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에 매니아에 최초로 작성했던 글(5월1일)을 아이 러브 사커에 그대로 퍼서 올립니다. 그 이유는 이곳에도 역시 이점에 대해 똑같이 궁금해하는 젊은 축구팬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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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rieamania.com/xe/?mid=calcioboard&search_keyword=%EC%B0%A8%EB%B2%94%EA%B7%BC&search_target=title_content&document_srl=10673110
http://www.serieamania.com/xe/?mid=calcioboard&search_keyword=%EC%B0%A8%EB%B2%94%EA%B7%BC&search_target=title_content&document_srl=10669491
질라르니노와 차범근의 비교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게시물을 작성한 붉은밀란님이 골수나 커리어 같은 면에서 오히려 질라르니노가 차범근보다 나은면도 많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동급이고 아무리 잘쳐줘도 아넬카,요크같은 선수들과 비슷한 급인데 유독 한국사람들만 애국심버프로 택도 없이 훨씬 높은 급인 셰브첸코,드록바등과 비교하고 있다고 말하시더군요. 그리고 그 의견에 동조하는 분들도 꽤 계시구요.
제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료를 통해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길게 끌기도 귀찮고 그만한 내공도 없습니다:;)
그 증거자료는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시절 킥커지 평점입니다.
공격수별로 분류
1979/80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1980 발롱도르
2. 케빈 키건(2.42) 1979 발롱도르
3. 차범근(2.45)
4. 지그프리트 헬트(2.52)
5. 라이너 게예(2.67)
차붐
http://www.kicker.de/news/fussball/bundesliga/vereine/1979-80/10430/vereinsspieler_bum-kun-cha.html
2,45
키건
http://www.kicker.de/news/fussball/bundesliga/vereine/1-bundesliga/1979-80/hamburger-sv-12/11410/spieler_kevin-keegan.html
2,42
루메니게
http://www.kicker.de/news/fussball/bundesliga/vereine/1-bundesliga/1979-80/bayern-muenchen-14/12573/spieler_karl-heinz-rummenigge.html
2.32
1980/81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24). 1981 발롱도르
2. 프리드헬름 푼켈(2.74)
3. 만프레드 벅스뮬러(2.79)
4. 베른트 홀첸바인(2.81)
5. 게오르그 볼케르트(2.83)
6. 차범근(2.85)
1981/82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4)
2. 뤼디거 벤첼(2.53)
3. 라스 바스트룹(2.59)
4. 로날드 보르허스(2.64)
5. 만프레드 벅스뮬러, 우베 라인데르스(2.82)
7. 차범근(2.87)
1982/83
1. 루디 펠러(2.32)
2. 칼 하인츠 루메니게(2.32)
3. 차범근(2.52)
4. 위르겐 밀렙스키(2.63)
5. 라이너 게예(2.84)
1983/84
1. 칼 하인츠 루메니게(2.31)
2. 루디 펠러(2.55)
3. 클라우스 알로프스(2.58)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2.79)
5. 프랑크 밀(2.84)
6. 차범근(2.91)
1984/85
1. 프리드헬름 푼켈(2.81)
2. 클라우스 알로프스(2.81)
3. 클라우스 피셔(2.82)
4. 루드비히 쾨글(2.96)
5. 칼 알고어(2.97)
15. 차범근(3.31)
* 루메니게는 인테르로 가고 펠러는 득점 2위 하고도 평점 6위..
1985/86
1. 칼 알고어(2.73)
2. 만프레드 벅스뮬러(2.85)
3. 허버트 바스(2.85)
4. 크리스티안 슈라이어(3.00)
5. 토마스 알로프스(3.13)
7. 차범근(3.18). 17골로 리그 득점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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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면 알겠지만 17골 넣어 득점 커리어하이였던 85-86시즌 평점(3.18)이 12골 넣은 데뷔시즌79-80 평점(2.45)에 비해 훨씬 낮습니다. 이것만 봐도 골수로 비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데뷔시즌(79-80) 평점2.45를 보면 당해년도인 1980년도 발롱도르 수상자인 루메니게 2.32 전년도인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인 케빈 키건2.42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안나는 수준입니다. 공격수중에서는 3위 평점이죠.
심지어 키건보다 낫다고 평가하는 현지 축구전문가도 있었습니다. 1980년 유에파컵결승전중계한 BBC영상에서 잘라낸 화면입니다.http://www.youtube.com/watch?v=i1CFZjQ_cbs
"bum kun cha rated as NO1 Foreign player in germany the last season"(지난시즌 독일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평가받은 차범근)
독일 진출한지 불과 1년밖에 되지않은 상황& 발언자가 케빈 키건과 같은 국적을 가진 영국인 해설자라는 점을 볼때 차범근을 과대평가해서 저런 멘트를 해줫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케빈키건 역시 같은 용병신분이었고 78,79연속 발롱도르를 수상할만큼 대단한 선수였는데 바로 전년도에 발롱을 수상한 자국국대주장대신 차붐을 띄울 필요가 있었을까요? (평점만 봐도 거의 대등한 평점이죠. 키건의 네임밸류로 인해서 평가에 붙을 약간의 어드밴티지까지 따진다면 사실상 이 시즌은 차붐이 더 나았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겁니다.)
1위 알란 시몬센 2위 빅상트 리자라쥬 3위 차범근 4위 에우베르 5위 장 마리 파프 6위 케빈 키건 7위 토니 예보아 8위 윈튼 루퍼 9위 브루노 페차이 10위 클라시미르 발라코프
(혹자들은 차범근이 1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분데스리가에서 뛰었기 때문에 다른 평가자들에 비해 어드밴티지를 받은 결과일뿐이라고 폄하하던데...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케빈키건이 있던 시절 그를 제쳐버렸던 선수가 차붐이었습니다. )
거기에 당시 차붐의 포스를 증명해주는 자료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에르하르트 헨샤이트라는 독일시인이 지어준 차붐 찬가라는 헌정시입니다. 이게 지어진 년도가 1980년이더군요. 유에파컵 우승 직후 지어준 걸로 보입니다.
(세세한 내용 읽어보면 ㅎㄷㄷ한 찬사가 많습니다.)
데뷔시즌 불과 1년만에 독일,아니 전유럽을 휩쓸어버린 포스를 보여준 아시아출신 용병..이게 바로 객관적으로 보이는 차범근의 당시 포스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궁금해지는 점...저렇게 유럽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게 만든 차범근의 진가는 골이 아닌 무엇이었을까요???(이건 차두리를 보면 좀더 쉽게 연상이 되실 겁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4EbKJRfI60
차범근의 질주장면을 모아놓은 플레이영상입니다. 영상 맨 처음부분이 86월드컵 우승팀 아르헨티나,82월드컵 우승팀 이탈리아 그 다음이 80년 유에파컵 결승상대였던 보루시아 MG, 그리고 맨 마지막의 역습으로 골 넣는 장면& 수비수 서너명 개인기로 무너뜨리고 돌파하는 장면은 상대가 바이에른 뮌헨입니다. 상대의 클래스는 의심의 여지가 없죠.(더욱이 월드컵의 영상은 만33세였던 시절입니다.)
차범근의 별명인 차폭탄 cha-boom(bomb)...갈색폭격기 (brown bomber) 등은 바로 이러한 차붐의 폭발적인 드리블을 이용한 플레이 스타일때문에 붙여졌던 거죠.
왜 프랑크푸르트나 레버쿠젠이 중하위권실력에서 차붐영입이후 단숨에 중상위권실력으로 상향되고 차붐의 존재로 2번이나 유에파컵 정상에 올라섰을까요?
그건 독일선수들 특유의 끈끈한 팀플과 조직력이 뒷받침되고,,,거기에 화룡점정을 찍을...수비에서 공격으로 역습시 차붐의 전광석화와 같은 돌풍 역습과 그후 동료와 협동에 의한 공격력 배가에 있었습니다..
단순히 골만 넣으려고 했던게 아니라 수비까지 깊숙히 내려와서 공격차단후 역습하는 그 다이내믹함은 차붐의 전매특허였습니다... 그 속도... 차붐을 당대최고 라고 언급해도 지나치지 않을겁니다.(구소련의 올레그 브로킨, 폴란드의 보니에크는 차붐보다 훨씬 최전방 스트라이커에 가까웠죠)
분대스리가 최고공격수중의 한명이라는 차붐이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며 핵심선수로 엄청난 활동량을 보엿던거 .
그리고 그것에 맞게 큰경기에서 골을 넣었다는거...
이것이 중하위급 팀이 중상위로 오르고 유에파컵을 드는 가장 큰 이유였던겁니다..
지금도 한국축구팬들의 상당수는 차범근이 과연 어떤 스타일의 선수였는지도 제대로 파악못하고 혹자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맹목적인 찬양 혹은 의도적인 폄하를 당하고 있죠. 왜냐하면 그가 어떤선수였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잘 모르니까 평가에 있어서 양극단으로 흐를수밖에 없는거죠..
p.s: 예상반박들.
1.차범근의 데뷔시즌 킥커지 전체평점은 20위권이었다??
루메니게가 12위였고 케빈키건이 20위였다는 걸로 대신하겠습니다.
한국에 있을때 그의 원래 포지션은 라이트 윙이었습니다. 고3이었던 19세 데뷔해서 27세에 독일진출하기전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라이트윙으로 뛰었고 독일진출전 1,2년정도는 김재한과 함께 최전방 투톱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은 한국국대 a매치 득점1위기록 55골을 넣었죠. 주포지션이 라이트윙어였던 선수가 말이죠.
분데스리가에 가서도 이러한 플레이 성향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글 최하단 링크자료에 있는 스페셜영상,분데스시절 1경기 볼터치 모음등을 보면 최전방 스트라이커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이드를 파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다시말해 정형화되지 않은 매우 변칙적인 플레이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요즘수비수들이 사이드에서 뛰다가 중앙으로 침투해 득점하는 호날두를 막기 힘들어하는것처럼 당시 분데스수비수들도 최전방에서 어느새 사이드로 빠져 공간을 마구 헤집어놓는 차범근을 막기 힘들어했습니다. 물론 사이드로 빠지다보니 득점수는 줄게 되었지만 어시는 많이 올렸죠. (차범근 본인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득점수와 비슷한 어시를 올렸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도 또 한가지는 그의 매우 이타적인 성격입니다. 본인 스스로도 자서전에서 '펠레,마라도나,굴리트처럼 담대하지 못하고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고 말한적이 있었고(이런 성격의 선수가 스트라이커에게 중요하다는 이기심,욕심을 심하게 부릴수가 있었을까요?)
동시대 그의 플레이를 본 연세지긋한 올드팬들도(저는 그런분들을 몇명 알고 있습니다.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제가 차붐세대가 아니다보니 직접 본 분들에게 자꾸 귀동냥을 청하게 되더군요.)골대 바로앞까지 다 돌파해놓고 옆동료에게 밀어줘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하더군요.(이런 선수를 동료들이 싫어할래야 싫어할수 없죠. 낯선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배타심을 누그러뜨리고 팀에 적응하는 데는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했을겁니다. 반면에 개인의 스탯을 쌓는데는 그만큼 불리하게 작용했을겁니다.)
요약; 사이드 지향적인 플레이스타일+ 이타적인 성격
3. 저렇게 대단한 차범근은 왜 빅클럽에서 못 뛰었냐?
일단 당시 세계축구계의 구조가 지금과는 많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당시는 현재처럼 축구가 고도상업화, 산업화된 상황이 아니었고 현재처럼 빅클럽과 중소클럽의 재정격차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90년대중반 있었던 보스만 판결이후 클럽간 선수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유럽축구가 양극화되었고 중소클럽,리그가 몰락했죠.
따라서 중소클럽에서도 팀의 간판이라고 할만한 특급스타 한명정도 보유하는 건 어려운일이 아니었죠. 그예로 중위권 클럽이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에게 독일에서 세번째로 많은 연봉을 줬었죠. 요즘 볼튼이나 선더랜드같은 클럽에서 epl에서 세번째로 많은 연봉은 도저히 줄래야 줄수가 없죠. 그냥 이적시키는게 답이죠..
프랑크푸르트에서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이유도 돈을 가장 많이 제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대제약회사 바이엘의 스폰서)
4. 당시 분데스리가는 세리아에 밀린 허접리그였다?
차붐이 처음 분데스에 가던 시절 분데스리가의 유에파랭킹과 점수입니다.
http://kassiesa.home.xs4all.nl/bert/uefa/data/index.html
2위인 잉글랜드리그와 큰 차이로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에파랭킹이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클럽의 국제대회 성적에 의해서 산정됩니다. 그런데 당시 챔스나 유에파컵 우승을 보면 잉글랜드 클럽(리버풀,노팅엄 포레스트)들이 대부분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그러면 잉글랜드리그가 당연히 유에파랭킹 1위를 차지해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게 논리적인데 실제 랭킹이 그렇지 못한 이유는분데스리가 팀들은 '평균적인 국제대회성적'이 좋았다는 겁니다. 바로 전력이 비교적 평준화되어 있었다는 소리죠.당시 분데스리가에 뛰었던 스타선수들의 면면과 그 소속팀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바이에른 뮌헨=프란츠 베켄바워,폴 브라이트너, 유프 헤네스, 칼 하인츠 루메니게, 융한스.
함부르크 SV- 케빈 키건, 펠릭스 마가트, 후루베쉬, 만프레도 칼츠.
도르트문트-아브람직.
카이져스 라우테른= 한스 브리겔
샬케04-클라우스 피셔.
FC쾰른-토니 슈마커, 쿨만, 피에르 리트바르스키
슈투트가르트의 한스뮐러, 쌍둥이 푀르스터 형제, 위르겐 클린스만
보루시아 MG- 마테우스,알란 시몬센
프랑크푸르트-휄첸바인, 그라보스키, 차범근그렇다고 해서 분데스리가가 오늘날의 빅리그에 비해 그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는 것 아닌가('에이 알고 보니 그냥 도토리중에서 좀 큰 도토리일 뿐이잖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다 해도 그당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 낮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바로 70년대 80년대초 발롱도르 수상자 면면입니다. 6년연속 분데스리가에서 배출되고 있습니다.
1976 : 프란츠 베켄바우어 ( 서독 / 바이에른 뮌헨 )
1977 : 알란 시몬센 ( 덴마크 /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 )
1978 : 케빈 키건 ( 잉글랜드 / 함부르크SV )
1979 : 케빈 키건 ( 잉글랜드 / 함부르크SV )
1980 : 칼:하인츠 루메니게 ( 서독 / 바이에른 뮌헨 )
1981 : 칼:하인츠 루메니게 ( 서독 / 바이에른 뮌헨 )도토리 중에 좀 큰 도토리라면 저렇게 일방적으로 1개리그에 발롱도르 수상자를 몰아줄수가 없죠. 한두번 정도는 타리그에 양보해야 정상이죠.따라서 오늘날의 빅리그와 그 구조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당시 분데스리가가 세계최고의 리그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하지만 오늘날의 빅리그처럼 재정능력이 뛰어난 빅클럽들이 뛰어난 선수들을 다 쓸어모으는 식으로 만들어진 형태가 된 최초는 세리아가 맞겠죠. 따라서 세리아를 최초의 상업화된 빅리그로 봐도 별 무리는 없을것 같습니다.(솔직히 당시 분데스리가가 수준높았던 것은 당시 세계최강수준으로 선수층이 두터웠던 자국선수들의 힘이 컸죠. 물론 알란 시몬센, 케빈 키건 같이 뛰어난 외국선수도 있었지만요. 그 이후 세리아에서 큰 돈 써서 분데스리가의 스타들을 빼내가면서 1위리그의 자리를 내주게 됩니다.) 이런 리그에서 최고의 용병, 리그에서 한손안에 드는 공격수였던 선수가 차붐이었죠...더욱이 병역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나이로 27살의 나이에 독일에 가서 이뤄낸 결과라고 보면 더 대단해지죠.오늘날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어느정도일까? 세계 탑5~ 최소한 탑10안에 들어가는 공격수라고 봐야하지 않을까요?뭐 무슨 말을 해봐야 변명으로밖에 안들리실 분들에게는 이것도 다 소용이 없을것 같지만 이정도로 마칠까 합니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졋네요..::===================================================================마지막으로 차범근에 관한 자료들을 링크합니다.영상자료: http://www.mgoon.com/mystation/folder.htm?id=10527407&folder=10558466&page=1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선수를 평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기록, 수치도 아닌 '기억' 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퇴후, 이적후 경기장에 찾아왔을때 팬들에게 따뜻한 박수를 받는 선수가 뛰어났던 선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기록은 근거로 남을수 있겠죠.
허정무 감독님이 psv에 갔을때, 차범근 감독님이 독일에 갔을때 두분다 따뜻한 환영을 받았죠.
공감합니다..
한마디로 줄여서 이 말이겠군요. "박지성도 단순히 스탯만으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게 아닌 것처럼, 차범근 또한 그러했다."
우선 이런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글이네요 아시아선수는 이타적이다 헌신적이다 이런게 차붐이 시초였군요
정말 좋은글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차붐같은 아시아 선수는 나오지 않을거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순간 왜 루니가 떠올랐을까요; 루니의 장점이 단순히 득점력이 아니듯이 차붐 역시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