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2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마태오 6,24-34
생각을 끊으면 걱정도 끊긴다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마음속에서 걱정을 몰아내는 법’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강연을 많이 했던 데일 카네기가 더글라스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강연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비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비극은 다섯 살짜리 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를 물고 참았습니다.
하늘은 또 하나의 생명을 선물해주었지만 그 아이도 역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휴식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처방한 약을 먹어보고 여행도 떠나보았지만 그의 슬픔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친척들 중 한 조카아이가 자신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힘도 없었지만 더글라스는 조카를 위해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배를 만드는 동안 슬픔에서 잠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안의 작은 소일거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고쳐야 되는 목록이 무려 242개였고 2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모두 수리를 하였습니다.
“걱정할 틈이 없다.” 이 말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하루 18시간 일을 했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전쟁 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 온전히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웅평 대위가 넘어올 때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집이 미군 비행장 옆에 살았기 때문에 전투기들이 뜨고 사이렌과 방송이 나올 때
어머니는 전쟁 나면 어디로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그 당시 저는 실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전쟁은 나지 않았습니다.
걱정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은 마귀가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있는데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걱정을 하게 돼 있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접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됩니다.
대학에 떨어질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 몰입하면 됩니다.
직장에서 잘릴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에 열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절대 잘리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하며 아무 일 안 하는 사람이 잘립니다. 걱정은 일이 잘되게 만들지 않고 그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걱정이 믿음이 되고 믿으면 믿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잘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같은 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왠지 잘릴 위험성 있는 것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잘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부 안 되면 누가 되겠어?’ 이 생각은 교만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리면 프란치스코처럼 살지 뭐.’라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해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일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대신 걱정하라고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걱정은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나를 믿으면 생기는 것이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사로잡히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리고 안 돼봐야 별게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그 사라지는 것을 잡기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적은 자아입니다.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 세상입니다.
그것만 배워 가면 됩니다.
믿고 노력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6,24-34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5, 29-29)
시골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그 끈질기고 왕성한 잡초들 사이로 여기저기 피어나는 청초하고 어여쁜 들꽃들이 있습니다.
나리꽃이며, 구철초며, 개망초며...
비싼 값의 씨앗을 따로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힘들게 허리 굽혀가며 모종을 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절기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야생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어 딱 한 송이 들꽃만을 바라봅니다.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쁜지, 그 작은 얼굴이 오목조목 갖출 것 다 갖추고,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때로 한심하고, 정말 못 나 보이고, 때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하느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비슷하고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보실 때는,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고, 다 특별하며, 다 나름 사랑스럽습니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섭리하시고 돌보아 주실 터인데, 미리 앞장서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오늘은 자비하신 주님의 충만한 현존 안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강론>
(2024. 6. 22. 토)(마태 6,24-34)
<모두 함께, 걱정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1)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하느님만 사랑하고, 하느님만 섬겨라.” 라는 명령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만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마태 22,37)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라는 말은, 이천 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2)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만일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또는 공동체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야단치기 전에 먼저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에서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말만 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내가’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3)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마태 10,9-11)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빈손’으로 떠났는데, 그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먹을 것을 하늘에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니까 일하지 않아도 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