의 맛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음식지미(飮食之味)입니다.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음식의 고유한 맛을 느끼며 먹는 맛입니다.
둘째, 직업지미(職業之味)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통하여 인생의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는 맛입니다.
셋째, 풍류지미(風流之味)입니다.
남을 따라 하는 게 아니라 바람처럼 물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느끼는 맛입니다.
넷째, 관계지미(關係之味)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호 관계가 아니라 만남 속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 만나는 맛입니다.
다섯째, 봉사지미(奉仕之味)입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함으로써 얻는 맛입니다.
여섯째, 학습지미(學習之味)입니다.
하루하루 배움과 깨우침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가면서 느끼는 맛입니다.
일곱째, 건강지미(健康之味)입니다.
육신만 아니라 건강한 내 몸과 균형과 조화를 갖추며 느끼는 맛입니다.
여덟째, 인간지미(人間之味)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규명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기쁨을 만끽하는 맛입니다.
어떻습니까? 인생 최고의 맛을 찾으셨는지요?
그러나 아무리 이 여덟 가지 ‘지미’를 통틀어도 아마 수도(修道)의 맛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수도 인이 구하는 바는, 마음을 알아서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고,
생사의 원리를 알아서 생사를 초월하자는 것이며, 또 죄와 복(罪福)의 이치를
알아서 죄 복을 임의(任意) 하자는 것입니다.
인생 최고의 지미는 수도입니다. 이 ‘인생지미’를 저와 함께 맛보시면 이 가을에
청량(淸凉)함이 더욱 느껴지지 않을 런지요?<덕화만발편지중에서>
*人莫不飮食也, 鮮能知味也에서 '飮食知味方음식디미방'이 유래되었슴.
6.영양석보에서의 생활 환경
경북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8경'에서 찾아 보자
<광려산-병암산-낙기대-세심대-동대-서대-석찬서당-광록초당>
(1)두들마을8경의 제1경'광려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뒤에 있는 '광려산'은 일월산의 낙맥으로서 산상에 수천평이나 되는
넓은 잔디 광장이 있다.
봄,여름,가을이면 주변에 기화요초가 피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연중 사계절을 통하여 자연탐방 산책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운동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 이 곳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 보면 고색창연한 옛 한옥이 즐비한 마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이 산은 남향으로 주남천.화매천 건너편 병암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마을 중심부가
중대로서 끝자락에 낙기대.세심대,석천서당.광록정이 있고 동쪽에 '동대', 서쪽에 '서대'가 있다.
마을 전체가 일목일초,일구일학이 모두 이름 없는 것이 없어,옛부터 재령이씨 일문이 번성해서 세거해
온 자취를 볼 수 있다.^^
마을 안에는 경상북도 민속자료인'석계고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인'석천서당',
'음식디미방체험관.음식디미방교육관,전시관','석간고택,'유우당','여중군자장계향예절관,유물전시관',
현대 문학도를 양성하는 '광산문우'. 이문열소설가의'서재','두들책사랑방',문화재자료인 '주곡고택',
전통한옥인 '만석꾼지기집'.고가체험민박가능한 '석계공종가','병암댁'.'영감댁', 천연염색체험가능한
'백천댁','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몽구 이병각 시비','두들광장'등을 둘러 볼 수 있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영양군발행'명가순례'
(2)두들마을8경의 제2경'병암산'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안산인 '병암산'은 높이 약130m되는 단애로 이루어진 야산으로,
산 전체가 기암괴석으로 형성되어 있다.
흡사 병풍을 펼쳐 놓은 것처럼 마을을 둘러 싸고 있으며,온갖 식물과 희귀한 산새들이 서식하며,
철 따라 이름 모를 각종 화초들이 뽑내어, 산 아래 흐르는 화매천 강물에 취영 되고 있다.
화매천 물은 낙동강 상류천인 반변천으로 흘러 가며,강물에는 온갖 담수어들이 노닐고.녹음 짙은
여름에는 넓은 강변과 푸른 강물이 한데 어울려 장관을 이루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약50년전만 해도 이 산자락에 있던 울창한 송림은 석보면의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출처:석계선생 문집 및 항재집.
석보 병암산을 노래한 시가 있다.
"백 자 푸른 벼랑 저만치 누웠는데
그 봄 꽃 가을 잎을 그려내기 어렵구나
나그네여, 산중 집이 누추하다 웃지말라
문 앞에 산 그림 병풍이 길게 펼쳐 있느니."
'항재 이숭일'이 서른셋 나이일 때 석보 두들마을 두 바위 언덕에 '세심대'와
'낙기대'란 이름을 붙이고 따로 '광록정'을 지어 유유자적하며 학문전념하며
마을 앞산인 '병암산'을 노래한 '시'이다.^-^
*출처:선택(이문열 지음) P193에서^^
(3)두들마을8경의 제3경'낙기대'
'낙기'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시경'의 '형문(누추한 집)'이란 시에 나오는
말로서 '형문'의 시에
"형문지하 가이루지 비지양양 가이락기
기기식어 필하지방 기기취처 필제지강
기기식어 필하지리 기기취처 필송지자"
로 노래했으며 '형문/누추한 집'
을 풀이하면 "누추한 집에서도 한가로이 쉴 수 있네
졸졸대는 샘물에도 굶주림을 달랜다네
고기를 먹는다 해서 황하의 방어라야 될까
아내를 얻는다 해서 제나라 강씨라야 될까
고기를 먹는다 해서 황하의 잉어라야 될까
아내를 얻는다 해서 송나라 자씨라야 될까"
"낙기"는 '형문/누추한 집'의 싯귀에서 취한 것이다.
어진 사람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자 몸을 숨기면서 부른 노래이다.
선비는 먹는데 배 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즐기며 배고품을
잊고,삶의 지혜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선비는 가난한 처지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켜 즐긴다. 은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분수를 지키고 만족할 줄 앎에 뜻을 두고 평생토록
변심하지 않는다는 안분지족.안빈락도를 덕목으로 삼고,궁불실의를 본령으로
실천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여겨 진다.
경북영양군석보면원리 두들마을 중대앞 주남천 언덕암벽에 '낙기대'가 있다.
이 대 글자는 '석계 이시명'선생의 넷째 아들인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각자 했다고 전해 진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시경.
(4)두들마을8경의 제4경'세심대洗心臺'
'세심洗心'이라는 말은 '易經역경' "계사상전繫辭上傳"의
"성인이차세심 퇴장어밀聖人以此洗心 退藏於密"에서 나왔는데,
"심중의 더러움을 씻어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마음속의 더러움이란?
"일신의 안위와 재물을 탐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간의 속성이라 할 것"인데
이런 마음을 씻어 내고, 안분지족安分知足과 安貧樂道안빈락도를 실천하며
수신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심대洗心臺'는 두들마을 들머리에 흐르는 주남천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명인지사,선비,은자들이 대자연을 감상하던 곳으로서 특히 '세심대'에서 동쪽을 향하여
조망하면 눈 앞의 30리 전방 산천경관을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어 심신이 상쾌하여 잡념을
잊고 마음을 씻을 수 있는 곳이다.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출처 석계선생문집 및 역경.
(5)두들마을8경의 제5경'東臺동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 두들마을 동쪽에 있는 언덕이다.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조 숙종때의 학자
항재(휘 숭일)선생이 언덕 바위에 각자했다고 한다^^
전통을 이어온 언덕.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두들에 오르니,시간이 만든 아름다움에 눈 뜨다.
여중군자라 칭송 받은 장계향에서 한국문학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소설가 이문열
까지 볼 수 있다.
음식 하나에도 접빈의 도리를 담고 고택마다 선비의 자부심이 살아 있는 곳이다.
두들마을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풍토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이 풍토를 가꾼다는 것을 ^-^
사람이 태어나고 자란 땅은 그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뜻을 키우고 마음도 딱아 준다.
이에 성현께서도 "그 사는 땅이 어질면 아름답다(里仁爲美리인위미)"라 하셨고.
"슬기롭기를 바란다면 어진 곳을 골라 살라(擇不處仁택불처인 焉得地언득지)"고
가르치셨다.^-^
동대 방향의 마을에는 가구교회.석보중학교가 있으며 천연기념물제399호 답곡리만지송.
천연기념물제476호주사골시무나무숲과 문화재로서'남악정'이 있다.
"남악정"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로서
*조선 후기의 문신 갈암 이현일의 정자이다.
*갈암 선생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성리학을 연구하는데 전념하기 위해
초가2칸을 지어 남악초당이라 한 것이 시초이다.
*1674년(현종15년)에 건립되고,순조22년(1882년)에 중건되었다.사주문에는 현판'홍도문'이
있는데 숙종의 어필이라고 한다.
*갈암 선생의 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남악정의 명칭은 석보면 주남리의 옛지명인 '남악곡'에서 따온 것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6)두들마을8경의 제6경'서대西臺'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1리 두들마을 서쪽 언덕이다.
조선시대에는 西臺서대 인근에 관청인 광제원이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은 원리1리로서 면사무소.경찰파출소.보건소,교회 등이 소재하고 있다.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
훌륭한 학자와 시인,독립운동가 등이 배출되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작가의 고향마을이기도 한 이곳에는 광산문우를 비롯하여 석계고택,
석천서당 등 30여채의 전통가옥들과 한글로 쓴 최초의 음식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여중군자 장계향예절관과 유적비, 유물전시관, 음식디미방전시관,교육관,조선 후기 양반가의
전통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디미방체험관"등이 마을의 주산인 광려산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마을 들머리에는 주남천 및 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 마을 앞에는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병암산있다.
시냇물이 산태극,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한다.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 서 있는 암벽과 바위에는 석계 이시명 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세심대.낙기대 등의 글씨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7)두들마을8경의 제7경'석천서당'
영양석천서당은 경북도문화재자료79호(1985.8.5.지정)로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이 1640년(조선 인조 18년) 영해부에서 석보촌으로
이주하여 두들마을 중대위에 띠집'초당'을 지어 유생과 아들들을 강도한 곳이다.
영조 46년(1771)중수하고 석천서당이라 하였으며, 그 후 고종28년(1891)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당에는 대산 이상정이 쓴 석천서당기를 비롯하여 석계기,갈암 이현일 및 남곡
권해의 차운,운악대훈, 좌해 이수영의 중수기 등 기판과 시판이 있다.
또한 안릉세전,석계선생문집,정부인안동장씨실기.정묵재집,항재문집,냉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석천서당이 있는 이 곳은 1640년(인조18년)에 영해에서 석보로 온,
석계 이시명(1590-1674) 이 중대위에 터를 잡아 석계초당을 지어 13년간 살던 곳이다.
석계가 19년간을 일월산 동쪽마을 수비면 신원리 수양산에서 은거하다 1674년 안동에서 운명하자
1676년에 상을 마친 넷째 아들 항재 숭일이 돌아와 선업을 이어 오다가 석계가 강학하던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다하여 1762년에 석천서당을 창건하게 되었으며 1771년 8월에 준공하였다.
서당은 두들 뒷산인 광려산을 배산한 경사진 대지에 남서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우측 담장 사이에는 3칸 규모의 대문채를 세웠으며 대문채의
전면 우측에는 4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 주사를 배치하였다.
서당은 정면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 시켰으며 배면을 제외한 3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둘렀다.
가구는 오량가의 초익공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8)두들마을8경의 제8경'광록정廣麓亭'
원리리광록초당/광록정은 조선인조18년(서기1640년)
석계 이시명이 터를 잡은 두들에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이 건립한 정자로
수차례에 걸쳐 중건과 중수를 거듭하다가 1926년에 현재의 규모로 중건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우측담장의 전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후 전면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으며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문을 설치하여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영양군문화재대관 및 석계선생문집
7.석계 선생 본가 재령이씨 운악 이함 종가의 가훈
-두들마을 석계 이시명 선생 큰집- '가훈'을 소개 합니다.
사람들과 사귀거나 일을할 때 "지고 밑져야 한다."
"지고 밑져라"라는 가풍이 있다.
-재령이씨 운악 이함 종가-
"박문약례" "글을 널리 배우고 익혀, 예로서 요약해 실천 한다."
21C 요구되는 창의적인 인재는 "대화할 줄 아는 아이"이다.
글을 널리 배우고 익혀,예로서 요약해 실천함을 강조해야 한다.
"지고 살면 사람을 얻고, 밑지고 살면 세상을 얻는다."
8.석계 이시명 선생
퇴계 이황 선생의 정통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1590-1674) 선생은 일찍이 생원에 올랐으나
입신양명에 뜻을 두지 않고 지절을 지키며 일생을 학문 연구에 바친 학자입니다.
조선조 영남의 명문가로 손꼽히는 운악 이함 종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19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무릎을 꿀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치욕에 비분강개하며.
대명절의를 지킨다는 뜻으로 1640(인조18년)년 고향 영해를 떠나 산간벽지였던 영양석보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물 맑은 인지천(주남천) 시냇가 바위 위에 터를 잡고, 그 처소를 석계 초당이라 하였으며,
조정에서 내린 벼슬도 마다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 전념 하였습니다. 후일 사람들이 그를 두고
'석계 선생"이라 부릅니다.^-^
*출처:영양군 발행'명가순례'
*석계 이시명 선생이 지은 시.
탁족청천수 승량벽현송
심전무외념 운물역한용
-석계 이시명
맑은 시냇물에서 깨끗이 발을 씻고는
푸른 소나무 아래에 와서 바람을 쐬네
마음에는 바깥 생각 모두 없이 하니
하늘의 구름 또한 그 모습 한가롭다.^^
맑은 석계 위에 집을 짓고는 스스로 호를 석계라 하었으므로 그 후 세상
사람들이 석계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의 글은 그 무렵에 지은 것이다^^
9.영양석계고택
경북도민속자료제91호90.8.7.
조선 인조,현종 때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과 정부인 안동장씨가 살던 집으로
석계선생은 안동에서 임종하였으나 정부인은 이곳에서 임종 때까지 살았습니다.
이 고택은 4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사랑채와 5칸 규모의 ㅡ자형 맞배기와집인 안채가 = 자형
으로 배치되어 있는데.전면에는 최근에 신축한 3칸 규모의 평대문을 세웠으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다. 사랑채는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마구와 고방을 두고 우측에는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습니다.
안채는 좌측으로부터 부엌.안방.대청.상방이 연접해 있는데 안방옆의 마루 후면에는 판벽을 둘러 고방을
설치하였습니다. 상방의 우측벽에는 상.하방 사이에 문꼴을 내어 문을 달았는데 밖으로는 세살문을 안쪽
으로는 판장문을 설치 하였으며 안방에는 코쿨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안채 역시 가구는 삼량가의 간결한
구조입니다.^-^
*출처: 영양군 발행'영양문화재대관'
10.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재령이씨 집성촌ᆢ
두들마을은 퇴계 이황 선생의 학맥을 이은 석계 이시명 선생이 1640년 터를 닦은 곳으로,훌륭한 학자와
시인,독립운동가 등이 많이 배출되었습 니다.
한국문학의 거장 이문열 소설가의 고향 마을이기도한 이곳에는 석계고택.석천서당.유우당.석간정사 및 정침.
주곡고택 등 문화재가 있고,
선비가 안빈락도를 덕목으로 궁불실의를 본령으로 실천하기 위해 수신하던 세심대,낙기대가 있고.
음식디미방체험관.교육관.전시관이 있으며,정부인안동장씨유적비,여중군자장계향예절관,유물전시관이
있고,현대문학도를 양성하는 광산문우.책사랑방이 있습니다.전통한옥이 30여채 있어서 병암댁.영감댁
에서는 고택체험 민박을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음식디미방의 양반가 음식을 만들어 보는 프로그램이 있고.
정부인상(9첩반상).소부상(7첩반상)
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마을뒤에는 광려산이 있고,마을 들머리에는 주남천,화매천이라는 내가 흐르고.마을 앞은 병암산이 나지막하게
병풍처럼 펼처져 있습니다.
시냇물이 산태극 물태극으로 굽이 돌아 산과 맞닿은 언덕머리 위에 자리했다하여 두들이란 이름이 붙었다
합니다.마을 앞 언덕,주남천가에 서 있는 암벽에 석계 선생의 넷째 아들 항재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
낙기대.세심대.서대의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광록초당,만석꾼지기집.두들광장이 인근에 있으며
조금 떨어진 곳. 답곡리 만지송,주남리 시무나무가 천년기념물로 자랑거리이며 주남리남악마을에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수신하던 남악정이 있습니다.
지경리에는 남자현 지사 생가와 나산 이현규 의병대장 기념비 등이 있습니다.^-^
*출처 : 영양군 발행 '명가순례'
영양스토리텔링Yeongyang Storytelling 영양옛님의 숨결을 찾아서...
영양.연양 의미는 영양의'영'자는 꽃부리영자이므로 꽃의 부리의 아름다움,다시 말하면 태양을 받들고 있는
아름다운 꽃의 부리를 연상 하기도 한다.
일명 연양이란 말도 태양의 빛의 환하고 밝고 아름다움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해야할 것 같다.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의 선민적 표현이라고 생각 된다.
'영(꽃부리영).양(볓양)일월산의 해와 달과 관련된 꽃과 빛의 고장이다.
따라서 문향이라 한다.
영양의 옛이름은 '고은'이었다.
'고은'은 해와 달의 빛과 관련해 빛깔고운에서 유래하였다고 본다.
은자들이 노래한 '시경'의 "형문=누추한집"이라는 시를 읊으며 "안분지족,안빈락도"를 덕목으로 "궁불실의"를
본령으로 실천하고,온후.선량.공손.겸양.검약한 생활을 한 은둔자와도 관련되었다.
은자.은둔자들인 영양사람들의 숨결. 이야기를 모아 보자.^-^
석보의 유래
옛 문헌 석계문집'석계기'에 "차역안지위무한복지,보전생인,여석지고야,여이소문"라고
하여"석보는 끝 없는 복된 땅으로서 돌 바위의 굳건함처럼 사람을 잘 살게 보전하는 곳"
이라는 의미로 조선 중기에 통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서 볼 때, 석보는 "돌의 굳건하고 영구함처럼.
이 곳에 사람들이 잘 살고 영원히 지켜 지기를 간구하는 의미로서 붙여진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출처:석계문집'석계기'
여중군자 장계향과 음식디미방의 선양사업 개선과제
1.장계향은 340여년 전에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빈민규흘의 애민사상을 실천한 여중군자이다.
한평생을 나눔과 배려 겸손으로 苦中有樂고중유락,애민에 솔선수범하였다.
女中君子 장계향 선양사업으로 음식디미방 아카데미와 체험행사가 음식만들기와 7첩,9첩,12첩,밥상으로시식하는 등
기능성이 지나치게 대두시키는 경향으로 본래의 애민사상,하심의 겸손정신에 부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여론이 많다는
여론이다.
君子란 유교에서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를 일컫는 말이며 유교에서는 聖人이 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다.
聖人이란 최고의 인격자 즉 天人合一의 경지에 달한 사람을 말한다.
현재 선양사업에서 대두시키는 것은 화려하고 최고의 자랑거리 위주로 소개함으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의
사회여건과 전염병 기근등으로 평생을 고난극복에 노력한 희생적 봉사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고 있다는 여론이 많다.
2.음식디미방의 상차림을 정부인상,소부상에서 경당상,석계상 등으로 호칭하며
12첩, 9첩, 7첩상 위주로 만들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님이 12첩이고 정승반열이 9첩이고 당상관이 7첩이며 백성들 평민은 3첩 밥상이었다. 따라서
양반가의 밥상이라도 소반으로 3첩이었다.
결혼식,회갑연 등에서 큰상이란 것이 있었고 접빈을 위한 손님상으로 추정된다.
두들마을과 신원마을의 환경 여건 등으로 보아 평민상,손님상,다과상,주안상이 주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음식디미방 상차림은 너무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값이 비싸다는 여론이다.
3.신축된 건물이 너무 화려하나 검소한 고택과 비교하여 설명할 자료가 없다
'檢而不陋華而不侈검이불누 화이불치'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으며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겸손을
나타내는 양반가의 문화. 유가의 바탕인 여중군자의 정신과 일치되지 않는다.
고택에는 치미,망와,막새기와가 없는데 신축 기와집에는 치미,망와,막새기와는 물론 통나무기동이 사용된 건축물도
있다.
은자 선비들이 사는 집은 꿀뚝을 높이는 것도 사치스럽다하여 평면 꿀뚝을 만들어 생활하면서 겸손을 생활화 하였다.
4.선비들은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마음/ 재물을 탐하려는 마음 / 권력에 아부하려는 마음'만 있어도 洗心을 하였고
배가 고파도 즐길 수 있는 지혜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배가 고프면 경치가 아름다운 언덕에 가서 흘러 가는 물을
보면서 경치에 몰입하면 배고품을 잊고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고 믿어서 시경에 나오는 '형문'이라는 시를 노래하였다고
한다.
현재 암각글자로 남아 있는 '樂飢臺'와 '洗心臺'아래 하천은 갈대와 잡초가 무성하다.
여중군자 장계향과 음식디미방의 선양사업 사례
장계향(張桂香)은 340년전 최초의 한글요리서 ‘음식디미방’을 저술하고,
빈민규휼의 애민사상을 실천한 여중군자(女中君子)입니다.
(사)여중군자장계향선양회(회장 김행자)가 주최한 ‘장계향 공모전’은
경북을 상징하는 여성 인물 장계향(1598~1680)의 삶과 철학을 재조명하기
위해 진행됐습니다. 여성신문은 경상북도지사상과 경북도교육감상 등
수상작 중 일부를 게재합니다. 수상작 전문은 장계향 선양회 홈페이지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지사상>
그녀의 참나무는 둥글다, 송현주
그녀는 둥근 것들을 따라 나선다
두들 마을에 참나무
둥근 열매를 툭툭 던져주는 날
제 몸을 다 내어주는 것이
집 주인을 닮았다
구석에 떨어지는 도토리
껍질이 부서져 둥근 소리를 낸다
함지박에 담아 불거진 울음 잠재우고
썩어서 까실한 것들은 둥근 채로 걸러내
알갱이만 곱게 갈아 맑은 물에 담근다
장작을 태우고
목이 긴 주걱으로 오랫동안 저으면
껄죽해진 도토리 죽
여기저기 물방울 터지듯 보글거릴 때쯤
뜨거운 열기는 풀어진 허공을 말아 쥐고
그녀의 가슴도 함께 끓어 오른다
가마솥은 소박하고 정갈하게 차린 구휼 두레반이 된다
시린 손 어루만지는 순백의 사발
오물 오므린 입안에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달도 별도 댕강댕강 떼어주는 손
책갈피에 숟가락이 들락날락
꺼지지 않는 불씨
아이들의 눈동자 안으로 들어가 빛난다
그녀의 대문 밖
참나무 환하게 비추는 달 하나 걸어 놓았다
둥근 것들은 왜 그렇게 환하게 웃는지
<경북도교육감상>
여중군주자 장계향의 삶과 꿈-‘나눔은 작아도 크다’를 읽고, 상지여고 2학년 배가영
처음 ‘장계향’이란 인물을 주제로 한 책을 읽게 되었을 때 장계향은 내게 굉장히 생소한 인물 이었다.
부끄럽지만 내가 알고 있는 여성인물은 주변에서도 흔히 알려진 신사임당뿐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새로운 인물을 알 수 있는 뜻 깊고 좋은 기회였다. 아마 주변에 알려진 인물 중 여성은 많지
않기에 더욱 기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쓰기에 앞서 장계향에 대해 조금
더 알고자 싶어 몇 가지 알아보자 가장 눈에 띄는 말은 조선의 큰어머니라는 말 이였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러한 칭호로 불리는 것 일까? 나는 더욱 궁금해졌고 그러한 찰라에 ‘나눔은 작아도 크다’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134페이지의 크지 않은 분량이었지만 속을 보기 전에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듯이
책 안에는 장계향의 일생, 자라온 배경, 남에게 베푼 일, 모성애, 진정한 현모양처는 무엇인가 등 장계향의
갖은 고생과 사랑으로 책안이 채워져 있었다.
첫 시작은 15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문으로 문명이 높은 학자 장흥효와 안동 권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장계향 또한 여아라는 이유로 주변에 많은 아쉬움을 샀는데 장계향과 나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경험과 아픔이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과 아픔을 말하자면 어머니가 나를 갖고 10달이 넘는 긴 시간동안
애지중지 품어 내가 세상 밖에 나왔을 때 할머니께서는 나를 한 번도 안아주시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나를 대하는
행동에는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 했다. 남자가 아닌 여자여서 나를 바라보시는 눈빛은 실망에 가득 찬 눈빛 이였고,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날카로운 화살은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내게는 괜찮다하시며 내색하지 않으시고는
나를 다독여주셨다. 어렸을 적 그때는 미처 못 봤지만 어머니 가슴은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한날은 가족끼리 친가 쪽 어른 분들을 뵈러 갔다. 거기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관심은 온통 오빠에게만 쏠렸고,
우리 가문의 대를 이을 장손이라며 모두 오빠 주위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자연스레 눈 밖 이였다. 사랑받고
관심 받고 싶었던 어렸던 나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달랬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던 것은 할머니께서
오빠에게 너는 대를 이을 장남이라며 딸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며 말 하신 것은 어린 시절의 아직도 나를
눈물짓게 한다.
이와 같이 나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기에 장계향의 심정이 잘 이해되고 공감이 간다. 어쩌면 그 시대 자체가
남성중심인 유교 사회였기에 장계향은 나보다 더 큰 아픔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여아라는 편견이 무색하게도
장계향은 뛰어난 덕성을 가진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 일찍이 문학에 눈을 떴다. 그 당시 나이에는 믿기 어려운
‘학발’ 시 같은 수준 높은 시를 써냈고, 그 당시 나이에는 믿기 어려운 실력이라고 한다. 시를 읽는다면 읽는
내내 감탄은 멈추지 못할 정도라 하였다. 나 또한 그 시를 읽어보니 어린 시절 쓴 실력이라니 내 자신이 부끄럽기
까지 했다.
장계향은 자신에게 꼭 맞은 신을 찾은 듯 학문 쪽으로 우월한 재능을 보였고, 주변사람 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아버지 장흥효도 그런 딸을 굉장히 어여삐 여기며 자랑스러워하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장계향이
남자아이였다면 하는 아쉬움을 애써 감추었다. 장계향은 당시에 학문은 그 시대에 남자만 논할 수 있었기에 학문의
길을 벗어나 여성으로서 할 일을 다 하기위해 학문 책을 접었다. 책을 접기까지 장계향은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여성으로써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학문을 할 수 없어 서글펐을까 ? 그 마음을 내가 다 헤아릴 순 없겠으나
나였다면 성별과 그 시대 배경이 밉고 원망스러울 것 이다.
장계향은 그런 내색도 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예기’라는 책을 폈다. 그 책은 남성은 하늘과도 같은 존재이며 여성은
남성의 옆에서 묵묵히 보필하는 것이 여성의 도리임을 알려주었고 그렇게 여성으로써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다. 이 구절을 보고 나는 여성은 왜 남성에게 이끌리며 살아야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니 오래 전부터 여성의
위는 남성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다가왔다. 왜냐면 내가 살아온 배경자체가 그랬으니 말이다. 우리 친가 쪽을 봐도
그렇다. 명절이나 어느 날을 보아도 우리는 삼촌, 아빠 등 남성과 식사를 다른 상에서 했다. 마치 계급을 매기듯이
당시에는 당연하다 느꼈지만 이제와 보니 이것이 남성주의 가부장제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사는 이 세대는
점차 가부장제에서 멀어져 예전과는 점차 변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때는 남성이 죽으라하면 시늉까지 해야한다하니
글에 써 있진 않지만 지금과는 비교조차 안될 만큼의 설움이 있을지 모른다.
예기를 다 깨우쳐 여성이 되었을 무렵 꽃다운 19세, 1616년 장흥효가 각별히 아끼던 이시명과 혼인을 치르게 된다.
장계향은 어머니의 가르침과 자신이 직접 책을 읽고 배운 것에 따라서 이시명을 보필했고 6남 2녀를 순산하였다.
또한 전처소생의 1남 1녀를 자신의 자식처럼 받아드려 보듬어 키웠다. 그리고 지아비와 힘을 합쳐 손수 자식들을
직접 훈육하기로 하고, 자식의 가르침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 정성이닿은 것인지 7남은 영남학파의 칠현자로
이끌었다는 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어느 어머니나 자식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마음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 어머니 또한 다르지 않다.
나는 중학교 시절 적응을 못하고 말 수가 적어 왕따를 당해 겉돌고 힘들어했었다. 내가 10대 시절 가장 힘들었던 때를
꼽으라 하면 이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학교에 있는 것이 절벽 끝자락에 서있는 것 마냥 아슬아슬하고 무서웠다.
그 밑에는 무엇이 있을까 떨어진다면 그 곳엔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싶어 너무 무섭고
지옥 같았다. 한 시도 학교에 있기 싫었다. 매번 핑계를 대며 학교가길 거부했다. 가게 되는 날이면 나는 아프다며
학교를 도중에 빠져나왔고 밤새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내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질 때 어머니의 가슴을
몇 번이고 쿵 하고 내려 앉았겠지 내가 소리 내 울 때 어머니는 마음 속 으로 더 크게 우셨는지 모른다. 자식의
울음소리는 어머니들에게 천둥과 같다 하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더 엉엉 울었다. 아마 천둥보다 더한 비바람
태풍이 몰아친 것과 같을 것이다. 울던 나를 한참 바라보시던 어머니는 언제나 똑같이 아기처럼 소리 내어 우는
내게 괜찮다 시며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내가 다시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셨다.
나를 달래시며 안아주신 따뜻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은 아직도 여운이 남아 나를 감싸 안아 준다.
그 품이 까마득해질 무렵 나는 어머니의 손을 보았다. 괜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손이 가는대로 만져보았다.
혈액순환이 잘 안되어 퉁퉁 부어버린 어머니의 손은 거칠고 따뜻했다. 얼마 만에 만져보는 손인가 싶은 와중에
엄마가 반대로 내 손을 어루만졌다. 희고 부드럽다하셨다.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올려 어머니의 변해버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분명 피부 결도 곱고 주름이란 걸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어느새 주름살도 깊어졌다.
언제나 모자라지 않게 나에게는 몇 십만 원이 되는 옷을 사주시고 정작 어머니는 시장에서 만원으로 티 2장을 샀다며
웃으시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가 어릴 적부터 가고 싶었던 간호과로 가게 됐을 때 나보다 좋아하시며 어린아이처럼
웃으실 때 그 때가 계속 생각나서 글을 쓰는 내내 울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어떻게 이렇게나 시간이 흐른 걸까 싶었는데
흘러버린 시간 안에서 나는 몇 번 아니 몇 백번이고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내 마음에 안든다 해서 비난의
목적지는 어머니였고 나를 위해주시는 행동인줄 알면서도 난 더 삐딱하게 굴었다. 내가 지금에서야 못을 박은 것을
빼내준다 해 그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이 자리를 빌려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어미와 같은 마음으로 장계향이 보살핀 사람들이 있다. 천하다하며 박대당하는 노비들을 차별하지 않으며
한글을 손수 가르쳐 주었고 여성 노비들에게는 여성으로서의 살아가는 일을 가르쳐 주었다. 노비들은 이런 장계향을
어머니 따르듯 존경하고 잘 따랐다. 그리고 17년 이라는 긴 세월동안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듯
시아버지를 보살폈다. 그러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며 길에는 피난민들이 들끓었다. 그 모습이 어느
모습보다 처참해 보기 힘들다 한다. 모습을 보고 장계향은 직접 나서서 수천 명의 피난민에게 식량을 나눠주었다.
서로 살기위해 남을 헐뜯을 때 장계향은 피난민들을 가슴으로 안아 그들을 진심으로 도왔고 그로 인해 수백 명이
전쟁 통에 버텨낼 수 있었다. 장계향은 자신의 식량이 바닥을 보여 당장 주저앉을 위기에도 남에게 자신을 바쳐가며
남을 도왔다.
계향이 남에게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예전부터 꿈 꿔오던 간호사라는 꿈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
으로 남을 보살펴야 하는지 장계향이 피난민을 보살핀 마음을 보고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바람이 매섭게
부는 겨울에 길가에서 작고 허리가 금방이라도 땅으로 꼬부라질 듯 허리가 굽으신 한 할머니를 보았는데 하이얀
도라지를 몇 바구니 내 놓으신 채 살갗이 베일 듯 스치던 추위에 한껏 웅크려 버티고 계셨다. 나는 다가가 도라지가
얼마냐 묻자 3천 원이라 했다. 이 추위에 버텨내는 이유가 삼천 원이라니 서글펐다. 할머니는 다 팔아야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겠지 라는 생각에 나는 3바구니 달라하자 고맙다시며 비닐봉지에 담으셨다. 3천원 보다 훨씬 더되는 양이였다.
나물의 양에 놀라있다 나는 만 원짜리를 건네고 나는 도망치듯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해 뛰었다. 뒤에서는 잔 돈 받아
가라며 부르시는 소리를 못들은 채 하고 계속 걸었다. 작은 돈이지만 그 돈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리 가벼울 수가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그 날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산 도라지를 보여
주자 빙그레 웃으며 기특하다 하셨다.
나는 중학교 시절 추위에 떠시는 할머니를 보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도라지를 샀고, 내가 간호를 배우는 데 있어 흥미를
가지지만 흥미만으로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 진정으로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장계향 또한
나의 중학교 시절과 같이 단순히 동정하는 마음으로 남을 도왔다면 자신을 아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버리며 헌신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 한 층 성장한 나는 장계향과 같이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통을 잊고 편안했
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크다. 장계향이 댓가도 없는 봉사를 하며 자신까지 험난한 세상으로 내몰렸고 가난에 늪에 들어서
빠지게 됐을 때 그럼에도 남의 손을 잡아 숨을 쉬도록 돕는 장계향은 피난민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장계향은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살아생전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보고 듣고 맛보고
배운 음식의 조리법이나 음식간의 조화를 직접 한글로 써 알리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음식디미방’이다.
이것은 시집 갈 딸에게 주려고 기록하였다고도 전해지는 한글최초의 조리서인데
자신이 직접 조리하고, 연구하여 긴 시간 끝에 만들어낸 조리서이다. 만드는 동안 뜻대로 되지 않고
어렵고 고민해야 할 순간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장계향은 또 자신이 아닌 그 당시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후세에 있을 우리를 위해 또한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쓴 장계향의 마음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장계향은 살아생전 위에 쓰여진 것 같이 공로를 많이 세웠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하나같이
장계향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고생하고 일생을 보낸 것 일까 ? 그 이유는 장계향이 마음이 그쪽으로 갔기
때문 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왜 장계향이 조선의 큰 어머니, 여성군자, 큰 별 이와 같은 칭송을 받는지 차츰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조선의 큰어머니란 칭송은 사람들을 대하는데 있어 어미와 같은 아끼고 자식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진정으로 대했기 때문 일 거라 생각한다.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문을 놓아
버려야 했던 그 시대의 배경이 한스럽고, 장계향이 안쓰러웠다. 내가 어른들이 모이시는 자리에 가면 매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이 있었다.
지금 공부 할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라는 말이다. 말씀하실 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배우는 것에 있어 그렇게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 어쩔 수 없이 놓아했던 학문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배우는
것에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로에도 여성이라는 그늘에 가려 지금에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나는 여성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올바른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깨달음과 교훈을 배웠다. 특히 장계향이
자신의 지아비와 자식을 극진히 보살피는 것을 보고 진정 이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들이 마음에 새겨 닮고 배워야 하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했다.
처음 ‘나눔은 작아도 크다’라는 책을 열기 전에는 앞서 말했듯 새로운 인물을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과 호기심이 많이
들었는데 책을 덮게 된 지금은 나의 꿈, 그리고 어린시절, 어머니 등 잊고 살았던 것이나 나의 장래와 같은 깊게 들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돌아보고 생각 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내게 돌아왔다. 아직 장계향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이 아닌 남성도 장계향에게
봉사정신이라든지 일생에 대해 배워가야 할 인물이다.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란 인물을 알게 되고 오늘 나는 많은 교훈생각도
배웠고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나 자신과 일생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 내가 너무 나만을 위해 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주저 없이 두 손 걷어붙이고는 도울 줄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서로 살기 바쁘고 단절 되었지만 나라도 장계향처럼 남을 먼저 챙기고 나선다면 세상은 조금이라도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장계향이 베풀고 나눈 많은 정과 사랑은 오늘 날 우리에게 전해져 많은 이들에게 교훈을 심어준다.
이 책을 읽고 장계향이라는 인물을 접하게 됨으로써 나는 너무나 가까이 있지만 잊고 살던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깨우치게 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 내게 숨을 불어 넣어주시고, 주저앉아 더 이상 설 수 없을 때 온
힘으로 나를 일으켜 다시 서게 해준 어머니를 다시금 떠올리게 해주었고, 나의 장래를 향해 더 가까워지고 깨달음을 준
장계향 여중군자님에게 감사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여성신문사사장상>
울타리를 넘어, 김휘연
능소화가 소담히
울타리 넘어 담에서 담으로 조용히 이어 피어나는
님의 향기가
시공간을 넘어 전해지는 여름 밤입니다.
여기 지금 내 자리에서 나를 가꾸고 자녀를 가꾸고
이웃을 가꾸어 온전한 삶을 가꾸어 간 님의 향기를 느껴봅니다.
여인의 삶을 살아내기도 벅찼을
훌륭한 성품으로 나를 갈마하고 자녀로 스미게 하는
자녀를 독려하여 사회의 대들보로 세우는 그대는 여장부이십니다.
음식하나에도 정성가득하고
함께 나누는 마음에 덕이 흘러넘치니
이 또한 모두의 마음을 이어주는 대모이십니다.
이제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의 마음이 되어보고 그대의 손이 되어보고
그대의 머리가 되어보는 조용한 이 시간은
나에게는 명상입니다.
시공간을 넘어
내 한계에 맞닿아 울타리를 넘어 사유하는 이 시간
한 시대의 삶을 알뜰하고 당당히 가꾸어 간 여인을
지금 이 공간에서 만나는 이 시간
이제 나를 만납니다.
지천명을 바라보며
더욱 현명하기를 더욱 알뜰히 시간을 영위하기를
더욱 품성을 바로 세우고 흘러넘치게 하기를
더욱 성큼성큼 울타리 넘어
담을 이어 이어 소담히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최우수상>
1. 장계향-시공을 넘어 우리에게 온 군자, 장경순
시서의 경전을 읽어
학문을 시작하고
예를 읽어
학문을 끝내니
선비로 시작하여 군자로 마친 여인
천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가
너무도 무겁고 또 무거운 짐이어서
강하지 않으면 맡을 수 없거니와
지혜가 없으면 그 또한 분별하기 힘드네
딸의 도리로 가문을 세우고
어머니의 도리로 자녀를 양육하였으니
그 지극한 도리는 사랑이라
시에 능하고 서화에 능해도
실천하지 않고 깨닫지 않으면
그 재주만 드러내 즐겼을 것을
학문에 근면하고 돈후해지도록 살았으니
시공을 넘어 불리어지고도 남을 이름
오늘에는 禮가 땅 위에 구르고
옛 성현의 말씀이 서가에 묵향도 없이 앉아 있어도
길 아닌 길 위에서 도리를 찾으니
여중군자
그의 삶이 더욱 귀한 이유라네.
2. 아식兒息에게, 김현묵
이제 이 어미는 늙고 병까지 들었으니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그리하여 정신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잠시 돌아보며 필을 들어본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내 일생 동안 나와 함께 했던 두 가지 생각은 교육敎育과 애민愛民이었다.
가슴에 품었던 그 두 가지 생각이 있었기에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잘 이겨내며
살 수 있었다.
먼저 내가 교육에 대한 눈을 일찍 떴던 것은 너희들의 외조부 경당敬堂 어르신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랐다. 아들이 없었기에 너희들 외조부께서는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여염집
규수들은 글도 제대로 깨우치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외조부께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에 머물지 않고 배운 것을 이웃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쓰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 중에도 살림살이를 배우고
익히며 틈틈이 한시를 지었고 그림을 그렸다.
내 나이 열 살 무렵에 너희들 외조부께서 제자들에게 ‘원회운세元會運世’를 강론하시다가 내게 대뜸 질문을 하셨다.
“회會는 무엇이고, 원元은 무엇이냐?”
“회는 1만 800년이고, 원은 12만 9,600년입니다.”
그 자리에서 암산을 하여 즉시 대답을 하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암산暗算의 천재라고 말했던 일화이다. 천재라기보다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던 마음가짐으로 강론을 들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답을 낼 수 있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이 있지만 무엇을 할 때는 열심히 정신을 집중해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배우고 익히는 일에는 정신을 더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도 공부를 하는 것처럼 혼을 불어넣어서 해야 하는 것이다. 매사에 혼을 불어넣는 마음가짐 없이 환경과 나이를 탓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어엿한 선비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으로 너희들을 훈육했기 때문
이다.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을 오면서 나 스스로는 서책을 멀리하였지만 교육의 중요함을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기에 너희들에게 마음껏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 임금님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너희의 부친이
세상을 등지고 영양 석보에 은거했을 때도 그냥 허송세월 하지 말고 후학을 양성할 것을 권면했다.
또 하나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애민愛民이었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쉽지만 내 이웃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무와 숲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듯이 이웃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돌아보지 않으면 나무도 홀로 살아
남기 힘든 법이다.
너희들도 잘 알고 있듯이 내가 어려운 이웃들을 구휼救恤했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내 입으로 그 일들을 다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 되어 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시집오기 전에 있었던 일 하나만 하고자 한다. 어렵게 짠 베를 여종이 실수로 불에 태우는 실수를 범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여종에게 함부로 야단치지 않았다.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을 다해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였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웃집의 계집종들도 내 밑에서 종살이 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고 전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저들을 대하니 저들 또한 진심으로 내 말에 순종하며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엄하게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하지만 사람은 진심이 통하게 되어 있다. 말 못하는 짐승들도 주인을 알아
보거늘 하물며 같은 사람들이야 진심이 더 잘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사람을 섬기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성인이다.
내 나이 열아홉에 재령 이씨 집안에 시집을 와서 시부모님을 비롯해 부모를 일찍 잃은 조카들 다섯, 시동생 둘, 전처소생 남매까지
바라지를 떠맡았다. 시집살이가 힘들고 어려울 수도 있었지만 남들에게도 마음을 나누거늘 하물며 집안사람들에게 못할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남들은 시집살이 힘들게 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렇게 본심으로 바라지를 한 은덕이었는지 너희들 모두 학명을 떨칠 만큼 기대 이상으로 잘 자라주어 이 어미는 고마울 따름이고,
너희들이 학명을 떨쳐주었기 때문에 이 어미가 과분한 여중군자女中君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제 내가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내 놓았던 일을 잠깐 생각해 보고 싶구나. 음식디미방을 쓰게 된 마음 밑바탕에도 이미 말했던
“교육敎育과 애민愛民”이라고 하는 큰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여성이 글을 쓰고 더군다나 책을 낸다는 것은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무지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고초를
겪는 일이 생긴다 할지라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내가 교육을 통해 배웠고, 또한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음식디미방을 만들 수 있었다. 내가 배우고 익혔던
바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한글만 읽을 줄 알면 음식을 만드는데 별 어려움 없이
보고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그냥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음식 만드는 법을 정리한 것이다. 양반가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서민들도 쉽게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 체계적으로 정리된 조리법이 있으면 음식을 만드는데 실수를 줄이고, 실수를 줄이면 낭비 없이 음식을 만들 수 있어 절약도
된다.
면병류麪餠類 18개 항목, 어육류魚肉類 74개 항목, 주류酒類 및 초류醋類 54개 항목으로 분류 하였다. 가능하면 음식의 재료에
따른 분류를 하려고 애를 썼다. 이 책이 널리 전해져서 애민愛民하고자 했던 내 마음이 전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음식디미방이
어느 한 사람의 손에만 들어가면 그것으로 사장死藏되어 버릴 수 있기에 여식女息에게는 필사를 하여 가져가도록 하였다.
나는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너희들의 어미 장계향이 마음 깊이 품었던 교육과 애민을 너희들도 항상 실천하고, 자만에
빠져 행실을 그르치지 않도록 당부하며 필을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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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호 [문화/생활] (2017-07-17)
이유진 여성신문 기자 (bazzi@womennews.co.kr)
*여중군자 장계향 연구회에서 논의할 과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의견을 개진해 주시기를 앙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