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에 더 푸르고 싱싱하게 자라는 채소가 있다. 청도 화악산 자락의 충분한 일조량과 청정 지하수를 흠뻑 먹고 자라 연한 줄기에 은은한 향이 그윽한 한재미나리다. 아삭한 식감의 쌈채소로 사랑받는 한재미나리는 노릇하게 구운 삼겹살과 먹거나 담백한 수육과 함께 곁들일 때 일품이다. 신선한 미나리전과 미나리비빔밥까지 먹고 나면 입안에 향긋한 봄이 찾아온다.
지금 청도에는 아삭하고 향긋한 한재미나리가 한창이다
봄을 부르는 초록빛 한 다발, 청도 한재미나리
한겨울에 더 맛있는 한재미나리는 청도 한재마을에서 키우는 미나리다. 예부터 경북 청도군 청도읍의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대를 한재라고 불렀다. 청도 남산과 화악산 계곡을 따라 이루어진 한재마을에 미나리단지가 들어선 건 1980년대부터다. 150여 개 농가에서 미나리를 재배하고 있으며, 모든 농가가 무농약 미나리를 재배한다.
한재는 미나리 재배에 필수적인 맑고 깨끗한 지하 암반수가 풍부해서 미나리밭의 넉넉한 배수는 물론이고 세척에도 한몫한다. 미나리를 손질해서 깨끗한 지하수에 씻는데, 두 팔을 이용해서 살랑살랑 흔들어 공들여 씻는다. 너무 힘을 주면 대가 다 부러지기 때문에 기술이 필요하다. 청정 암반수에 씻어낸 미나리는 바로 먹어도 될 만큼 깨끗하다. 알칼리성 식품인 미나리는 피를 맑게 하고 피로 해소, 해독 작용, 혈압 강하, 빈혈 개선, 피부 미용 등에 효과가 있다.
지하 암반수에 깨끗이 씻어낸 미나리는 바로 먹는다
1월 말부터 주말이면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한재마을을 찾는다. 2월과 3월에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 한재미나리는 사실 7월부터 9월까지 파종 시기를 빼고는 1년 내내 생산되는데,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찾기에는 이른봄이 제일이다.
삼겹살을 굽다가 한재미나리를 넣으면 한결 향이 좋다
한재미나리는 속이 통통하게 차고 식감이 연해서 생으로 먹기에 제격이다. 미나리 줄기 하나를 손으로 돌돌 말아서 노릇노릇하게 구운 삼겹살과 쌈장을 올려 한입 먹으면 삼겹살의 느끼함은 사라지고 고소한 맛이 향긋한 미나리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한재 미나리단지에 유난히 삼겹살 식당이 많은 이유다.
화악산 자락에서 나는 산나물로 만든 장아찌와 수육의 조합
싱싱한 한재미나리에 담백한 수육을 원한다면, 춘천집
뜨겁게 구워 기름기를 쏙 뺀 삼겹살에 미나리를 돌돌 말아 쌈장에 콕 찍어 먹는 식당만 상상했다면 오산이다. 한재미나리와 삼겹살 식당이 이어지는 언덕길에 주택을 개조한 ‘춘천집’이 있다. 한재에서 유일하게 수육으로만 21년째 영업 중인 식당이다. 12월 초부터 4월 중순까지 쉬는 날 없이 점심시간에만 영업하고 4월 말이면 문을 닫아 12월에나 다시 문을 연다. 한재미나리가 가장 연하고 맛있을 때만 영업을 하는 주인장은 5월부터 산으로 들로 다니며 산나물을 캐다가 장아찌를 담근다. 저온 냉장고에 온갖 종류의 장아찌가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표고버섯을 직접 재배해 장아찌를 만들 정도라니 장아찌 사랑이 대단하다. 수육과 미나리가 나오기 전, 밥상에 차려지는 6~7가지 장아찌만 보아도 그 정성을 알 만하다.
연근, 돼지감자, 생강, 마늘, 달래, 깻잎, 취나물, 감, 토마토, 양파, 다시마, 양배추 등 수십 가지 장아찌를 담가 그때그때 밥상에 맞춰 낸다. 아삭하고 짭조름한 장아찌가 입맛을 살려준다. 장아찌를 조금씩 맛보다 보면 메인 요리인 돼지 수육과 미나리 한 다발이 상에 차려진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시골 된장찌개와 미나리비빔밥까지 차려지면 눈앞이 초록빛으로 시원하다. 눈만 즐거운 게 아니라 싱싱한 초록빛 미나리 한 다발이 잃어버린 식욕을 되찾아주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반가운 마음에 미나리 한 대를 집어 야무지게 말아서 입에 넣는다. 이른봄의 싱그러운 기운이 입안에 가득 찬다.
수육에 직접 담근 생강, 마늘장아찌를 얹은 미나리쌈밥
이제 미나리쌈밥을 본격적으로 먹을 차례다. 긴 미나리 한 대를 서너 번 접어서 그 위에 수육을 얌전하게 놓는다. 거기에 된장을 살짝 얹어 입에 넣는다. 아삭하고 쫄깃하게 어우러지는 맛이 찰떡궁합이다. 생강 몇 조각과 커피 한 스푼만 넣었다는 수육은 잡내 하나 없이 쫀득하고 고소한 맛이 입맛을 사로잡는다. 미나리쌈밥을 먹는 틈틈이 장아찌에도 수육을 싸서 먹는다. 간장과 식초, 설탕에 절였다지만 채소의 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아찌와 함께 먹는 수육도 별미다.
이제 보리비빔밥을 맛볼 차례. 진하고 구수한 된장찌개를 서너 숟갈 떠서 미나리비빔밥에 넣고 비빈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보리밥에 콩나물, 무생채, 미나리뿐인데도 영양과 맛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과식에 대한 걱정보다 미나리를 씹을수록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한재미나리 밥상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행복한 포만감이다.
‘억수로 연한 한재미나리 드시러 오이소~’, 탐복미나리가든
춘천집 바로 옆에 있는 ‘탐복미나리가든’은 한재미나리가 너무 맛있어서 '탄복'한다는 의미를 가졌다. 모범음식점답게 실내가 깔끔하고 넉넉하다. 주인장 부부의 고향이기도 한 청도 한재에서 부모님과 함께 대를 이어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어 미나리 사랑이 극진하다. 7월부터 9월까지만 쉬고 10월부터 6월까지 쉬는 날 없이 한재미나리와 삼겹살 밥상을 차려내고 있다.
삼겹살을 주문하면 한재미나리가 한 다발 나온다. 500g에 8,000원이다. 한재 미나리단지에서 직접 사가는 가격은 1kg에 10,000원 선(시세에 따라 다름). 한겨울에는 택배 주문을 받지 않는다. 추운 날씨에 미나리가 얼어버리기 때문에 직접 사는 것만 가능하고 봄부터 택배가 시작된다.
삼겹살을 불판에 올려 노릇노릇 구워지면 미나리를 한 줌 올려 가위로 툭툭 잘라준다. 숨만 죽으면 삼겹살과 함께 집어 먹는데 그 맛이 부드럽고 향긋하다.
미나리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놓고 상추 위에 얹어 삼겹살과 함께 싸 먹다 보면 풍성한 미나리 한 다발이 홀쭉해진다. 확실히 삼겹살보다 미나리가 더 인기 있다.
탐복미나리가든도 밥상 위에 짭조름한 장아찌 반찬이 수두룩하다. 화악산 자락에서 나는 갖가지 산나물과 꽃, 열매 들이 1년 내내 두고 먹을 수 있는 장아찌로 변신해서 약초밥상을 이룬다. 죽순, 씀바귀, 깻잎, 취나물, 오이, 냉이, 아카시아 꽃잎 등 50여 가지 장아찌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미나리장아찌다. 연하고 가느다란 미나리로 장아찌를 만들어도 식감이 괜찮을까. 의구심에 한입 먹어보면 아삭아삭 살아 있는 식감에 은은한 향까지 반할 만하다. 한재미나리는 장아찌로 담가도 아삭하고 향기롭다.
미나리 생채 무침을 밥에 넣고 비벼 먹는 미나리비빔밥도 별미다. 냉이된장찌개를 듬뿍 넣고 쓱쓱 비벼 먹는 맛이 구수하다. 탐복미나리가든은 반찬이나 찌개에 들어가는 된장과 청국장, 고추장을 직접 담가서 쓴다. 짙은 초록빛이 먹음직스러운 생미나리전은 99% 미나리만으로 부쳐내는데, 검은콩가루를 넣어 반죽해서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한 조각 큼직하게 찢어서 초간장에 찍어 먹으면 쫀득하면서 달큼한 미나리 향이 입안에 가득하다.
미나리쌈밥에 미나리비빔밥, 미나리전까지 푸짐하게 먹고 나면 봄이 성큼 다가서는 느낌에 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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