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民族史”-3-‘발해’부분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主編 : 王鐘翰
편찬처 : 中國民族史編輯委員會
일시 : 1994년 2월
# ‘중국민족사’중에서 발해관련 부분입니다. 총8편 중에서 제4편에 속하는 부분인데 그들이 나눈 각 편의 제목에도 신경을 써야할 것입니다. 참고로 각 편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민족사”의 목록
* 서론
1. 중국민족사의 시대구분
2. 몇 가지 이론적인 문제
* 제 1편 : 중화민족의 기원
* 제 2편 : 화하와 華夷五方格局의 형성
* 제 3편 : 통일적다민족국가의 건립과 남북 각 민족의 융합
- 제 1장 : 漢민족의 형성
- 제 2장 : 부여, 오환과 읍루
제 1절 : 부여와 고구려
…
* 제 4편 : 중화민족의 흥성과 조국통일의 증강
- 제1장부터 제 5장 까지 : 돌궐, 회흘, 토번, 南詔, 莫요, 俚僚와 諸蠻
- 제6장 : 발해, 실위와 庫莫奚
* 제 5편 : 거란,여진 각 민족의 출현과 정권건립
* 제 6편 : 몽고의 전국통일에서 만족의 興起 전까지의 남북 각 민족
* 제 7편 : 만족의 전국통일과 각 민족의 진일보적인 발전
-제 3장 : 서북과 동북의 제 민족
제 4절 : 서북과 동북의 기타민족(조선족 언급)
* 제 8편 : 각 민족인민의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투쟁과 중화민족의 해방
* 후기
* 본 책에서 인용한 참고도서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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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제 4편 中華民族的興盛和祖國統一的加强
제 6장 渤海,室韋與庫莫奚
제 2절 粟末靺鞨及渤海
1. 발해국의 건립(이 부분은 누락된 곳이 없음)
발해국은 속말말갈의 우두머리인 大祚榮이 隋末唐初에 잇달아 지금의 요녕성 朝陽지역으로 옮겨와 거주하였던 두개의 무리인 속말말갈인과 고려(高麗 :여기선 이렇게 적었음)의 남은 사람들을 기본으로 하여 건립하였다{渤海國是粟末靺鞨首領大祚榮, 以隋末唐初先后遷居今遼寧省朝陽地區的兩批粟末靺鞨人和部分“高麗余種”爲基礎建立的.}.
후에 고려국의 도망친 잔당{,高麗的 “逋殘”,}과 말갈의 백돌{伯돌(口+出)}, 安車骨, 號室등의 부족의 유민들이 모두 합하여서 발해국의 주요 주민을 이루었다. 그들은 장기간의 공동노동과 생활을 거치면서 차츰 하나의 새로운 사람들의 공동체{人們共同體}로 응집되었는데 역사에서는 발해인이라 칭한다. 발해는 또 발전을 진행하면서 무력으로 黑水말갈의 虞婁, 拂涅, 鐵利, 越喜등의 부락을 정복하여 그들을 자기들의 행정관할 아래로 병합시켰으나, 이 부족들은 발해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하여 원래의 명칭을 유지하여 발해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지는 않았다.
발해국의 건립은 속말말갈의 사회발전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고려와 당왕조의 속말말갈에 대한 영향과 민족의 압박이 그 정권을 빠르게 건립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말갈족은 唐初에 이르러 많은 부락이 속말말갈과 흑수말갈의 양대 부족연맹으로 결성된 것이며, 만약에 외래의 영향이 없었다면 그들은 또한 스스로 내부발전하면서 문명사회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양대 부족연맹이 형성되기 전후에 속말말갈의 역사적발전을 촉진하게 하는 두 가지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앞에 말하였던 突地稽등의 8개 부족이 고려에 신하로 굴복하는 걸 원치 않아서 수나라 말에 柳城지역으로 옮겨와 산 것이다; 다시말해 말갈이 勿吉시대 이래로 매번 고려를 약탈하였기 때문에 속말말갈의 미처 이동하지 않은 자들은 전성기 때의 고려에 의하여 정복 당하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고, 당과 고려의 전쟁 중에 그들의 많은 수가 또 고려귀족에 의하여 당나라 군사와 전쟁하기 위해 요동지역으로 소집되었었는데, 이러한 것을 볼 때 이 속말말갈인들은 고려국{高麗國}의 봉건통치를 직접적으로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봉건제가 이미 발전한 이 지역의 주민들은 여러 곳에 복잡하게 섞여 살았는데, 668년{당 總章 원년} 고려국이 망한 후 그들은 또다시 당에 의하여 營州{즉 柳城}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영주지역은 수당시대에 동북지역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지역이 長城과 가까우며, 영역의 내외는 한족과 동북의 각 소수민족 간의 경제와 문화의 집중적인 교류지였다. 속말말갈인들이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한 후에는 여러 선진적인 요소의 강한 영향으로 빠른 사회발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옮겨 왔던 厥稽등 8개 부족을 예로 들면, 그들이 이곳으로 온 후 한족의 관대풍속과 습관을 매우 좋아하였으며{,흔快喜悅漢族的“冠帶”等風俗習慣,}, 더욱이 항상 唐으로부터 군사작전의 공으로 후한 상과 하사품{賞賜}을 받았기 때문에, 고려국의 멸망 이전에 이미 재력이 변방에 이르러{“財力雄邊”} 동북의 각 소수민족들이 두려워하였으며, 각 부족들은 이미 많은 수의 노복도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의 일파{大祚榮一支}들이 비록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하는 것이 비교적 늦었으나, ‘동으로 가기 전’{至其 “東奔”前}에 이미 이곳에서 근 30년을 생활하였으며, 더욱이 그 이전에 그들이 일찍이 고려의 봉건통치 하에서 반세기를 지냈는데, 지금의 遼陽지역의 속말말갈의 사회내부에 이미 계급구분이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다{大祚榮一支雖遷居這里較晩, 但至其 “東奔”前也已在這里生活了近30年, 且在此之前, 他們早在高麗封建統治下過了半個世紀左右, 這些事實說明, 遷到今遼陽地區的粟末靺鞨, 社會內部已有了階級劃分.}.
계급사회의 일정 메커니즘으로 각 계급의 관계를 조정하고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은 이미 속말말갈의 신흥귀족들이 신속히 착수하여 해결하여야 할 문제가 되었다.
696년{당 万歲通天 원년}, 거란의 우두머리 李盡忠등이 營州도독 趙文O(歲+羽)를 죽이고 당에 반란하게 되는 것이 속말말갈의 신흥귀족들에게 민족정권을 창건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변고가 발생한 것은 주로 조문O등이 폭력으로 정권을 휘둘러 동북의 모든 소수민족들에 대한 착취와 민족압박을 갈수록 무겁게 하여, 각 민족인민들의 불만이 극도로 일어나자 이진충이 이 기회를 빌려 일으킨 일이다. 영주에 거주하였던 속말말갈인들은 반당행렬에 가입하게 되었다. 사건 발생 후, 武則天이 曹仁師를 파견하여 대군을 통솔하고 먼저 진압하자, 대조영의 아버지 乞乞仲象과 다른 우두머리인 乞四比羽가 그들의 부족과 고려의 유민 일부{部分 “高麗余種”}를 거느리고 遼水를 건너 동으로 도망하였다. 당이 동북 소수민족들의 반당연맹을 와해 시키고자 거란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포위하여 소탕함과 동시에, 속말말갈에 대해서는 위무정책을 사용하였는데, 乞四比羽는 許國公으로, 乞乞仲象은 震國公으로 봉하였다. 을사비우가 당의 성의를 믿지 않고 명 받기를 거절하자 결국 당의 추격병에 의해 참하여졌다{,拒 “不受命”, 結果被唐追兵 “擊斬”.}.
걸걸중상이 도망 중에 병에 들어 죽자, 대조영이 아버지를 이어 부족을 이끌고 계속 동으로 도망하였는데, 당에 항복한 거란의 대장 李楷固가 그 뒤를 끝까지 추격하여 天門嶺{지금의 길림성 경내의 哈達嶺}에 이르자, 용맹하고 용병술에 뛰어난 대조영{,驍勇善用兵的}이 천문령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고려와 말갈이 합쳐진 무리’{, “合高麗, 靺鞨之衆”}로 당의 군사를 대패시키자, 이해고는 몸을 탈출하여 패하여 돌아갔다. 698년{당 聖歷 원년}, 돌궐이 지금의 하북성 중서부의 O(女+爲)州, 檀州, 定州, 趙州등지로 들어와 살게 되고, 거란과 奚가 또다시 돌궐에 의지하여 따르게 되자, 중원으로 통하는 동북의 통로가 차단되게 되는데, 대조영이 형세를 판단하고서, 그리하여 그 해에 지금의 길림성 敦化縣 敖東城에서 건국하여 왕이라 칭하였으며, 唐武后가 그의 아버지에게 봉하였던 진국공의 ‘震國’를 국호로 삼고 스스로를 진국왕이라 칭하였다.
진국이 건립된 후 오래지 않아 당의 中宗이 복위하여 恃御史 張行급(山+及)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불러 위무하고자 하자{招慰}, 祚榮(원문에 성은 생략하고 적혀있음)은 즉시 아들을 파견하여 받들게 하고 당에 신속{臣屬}하였다. 당의 睿宗 李旦의 즉위 후 713년{당 先天 2년}에는 낭장 崔흔(心+斤)攝 鴻瀘卿을 祚榮이 있는 곳으로 파견하여 左驍衛大將軍, 발해郡王으로 관직을 주고{拜}, 또한 忽汗州를 통치케 하고, 홀한주도독도 더하여 주었다. 祚榮은 바로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동시에 ‘발해군왕’의 ‘발해’를 ‘진’의 국호 대신으로 취하였다. 이때부터 발해가 국호와 족칭으로써 역사에 보여지게 되었다.
발해국은 하나에 이중적인 성격의 정권을 가졌는데, 그것은 속말말갈과 고려등의 유민들이 연합하여 건립한 하나의 변강소수민족왕국정권이며, 동시에 또한 당왕조 관할 하의 하나의 羈미州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다음의 3가지 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첫째는, 매 세대의 발해왕의 경질은 비록 大씨의 아버지가 죽어 아들이 계승하거나 혹은 형이 죽어 동생이 잇더라도, 모두 당왕조의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 책봉을 받은 후에야 합법으로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단지 ‘權知國務”, ‘知國務’로만 칭할 수 있을 뿐이었다.
둘째로는, 당왕조는 새로이 왕위를 잇는 국왕을 책봉할 때에 동시에, 반드시 忽汗州都督府都督으로 임명하였으며, 계승자{繼立者}는 바로 동시에 당왕조의 지방관의 임명을 받아야 했다.
셋째로는, 발해국은 당왕조에 조공할 의무가 있었는데, 사서에는 발해가 당조정에 무릇 140여차례 조공하였으며, 后梁과 后唐에 10차례 조공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대조영의 개창과 大武藝의 “斥大土宇”와 大仁秀 “開大境宇”를 거치면서 발해는 연이어 광대한 지역을 갖게 된다. 오늘날의 지리로 비교하여 보면, 동으로는 일본해에 임하고; 서로는 대략 길림성 乾安, 長嶺과 雙遼縣일대로 거란의 영역과 서로 접하며; 남으로는 조선 德源부근의 龍興江{泥河}에 이르며; 북쪽 변경은 조선 孟山 부근의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대략 七星河 혹은 撓力河 너머 우수리강에 연하여, 다시 比金河에서 일본해 까지 이르며; 서남으로는 대략 조선 맹산 부근의 동에서 시작하여, 大同江 뒤에 있는 价川 부근을 넘고, 다시 淸川江을 지나 義州 북에 있는 압록강을 넘어, 요녕성 단동시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무순시와 新賓滿族自治縣 지경 그리고 開原縣과 昌圖縣의 지경을 경과하여 雙遼縣 영역에 다다른다.
발해의 왕성은 또한 忽汗州都督府의 府의 소재지인데, 처음엔 敖東城에 있다가, 후에 몇 번 이전하여 제5대 왕 大華嶼 때에 上京인 忽汗城{지금의 흑룡강성 寧安縣 東京城}으로 다시 옮겨와 이후로는 다시 변동이 없었다.
발해인들은 열심히 노동하여 번영된 경제와 휘황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키고 창조하였으며, 고대 동북지역의 개척과 발전을 이룩하는 데에 걸출한 공헌을 하였다.
( 제2절-1. 발해국의 건립. 끝.)
2. 발해국의 경제와 정치제도( 이 부분은 대부분 생략 및 중략 – 분량도 많지 않음)
발해의 구성원들의 내력은 동일하지 않는 발전단계에 있었고, 부족과 민족이 동일하지 않는 유형의 생산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발해지역의 경제발전의 수준은 시작하면서부터 불균형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발해국이 존재했던 200여년간 동안 그 근본이 변하지 않았었다. 대체로 말하자면 … (중략 : 발해의 특산물, 농업을 설명)…
농업에 있어서 가치있는 것을 지적하자면, 유명한 ‘노성의 벼’ {“盧城之稻”}으로, 그것은 1,000여년 전에 발해인이 이미 북위 43도 부근과 그 북쪽지역에서 까지 벼의 수도작을 성공시켰다는 걸 나타내는데, 이는 그 농업생산이 말갈시대에 비하여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는 걸 나타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하 생략 : 목축, 수공업<방직, 동과 철의 제련과 야금, 금은제품, 도자기, 조선업등>, 어업과 수렵, 정치제도와 조직, 군대제도와 신분제도 등을 설명…)
(2. 발해국의 경제와 정치제도. 끝.)
3. 遼의 발해와 東丹國의 멸망(이 부분은 누락된 곳 없음)
항상 발해를 삼키고자 뜻을 지녔던 거란의 추장 耶律阿保機는 남으로 요동과 西奚를 평정하고, 북방으로는 室韋등의 부족을 통제하고 서쪽 정벌에서 승리한 후에, 중원으로 진군한 후의 후환을 없애고자, 925년{遼 天贊 4년}12월 말에 발해정벌의 조서를 내리고, 이어서 직접 황후, 황태자, 대원수 堯骨을 거느리고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게 된다. 그는 귀를 감싸지 못할 만큼 신속한 기세로, 단지 2,30일 만에, 229년간 15대까지 왕위가 이어졌던 발해국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발해국이 멸망된 원인은 여러가지이나, 주요하게는 그 내부의 계급간의 모순과 정권투쟁이 갈수록 격렬하게 되자, 阿保機에게 그 기회를 제공하게 되어 일거에 섬멸된 것이다.
발해국 내부의 계급모순은 대외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층 격렬하게 되었다. 일찍이 제 3대왕 大欽茂 때에, 발해는 대대적인 토목과 축성, 궁실건축을 시작했었다. 현재 이미 발견된 발해시대의 고성만 이미 몇 십座에 달한다. 지금의 寧安縣의 발해 왕성의 유적지는 제 11대왕 大彛震이 지은 것으로, 그는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하여 높은 담장과 정원, 정자, 누대, 전각들을 성안에 가득 배치하였다. 이는 대량의 인력과 물자와 재력을 소모시켜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귀족과 관료들의 부패와 사치와 교만과 음란함은 날로 심하여져서 통치계급과 많은 농민, 수공업자, 사병들{部曲}, 노예들과의 마찰이 갈수록 첨예하였다. 귀족과 관료들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폭력적인 기구를 강화시키고자 군대를 수만 혹은 수십만 까지 증가시켰다. 발해의 당시의 생산능력의 조건에서 이러한 일련의 방대한 군대를 공양한다는 것은 백성들이 감히 그 부담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계층간의 갈등{階級矛盾}을 한층 격화시켰다.
阿保機가 발해를 침략하게 한 원인은 발해의 집단내부의 왕위쟁탈의 투쟁이었다. 이러한 투쟁은 대흠무의 사후에 이미 돌출되기 시작하였다. 그가 죽은 후 1년여의 시기에 왕위를 둘러싼 두 번의 유혈투쟁이 있었는데, 우선은 대흠무의 친척동생{族弟} 大元義가 무력으로 왕위를 빼앗으면서 반대자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년간의 준비를 통해 元義를 죽이고 대흠무의 손자인 大華嶼가 왕위를 다시 빼앗은 것이다. 제 10대왕 大仁秀가 왕위를 이으면서도 비슷하게 한바탕 격렬한 쟁탈전을 치렀다. 마지막 왕인 大O(言+?)O(言+?)가 왕위를 이은 후엔 그 사람됨이 변변치 못하고 어리석고 우매하여, 통치하여 부리는 데에 적당치 않아서{,其爲人庸愚暗昧,統馭失宜,}, 발해 내부의 각종 갈등이 더욱 격화 되었을 뿐 아니라, 예절의식{文}이 막 일어서고 있는 거란과 계속하여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이리하여 통치집단의 상류층에선 또다시 왕위쟁탈의 투쟁이 출현하게 되었다. 결국, 비록 大OO이 왕위를 지켜 냈다고는 하나 발해의 원기가 크게 상하여 나라 안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실패한 자들은 분분히 고려로 도망하여 나가버렸다. 3일 후에는, 또 예부경{禮部卿} 大和均, 均老와 사정{司政} 大元均, 공부경 大福O(莫+言), 좌우위장군 大審理등이 백성 1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하여 갔다. 12월 戊子 때엔 좌수위소장 冒頭干, 검교개국남 朴漁등이 백성 1,000호를 이끌고 고려로 달려갔다{奔高麗.}.
阿保機는 바로 발해 통치집단 내부가 붕괴되어 떨어져 나갈려는 이 기회를 바로 집어내어서 그리하여 그 해 12월에 먼저 사람들을 동원하게 하고, 이어서 윤12월에 직접 발해를 정벌함으로써 능히 일거에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阿保機는 발해의 上京을 공략하여 大OO을 포로로 잡은 후에 한번 기획을 하고 나서는{,經過一番籌劃,} 발해를 고쳐서 東丹{동거란의 뜻임}이라 불렀고{曰}, 忽汗城을 天福城으로 하고 그의 큰아들 耶律倍를 人皇王主東丹으로 책봉하였으며, 더불어 거란귀족과 발해의 옛 신하들을 각각 左右大相, 좌우次相으로 하여 많은 관리{百官}를 두어 다스렸다.
982년{요 乾亨 4년}에 遼省에 東京中台省官을 설치하자 일찍이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었던 동단국은 이때에 이르러 나라가 없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57년이었다.
발해가 멸망 후, 그 중심지역은 오래지 않아서 거의 사람들이 없는 지경{幾成無人之境}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난 것은; 하나는 아주 많은 발해인들이 거란인에게서 통치 받는 걸 원치 않아 대규모로 밖으로 도망한 것이며, 둘째로는 거란의 최고통치자가 통제를 쉽게하기 위하여 발해인들을 강제로 타지로 이동시킨 것이다. 외부로 도망한 주된 사람들은 고려와 여진 그리고 중원지역으로 도망갔다. 도주하여 들어간 두 지역은 사서에 상세히 언급하지 않거나 많은 걸 누락하였다{逃入后二地的, 史書語焉不詳, 或掛一漏万.}.
고려로 투항하여 간 무리는, “고려사절요”에 의거하면, 발해가 망한 후부터 938년{고려 태조 21년} 까지 차례로 대규모적으로 근 10차례(무리){10批}였으며, 총 사람 수는 “고려사절요” 권1에 적힌 것을 볼 때 수 만戶로써 약 10여만 명이었다. 이후에 고려의 경종, 현종, 덕종, 문종, 예종의 여러 왕조에도 또한 투항하여 온 자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사람수가 가장 많았던 해는 979년{景宗 4년}으로 “발해인 수 만 명이 투항해 왔고”{ “渤海人數万來投”}; 횟수(무리)가 가장 많았던 해는 1032년{덕종 원년}에 무릇 7번(무리){7批}이며; 마지막의 한 차례(무리)는 1117년{예종 12년} 정월에 52명이 투항하여 온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발해인이 지속적을 고려로 투항하여 도망하는 기간은 줄곧 요왕조의 기간에 상당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由此可見, 渤海人逃投高麗持續時間之長, 與遼朝相始終.}. 그들이 고려의 영역으로 도망하여 들어간 후로는, 소수만이 遼 統和년간에 요와 고려의 전쟁 중에서 요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 지금의 압록강의 서쪽에 살게 된 것 이외에는, 대다수가 차츰 고려족으로 융합되었다.
중원지역으로 도망하여 들어 간 것으로는 사서에 단지 3무리{3批}만 기록되어 있는데: 첫번째는 954년{后周 顯德 원년}에 烏思羅등이 30명을 이끌고 후주로 투항한 것이고; 두번째 무리는 979년{宋 太平興國 4년}에 酋帥(대장수?) 大駕河가 소교(小校) 李勛등 16명과 부족 300기(騎)를 이끌고 북송으로 돌아온 것{歸北宋}이며; 세번째 무리는 986년{요 統和 4년}에 “발해의 소교 貫海등이 반란하여 송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진지역으로 들어간 것은 사서에 미처 구체적인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는 데, “遼史”에 발해인이 남으로 이동할 시에 “혹은 신라{ 즉 고려}, 여진으로 도망하였다”고 말하는 것에 의거하면, 비록 고려로 도망한 숫자가 많지 않았다하여도 그 수는 만명 이상이다{, 卽使沒有逃往高麗的人數多, 但爲數當不下万計.}.
거란의 귀족이 발해인들을 압박하여 옛땅을 떠나게 한 것은 크게 두번 있었다 : 하나는 阿保機가 扶余府와 忽汗城을 공략한 후에 발해의 大씨 왕족과 전쟁중에 포로로 잡은 군사와 백성들을 上京臨演府 주위로 옮긴 것이고; 두번째는 928년{요 天顯 3년}에 동단국이 남으로 옮길 때에 많은 수의 발해인들도 더불어 遼陽을 중심으로 한 요동일대의 지역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러한 두차례의 대이동을 거치면서, 발해의 5京15府의 거주민들 대다수는 원래의 거주지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대체로는 : 上京의 龍泉府 주민 일부분들은 요의 臨潢府의 서쪽으로 옮겨지는데, 즉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巴林左旗지역으로, 대부분이 지금의 요녕성 遼陽市와 그 부근지역에 옮겨 살게 되었다; 中京 顯德府 주민의 소수는 멀리 夕老哈河유역까지 이동하여, 다수가 北鎭縣 내를 포함한 지금의 심양시와 요양시 일데에서 흩어져 살았다. 東京 龍原府의 발해인들은 지금의 요녕성 鳳城縣 부근으로 옮겨 졌으며; 남경 南海府의 백성들은 지금의 海城市를 중심으로 한 營口市에서 鞍山市에 이르는 지역으로 옮겨져 살게되었으며; 서경 鴨祿府 백성들은 요의 臨潢府의 남쪽으로 포로로 끌려가거나 옮겨지게 되었으며; 扶余府는 임황부의 서쪽으로 포로가 되거나 옮겨졌으며; O(莫+우부 방)힐(吉+頁)府 백성의 부분은 지금의 요녕성 昌圖縣 서북쪽으로 나뉘어 이동했으며; 定理, 安邊 2부의 주민들은 지금의 심양시와 그곳의 북쪽 지역으로 남으로 이동되었으며; 率賓府의 부분적인 주민들은 요녕성 盖縣과 北鎭縣등지로 나뉘어 옮겨졌으며; 東平府 주민들은 요녕성의 新民, 開原, 康平등의 현 일대로 분산되어 졌으며; 鐵利府의 부분적인 주민들은 요의 상경 서북과 지금의 西拉木倫河 부근, 장춘시 북쪽, 심양시 서남쪽의 渾河 북쪽으로 옮겨졌으며; 懷遠과 安遠 2부의 주민들은 지금의 철령시와 요하의 상류지역, 길림성 혼강시 북쪽으로 이동되어 살았다.
위에서 언급한 지역으로 옮겨진 발해인의 숫자는 대략 94,000여호에 470,000여 명이다.
외부로 도망하였거나 강제로 고향을 떠난 것 이외에 아직 대략 2만호, 10만여명 전후의 발해인들이 옛 지역에 남아있었다.
1114년 여진의 수령 阿骨打가 군사를 일으켜 요를 반격한 후에 요의 관할 하에 있었던 발해인들에 대해 무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집안”{ “女眞,渤海本同一家”}이었다는 구호로 불러내어 위무하자, 발해인들은 분분히 창을 버리고 여진에 투항하였다. 여진귀족은 그들을 군사로 삼아 “발해軍”으로 무릇 8猛安을 편성하였는데, 그들은 金代에 여진인들을 따라서 각지의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지금의 遼陽市일대에 5천여호의 발해인과 3만의 승병{勝兵}이 머무르게 되자, 金나라 사람들이 그 통제하기가 어려움을 우려하여, 빈번히 그들을 山東의 수비로 전환시켰으며, 辛酉년{1141년}에 이르러 내쫓는 일을 다하였다{, 盡驅以行.}. 1145년{금 皇統 5년}에 금의 희종 完顔亶이 조서를 내려 渤海猛安을 폐지하고 그 제도를 계승할 수 있도록 도모하고자 여진인들이 관리토록 하였다.
1177년{大定 17년}에는 금의 세종 完顔雍이 조서로 발해의 남녀들이 혼인을 하는데 옛 풍속을 따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여진귀족들의 일련의 이러한 조치들은 발해인들로 하여금 금왕조의 중기(中期)이후로는 다시는 하나의 독립적인 공동체활동을 할 수 없게 하였으며, 금의 통치지역 내의 발해인들을 분산시켜 차츰차츰 여진인으로 융합되게 하였으며; 금이 망한 이후에는 대다수가 한족으로 융합되었다.(3. 요의 발해와 동단국의 멸망. 끝.)
(제4편 제6장 제2절 속말말갈과 발해. 끝.)
<중국의 편집책임자 : 제4편의 分主編 = 肖之興, 동 제6장의 편집위원 = 楊保隆>
원문만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과 비판과 첨삭은 보다 학식이 많고 또 한창 공부하시는 분들이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역사전문가도 아니고 아직 아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관련 책과 논술들을 읽어 보면 속이 무지하게 끓고 답답함을 느낌니다. 여러분들이 좀 풀어주세요.
첫댓글 정치쪽 서술에 왜 건원칭제했다는 기록이 없을까요?
원문만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과 비판과 첨삭은 보다 학식이 많고 또 한창 공부하시는 분들이 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역사전문가도 아니고 아직 아는 것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관련 책과 논술들을 읽어 보면 속이 무지하게 끓고 답답함을 느낌니다. 여러분들이 좀 풀어주세요.
학문이 정치의 시중을 든다.. 이것이 떼넘들의 역사서술 원칙이죠. 호떡집에 한 번 더 불나야 정신을 차릴라나?
흠...... 솔직히 유일하게 한국이 거의 정치에 영향을 안받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