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소개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의 저자, 건축가 김명식의 새 공간 인문 에세이. 이번 책에서는 비극성과 고통의 무게를 다소 덜어내고, 보다 일상 영역에 가까운 기억공간을 선별해 안내한다. 도심에 자리한 서울로7017, 전태일기념관, 오월걸상, 둔촌주공 등은 개발 시대와 민주화 시대 그리고 오늘의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하고, 안국역, 강우규 동상, 여수 마래 제2터널, 노근리 쌍굴다리 등은 일제강점기 항일 및 그 후 해방 공간의 비극을 상기시킨다. 4·3평화공원의 비설, 4·16생명안전공원,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등에서는 불의에 스러져간 이들에 대한 추모의 방식을 고찰해 본다. 아울러 상실과 기억이란 화두를 은유적·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해외의 공간들을 소개하여, 우리의 추념 공간이 참조해야 할 바도 함께 살핀다.
🏫 저자 소개
김명식
LH 토지주택연구원 주거복지연구실, 도시재생공간연구실, 공공주택연구실에서 공공, 공동주택 관련 연구를 수행해 왔다.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서 고령 친화 도시 및 주거 정책 수립에 관여했고, 현재 이 연장선에서 초고령화시대에 대응한 은퇴자 및 고령자복합공동체주거 조성에 관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건국대(BFA, 건축기사), 델프트 공대(MSC, 네덜란드 건축사), 밀라노 공대(PHD con merito)에서 공간과 건축과 도시 공간에 관해 공부했다. RICERCHE DI SENSO NEL MONDO DEGLI INTERNI, 『철학적으로 도시 읽기』,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건축의 이론과 실천 1993-2009』 등의 책을 펴냈거나 펴내는 데 참여했고, 최근 우리 시대 기억의 공간에 관한 관심을 갖고 공간에서 인문학과 미학을 찾는 데 열심이다.
📖 책 속으로
마래 제2터널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군수물자 등을 운반하기 위해 여수 시민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것입니다. (중략) 벽면을 쓰다듬어봅니다. 거칠고 차갑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벽면의 질감과 한기는 손끝에서 가슴, 머리로 전해집니다. ‘암반을 어디 정으로 뚫었을까, 강제로 끌고 온 사람들 가혹하게 매질해 뚫었겠지. 채찍질이 몸에 새겨질 때마다 조금씩 앞으로…… 그러다 결국 뚫렸겠지.’ 짐작은 강한 확신으로 바뀝니다.
--- pp.29~30
도심 내 접근하기 좋은 곳에 세워질 4·16생명안전공원은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이 방문하여 서로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증대시킬 것입니다. 이곳이 추모를 위한 의식의 공간으로만 조성되지 않고 여러 가지 관련 행사가 열리는 일상의 공간으로 활용된다면, 접촉성은 배가되어 기억과 공감의 바이러스가 쉽게 전파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들어질 비물리적인 전염성은 사회적 거리 두기로도 막지 못할 따뜻한 공동체적 공감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pp.67~70
무덤 혹은 묘지 건축은 (중략) 존재의 기억과 기념, 찬양과 추모를 위한 징표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남은 자를 위한 것이고 몫입니다. 그래서 (중략) 절대 기억의 공간인 묘지나 무덤은 죽은 자의 무덤, 죽음의 무덤이 아니라 산 자를 위한 무덤, 삶을 기억하는 살아 있는 자를 위한 표징의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상실 혹은 부재에 관한 공간, 기념비나 기념관 혹은 묘지나 무덤은 남은 자가 수행해야 하는 자명한 행위, 곧 건축이고, 건축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임이 틀림없습니다.
--- pp.107~108
기억을 세공하는 보존, 복원, 재생 등의 작업은 창작보다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갑니다. 그런 만큼 까다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입니다. 낡은 것에 속박된 기억을 아름다움으로 해방시켜야 하는 일이니까요. 이럴 때 도시 경험의 지평은 더 확장되고 넓어질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 오늘 새길 시간의 무늬는 기억의 미학이어야 합니다. 이를 망치는 것은 도시 곳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아름답지 않은 것들에 너무나 관대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 pp.170~171
대지 위에 창조된 삶의 공간은, 우리가 거주하는 집 안이든 집 밖이든, 도시 안이든 넓은 초지이든, 이곳이든 지구 반대편이든 하나의 대기로 된 삶의 세계로, 절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중략) 북극곰이 죽어가며, 코로나로 병들어 가는 우리 시대에, 대상화할 수 없는 공간 속에 언제나 전경으로만 존재하고자 하는 우리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재고할 시간이 넉넉히 주어져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 pp.231~233
UTA항공 772편의 사고 지점 인근에, 다시없을 묘비이자 추모비가 세워졌습니다. (중략) 사람이 찾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추모비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중략) 이 추모공간은 조성한 지 몇 개월 만에 구글 지도에 포착되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 추모비를 볼 수 있게 됨으로써, 테러 희생자들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기억될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모래가 돌들을 덮어 새로운 모습을 만들고 있고, UTA항공 772편 추모공간은 사막이 만들어낸 하나의 예술이 되었습니다.
--- pp.271~272
금전이 추동하는 개발은 언제나 거주의 가치를 희생시켜 낭만과 추억과 삶을 교수대에 매답니다. 무엇이든 물질과 자본으로 귀결되는 시대 탓에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예우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기억이 일시에 소거되지 않는 거주 공간의 재건축 방식을 고민해보고 또 고민해봅니다. 이런 고민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흑역사가 어디 민족과 국가에만 있으려고요. 우리 주변에, 우리 가까이 허다하게 널려 있어, 마음만 먹으면 다크 투어리즘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할지 모릅니다.
--- pp.300~301
🖋 출판사 서평
절망을 보듬고 희망을 길어 올리는
공감·연민·회복의 기억공간 산책
2022년 가을, 젊은이 150여 명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생때같은 청년들을 한꺼번에 떠나보낸 ‘10·29 참사’를 겪으며, 한국 사회는 또 한 번 충격과 실의에 빠졌습니다. 많은 이가 고통 속에 스러져간 현장을 목격한 우리는 제 일인 양 아파하며 희생자와 유족을, 그리고 비통에 빠진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사회적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기억 저편의 고통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방아쇠를 당기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토록 어렵게 마음 써야만 가능한 일을, 우리는 굳이 하려 듭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일 뿐더러, 좀 더 나은 시대를 만들려면 잊지 않고 되새겨야만 하는 일들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재난 재해, 사회적 참사, 역사적 비극이 지나간 현장들을 ‘기억공간’으로 조성합니다.
당시의 상흔을 보존하거나 상징적 조형으로 기록하여 그 장소를 기억공간으로 만들면, 사람들은 종종 그곳을 찾아 그때를 되새기며 새삼 오늘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한층 더 공감하고 배려하며, 서로의 안위를 살피며 조심하는 더욱 끈끈한 공동체로 거듭납니다. 그렇게 사회는, 시대는 더 나은 곳으로 한 걸음 나아갑니다.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는 이런 기억공간들 가운데, 그 가치를 새로이 톺아본 사례들을 엄선하여 소개합니다.
기억공간, 새 시대를 향한 약속의 기념비
‘다크 투어리즘’의 인문·사회적 가치에 일찍이 눈떠, 2017년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를 펴냈던 건축가 김명식. 기억공간들을 찾아다니며 그곳의 인문학과 미학을 발견해 온 그는, 이번엔 좀 더 일상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들을, 보다 살갑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살핍니다. 우선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권력에 의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된 장소들을 찾아가 봅니다. 제1장 ‘역사화된 기억공간’에서 가본 이 공간들은, 근현대의 비극적 기억으로부터 길어 올린 새 시대에의 염원을 드러냅니다.
제주4·3평화공원에 마련된 추모 조형물 ‘비설’. 토벌대를 피해 달아나다 눈밭에서 죽어간 모녀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총에 맞아 주저앉은 젊은 어머니는 두 살배기 딸을 품에 안은 채 서서히 얼어갔고, 모녀의 시신은 눈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의 비극을 재현한 ‘비설’은 제주식 돌담에 빙 둘러싸여 있습니다. 돌담을 따라 띠처럼 길게 적힌 제주 전래 자장가 ‘웡이자랑’의 노랫말이 이들 모녀의 영혼을 조용히 달랩니다. 저자는 ‘비설’에 표현된 피에타의 형상과 의미가,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못지않은 장엄함과 성스러움을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여러 지역에 속속 들어선 5·18 추모 기념물 ‘오월걸상’도 인상적입니다. 1980년이라는 시간, 광주라는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 누구든 걸터앉아 ‘1980년 광주’의 기억을 되새길 수 있도록 마련된 걸상들입니다. 형태도, 거기 담긴 메시지와 이미지도 각양각색인 걸상들은 지금까지 부산 서면, 목포역 광장, 서울 명동성당 앞, 남양주 모란공원, 수원 경기도청 앞, 서울 기독교회관 앞 등지에 세워졌습니다. 도심 한편에 조용히 들어선 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빈 오월걸상. 일상의 빈틈에 잠시나마 거기 앉아, 우리 민주화의 잊힌 의인(義人)들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아도 좋겠습니다.
이 밖에도 1장에서는, 일제강점기 여수 주민이 동원되어 뚫은 ‘여수 마래 제2터널’과 여순사건 희생자 봉분,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학살된 이들의 비극이 깃든 ‘노근리 쌍굴다리’, 무책임한 정부에 경종을 울리고 희생자를 추념하는 ‘4·16생명안전공원’, 영웅적 분신(焚身) 이후 반세기 넘도록 빛이 바래지 않는 전태일의 행적을 기록한 ‘전태일기념관’, 전태일의 후예 노회찬을 기리며 살아 있는 것의 존재 이유를 되새기는 ‘모란공원’ 등을 답사합니다. 비극적 희생과 상실의 기억으로 가득 찬 이 공간들에서, 더 나은 시대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읽어내 봅니다.
일상 곁 기억공간에서, 새로운 공간 경험의 장소까지
제2장 ‘일상의 기억공간’에서는 우리 곁에서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도심 속 추모와 기억의 공간들을 살펴봅니다. 아울러, 추모의 공간은 아니지만 우리의 원형적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들에도 찾아갑니다. 너무 가까워 오히려 지나치고 마는 일상다반사의 기억공간들, 그리고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한 원형성의 공간들을 마주하며, 나날의 삶 속에서 우리의 기억과 공간 경험은 어떤 모습이면 좋을지 새삼 생각해 보게 해줍니다.
과거 ‘양재시민의숲’으로 불리던 서울 양재동 ‘매헌시민의숲’. 그곳엔 유격백마부대 충혼탑, 대한항공 858기 희생자 위령탑,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 위령탑 등 여러 추모 조형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 가운데 최근 들어선 ‘일상의 추념’은, 2011년 우면산 일대에서 발생한 산사태로 비명에 숨져간 이들의 넋을 달래는 ‘21세기형’ 기념비입니다. 윗면을 경사지고 거칠게 마감한 열다섯 개의 대리석 기둥은, 많은 희생을 불러온 산사태를 형상화했습니다.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의 ‘추방의 정원’과 비교해 볼 만한 이 추모 조형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미비한 재해 재난 대응에 경각을 주는 동시에, 숙연한 공간감을 자아냅니다.
서울역 서측, 만리동 들머리에 조성된 공공미술 프로젝트 ‘윤슬’은 서울 도심의 시공간을 새로이 체험하게 해주는 인상적인 조형물입니다. 도심 한복판의 그늘과도 같던 이곳에 들어선 ‘윤슬’은 우리의 원형적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도시 속 우물과도 같습니다. 2800개의 내림 층계가 만들어낸 넓고 둥근 공간 위를 스테인리스스틸 루버들이 가로지릅니다. 밤의 윤슬 위아래로 산란하는 조명의 빛은, 과거 이곳 가까이 흐르던 덩굴내(만초천)와 그 수면 위 어른거리던 교교한 달빛을 오늘의 시공간 속에 다시 불러냅니다. 길을 걷다 이 광경을 마주한 보행자는 도시 경험의 지평을 한껏 넓히게 됩니다.
이외에도 개발 시대 상징인 고가도로였다가 도시의 공중정원으로 다시 태어난 ‘서울로7017’, 조선 시대 사형장에서 오늘날 공원 겸 박물관으로 거듭난 ‘서소문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독립운동 테마 역으로 변모하여 언제나 3·1절을 기억하게 해주는 ‘안국역’, 신라 탑의 형상을 투각으로 표현해 우리의 공간 인식을 재고하게 만든 ‘경주타워’, 태곳적 공간에 대한 상상과 숭고한 건축의 예술적 감상을 환기하는 영월의 ‘젊은달와이파크’ 등을 찬찬히 돌아봅니다.
‘엄숙함’ 벗고 ‘친숙함’ 입은 우리 시대 기억공간들
마지막, 제3장에서는 눈여겨보아야 할 해외의 기억공간들을 소개합니다.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간 불의의 사고, 한 시대를 암흑으로 몰아넣은 광포한 힘의 흔적을 표현해 낸 추모와 기억의 공간들입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의 형태에서부터 어떤 의미를 내포한 상징적인 형태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비극의 역사를 기록한 이 공간들은 우리에게 추모의 또 다른 조형성을 제시합니다.
먼저, 사하라사막의 광막한 모래밭에 들어선 ‘UTA항공 772편 추모비’. 항공기 테러로 희생된 이들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표식이자,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다짐의 이정표입니다. 한편 독일 베를린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반성과 추념의 공간이 여럿 있습니다. 나치에 핍박받고 학살된 동성애자를 기리는 ‘박해받은 동성애자 추모비’, 유대인과 좌파 인사의 저서를 불태웠던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분서 기념 도서관’, 케테 콜비츠의 비통한 피에타 조각상을 전시해 2차대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신 위병소’, 유대인들이 짐짝처럼 몸을 싣고 죽음을 향해 출발했던 플랫폼 ‘그루네발트역 17번 선로’ 등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삶과 죽음은 건축을 통해 공간으로 투영되니, 공간은 일상의 배경과 무대가 되기도 하지만 고귀하고 거룩한 성소가 되기도 합니다.” 기억공간 답사를 시작한 이래 역사 속 어두운 페이지들의 흔적, 비통하고 공포스러웠던 사건들의 흔적을 찾던 저자의 발걸음은, 점차 일상 속에서 쉽게 발 닿는 추념의 공간으로, 더 나아가 미적 상상을 자아내는 공간들로 옮아갔습니다. 처음에는 ‘다크 투어리즘’이었던 걸음이 나중에는 ‘산책’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기억공간 답사는 엄숙해야만 하는 게 아님을, 이 책은 자연스레 이해하게 해줍니다.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 일과 사람을 기록한 공간들은, 이제 우리에게 좀 더 가깝고 살갑게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기억공간이 일상의 궤적에 들어와 친숙한 곳이 된다면, 우리는 그곳을 더 자주 찾고 더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 곁 기억공간들이 사건 사고의 흔적을 담은 타임캡슐의 기능을 넘어, 더 나은 시대를 위한 다짐의 기념비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는 바로 그 희망을 전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