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대마도에서 하룻밤을 지낸 바닷가 민박집이다
일본식 다다미방에 전기요를 깔고
또 두툼한 이불을 주어잠자는데 별 불편이 없었다
對馬島는 나가사키현에 소속이되어있엇고
차량번호판에도 長崎(나카사키)로부터 시작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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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주인이 해가뜨니 일출을 구경하라는 소리에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침해는 수평선을 지나 하늘위로 솟아올랐고
일행중 부지런한 사람은 어늣새 바다가 바위 끝으로 달려간 분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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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사로 향하던중 일본집 뜰악에 맺어있는 빨간 열매가 시선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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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선생님 순국비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쓰시마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修善寺)에서 치러졌으며
그곳에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에 비를 세우다
일본의 계획적인 침탈과 내정간섭이 본격화 되었던 구한말의 역사적 상황,
몰락해가는 왕조의 쓰러져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던 최익현 선생님
지금이야 쾌속선으로 2시간 30분이지만, 목선뿐이던 그 당시를 되돌아보자.
대한해협의 물살은 더욱 거칠었을 것이고, 바람 또한 사나웠을 것이다.
그 바다를 건너왔다.
오고 싶어 온 것이 아니라, 나라를 송두리째 삼켜버린
약탈자들의 음모 속에 유배된 것이다.
멀어지는 부산포, 조선 땅을 바라보며 면암 선생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선생님께서 운명하실 때 남긴 유시(遺詩)
기첨북두하고 배경루하니(起瞻北斗拜瓊樓)….
백수만삼에 분제류라(白首蠻衫憤悌流)….
만사불탐 진부귀(萬死不貪秦富貴)요….
일생 장독이 노나라의 춘추(一生長讀魯春秋)라네.
아침에 일어나 북두를 바라보고 임금님 계신 곳에 절하고 나니,
흰 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르는구나.
만 번을 죽는다 한들 어찌 부귀를 탐하랴.
일생을 읽은 책이 노나라의 춘추라네…
선생이 대마도로 압송 된지 5개월이 지난 1906년 11월 17일…,
양력으로는 1907년 1월 1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적지 대마도에서 단식으로 순국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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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들은 절(寺)에 가족납골당을 지어놓고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면 절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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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중 사진촬영담당자 농협 최전무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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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즈하라(巖原)의 성문으로
조선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위해 만들어 高麗門이라명하였다
현재의 문은 태풍으로 인해 훼손된것을 1989년 다시 복원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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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결혼 기념비를 찾아가는 도중
유치원 건물을 지날때 벗꽃나무가 벗꽃 꽃방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2-3일만 늦게왔으면 일본에서 만개된 벗꽃을 볼수있었으리라
덕혜옹주(德惠翁主 :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고종과 복녕당 양씨(梁氏) 사이의 딸입니다.
덕혜옹주는 1912년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측근을 모시던 궁녀 양귀인(梁貴人) 복녕당(福寧堂)과의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 태어났다.
창덕궁 낙선재(樂善齋)에서였다.
고종은 환갑의 나이에 본 아이이고, 장성한 왕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옹주를 금이요, 옥이요 하면서 귀여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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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 하였으나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 일신국민학교)
5학년이던 1925년 일제에 의하여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동경 학습원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1930년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인 조발성 치매증으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를 옮겨 치료하며 고생하였습니다.
1931년
대마도번주의 아들인 소다케유키 백작과 강제 결혼하여
3년만에 딸 마사에을 얻었으나 지병이 계속되었습니다.
1951년
다케유키와 이혼을 하고, 딸이 결혼에 실패하여
현해탄에 투신자살하여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가 미국 방문 도중
일본에 기착한 기회에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가 면담하여,
1962년 1월 26일 38년만에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창경궁(昌慶宮) 낙선재(樂善齋)와 연결되어 있던
수강재(壽康齋)에 칩거하였습니다만
계속된 치료에도 병세는 호전되지 않다가
1989년 4월 21일 상오 11시 40분에 별세하였습니다.
그 해 4월 25일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金谷洞)에 소재한
홍유릉(洪裕陵) 부속림에 안장되었다죠.
일제하에서 덕혜옹주는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일본인들로부터
독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을하고,
일제에 의하여 일본인에게 강제결혼당하고, 일본인의 자식을 낳고,
한국의 역사가 마구 짖밟히고,평생을 웃음을 잃고 살아가,
결국은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 억류된분입니다.
근대 한국사에 있어 아픈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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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있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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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市役所 건물 국기 계양기에 日章旗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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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市役所 건물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있는 일행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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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함부로 열어주지 않고 누구인가 확인후 열어주기위해
외부가 환히 다 보이도록 대문을 만든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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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하라마치 항구언덕에 위치한 서산선사는 9세기 이전에 지어진것으로 추정된다
西山禪寺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통신사로 왜국에 갔다와서 전쟁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고 잘못된 정보를
전해준 김성일의 詩碑(시비)가 있는 곳이다.
김성일의 후손이 세웠는데 이 서산선사의 주지가 바로겐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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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소(玄蘇) 스님의 부도
겐소(玄蘇)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 들어와서 조선말을 익히고
조선의 지리와 정세를 파악하여 왜에 알린 첩자이다.
임란 때에는 길잡이 역할을 한 왜의 승려이며,
나중에 조선과 왜의 협상에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왜의 공로자 겐소(玄蘇)가 있던 절에 조선의 관리
김성일의 詩碑(시비)가 있다는 것은 왠지 ......
김성일의 후손들이 사비로 세운것이란다
현소 스님은 하카다(博多) 세이후쿠사(聖福寺)에서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하 승려가 되어 1588년(선조21년)부터 조선에 드나들며
자국의 내부사정을 설명하고,
일본과 수호관계를 맺고 통신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1590년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의
통신사 일행이 풍신수길의 저의를 살피기 위하여 일본으로 갈 때 동행했으며,
이듬해 다시 입국하여 조선의 국정을 살피고
토요토미의 명나라 침공을 위한 교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이끄는 선봉군에 국사(國使)와
역관 자격으로 종군하였다.
스님의 부도는 절 옆에 있는 무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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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선생의 시비(詩碑)이다.
학봉 김성일(1538∼1593)은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의성이다.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이다.
조선 선조 임금이 왜국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황윤길과 함께 통신사로 파견하였다.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필히 왜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황윤길의 의견과 반대로 보고하여
당시 동인과 서인의 세력 갈등의 상황에서 우위였던
동인 세력인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같은 동인이었던 유성룡 선생과의 교분이 깊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선조의 처벌의지에도 불구하고 유성룡 선생이
적극 변호하여 벌을 면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초유사로 종군하다 병사했다.
경내에 있는 시비는 의성 김씨 문중에서 최근에 만든 것이고,
원래의 시비는 산사 뒷산 기슭에 현소 스님의 부도와 함께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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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馬市 免稅店 (DUTY FREE 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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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를 한 "기온"식당 건물 주인은 한국사람이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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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명함 이름끝자가 (子)가 아니라 (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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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原町 대형 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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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까스 국제여객선 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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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터미널에서 바라본 경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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乘船券 앞면과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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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출항을 기다리며 시간이 많아서일까 술이 좋아서일까 술판이 벌어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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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깔금한 옷차림의 중년이상의 많은 일본사람들이
여객선 대합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는모습을 보며 손을 흔들어
무슨일인가하고 창가까이 가서 내려다보았다
들고서있는 깃발 글씨중 挑戰과 仁田中61回를 읽고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환송하는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였다
가이드 설명은
쓰시마(대마도)에 살다가 나가사끼(본토)로 이사하는 사람들을
전송하러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라는것이다
挑戰이라는뜻은 섬에 살다가 본토 육지로 이주하면
상당히 소외당하고 어려운 처지에 봉착하게 되는경우가 많은데
도전정신으로 용감히 고난을 극복하라는뜻이라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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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일행이 타고 온 여객선 DREAM-FLOTER
첫댓글 구경 잘 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