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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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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42. 난 정말 괜찮아.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짓누르다 못해 어딘가로 날 깊숙하게 끌고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너무 울어 퉁퉁 부어버린 눈은
더이상 눈물을 쏟아내면 쓰라림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지 알아서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다.
침묵 침묵 침묵 그리고 또 침묵.
더이상 견딜 수가 없는 그 무거움에 헛소리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나 내던져버릴까 하고 생각할 쯤 유진태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해봐도, 거짓말이 아니니까 소용이 없겠죠?”
이미 내가 말한 것이 자신이 모르고 있을 뿐이었던 ‘진짜 진실’이라고 받아들인 듯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엔 착잡함이 묻어나왔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계속 부정할 수는 없는 진실 앞에 유진태 감독은 꽤나 위태로워보였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유주아의 죽음부터 지금까지 5년을 거짓된 진실을 사실로 믿고 살아왔을 테니 의미가 사라져버린
자신의 지난 날과 복수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질까.
그리고 주체할 수 없을정도의 죄책감은 어찌한단 말인가.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어요. 어차피 기사 터졌는데.”
기사가 터지기 전에 당신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나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곽하주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허탈한 빈웃음을 내뱉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빠르게 대답하자 유진태 감독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다.
소파에 앉아있는 나와 식탁 옆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난 피하지 않았고, 그는 피했다.
“말…해줄 수 있어요?”
“어디서부터, 어느 것부터 얘기 해드릴까요?”
“전부 다요. 초하씨는 알고 나는 모르던 것들을 전부 얘기해줘요.”
힘겹게 내뱉어진 유진태 감독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식어버린 차에선 뜨거운 김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이건 그저 식어버린 차에 불과했다.
맛도 없는. 향도 사라진.
한참을 컵 안에 담긴 차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나 스스로도 정리하지 못해 복잡해 죽겠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달라는 걸까.
아니,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저도 잘 몰라요.”
“그래도 듣고 싶어요.”
딱 잘라 내뱉어진 내 대답에 다시 단호하게 내뱉어진 유진태 감독의 대답이 팽팽하게 맞서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유주아의
친오빠가 유진태 감독이 맞는지 확인한 뒤엔 뭘해야할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난 거의 공황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유주아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귀찮았고, 오로지 나와 산하의 일을 생각하는 것으로도 벅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입을 연 것은 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고, 유진태 감독의 그답지 않은 어두운 표정을 외면하면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름 친오빠이니 그에게도 동생의 죽음에 대해 알권리가 있지 않은가.
“주아랑 산하는 정말 좋아하던 사이였던 것 같아요. 어릴 때 두 사람을 잘 모르니 그거에 대해선 자세하게 얘기할 수 없지만
주위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죽은 사람에게 질투했을 정도니까.
“독고산하가 첫 촬영을 무단으로 펑크냈던 날 기억하시죠? 그 날이 주아가 죽은 날이었다면서요. 감독님도 알고 계셨죠?”
유진태 감독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의 끄덕거림에 난 희미하게 웃으며 이미 식어버린 차가운 차를 한모금 마셨다. 맛 없어.
“…그 날 산하는 아픈 게 아니라 고주망태가 된 상태였죠. 주아를 잊을 수가 없어서, 주아한테 미안해서, 주아가 그리워서.
술에 취한 자기를 부축해주던 저를 주아로 착각해서 미안하다고, 이제 떠나지 말라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두 눈을 깊게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니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건가.
나도 모르게 손 끝에 힘이 들어가 컵을 세게 쥐었다.
“주아는…”
본격적으로 유진태 감독이 모르는 이야기들을 시작하려 하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이유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한 기분에 침을 삼키며 유진태 감독을 쳐다보았다.
유진태 감독 또한 자신이 알던 이야기가 아닌 새로운 진실을 마주해야하는 것이 두렵고 버겁긴 마찬가지인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계속해요.”
“…주아는 산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얘기를 들어보면 주아도 산하를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산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곽하주의 약혼자였다는 건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고 상황만 더 복잡하게
흘러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아의 친오빠니까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하긴 했지만 아직 산하도 모르는 이야기를 그에게 먼저 하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얘기한다면 산하에게 하는 것이 먼저라는 확고한 다짐이 내게 존재했다고나 할까.
“아무튼 산하는 그 사실에 많이 놀랐고, 화를 낸 것 같아요. 산하 말로는 떨고있는 주아한테 자기가 죽으라고 했대요. 그리고선
연락이 며칠 안됐는데,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주아를 버릴 수가 없겠더래요. 그래서 주아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는데… 주아가 죽었다고 연락이 오더래요, 매니저한테서…….”
유진태 감독의 입에서 한숨인지 비통한 마음에서 올라오는 숨인지 알 수 없는 긴 숨이 토해졌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침묵했다.
울고 있는 것 같진 않았는데 단지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지 아니면 그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남의 눈치 보고 이야기하는 성격도 아니고 느긋하게 그를 기다려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이건 애초에 유진태 감독이 감당해야 할 그의 몫이기도 하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산하에게 네 아이냐고 다그쳐 물었겠죠. 산하는 거기서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게 자기가 주아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주아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 그래서 일이 이렇게 꼬여버렸지만요.”
그때 산하가 부정했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 순간조차 나 스스로를 위해 이기적으로 과거마저 바꾸고 싶어하는 내 모습에 빈웃음이 흘러나왔다. 울고 싶은데 눈이 쓰라려
더이상 눈물은 나오지 않으니 이젠 웃음이 나와버린다.
눈물을 대신한 웃음은 눈물보다 더 뜨거워서 웃을 때마다 심장이 데이는 것 같았다.
“…하하……. 전 이제 뭐라고 사과를 해야하죠?”
유진태 감독도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니 그는 아직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할까 잠깐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나중에…”
뜬금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유진태 감독이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쓰라린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지금 누구보다 감당하기 버거운 짐을 짊어진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일 것이 뻔했다.
물론 독고산하나 내가 감당해야 할 짐도 만만치 않지만, 적어도 난 독고산하를 사랑하기로 한 순간 각오하고 있던 짐이니까.
“나중에, 산하가 괜찮아지면 녀석한테 주아를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말이나 해주세요.”
“초하씨?”
“난 감독님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으니까.”
영원히 핑크빛일 것만 같았던 지독한 사랑이 핏빛으로 물드는 것이 심장 끝에서부터 느껴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웃는 것 밖엔.
실성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 속에 공허하게 비어버린 마음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컵 안의 차가 둥글게 퍼지며 뜨거운 액체를 흡수하는 게 뿌연 시야너머로 보였다.
눈이 따가워 죽겠는데, 그래서 웃겠다는데 왜 굳이 눈물이 나는 걸까.
왜 굳이.
“감독님… 저요, 저 말이에요… 독고산하 약혼녀랑 그냥 사이가 나쁜 게 아니에요. 나랑 곽하주는 말이죠, 치명적이에요.”
느닷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유진태 감독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뿌연 시야너머로 쳐다보며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내가 곽하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곽하주의 약혼자에게 접근했을 정도라면… 짐작이 가세요?”
유진태 감독의 두 눈이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으로 커지는 걸 보며 텅 빈 웃음을 내뱉었다.
거봐, 나도 다를 게 하나 없다고 했잖아.
“다만, 감독님이 계획과는 다르게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독고산하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거군요.”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리자 유진태 감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유진태 감독이 한숨 끝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눈이 쓰라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향해 말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정말 모르겠었는데… 감독님하고 얘기하면서 정리가 좀 됐어요.”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 꼭 머리 속에 소용돌이 하나를 넣고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거짓말처럼 소용돌이가 멈췄다.
사실 처음부터 답은 정해져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독고산하를 사랑하기로 한 순간부터, 녀석을 구원해주기로 한 순간부터 모든 짐을 짊어지겠다고 했으니까.
다만 그 정답을 공개해준 것이 곽하주였을 뿐.
“감독님, 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하셨죠? 그럼 제 부탁 좀 들어주세요.”
눈물이 사라진 시야는 다시 환해졌지만 쓰라림은 가시지 않는다. 아마 폭풍처럼 몰아닥친 이 순간이 지나면 독고산하와 나의
사랑도 조각난 채 버려져 깨끗하게 정리되는 순간이 올지 모른다.
다만, 그 상처가 가시지 않을 뿐.
유진태 감독이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내가 무슨 부탁을 할지 어렴풋 짐작이 되는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곧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에게 어떠한 부탁의 말도 하지 않은 채 고맙다는 말부터 내뱉은 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우선 기자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집에 돌아가서 잠을 푹 자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유진태 감독의 집은 넓고 세련되고 고급스럽고 좋은 곳이었지만, 더이상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뭘 부탁할 건데 고맙다는 말부터 해요? 나 지금 안 좋은 예감 드는 거 알아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자 유진태 감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내게 다가와 내 팔목을 붙잡고 물었다.
꽤 다급하게 내뱉어진 그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유진태 감독이 ‘초하씨.’하고 날 부르며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의 말을 가로지르며 내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감독님, 주아는 자살하지 않았어요.”
뜬금없이 내뱉어진 내 말에 유진태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초하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독고산하도 자살이라고 알던데.”
‘나만 알아요, 주아를 죽인 사람에게 들었으니까.’ 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빙긋 웃었다. 유진태 감독이 재촉하듯
다시 물으려는 듯 입을 벙끗거렸지만 내가 먼저였다.
“감독님.”
“초하씨.”
“그냥 잊으세요. 전부 잊고, 감독님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네?”
“그게 제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는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만 남긴 채 문을 열었다. 유진태 감독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뒤를 쫓아나와 손목을 우악스레 잡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해할 수 있게 얘길해줘요. 그게 부탁이에요? 고작 그게?”
“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아주세요.”
“초하씨, 대체 그게…”
“두 명은 너무 많거든요.”
빙긋 웃으며 유진태 감독의 손을 풀었다. 엘레베이터 멈추는 소리에 발걸음을 옮기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유진태 감독이 복잡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것을 보며 가볍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안녕.
악역은 하나면 충분해요.
*
- 어디야?
밤새 한숨도 편히 못잤다. 독고산하가 빠른 시일내에 촬영장에 복귀하겠다고 했으니 그게 언제가 될지 추측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잠이라도 자려 싶으면 곽하주가 꿈에 나와 내 목을 졸랐다.
그걸 밤새 반복하다보니 결국 자는 걸 포기하고 새벽 녘에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버렸다.
그래서일까, 촬영장으로 가기 위해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컨디션이 안좋았다. 게다가 날씨는 또 왜이렇게 흐린지.
“지금 집에서 나왔어. 촬영장에 가느라구.”
- 기자들은?
“몰라, 없던데. 며칠 집에 안들어갔더니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아예 안왔나봐. 어제도 불 안켜고 있었거든.”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산하와 통화를 하며 택시에 올랐다. 촬영장 위치를 말하며 편하게 자세를 잡고 앉자 택시 기사
아저씨가 힐끔 백미러로 날 쳐다보는 시선이 보였다.
꽤 익숙한 얼굴이라 생각했는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무언가를 얘기하려다 말고 운전에 집중하는 아저씨를 보니
매스컴이 무섭긴 무섭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넌 어딘데.”
- 본가.
“응, 그래 본… 뭐? 오피스텔 아니고? 왜? 설마 혼내려고 부르신 건 아니겠지?”
김수옥씨 보니까 스캔들을 오히려 즐기면 즐겼지 행실이 이게 뭐냐며 혼내실 분은 아니던데.
깜짝 놀라 핸드폰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며 독고산하에게 묻자 녀석이 가볍게 웃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 아니야, 당분간 여기서 지내기로 했어.
“왜? 오피스텔도 좋잖아. 아, 혹시 기자들 때문에? 어휴, 너도 피곤하겠다.”
- 뭐 그런 것도 있고…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
그러면서 뭘 생각하는 건지 꽤 뿌듯한 웃음을 내비추는 독고산하의 태도에 핸드폰을 힐끔 쳐다보며 나도 가볍게 웃었다.
컨디션도 꽝이고 날씨도 꽝이지만 오늘 애정전선은 꽤 맑음이네.
“그래서, 오늘은 본가에서 뭐 할건데? 하루종일 게임? 강아지랑 산책하기?”
- 아니.
“그럼?”
- 오늘부터 촬영장에 다시 나갈거야. 지금 엄마랑 같이 나왔어.
독고산하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에 돌처럼 굳어버린 나를 어쩌면 좋을까. 정말 다행인건 얼굴을 볼 수 없는 통화만을
나누고 있다는 것.
내 잠깐의 침묵이 이상했는지 독고산하가 ‘야.’하고 나지막이 날 불렀다.
그제서야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다시한번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 잠깐 졸았나봐. 밤에 좀 뒤척였거든.”
- 뭐? 야, 네가 지금 누구랑 통화중인데 자냐? 나랑 통화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복에 겨웠지 아주.
“그래, 복에 겨워서 잠까지 잔다. 됐냐?”
너무 복에 겨워서, 과한 행복에 취해서, 그 모든 게 내 것이 아닌 줄도 모르고.
- 이따 촬영장에서 만나기만 해 봐.
“뭐! 뭐! 만나면 때리기라도 할 거야? 때리기만 해봐, 데이트 폭력으로 신고할거야.”
- 뭐래? 누가 때린대?
“그럼?”
- 뽀뽀해버릴건데.
마냥 즐거웠기에
“우, 웃긴다! 누가 마음대로 뽀뽀하게 해준대? 왜이래, 내 이래봬도 어려운 여자야!”
- 야, 내가 뽀뽀해준다고 하면 줄 서서 기다릴 사람이 저멀리 지구 열두바퀴를 돌고도 남아. 왜이래, 해줄때 고맙게 생각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는 이 순간.
“됐어!”
- 됐긴 뭐가 돼. 또 혼자 지나치게 상상하고 얼굴 빨개졌있을 텐데. 아, 뽀뽀로는 만족을 못해서 그러는 건가?
“끊어, 이 자식아!”
- 왜, 좋잖아. 알콩달콩.
벌써부터 네가 그립다.
“알콩달콩은 무슨, 완두콩이다 이 자식아! 나 촬영장 다왔어. 끊어!”
독고산하가 ‘이따 봐…’라고 말을 잇는 것이 들렸지만 그대로 핸드폰 폴더를 닫아버렸다. 그와 동시에 택시가 촬영장 앞에 멈췄고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는 내게 택시 기사 아저씨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가씨 도착했는데… 거 애인이 못되게 구남? 왜 예쁜 아가씨가 울고 그래? 허허허.”
“…아니에요.”
주섬주섬 꺼낸 택시비를 아저씨에게 차마 건네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울어버렸다. 울면서도 쉴 새 없이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나를 아저씨는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곧 다정한 아버지처럼 아무 말 없이 날 기다려주었다.
온전하게 외부와 차단 된 택시 안에서, 마치 나만의 공간을 만든 아이처럼 목 놓아 엉엉 울어버렸다.
“아니에요, 안 못됐어요. 아니에요… 제가 못나서… 제가 나빠서…… 아니, 곧 나빠질거라서… 미워서…… 그래서 그래요.”
예전에 읽었던 로맨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꼭 이렇게 한심하게 울었지. 그때 내가 뭐라고 그러면서 읽었더라?
어이없다고 했던가, 한심하다고 했던가, 그냥 속 시원하게 얘기하면 될 걸 왜 우냐고 했었지 참.
그런데 왜 지금 나는, 그 한심한 여주인공이 돼서 속시원하게 얘기하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울고만 있을까.
…빌어먹을.
*
“초하! 왔냐규…악!”
촬영장으로 들어서자 언제왔는지 다솔이가 스탭들과 서서 깔깔거리며 웃다가 날 쳐다보고는 반가운건지 기절하려는건지 악!
소리까지 내며 기겁을 했다.
“여어.”
어차피 황가철씨 집에서 바로 왔을테니 독고산하랑 같이 온 건 아니겠구나 싶어 대충 손만 들어 인사하고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편히 앉았다.
밤새 잠을 제대로 못잔 것이 원인인지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노곤노곤하게 몸이 풀어지고 잠이 솔솔 들이닥치는 게 딱 죽을 맛이라
다솔이를 쳐다보는 건지 노려보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눈에 힘을 줘야했다.
“눈은 퉁퉁 부어서 왜 노려보냐규! 괴물이냐규! 무섭다규! 뭐냐규! 대체 뭐냐규!”
“규규거리지 좀 말라규. 너 때문에 머리가 다 울려.”
다솔이를 향해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다솔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왜 그래? 상태 안좋아보여. 유진태 감독 집에서 나왔다며?”
“어? 어. 그냥 집에서 자고 싶더라고.”
“흐응. 단지 그것뿐?”
다솔이가 예리한 눈썰미로 날 훑어보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이게 어디서 얼굴을 들이대, 가뜩이나 속 안좋은데.
바짝 가까워진 다솔이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꾸욱 눌러 밀어내며 대답했다.
“그럼 그것뿐이지 뭐가 더 있어야 돼?”
“내가 너 일이년 봤니? 눈은 퉁퉁 부었으면서 ‘정말 아무 일 없어요~’하면 내가 오냐 그렇구나 할 줄 알았어? 뭐야? 무슨 일이야?
독고산하 관련 된 일이지?”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다솔이가 ‘오호라, 이거봐라?’하는 표정으로 두 눈을
번뜩이더니 내 어깨를 꽉 붙잡고 다시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아, 가뜩이나 정신없어 죽겠는데 얘 보고 있으려니 왜이렇게 속이 뒤틀리니.
“뭐야? 독고산하가 헤어지자고 하디? 스캔들 때문에 너랑 못사귀겠대? 아니면 곽하주랑 헤어지겠다고 해서 감동해서 운 거야?”
순간 다솔이가 곽하주를 어떻게 알지 라고 생각했다가 뒤늦게 아, 얘 나랑 고등학교때부터 친구지 하고 생각을 고쳤다.
나 미친 거 아님? 어떻게 이걸 까먹음?
나참,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으며 다솔이를 쳐다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깨에 얹어진 다솔이의 손을 슬쩍
치웠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뭔데? 우리 서로서로 좀 얘기 하면서 살자규. 왜이렇게 비밀이 많아? 내가 황가철이랑 연애하면서 너한테 뭐
숨기는 거 봤냐규.”
“못봤지. 좀 얘기 안했으면 하는 것도 얼마나 자세하게 얘기하던지 오히려 짜증 났지.”
장난스레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솔이가 에? 하고 날 올려다보며 ‘짜증 났어?’하고 꽤 큰 소리로 되물었다.
혓바닥을 날름 내밀며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얼른 스탭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씩씩거리며 황소 콧김을 내뿜는 다솔이가 ‘뭐가! 뭐가 짜증났어! 왜!’하고 우렁차게 되물었지만 ‘아 귀찮아 패스패스’하고
요리조리 스탭들 사이를 비집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느린 건지 다솔이 팔이 긴 건지, 요리조리 피해다니던 내 걸음은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라도 얘기해줘. 나도 알고 있어야 널 돕든지 위로하든지 할 거 아냐. 친구 사이에 이러지 말라규.”
다솔이라면 사실 전부 얘기해도 안심할 수 있는 온전한 내 편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그저 빙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다솔이에게 지금 시시콜콜 모두 얘기한다면 내 속은 분명 시원하겠지만 다솔이는 곽하주를 죽이고 말 테니까.
친구를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야, 정말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닌데 눈이 붕어가 될 때까지 우냐규.”
“그냥… 원래 커플이라는 게 그런거잖아. 사소한거로 울고 웃고, 너도 그랬잖아.”
“그거야 뭐, 그렇지만…”
“거 봐! 연애는 원래 다 똑같은 거야, 너 연애하는 거 생각해봐라. 진짜 별 일 아니니까 걱정 마.”
씨익 웃으며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 다솔이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주었다. 기지개를 켜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자 어디에
있었던 건지 도통 내 눈엔 안보이던 유진태 감독이 저 끄트머리 쯤에서 조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 촬영 감독님 오셨네. 헉! 눈이 왜 그러세요?”
심하게 붓긴 부었군.
조감독이 날 먼저 발견한 듯 반갑게 인사하다말고 깜짝 놀라 흠칫-하고 뒷걸음질 치며 내게 물었다. 밤새 울었다고 할 수도
없고, 모기 물린 거라고 둘러대기도 뭐해서 그냥 아무 대답 안하고 씨익 웃자 그게 꽤 흉측했는지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으며
다급하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겁 많은 놈. 영화 조감독이라는 자식이 말야, 눈 부은 사람이 뭐… 잡아먹냐? 웃겨 정말.
“왔어요? 눈 많이 부었네요.”
유진태 감독은 애써 다정하게 말을 걸며 다가왔지만 그의 표정에서 꽤 복잡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다. 하룻밤만에 그와 하하호호
다정다감한 얘기를 나누기엔 내 철면피가 부족했기에 난 그저 빙긋 웃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잘 주무셨어요?”
형식상의 인사지만 나와 유진태 감독에겐 꽤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아마 어젯밤엔 그도 나처럼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유진태 감독은 난처한 듯이 웃더니 가볍게 자신의 눈 아래를 가리켰다.
짙은 다크서클이 생겼어요, 라며 장난스레 중얼거리는 그의 반응에 다시한번 웃어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렸다.
“산하씨 왔어? 이야, 오랜만에 보네. 더 잘생겨졌어! 초하 감독, 여기 애인왔네!”
“촬감님 애인 왔어요~”
“그동안 산하씨 안와서 촬영장에 빛이 없더라 빛이. 이렇게 잘생긴 배우를 못보다니 내가 얼마나 땅을 쳤는데!”
스탭들이 웅성거리며 소란스럽다 싶더니 여기저기서 날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날 갑자기 왜 찾아? 하고 고개를 돌리니
독고산하가 긴 기럭지를 드러내며 촬영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녀석의 옆엔 싱글벙글 신난 표정의 김수옥씨도 보였다. 모자(母子)가 나란히 등장하니, 후광이 장난이 아닐세.
안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왔다 싶어 빙긋 웃으며 녀석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민초하. 인사도 안하고 너 여유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씨익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독고산하의 뒤엔 이게 대체 몇 명일까 싶은 기자들이 웅성거리며
서있었다.
얘가 설마 기자를 보디가드로 뒀을 리는 없고, 저 많은 기자들이 독고산하의 팬클럽일 리도 없으니… 기자회견인가.
“어, 왔어?”
어색한 게 티나지 않을까 싶어 최대한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자 가까이 다가오던 독고산하가 표정을 굳혔다.
어색했나?
어색했을 리 없는데 싶어 들었던 손을 조심스럽게 내리자 금세 내 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날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눈.”
“눈?”
“부었어. 엄청 많이. 괴물 같아.”
뭐야 이자식아?
아무리 눈이 많이 부었더라도 애인한테 괴물 같다고? 눈이 이렇게 부었어도 애인한테는 사랑스럽다고 하는 거야! 예쁘다고!
“애인한테 말 한 번 오질나게 예쁘게 하는 구나.”
“난 원래 거짓말 못해.”
그래, 참 정직하구나. 괴물 같이 부어버린 내 눈에게 괴물 같다고 친절하게 알려줘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야.
너무나 당당한 녀석의 발언에 살짝 김이 빠져 피식 웃어버리자 독고산하는 심각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한 손을 뻗어
내 두 눈을 쓱 가렸다.
“거 참, 갑자기 짜증나네.”
“뭐가?”
퉁명스레 대답하며 내 두 눈을 가린 녀석의 손을 떼어내려는 찰나, 독고산하가 꽤 차가운 자신의 손으로 내 두 눈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듯 누르더니 나지막이 대답했다.
“내 애인이 나 없는 곳에서 펑펑 울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억울해.”
“에?”
“다신 그러지마. 울 땐 날 부르도록 해.”
“…달래줄거야?”
투정부리듯, 지금이라도 기대볼까 싶어 입을 삐죽 내밀며 묻자 내 두 눈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치우며 독고산하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꽤 가깝게 다가온 녀석의 얼굴 때문에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얼굴을 뒤로 빼려는데, 녀석이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콩- 박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미쳤냐? 괴물로 변신하는 과정 지켜보려고 한다.”
“뭐? 야!”
“괴물 같으니까 두 번 다시 그 꼴로 나타나지마. 어휴, 부끄러워서 어디 애인이라고 데리고나 다니겠어?”
울지 마, 라고 얘기하는 걸 알고 있어서 너무 억울한데도 웃음이 났다. 지극히 독고산하다운 위로라서 참웃음이 났고,
이제 이 위로는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빈웃음이 났다.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이 위로를 해주겠지, 그게 몹시도 부러운 날 어쩌면 좋을까.
“기자들은 뭐야?”
“저번에 말했잖아. 소속사에서 반박 기사 내기 전에 내가 따로 기자들 만나서 얘기할 거라고.”
“촬영장에서?”
“하? 너 대체 뭘 들은거야? 촬영장에서 할 거니까 같이 하자고 했잖아.”
아, 그랬지 참. 잠을 못 자서 제 정신이 아닌가봐. 기자들 오는 것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한 것도 많았는데.
“기억나. 장난 좀 쳤어.”
입을 삐죽 내밀자 독고산하가 가볍게 웃으며 내 이마를 꾹 눌렀다. 누르지 말래도, 아프다니까.
녀석이 누른 이마를 쓱쓱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있는 힘껏 노려보았으나 독고산하는 이미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꽤 많은 수의
기자들을 촬영이 진행되지 않는 다른 스튜디오로 안내하느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조금만 더, 며칠만 더, 나와 함께 해준 후에 데려와도 좋았을 걸.
“왔네요.”
유진태 감독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하고 산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마도 기자회견은 촬영 후에 할 것 같은데… 그럼 지금 촬영하는 게 가장 행복한 연인이 함께 일하는 순간이 되겠네.
“오늘 씬 31 촬영 맞죠?”
“네, 맞아요.”
“그거 행복한 순간이죠?”
“네.”
다행이네요, 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먼저 걸음을 옮겨 촬영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분주하게 촬영 준비 중이던 스탭들은
날 보고는 눈이 왜그러냐며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내가 대답하길 꺼려하는 걸 눈치챈 듯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촬영할 씬의 시나리오를 읽고 또 읽고 몇 번이나 읽었을까, 눈이 뻑뻑해서 고개를 들고 멍하니 세트장을 쳐다보았다.
거짓 된 사랑을 속삭이는 여자와 그 사랑이 진심이라고 믿는 남자의 ‘온전하게’ 행복한 시간을 위해 준비 된 세트장은 온통
행복한 색상들로 가득한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가슴 아플 정도로.
“행복했을까?”
“네?”
나지막이 중얼거린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촬영 준비를 돕던 촬영팀 퍼스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라고
의아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그를 향해 짧게 웃어준 후 다시 물었다.
“아니, 시나리오 속의 두 사람 말이야.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을까?”
“그랬겠죠. 그건 갑자기 왜요?”
“그냥…그 순간이 어느정도로 행복했을까 싶어서.”
다가올 불행을 아는 여자와 다가올 불행을 모르는 남자의 행복한 순간의 값어치는 분명 다를 것이다. 누구의 행복이 더 깊은
행복일까. 다가올 불행을 아는 여자의 슬픈 행복? 다가올 불행을 모르는 남자의 순수한 행복?
“…빌어먹을, 알게 뭐야. 그냥 행복한 게 행복한거지. 에이씨 머리 아파.”
미간을 확 찌푸리며 세트장 앞으로 다가갔다. 기자들에게 촬영 후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말하고 온 것인지 가벼운 발걸음의
독고산하가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녀석도 날 발견한 듯 씨익 웃더니 ‘괴물이다~’하고 입을 벙끗거렸다.
뭐가 어쩌고 어째? 녀석을 조용히 노려봐주며 카메라로 다가갔다.
큰 움직임이 없는 촬영이라 촬영은 어려울 게 없었지만 감정선을 영상에 잘 살려줘야해서 조명팀과의 호흡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민 감독! 큰 그림 한 번, 여자 전신, 남자 얼굴 맞지?”
“예, 맞아요. 조명은 아까 저한테 주셨던 플랜대로 가시는 거죠?”
“엉~”
털털한 조명 감독의 대답에 오케이 사인을 주고 받고 촬영 준비를 끝마치자 예쁘게 단장한 김수옥씨가 가볍게 대사를 중얼거리며
세트장으로 들어왔다.
유진태 감독이 복잡한 표정으로 날 힐끔 쳐다보고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는 곧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배우들에게
무어라 연기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유진태 감독의 입에서 스탠바이, 라는 얘기가 나오자 촬영장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침묵.
“액션!”
그의 액션 소리와 함께 배우들이 인물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카메라에 잡았다. 섬세한 조명과 어우러진 배우들의 얼굴에서부터
인물들이 숨쉬고 있었다.
하나라도 놓칠 새라 꼼꼼하게 카메라로 그들을 담아내며 최대한 깊은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웃고 있지만 절대 이를 드러내며 웃지 않는 여자와 항상 소리내어 크게 웃는 남자의 행복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김수옥씨를 지나 독고산하의 얼굴을 가까이서 잡을 때는 나조차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지독한 몰입. 끝을 알기 때문에 끝이 두려운 몰입이었다.
“와, 장난 아니네. 민초하 감독님 원래 저렇게 인물 잘 잡으셨나?”
“음?”
“화면 죽이네요. 진짜 장난 아니네. 감독님 사람 발굴해내는 눈이 탁월하시네요!”
조감독이 진태의 옆에서 소곤거린다고 입을 열었으나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듯 꽤 톤이 높은 목소리를 드러냈다.
유진태 감독이 신경쓰인다는 얼굴로 조감독을 힐끔 쳐다보다가 이내 영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던 유진태 감독은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발굴해낸 게 아니야.”
“예?”
“감정을 담았으니까, 이 순간 독고산하를 민초하보다 잘 촬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마찬가지로 민초하의 카메라가 아니면
독고산하는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없지.”
유진태 감독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 조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연인이라서요?’하고 물었지만 유진태 감독은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이미 컷을 외칠 타이밍이 지났기 때문에 중간중간 스탭들이 웅성거리며 유진태 감독을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유진태 감독은
어쩐 일인지 좀처럼 컷을 외치지 않고 씬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배우들의 애드립이 계속 반복되었고 보다못한 조감독이 유진태 감독의 옆구리를 찌르려던 찰나였다.
“아직 안 돼.”
“네?”
“내가 끊을 컷이 아니야.”
유진태 감독의 시선은 이미 영상을 벗어나 카메라를 쥔 초하에게로 향해있었다.
“날 사랑하는 거죠? 그렇죠?”
나지막이 내뱉어진 산하의 목소리는 꽤 부드럽고도 달콤했다. 행복에 취해 어찌할 바 모르는 남자가 저것보다 더 달콤하게
속삭일 수 있을까.
카메라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이미 컷이 나올 타이밍은 지났지만 유진태 감독은 컷을 외치지 않고 있었다.
더 끌어가길 바라는 건가,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고 그가 컷하는 순간을 내게 넘겼음을 깨달았다.
내가 컷하는 순간이 그가 컷하는 순간이라… 물끄러미 카메라 속 독고산하를 쳐다보았다. 산하의 두 눈이 부드럽게 초승달을
그리며 휘었고 그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왼 손을 살짝 들었다.
“컷!”
끝나지 않길, 차라리 촬영하는 지금이 계속 지속되길 꿈 꾸었지만 그건 단지 꿈일 뿐이다.
내가 왼 손을 살짝 들자 아니나 다를까 유진태 감독의 컷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오케이라는 사인이 떨어졌다.
“새삼 나한테 또 반하면 곤란한데.”
독고산하가 가볍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새삼 안 반해, 왜냐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매일 반하고 있으니까.
“그러게, 아까워서 연속 NG라도 내가 낼 걸 그랬지? 그 모습 계속 볼 수 있게.”
“안 돼. 나 비싼 몸이라. 너 계속 NG 내면 내가 촬영 감독 교체하자고 할 건데?”
“얼씨구? 나 말고 누구? 점 찍어둔 사람 있는 거 아냐? 흐음, 수상해.”
두 눈을 가재미처럼 흘기며 가볍게 독고산하를 위아래로 훑어보자 녀석은 뭐? 하고 어이없는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곧 푸하하
소리내어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놓았다.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서 눈물이 차오를 정도였다. 주책맞게.
“다음 촬영 전까지 휴식 시간이라더라, 기자들 만나러 가자. 오래 기다리게 하면 짓궂은 질문할 사람들이야.”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떨어진 곳에서 유진태 감독이 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그저 빙긋 웃어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벼운 웃음을 입에 머금은 채 독고산하와 손을 꽉 잡고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세트장 옆의 스튜디오로 걸음을 내딛었다.
독고산하의 다음 의상을 챙기던 다솔이가 몇 걸음 떨어진 채 나와 독고산하의 뒤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 얘기할까? 아니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하지? 넌 뭐 생각해둔 거 있어?”
“응.”
“어? 정말? 진짜?”
가볍게 물었던 독고산하는 내가 응, 이라고 대답할 줄 몰랐는지 꽤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재차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을 쳐다보자 독고산하는 환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중얼거렸다.
“기특한데?”
“뭘 이정도로.”
기쁨을 전부 감출 순 없었는지 약간 상기 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녀석을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한 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세트들이 즐비한 스튜디오 안에서 나와 독고산하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정신없이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선 채 산하를 노려보고 있는 매니저의 모습도 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뒤 기자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럼 시작할까요? 이쪽은 제 스캔들 상대인 민초하 촬영감독님 입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스캔들이 사실이라는 점과…”
“곽하주, 나와.”
기자들 틈에 묻혀있어도 너만큼은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기자들 가운데서
유독 도도한 고양이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날 주시하는 네 시선을 내가 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
나지막이 내뱉어진 내 말에 산하도, 매니저도, 다솔이도 놀란 듯 날 쳐다보았고 곧이어 들려오는 또각거리는 소리에 다들 숨을
멈춘 채 기자들이 서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민초하, 귀신 같이 알아낸다니까. 산하씨, 잘 지냈어?”
브랜드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값비싼 명품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정장을 입고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등장하는 곽하주의 모습에
기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산하는 의아한 눈으로 곽하주를 쳐다보다가 다시 날 쳐다보았다.
“아는 사이야?”
“응.”
“어떻게 알아? 하주는 내…”
“약혼녀겠지.”
독고산하의 말을 자르듯 내뱉어진 단호한 내 대답에 녀석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알고 있었어?’라고 표정으로 물어오는
녀석을 향해 피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곽하주 아주 잘 알아. 고등학교 졸업 며칠 앞두고 쟤 때문에 퇴학 당했거든. 대학교까지 합격한 상태였는데.”
“…뭐?”
이게 무슨 말이야, 싶은건지 독고산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날 쳐다보더니 이내 날 향해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탁 소리가
나도록 녀석의 손을 밀쳐냈다.
느닷없는 내 태도 변화에 독고산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고 곽하주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솔이가 ‘초하야?’하고 의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희미하게 들으며 독고산하를 향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더 설명해줘야 돼? 하, 독고산하. 멍청하다 멍청하다 했는데 생각보다 더 멍청하네.”
지금 내뱉는 모든 말들은 결국 돌고 돌아 내 가슴에 꽂혀 평생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는 비수가 될 터이지만 내뱉어야 할 말이다.
이미 퉁퉁 부어있는 두 눈에 힘을 주며 독고산하를 향해 속삭이듯 다정하게 말했다.
타다닥-하는 발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유진태 감독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언뜻 보였지만 신경쓰지 않은 채.
“난 널 이용한 거야.”
“…….”
“곽하주한테서 널 빼앗아서 보란 듯 곽하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넌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날 원망하면 돼. 그리고 연기하는 독고산하로 남아 평생을 배우로 이름을 날려.
연기하지 않는 너는 숨을 쉬지 않는 너와 같아. 그런 널 곁에 두고자 내 사랑을 고집할 순 없어.
애초에 내가 저지른 일이야, 옹졸한 복수심에 네가 받을 상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나를 벌하는 것 뿐이야.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난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을 수 있도록 최대한 힘껏 웃었다.
“고마웠어.”
“민초하, 너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얼마나 멍청한지 덕분에 보란 듯이 복수에 성공했어.”
거짓말의 시작은 거짓말로 끝내는 거야.
그게 공평한 거야.
그러니까, 난 정말 괜찮아.
“거짓말에도 얼마나 잘 속아넘어가던지, 없는 사랑도 생길 뻔 했다니까?”
사랑해.
***
여러분. 하이라이트에요!!!!!!!!!!!!!!!!!!!!!!!!!!!!!!!!!!!!!!!!!!!!!!!!!!!!!!!!!!!!!!!!!!!!!!!!!!!!!!!!!!!!!
-.,-.
녜...그래요, 녜....늦었어요. 미안해요....정말....미안해요!!!!!!!!!!!!!!!!!!!!!!!!!!!!!!!!!!!!!!!!!!!!!!!!!!!!!!!!!!!!!!!!!!!!!!!!!!!!!ㅜ.,ㅜ.
으허엉.
나 정말 늦고 싶지 않았는데, 1월 달은 정말 사람 잡는 달이에요. 제 몸이 열 개였으면 좋겠어요.
완결 예상 편수는 ~47,48 이니까 금방이겠네요.
아자아자!
읽어준 예쁜이들과 꼬리말 달아준 사랑스러운 이들 모두 감기 조심해요♡_♡
야호♬ 올림.
(+ 이미지 작품은 친정식구 ‘슴보’ 님께서 선물해주셨습니다. 다시한번 감사해요! 학창시절의 싼초라인-.,-으흐흐.)
첫댓글 와우........드디어 빵......
나는나는나는 곽하주도막싫은데 멍청한 초하도 싫어!
오우 드디어터지는군요!!!!!!!!!!
ㅜㅜ.. 이건아니잖아. 끝이 슬프더라도 끝까지 함께가야지..뭐하는거냐아아.ㅠㅠㅠㅠ 민초하..
엉엉엉 어쩜조아요ㅠㅠ 불쌍한 우리초하랑 산하ㅠㅠ 어떡해요ㅠㅠ 미치겠어요!!!!!!!!!!!
안돼!!!!!!!!!!!!!!!!!!!!!!!!!
마지막에 해피죠?ㅠㅠ
해피 해피 부탁드립니다 ㅠㅠ 슬픈건 싫단 말예요!!!ㅠㅠ
ㅠㅠ 완결이 너무 빨리 다가온거 같아요 ㅠ 아쉬워요ㅠㅠ 해피였으면♡
안되요!!! 해피 해피 부탁드려요. 제발 플리즈. ㅠㅠ
어떻해요..ㅠㅠ
아 이럼 안대안대!! 옳지않아!!!!!!!!!! ㅠ ㅠ 왜 둘다 힘들어지게 되는거냐구!! 하주 저 계집땜에 ㅜㅜ
♡
내용 일부러 대충읽었어요...................... 해결된 장면 올라오면 읽어야지 ㅠㅠ 마음아프고 싶지않아 ㅠㅠ
........... ㅜㅜ
아 너무 눈물나요.. 흑흑 완결도 너무 빨리 나는거같구.. 막 슬퍼요 흑
하주 ㄲㅈ
아아아아아아아 마음이 아프다~~ ㅜ
에라이 신발끈 같은 년 에라이 종 같은 . 에이씨.
ㅣ건아니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ㅇ
★
아놔돌겟네아 버ㅔ ㄹ베0 라ㅣㅓㅔㅂ 아ㅓㅔㅂ 랑네 ㅂ자 ㄴ맹
이런 씨.................발라먹을여자!
크흑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