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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 가는 길에 먼저 지율 스님이 떠오른다. 100일 단식을 통해 지율 스님이 지키고자 한 것은 단순히 천성산이 아닌 이 땅의 자연이고, 생명일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 지율 스님은 개발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 |
반환경적 개발에 반대한 것이다. 결국 스님의 오랜 노력은 고속철 터널 공사를 잠시 멈추게 했으며, 천성산에 대한 전반적인 환경영향 공동조사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도롱뇽 소송으로 잘 알려진 천성산 일대는 2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이탄층 습원이 자리한 고산 습지로서 환경부에서는 이 가운데 천성산의 화엄늪을 습지보존지역으로, 정족산의 무제치늪을 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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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도립공원에 들어 있는 천성산(922미터)은 예부터 경치가 아름다워 소금강이라 불렸는데, 옛날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온 천명의 승려를 이 곳에서 <화엄경>을 통해 성인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이 지명의 유래로 전해온다. 천성산 정상부에 자리한 화엄늪이란 이름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성산 오르는 길은 내내 비경의 내원사 계곡을 따라간다. 기암괴석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계곡에는 층층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꽃이 한창이다. 특히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꽃은 역시 때죽나무 꽃이다. 오뉴월에 꽃이 피는 때죽나무는 산 속의 계곡가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가지마다 주렁주렁 늘어뜨린 때죽나무 하얀꽃은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있으며, 가을에 은행처럼 달리는 열매 또한 보는 맛이 일품이다.
계곡에 때죽나무 꽃이 눈길을 끈다면 산기슭에서는 쪽동백이 더욱 눈길을 끈다. 같은 때죽나무과에 속하는 쪽동백 역시 흰색의 꽃을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데, 때죽나무 꽃이 전체적으로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것에 비해 쪽동백은 마치 아카시아처럼 꽃차례가 다닥다닥 붙어 20여 송이의 꽃이 모여서 핀다. 하여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때죽나무보다 훨씬 더하다. 이 나무의 열매로 예부터 기름을 짜서 사용해 왔으므로, 쪽동백이란 이름도 거기에서 왔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감히 나는 봄에 피는 꽃나무 가운데 이처럼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원사 계곡 최상류에는 우묵한 곳마다 산개구리와 도롱뇽의 은신처가 있지만, 화엄늪을 만나려면 내원사에서 계곡을 버리고 약 2시간 정도 산자락을 타고 올라야 한다. 산 아랫자락에는 쪽동백이 한창이고, 좀더 올라가면 숲 그늘마다 수줍게 고개를 숙인 애기나리꽃과 조롱조롱 흰꽃을 매단 둥굴레꽃이 한창이다.
내원사에서 화엄늪까지 오르는 동안 나는 무려 10여 마리 이상의 명주딱정벌레를 만났다. 녀석들은 길을 가다 낯선 발자국 소리가 나면 재빨리 바닥의 나뭇잎 속으로 몸을 숨긴다. 몸은 전체가 검은색이지만, 윗면에 광택이 있어 쉽게 눈에 띈다. 녀석은 사람의 손에 잡히거나 천적을 만나 위험에 처하게 되면, 마치 스컹크가 하는 것처럼 심한 누린내를 풍겨 자신을 보호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녀석을 잡아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나는 화엄늪을 오르는 내내 심한 누린내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드물게 길앞잡이도 눈에 띈다. 비단길앞잡이라고도 하는 이 녀석은 몸빛깔이 광택이 나는 금색과 녹색이 어울린 가운데딱지 날개가 검은색에 청색과 흰색, 녹색이 얼룩덜룩한 띄무늬를 이루고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화려해 보인다. 화엄늪과 늪 주변의 마른 갈대줄기나 풀, 고사목등에는 흔한 게 털두꺼비하늘소다. 흑갈색 몸 빛깔을 띠는 녀석은 마치 날개 표면이 두꺼비 처럼 오둘도툴해서 붙은 이름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름에 비해서는 꽤나 아름다운 하늘소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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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정상부 가까이 이르면 드디어 드넓게 펼쳐진(4만여 평) 화엄벌을 만나게 된다. 옛 사람들은 천성산 정상부의 넓게 펼쳐진 갈대밭(봄에는 철쭉밭)을 화엄벌이라고 불렀는데, 여기가 바로 화엄늪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습지보존지역으로 지정돼 화엄늪 인근에 목책을 둘러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화엄늪은 얼핏 보아서는 그냥 들판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질척질척한 땅에 발이 푹푹 빠지는 이탄층(식물의 사체가 썩어서 검은 탄층을 이루었다)이 마치 갯벌이 뻘처럼 펼쳐져 있고, 중간 중간 물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호수처럼 거대한 우포늪과 같은 풍경을 기대한다면, 화엄늪의 풍경에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 정상부 에 이처럼 질퍽한 이탄층에 물웅덩이가 연이어 펼쳐진 늪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경우이다.
전문가에 따르면 화엄늪은 처음 생겨난 것이 길게는 1만여 년 남짓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잘 알려진 대암산 용늪보다도 훨씬 오래된것이어서 그 보존가치와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초와 골풀, 이끼류와 진퍼리새, 억새가 뒤덮은 화엄늪으로 들어서면 철쭉 군락지 사이사이로 푹푹 발이 빠지는 습지가 불규칙하게 이어져 있다. 크고 작은 물웅덩이 속에는 이제 천성산의 상징이 된 도롱뇽의 알이 풀그늘에 잠겨 꼬물거리는 유생을 키우고 있다. 알만 보아서는 어떤 도롱뇽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습지 주변은 무당개구리의 천국이나 다름없다. 이 곳의 무당개구리는 검은 이탄층에 적응해서 그런지 일반적인 무당개구리에 비해 몸빛깔이 좀더 검은색을 띠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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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탄층 웅덩이를 따라 습지 주변에서 자라는 동의나물도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여름이면 이 곳 웅덩이 주변에는 물매화가 희고 작은 꽃을 피운다. 고산 습지는 오래된 '생태유전자은행'이나 다름없는 생태계의 자궁이다. 형성시기가 수천 년에서 1만 년 정도이므로 당시의 오래된 꽃가루 유전자를 분석한다면 다양한 생태정보를 얻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 습지인 대암산 용늪은 유전자 연구가 이미 진행중이며, 현재 여러 나라에서 고산 습지의 생물 유전자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천성산을 비롯해 정족산 일대에는 약 20여 개가 넘는 보존가치가 뛰어난 고산 습지가 자리해 있는데, 천성산 터널은 바로 이 지역의 아랫부분을 13킬로미터쯤 관통하도록 돼 있어 이미 오래 전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율스님이 주장하는 것은 만일 터널 공사로 인해 습지와 연결된 산의 단층대에 균열이 생길 경우의 위험성 때문이다. 자칫 그것이 고산 습지를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영향평가를 통해 이런 문제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몰라도 문제가 된다면, 공사중인 터널은 우회로를 찾아야 한다. 15분 빨리 가자고 1만년 생태계의 자궁을 망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