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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 일타(東谷 日陀)스님
스님은 1929년 9월 2일(음력 8월 1일) 충청남도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연안 김씨 봉수공을 아버지로, 광산 김씨 상남씨를 어머니로 하여 4남매 중 삼남(三男)으로 태어났습니다.
1933년(5세), 사는 마을로 탁발을 하러 온 스님을 따라다니며,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독경하는 소리를 듣고 그날 모두 외웠을 뿐 아니라, 지옥 · 천당 · 극락 등의 이야기와 인과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믿었으며,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마음에 깊이 새겼으니, 전생부터의 불연(佛緣)은 참으로 지중(至重)하였습니다.
1936년(8세) 공주 본정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42년(14세) 친가 외가의 식구 41 명이 모두 출가함에 따라, 보통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양산 통도사에 계신 고경 스님을 찾아가 출가득도 하였습니다.
1945년(17세) 현 보광고등학교인 통도사립중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18세) 정월에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자, 순천 송광사 삼일암 선원의 효봉 스님 회상에서 첫 하안거를 하고 속리산 복천암 선원에서 동안거를 하며 참선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불교공부의 기초가 미진함을 느끼고,
1947년(19세)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하여 경학(經學) 공부에 몰두하였으며, 이때 스님은 불경에 대한 문리(文理)를 터득하였습니다.
1949년(21세)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大敎科)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으며,
1950년(22세)부터 다시 운수납자의 길로 들어서서 진양 응석사와 범어사, 성주사 선원 등에서 금오 · 동산 · 구산 · 성철 스님을 모시고 정진하였습니다.
1953년(25세) 자운율사의 권유로 천화율원(天華律院)에서 율장전서를 열람하고 계법(戒法)을 정립하였으며,
1954년(26세) 강원도 오대산 서대에서 혜암 스님과 함께 생식과 장좌불와로 하안거를 마친 뒤, 적멸보궁에서 하루 3천 배씩 7일기도를 하고 연지연향 발원을 했습니다.
허공과 같은 법신자리에 절하옵고
평등한 일심으로 간절히 임하나이다
오직 가피를 드리우시어
저희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소서
발원을 마친 뒤 스님은 세속과 관련된 사람노릇에 대한 미련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중노릇만 잘하리라" 결심하며 오른손 네 손가락을 심지로 삼아 불을 붙였고 한 밤중에 시작된 연비는 날이 환해지면서 끝이 났습니다.
이듬해인 1955년(27세), 스님은 경북 봉화군 소천면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가 동구불출, 오후불식, 장좌불와를 지키며 홀로 6년의 결사(結社)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하다가 1956년 음력 3월 22일에 큰 환희의 경지를 이루어 게송을 지었습니다.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
깊은 산 높은 봉우리 위에 앉아 산새와 솔바람 소리를 벗 삼으며 깊은 삼매의 도를 이루었던 일타 큰스님!
노년에도 스님께서는 이 태백산에서 정진할 때가 "참으로 좋은 시절" 이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태백산 6년 정진을 통하여 정법(正法)과 대원(大願)과 대행(大行)을 구족하신 스님은 1960년(32세) 산에서 내려와 걸림 없는 교화의 길을 열어 보였습니다.
종단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종회의원 · 교육의원 · 법규의원 · 감찰위원 · 역경위원 등을 맡아 정법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언설변재(言說辯才)를 갖추었던 스님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대법사로 추앙 받아, 전국의 여러 사찰에서 걸림 없는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와중에서도 스님은 해인사, 화엄사, 통도사 극락암 등의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 · 동안거 결제에 한차례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45세 때일 1973년, 스님은 인도의 팔대성지 등과 동남아시아 10여 개 국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면서 불교의 뿌리와 우리불교의 장단점을 살폈으며, 이듬해에는 유럽 10여 개국을 순방하였습니다.
그때 스님은 ″겉모양이나 언어, 문자를 떠난 마음이야말로 세계 어디에서나 통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귀국하자 곧바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다시 들어가 안거정진 하였습니다.
1976년(48세) 해인총림의 율주(律主)로 피임된 스님은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 계율과 관련된 여러 책을 발간하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일제강점기 때부터 무너졌던 이 땅의 계율을 재정립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1980년(52세)부터는 미국 LA의 고려사(高麗寺) 포교를 시작으로 2년 동안 북미, 남미, 중미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렸습니다.
1987년(59세) 봄, 스님은 ″간경화″라는 난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14년 전 인도로 갔을 때 옮은 간염을 방치하여 간경화로 진행된 것입니다.
이러한 큰 병이 찾아들었어도 스님은 오히려 정진으로 일관하며 더 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1990년(62세) 봄, 스님은 지리산 칠불암으로 들어가 용맹정진하시며 다음의 시를 남겼습니다.
약과 병을 함께 다 놓아버리고
아자방 한가운데 앉았으니
멀리 바라보니 흰 구름이 나르고
가까이 들으니 두견새가 우는구나
옛 성인의 자취를 좇아 생각하니
이 아자방에서 큰 기틀을 얻으셨도다
나도 여기에서 묵언정진하며
남은 해를 여여하게 보내리라
죽음을 넘어선 정진으로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은 스님을 1992년부터 불자들의 올바른 신행 생활을 위해 집필을 시작하셨습니다.
알기 쉽고 깨달음이 깊은 저서를 통하여 일일이 접견할 수 없는 불자들을 교화하기 위 해 글을 남기신 것입니다.
<기도>, <생활 속의 기도법>, <윤회와 인과응보 이야기>, <시작하는 마음>, <영원으로 향하는 마음>, <자기를 돌아보는 마음>, <불자의 기본예절>, <범망경보살계 5책>, 법어집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등 20권에 가까운 책은, 스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금에도 우리 곁에 남아 우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97년(69세)에는 일어판으로 <불안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는 불교의 기도> 라는 책을 일본 법장관(法藏館)에서 출판하여, 일본의 ″좋은 책 10선″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3년(65세) 때는 대한불교조계종 전국 구족계 단일 계단 전계 대화상으로 추대되어 모든 승려들에게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를 수계하는 중임을 맡았으며,
1994년(66세) 5월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으로 추대되셨습니다.
그리고 해인사 지족암에 선방을 만들고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조실로 계시면서 후학을 지도하셨습니다.
1996년(68세)부터 스님의 몸은 열반을 감지했음인지 생사리(生舍利)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연비를 한 오른손에서 한 달에 한두과 또는 세과씩 나와 열반하시기 전까지 1백여 과의 사리가 나왔습니다.
그 사리중의 일부는 증장(增長)하거나 분신(分身)을 하여 여러 개로 나누어지기도 하였습니다.
만년에 스님은 자주 말씀을 남겼습니다.
"다음 생에는 지구상의 최강국인 미국에서 태어나 거룩한 상호를 갖추고, 학업을 마치면, 한국으로 와서 출가하리라. 그래서 젊은 나이에 부처님과 같은 대도(大道)를 이루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이 땅의 불교를 세계에 펼치리라."
이 말씀처럼 스님은 3년 전부터 매년 가을철이 되면 미국을 찾았습니다.
특히 하와이에 오래 머물며 ″염화시중″의 화두를 놓지 않고 마지막 회향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1999년(71세) 11월 22일 미국 하와이로 건너간 스님은 11월 29일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상좌 혜인, 혜국, 성진, 도범 등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수서하셨습니다.
하늘의 밝은 해가 참 마음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옛 거문고 타는구나
생사열반 이 모두가 오히려 꿈 이러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서로 방해롭지 않네
게송을 남긴 스님은 편안한 모습으로 열반에 드셨으니, 세수는 71세가 되시고 법랍은 58년이십니다.
#불자의마음가짐과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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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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