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강릉을 떠나서, 묵호에서 문제아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만약 강릉이었다면, 그렇게 양아치 같은 어린 깡패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엄격한 교육도시이자, 오래된 성씨의 도시가 강릉이다. 강릉 김씨, 강릉 최씨 등이 여전히 활개를 치는 유서 깊은 오래된 도시다.
신라시대 명주군 왕이었던 강릉 김씨 사당은 여전히 태백산맥의 무성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매년 제사를 지낸다.
오래되고 유명한 고등학교도 많다. 축구의 라이벌이었던 강릉상고와 강릉농고의 축구시합은 단오제의 가장 큰 볼거리였다.
내가 다녔던 강릉고는 전국에서 서울대에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명문고였다.
그런데 나는 강릉의 그런 점이 싫었다. 내가 다녔던 명문고의 교육 방법이 지겨웠다.
묵호는 자유의 도시였다.
문제아의 소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사춘기 소년에게는 딱 맞는 곳이었다.
나는 급속도로 망가졌다. 평생 싸운 횟수보다 몇 배나 많은 싸움을 했다. 매일 전쟁이었다.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은 꿈속에서도 없었다.
그 시절은 내 삶에서 불과 4 개월이 되지 않은 짧은 기간이었다.
사춘기 시절의 기억들은 거의 사라졌지만, 묵호에서의 기억은 죽어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아있다.
묵호역 굴다리 밑으로 석탄가루가 흩날렸으며, 묵호항 어판장은 비린내와 고기 썩은 냄새가 가득 찼으며, 묵호 극장은 술집 여자의 껌 씹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였고, 발한 삼거리는 어부와 한복 입은 술집 여자와 외국 선박에서 외출나온 외국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발한 삼거리와 묵호극장 부근에는 몸을 팔기 위해 창녀들이 의자를 갖고 나와 앉아 있고, 지나가는 남자들을 향해 추파를 던졌다.
어린 깡패였지만 순진한 사춘기 소년에 불과했던 나는 수줍고 창피해서 그녀들 앞을 제대로 지나가지 못했다.
묵호라는 마을은, 어린 소년을 말썽꾼으로 만들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며 온 마을이 필요하다”
이 말은 나에게 틀림없이 들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묵호는 나를 다시 한번 변신을 시켰다.
창녀촌에서 나의 순결을 준 어린 창녀였다.
“남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서......”
그녀의 그 한 마디가 나를 바로잡았다.
남동생 대학 보내기 위해 몸을 판다는데, 나는 왜 이따위 짓을 하는가.
그녀 덕분에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묵호에 그녀를 찾아 다시 왔지만, 그녀는 가고 없었다.
그 후 데모를 했고 일본 유학까지 갔다 왔다. 소설책도 냈다.
늙은 장삿꾼이 되어 묵호에 왔지만, 여전히 그녀는 없다.
새벽마다 묵호의 거리를 걸으면서 항상 그녀를 느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