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시에 임하는 성례적 연합 혹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의 문제- 이 문제와 더불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오랫동안 의견의 차이를 보여 왔고 지금도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문제에 접하게 된다. 표징과 표징이 의미하는 것의 관계 곧 성찬시의 그리스도의 임재의 성질의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본적이 없었다. 여기서 네 가지 견해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1. 로마교회의 견해(transsubstantiatio).
로마 교회는 성례적 연합을 물질적 의미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미의 성례적 연합 이론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 표현에 따르면, 적절한 의미의 연합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징은 의미하는 것과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길을 터주기 때문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라” (hoc est corpus meum)는 예전문을 낭독할 때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고 로마 교회는 말한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난 후에도 빵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들의 본질은 변할지라도 속성은 그대로 남는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인 몸과 피가 임재한다.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성찬 제정의 말씀과 요6:50이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앞구절은 요14:6, 15:1, 10:9등과 같이 비유적인 표현임이 분명하며, 뒷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성찬을 먹는 자마다 하늘에 가지만 성찬을 먹지 못하는 자는 누구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되어(53,54절) 로마 교회 자체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더욱이 63절은 분명히 영적인 해석을 지칭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떼신 떡을 그 떡을 다루는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해석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본질이 변화된 것으로 가정된 떡까지도 그대로 떡이라고 부른다(고전10:17,11:26-28). 이와 같은 로마 교회의 견해는 인간의 감각에도 맞지 않는다. 실체와 속성의 분리를 믿는 것과 물리적인 몸이 동시에 여러 곳에 임재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체를 높이고 숭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consubstantiatio)
루터는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을 거부하고 그것을 공재설(consubstantiation)로 대체했다. 루터에 의하면,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 안에, 그리고 그 아래,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몸과 피를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전인격이 신비스럽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임재한다고 한다.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몸과 피가 성찬시에 장소적으로 임재(local presence)한다고 주장한다. 루터파는 때때로 자신들이 성찬시에 그리스도께서 장소적으로 임재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장소적(local)이라는 단어를 달리 해석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은 모든 다른 몸들이 같은 공간으로부터 배제된다는 뜻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것, 예컨대 하늘에는 없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자성이 자석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고 영혼이 육체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육체적 본질이 성찬 안에 장소적으로 임재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소위 입으로 먹는 것(manducatio oralis)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성찬시의 빵과 포도주에 참여하는 자들은 단순히 믿음을 통하여 주의 몸과 피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신체의 입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이다. 합당하지 않은 자도 성찬을 받으나 그에게는 정죄밖에 안 된다. 이 견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해와 별반 다른 것이 없는 견해이다. 이 견해가 속성의 변화없는 본질의 변화의 반복적인 기적을 포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속성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채 본질만이 변화하는 기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이 내 몸에 동반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정당성이 없다. 더욱이 이 교리는 주의 영광스러운 인성이 편재한다는 불가능한 교리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 점은 루터파들도 부인하는 교리이다.
3. 츠빙글리의 견해
츠빙글리의 성찬론에는 아주 결함이 많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고, 이와 같은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성찬이란 하나의 표징 또는 상징으로서, 영적인 진리와 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상징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상징들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단순하게 기념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의 표(badge)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이 스위스의 개혁자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가 한 말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 있어서 성례란 단순한 기념의식으로서 신자들이 서약하는 표지와 상징일 뿐이라는 사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에는, 보다 깊은 성찬의 의미를 전달하고 성찬을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위하여 하시는 일에 대한 인 또는 보증(pledge)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상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기의 생각을 조금씩 바꾸어 간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가 생각했던 내용을 정확히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성찬론에서 모든 반지성적인 신비주의를 제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성찬을 표현하려는 경향으로 과도하게 기울어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종종 성찬은 단지 주의 죽으심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찬은 인 또는 보증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이 같은 생각을 충분히 전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성례에서 하나님이 보증하신 것보다는 신자들이 서약한 것이 더 중요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는 것과, 그를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신자의 믿음에 임재 하신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다만 그의 신성으로만, 그리고 성찬에 참여한 신자들의 이해에만 임재하실 뿐이다.
4. 개혁파의 견해(praesentia spiritualis sive virtualis)
칼빈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츠빙글리의 성찬론을 반대했다. (1) 이 견해는 성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을 희생시키면서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한다. (2) 이 견해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을, 그의 이름을 믿고 그의 죽으심을 의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과거의 사역 곧 (츠빙글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죽으신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재의 영적 사역 곧 영광 중에 살아계신 그리스도와도 관계가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물론 육체적으로 그리고 장소적으로 성찬시에 임재 하시지는 않지만, 몸과 피를 포함하는 전인으로서 임재하시며 또한 향유된다고 말한다. 그는 신자들과 구주의 전인격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그의 표현은 아주 명료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에 임재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만 장소적으로 임재할지라도, 신자가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생명을 주는 감화를 그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감화는 실재적인 것이면서도,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신비적이요, 성령을 매개로 하여 전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받는 믿음의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전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communio)를 가능케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이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Dabney는 마치 수찬자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를 받아 먹은 것처럼 말한 칼빈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은 분명히 칼빈의 표현에서 애매한 부분이다. 어떤 때는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말은 성례적으로 곧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는 우리의 신앙 고백서에서 발견된다(비교- 벨기에 신앙고백 35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5,76문;성찬집례모범). 이와 같은 칼빈의 교리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만 실질적으로(virtually) 임재한다는 것이다. Hodge 박사의 말을 빌리면 “십자가에 달려 희생된 구주의 몸이 가져오는 덕과 효과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른 도구로서 성찬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합당한 수찬자에게 임하고 전달된다”.
- 루이스 벌코프,『조직신학』(서울:크리스찬다이제스트,2001),pp.9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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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도 칼빈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위의 글은 분명히 우측 끝단이 짤려서 나오고 잇습니다.
짐작컨대, 이글은 벌코프에 의해 쓰여져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음을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대단한 신학자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편견들이 나타납니다. 쯔빙글리는 오늘날의 기념설과 같은 견해를 갖고 있어서 가장 성경적인 해석을 내놓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재설 임재설 등은 화체설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칼빈은 예정론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자꾸만 남들이 믿음의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행위구원론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고 또한 그 자신의 구원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는 침례도 안받았습니다!
침례도 안받은 사람이 성만찬을 논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는 그저 유아침례 반대자들을 살육하거나 핍박하는데 여념이 없던 사람이었고 프랑스 국왕에게 위그노 살육을 과감하게 진행하라고 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진리를 들으려 하는 사람들의 믿음부터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근데 위그노는 개혁교회가 아닌가요? 칼빈이 자기 소속 교회 성도에게 살육을 과감하게 진행하라고 했나요? 제가 잘못 아는 것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죽인 후에 나바르왕 마르키스에게 자기는 그러한 이단을 잘 처단하였으며 국왕도 위그노들을 척결함이 옳다고 권고했습니다. 그의 주적은 카톨릭이 아니라 재침례교도들, 위그노들이었고, 카톨릭을 비난하기 보다는 교황제도를 비난했습니다. 대신 교황의 자리에 그 자신이 앉았습니다.
칼빈이 위그노(칼빈파)를 숙청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합니다.
위그노는 칼빈파가 아니었습니다.
12세기에 페트로 드 부루시안 운동 이후 귀라드 물랭의 성경 번역을 했고, 쟈크 르프브르 등의 개혁자들이 1487-1530년대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칼뱅 이전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 위그노는 그 뿌리를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다가 1559년 신앙고백무렵 혹은 그 이전부터 칼빈주의가 위그노에 스며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나바르 국왕에게 칼빈이 권고한 내용입니다.
1561년 칼빈이 마르키스 나바르 왕 고등 시종에게 보낸 편지;
"Honour, glory, and riches shall be the reward of your pains; but above all, do not fail to rid the country of those scoundrels, who stir up the people to revolt against us. Such monsters should be exterminated, as I have exterminated Michael Servetus the Spaniard."
영광과 존귀와 부귀가 당신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라로부터 저들, 우리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람들을 동요시키는 불한당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괴물들은 근절되어야 합니다, 제가 미카엘 세르베투스, 스페인인을 멸절
시켰습니다.
여기서 칼빈은 나바르왕에게 권고하는데 바로 훗날 이 나바르왕 앙리 4세가 유명한 낭트 칙령을 공포합니다.
이로 보면 나바르공국은 위그노로 가득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낭트 칙령으로 신교도 박해가 잠시 주춤했지만 프랑스 내의 신교도 박해는 루이 14세에 절정을 이룹니다.
칼빈의 개혁에 그들이 자극을 받았을 수는 있지만 칼빈 출생 이전부터 존재하던 왈덴지안, 알비파, 페트로 드부르시안들의 규합체였던 위그노를 칼빈 추종자들이 세운 것처럼 오해하는 것은 본말 전도입니다.
교회사를 볼 때에는 항상 카톨릭 이전에 기독교가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보아야 합니다.
나바르왕은 나중에 부르봉 왕조로 개명합니다. 앙리 3세 이전에도 항상 프랑스 국왕과 혼인해왔는데 3세는 카톨릭으로 귀환했고, 그 아들 4세가 낭트 칙령을 발표하고 나중에 1620년에 그의 아들이 부르봉 왕조를 세우면서 루이 13세가 됩니다. 그 이후 프랑스 혁명때까지, 그리고 나폴레옹 이후 잠시 왕정복고시까지, 프랑스 국왕은 나바르 왕 칭호를 항상 병기하여 왔습니다. 루이 14세, 18세 모두 나바르왕이었습니다.
그 나바르왕에게 불한당 살육을 권고하였는데 바로 그 불한당이란 위그노들을 말하는 것이었지 카톨릭 살육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그노를 칼빈주의자들로 몰아가는 것은 기독교가 카톨릭에서 생겨나왔다는 교회사를 신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 많은 위그노들이 갑자기 칼빈 덕택에 생겨났겠습니까? 칼빈 이전에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이 프랑스 내에서 항거한 교회사 기록을 애써서 외면할 때에는 그런 이론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내에는 독일 루터보다 일찍 반카톨릭 저항 운동이 심하였고 후기 십자군 운동은 바로 프랑스 알비 지역의 신교도 숙청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엇습니다.
하토브님의 이러한 답글을 대하면서 교회사책들 자체를 신뢰할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른 교회사를 통전적으로 알수 있을 까요? 위그노 교도들이 칼빈주의자라는 말은 교회사를 전공한 신학교 선생들의 말입니다. 지금 출판된 반 카톨릭 교회사 책들도 위그노를 칼빈파로 말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교회사 책으로 바른 신약교회사를 알수 있을까요! 난감하네요.
위그노가 후기에 칼빈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우선 다수의 재침례파가 포진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재침례파를 격렬히 비난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칼빈은 재침례파의 영혼수면설을 영혼 소멸설로 오해하는 반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혼수면설은 강력한 영혼 불멸설을 말합니다.
칼빈 자신은 재침례파 과부와 결혼하였으면서 재침례파를 학대하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알비파요, 왈도파요 드부르시안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칼빈의 예정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칼빈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이전에 받아들였는데, 칼빈의 예정론을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파악됩니다.
케슬님이 위그노를 개혁교회로 보신 것은 오해입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파악할 때 크게 구분할 것은 카톨릭과 침례교(형제단)과 개혁교회로 구분해야 합니다.
침례교와 형제단은 개혁교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침례교는 개혁교회들 이전에 상존하고 있었습니다. 개혁교회는 루터 ㅋ칼빈 쯔빙글리 웨슬레까지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슬레의 경우는 형제단과 연결이 가장 많은 개혁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침례교, 형제단은 개혁교회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고 그들은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을 파악하고 기억하는 것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입니다. 많은 신학교가 가르치는 교회사는
왈덴지안이 피터 왈도에 의해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뿌리는 항상 초대교회까지 올라갑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콘스탄틴 이전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칼빈이 기독교 강요 하나 발간하니까, 프랑스에 200만 위그노가 생겨납니까?
단지 껍데기가 마치 칼빈주의자들인 것처럼 오해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칼빈은 재침례파와 웬수였습니다. 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습니다. 그가 1533년에 회심했다는 기록을 보면, 법학 공부하다 신학공부하기로 바꾸어먹었다는 것이 회심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교리들은 하나님 모독에 속하는 예정론, 성직자제도, 침례중생..
칼빈은 참된 교회들인 형제단과 침례교의 피흘린 자취들을 비난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 재침례파 모두 비난 대상이었습니다. 위그노의 껍데기는 개혁교회였을 수 있지만 그 내막은 바로 형제단과 알비파, 왈덴지안, 드 부르시안들이었습니다.
제고이센이 개혁파가 아니었다면,
영국의 청교도나 스코틀란드의 장로교도 원래는
칼빈파가 아니었다는..!!
네덜란드의 고이센은 칼빈파인가요? 아닌가요?
저는 제고이센이라는 말을 처음 듣습니다.
제고이센은 네덜란더어로 바다의 거지단을 의미하는데 스페인 네덜란드 독립전쟁때 네덜란드 신교도 함대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고이센은 네덜란드어로 거지라고 합니다. 즉 네덜란드 신교도를 부르는 명칭이었다고 하는데 위그노처럼 제가 칼빈파로 잘못 알고 있었는지 해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오해가 없었기를 바랍니다. 교회사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자 하는 생각으로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칼빈 신봉자들은 칼빈이 전도한 적도 없는 지역에 무수한 칼빈주의자들이 생겨났다고 믿는 것같습니다. 칼빈 그는 유아침례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재침례파를 격렬히 비난하면서 재침례를 받았을 리도 없고 그렇게 한 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그는 유아침례만을 죽도록 옹호했고 그에 반대하는 세르베투스를 체포하도록 명하여 기소하게하였습니다.
위그노는 칼빈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칼빈이 23살 때 위그가 스위스에서 죽었습니다. 위그가 23살 칼빈에게서 배워서 전도했다고요? 그는 아직 법학 공부하고 있었고 (자칭 타칭으로) 거듭난 시점이라는 1533년보다 한해 빨리 위그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칼빈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자체도 의문시되지만 설사 그의 회심을 인정한다 해도 위그는 칼빈이 회심하기 전에 죽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위그노가 생겨났다고요?
칼빈신봉자들은 칼빈을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음이 여기서도 드러납니다.
based on a belief in salvation through individual faith without the need for the intercession of a church hierarchy and on the belief in an individual's right to interpret scriptures for themselves, placed these French Protestants in direct theological conflict with both the Catholic Church and the King of France in the theocratic system which prevailed at that time. Followers of this new Protestantism were soon accused of heresy against the Catholic government and the established religion of France, and a General Edict urging extermination of these heretics (Huguenots) was issued in 1536.
1536년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발간한 해였습니다. 이미 그해에 프랑스에는 위그노가 번성하여 그에 대하여 이단으로 경고하고 멸종시키라는 칙령이 발동되지 않습니까? 칼빈이 책을 발간하자마자 150- 200만의 위그노가 폭발하였다고요?
저도 그런 성령 폭발물을 가져보았으면 한이 없겠습니다!
칼빈은 회심한지 3년만에 책을 써서 세계를 뒤집고 프랑스에 200만의 신자들을 갖고...
위그노가 칼빈주의자들이었다는 주장은 생 패트릭이 카톨릭이라는 주장과 같습니다.
그들의 교의 실행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분명 믿는자들의 완전 침수에 의한 침례를 가르치고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바로 왈덴지안 알비파의 연장선상에 잇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칼빈은 유아세례 주장자요, 재침례 반대자였습니다.
위그노에 대해서는 하토브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위그노는 칼빈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나중에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고 세계의 역사에 나와 있습니다. 제가 위그노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위그노교도 안으로 칼빈주의가
침투해 들어간 것으로 결론을 내리면 되겠군요!
위그노교도들이 칼빈주의[개혁파]로 흡수되었다는
것과 칼빈주의가 위그노교도들 안으로 침투했다는
미묘한 차이를 숙고해서 관찰해야겠습니다.
위그노 뿐만이 아닙니다. 침례교도들 안에도 칼빈주의가 침투했습니다. 칼빈이 그토록 혐오했던 재침례파들 안에 칼빈주의가 스며든 것입니다. 또한 침례교의 시작 시점을 1550년 경으로 보는 학설이 오늘날 신학교들에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례교는 창시자도 없고 시작 시점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침례교가 초대교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침례교는 적어도 콘스탄틴 이전에 존재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종교 재판 기록들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이제 다만 기존에 존재하던 위그노에, 칼빈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침투했느냐? 칼빈이 그정도까지도 비난했는가?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프랑스는 워낙 카톨릭이 강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개혁시대 이전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드뭅니다만 독일보다 더 왕성한 기독교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중에는 카타리가 있었습니다. 헬라어로 청교도에 해당됩니다.
그 많던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고 흩어져 영국과 네델란드로 갔고 그들 국가는 부흥하였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제가 그런 얘기를 해주면 놀랍니다. 영불 전쟁 패퇴의 근본원인은 해상 선박 수송 지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프랑스 조선공들의 대부분이 신교도 위그노로서 영국 네델란드로 피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 입니다.
아직은 자세하지 못하나 전체적인 윤곽이
잡히는 듯... 해서요.
셀틱 기독교의 역사가 말입니다!
아울러 칼빈주의 5대강령을
다시금 바라볼 필요를 개인적으로 느낍니다.
좋은 교제가 되어 감사하네요.
교회사를 볼 때 주목할 것은 각 교회 집단들이 유아침례를 실행했는가? 화체설을 인정했는가? 입니다. 첫번째 이슈는 대개 판정이 쉽습니다. 두번째 화체설 문제는 별로 확인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내의 가장 강력한 반 카톨릭 저항세력이 알비파였고 십자군 운동의 후기 동원령은 주로 알비파 숙청에 있었습니다. 그들 알비파들을 잡아다가 심문한 종교재판 기록들은 알비파가 1) 유아침례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믿는자 침수를 강조햇다는 것 2) 화체설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등이 나옵니다.
그토록 유아세례를 반대하던 프랑스 신교도들이 칼빈파였다든지 칼빈주의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상당부분 예정론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취약점입니다.
프랑스인들이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것은 그들이 제대로 숙고하고 검토하여 받아들였다기 보다는, 독일은 루터가 개혁했지 않느냐? 프랑스에는 칼뱅이 있다, 는 식의 대충 받아들인 경향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것은, 다비는 프랑스에서 많이 전도하였고 이탈리아, 독일에서도 많이 전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한 칼빈은 어디에서도 전도를 거의 한적이 없고 다만 제네바에서만 주어진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에 전도여행을 다닌 적이 없습니다. 스트라스 부르
에서는 부써 등을 통해서 많은 문헌들을 보고 공부할 수 있게되어 거기서 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가 펼친 이론들로는 1) 카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2) 침례냐 세례냐는 별거 아니고 자유다 3) 성직자들에 의해서만 세례 베풀어져야 한다 4) 물침례에 의해 거듭나며 성령은 나중에 임할 수 있다 5) 유아들에게 침례 베풀지 않는 것은 그들의 구원을 빼앗는 행위다 6) 예수님의 피흘림은 예정된 사람들에게만 속죄 효력을 갖는다는 예정론을 포함합니다. 그는 재침례를 격렬히 비난하였으므로 카톨릭에서 받은 유아세례 외에 그 자신이 아무런 침례를 안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침례 기록이 없습니다.
프랑스 위그노는 분명히 화체설을 반대하였고 오늘날의 기념설 혹은 상징설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Largely, however, they tended to be primarily distinguished as being Sabbath
keepers, not Sunday keepers. They tended not to practice infant baptism,
they shunned the use of religious icons, (among which often were crosses),
and religious statues, relics and idols. There were many differences besides
these, but that becomes a topic on its own. These are but a few examples
that stand out, however. Just bear in mind that their history is speckled
with exceptions to many generalizations.
http://archiver.rootsweb.ancestry.com/th/read/HUGUENOTS-WALLOONS-EUROPE/2006-12/1165482213
위는 위그노에 관한 사이트인데 유아세례 반대하고 성상 숭배 반대, 일요예배 대신 토요일 안식일 예배까지 언급됩니다.
칼뱅주의나 칼뱅파라 불리우기에는 너무 차이가 클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기념설, 기억설이 옳습니다. 화체설에 대해서는 좀더 이해해줄 필요가 있는데 그들은 과거에는 실질적으로 물질이 변했다고 하다가 요즘에는 실험실 장비들이 등장하니까, 실제로 실험하면 물질은 변하지 않았는데, 액시던트(ACCIDENT) 는 그대로 있지만 실물은 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점에서는 그렇게 여긴다는 말과 연결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알비파 왈덴지안등은 화체설에 반대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