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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땅
수 16:1-10
1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은 것은 여리고 샘 동쪽 곧 여리고 곁 요단으로부터 광야로 들어가 여리고로부터 벧엘 산지로 올라가고
2 벧엘에서부터 루스로 나아가 아렉 족속의 경계를 지나 아다롯에 이르고
3 서쪽으로 내려가서 야블렛 족속의 경계와 아래 벧호론과 게셀에까지 이르고 그 끝은 바다라
4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들의 기업을 받았더라
5 에브라임 자손이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지역은 이러하니라 그들의 기업의 경계는 동쪽으로 아다롯 앗달에서 윗 벧호론에 이르고
6 또 서쪽으로 나아가 북쪽 믹므다에 이르고 동쪽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 야노아 동쪽을 지나고
7 야노아에서부터 아다롯과 나아라로 내려가 여리고를 만나서 요단으로 나아가고
8 또 답부아에서부터 서쪽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이르나니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 이러하였고
9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분한 모든 성읍과 그 마을들도 있었더라
10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
수 16:1-10 / [요셉 후손이 차지한 땅] 요셉의 후손들이 제비를 뽑아 그들 몫으로 돌아간 남쪽 지역인 여리고 가까이에 있는 요단강에서 시작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빈들 동쪽에 있는 여리고 샘물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여리고에서 시작하여 산악지대를 거쳐 벧엘까지 올라간다. 2) 벧엘에서 다시 루스로 뻗어 가다가 아렉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경계선인 아다롯을 지나 3) 서쪽으로 계속해서 내려가다가 보면 야블렛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경계선까지 내려가고 급기야는 아래 벧호론까지와 게셀까지 내려간다. 그렇게 내려가다가 큰 바다라 부르는 지중해까지 이르러서야 그 경계선이 끝난다. 4) 이상이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그들 몫으로 차지한 땅의 경계이다. 5) [에브라임 지파의 땅]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각 지파에 따라 그들 몫으로 차지할 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이 차지한 땅의 경계선은 아다롯 앗달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윗 벧호론까지 뻗는다. 6) 또 여기에서 흔히 큰 바다라고 부르는 지중해까지 경계선이 나아간다. 이 경계선의 북쪽 선상에는 믹므다가 자리잡고 있고 믹므다에서 동쪽으로 돌아 죽 내려가다가 다아낫실로에 다다른다. 경계선은 다아낫실로에서 야노아 동쪽을 지나간다. 7) 야노아에서 죽 내려가다가 아다롯과 나아라에 이르고 그곳에서 계속해서 여리고에 다다르고 다시 요단강까지 경계선이 계속된다. 8) 서쪽의 경계선은 답부아에서 시작하여 가나 개울까지 이어진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큰바다라고 흔히 부르는 지중해까지 가서야 경계선이 끝난다. 이상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각 씨족별로 그들 몫으로 차지한 땅이다. 9) 이 밖에도 므낫세 지파 사람들이 그들 몫으로 차지한 땅가운데에도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차지한 성읍들과 각 성읍에 딸려있는 여러 마을들이 많이 있었다. 10) 또 하나 이야기해야 할 사실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가나안 주민인 게셀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였기에 오늘날까지도 게셀의 가나안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들과 함께 섞여 살고 있다. 게셀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강제 노동에 동원되어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요셉 자손 특히 에브라임 자손이 기업으로 받은 땅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셉 자손이 제비 뽑음(1-4)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인 요셉은 애굽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게 됩니다. 요셉이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야곱에 의하여서 그의 삼촌들과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창 48:5), 모세와 아론 때문에 레위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되어서 열두 지파의 계수에서 빠지게 되고, 요셉의 두 아들이 각각 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자손들에게 주어진 기업은 다른 지파의 두 배가 됩니다. 요셉 자손도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받습니다. 제비를 뽑는 방식은 아마도 두 항아리에 한쪽은 지파의 이름을 다른 한쪽은 대략적인 땅의 위치를 넣어 같은 순서에 뽑힌 땅을 분배받는 방식일 것입니다. 제비를 뽑는 이유는 기업 분배가 인간의 생각이나 권력에 의하여서 좌우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기 위함입니다. 요셉 자손은 동으로는 요단 강을 경계하며, 서로는 지중해를, 남으로는 단과 베냐민 지파를, 그리고 북으로는 아셀, 스불론, 잇사갈 지파와 각각 접하는 가나안 지역 중앙부에 걸쳐 있는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에브라임 자손의 기업(5-10) 요셉의 두 아들 중 에브라임은 동생이고, 므낫세가 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인 에브라임이 형 므낫세보다도 먼저 기업을 분배받습니다. 이것은 동생 에브라임이 야곱에 의하여서 장자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창 48). 그래서 에브라임 지파는 유다 지파와 더불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가장 강력한 두 지파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서 훗날에 통일 이스라엘이 나누어질 때 유다는 남 왕국을 대표하게 되고, 에브라임은 북 왕국을 대표하게 됩니다. 에브라임은 유다 지파 북쪽의 요단 강부터 서쪽의 대해까지 분배받습니다. 이어서 므낫세 지파가 땅을 분배받는데, 므낫세 지파는 그 인구에 비하여서 땅이 많았기에 므낫세 지파에게 속한 몇몇 성읍을 에브라임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 땅을 분배받은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의 땅 게셀에 사는 가나안 족속을 충분히 쫓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을 방치해 두면서 이용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상 숭배자들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20:16-18)을 소홀히 여기는 첫 번째 사례가 됩니다. 이는 에브라임 지파의 우상 숭배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 삶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그 인생의 결산을 내가 만족하였다는 말로 마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의 삶은 나그네요, 남의 땅에 우거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족한 인생이었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의 인생을 만족케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과 비할 수 없는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매일 승리하는 삶,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 설 교 >
에브라임 지파의 교훈
수 16:1-10 / 김광석 목사
오늘 본문은 요셉지파의 기업분배가 나옵니다.
요셉지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두 지파가 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할 때 동생인 에브라임에게는 큰 축복을 하고, 장자인 므낫세 지파에게는 작은 축복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브라임지파는 물질적인 장자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9절에 보시면 므낫세 지파에 속한 성읍과 마을들도 에브라함지파의 소유가 됩니다.
이렇게 물질의 축복의 차원에서 보면 에브라함지파는 복이 많은 지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에브라임지파는 불행한 지파였습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에브라임지파는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의 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지파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게셀족을 자신의 종으로 삼아서 육신적으로 더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시78:9절에 “에브라임 자손은 무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고 합니다.
결국 이 에브라임지파는 우상숭배를 하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표지파가 되고 나중에 완전히 진멸이 됩니다.
그래서 호세아 7장1절과 2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2. 내가 모든 악을 기억하였음을 그들이 마음에 생각하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에워싸고 내 얼굴 앞에 있도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에브라임지파를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물질의 축복이 당장은 복이 될 수 있지만, 그 물질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화가 될 수 있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다지파와 므낫세지파와 같이 자신들이 받았던 물질을 전혀 나누지 않습니다. 도리어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해서 가나안 족속인 게셀지파를 진멸하지 않고 도리어 종으로 삼아 그들을 통해서 더 편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표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직 물질의 축복만을 따라가던 에브라임지파는 결국 교만의 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호세아 5장5절에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 (교만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지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만의 죄에 빠지니까 호5장 3절과 4절에 보면 음란의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호7:1절에 보면 결국에는 거짓으로 도둑절하여 남의 것을 빼앗은 죄에 빠져서 결국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권순영집사 공장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권순영집사 아버지 장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기업은 기업주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씀을 가장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들 집사를 몇 달째 월급을 못줘도 종업원들 월급은 확실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꿈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를 주고, 또 그들을 주님 섬기듯이 하여서 그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월요일 6시 30분에 전 직원이 함께 예배를 드리게 하고, 그 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중에서는 권순영집사가 직원들과 성경공부를 하고, 또 주일에는 그 중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공장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공장이 더 잘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고, 그 직원자녀들의 교육까지도 책임지는 기업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물질의 축복이 절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축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우상이 되면 결국 에브라임지파처럼 우리에게 주신 물질의 축복은 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앞에 나오는 유다지파는 많은 물질의 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움겨쥐어 물질을 목적으로 삼거나, 우상으로 삼지 않고 나누어 주는 지파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섬기는 유다나라의 대표지파가 되었고, 그 후손가운데서 예수님에 태어나셨고, 또 지금까지 유대인으로 남아 있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물질의 복을 받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복을 많이 받은 만큼 유다지파와 같이 더 많이 나누어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셉 자손의 기업
수 16:1-10
유다 자손에 이어 두 번째로 기업을 분배받은 지파는 요셉자손입니다. 이 사실은 16:-17: 두 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16장에는 요셉의 두 아들 중 에브라임의 기업이 수록되었고, 17장은 므낫세의 기업이 수록되어 있어, 요셉은 한 제비에 두 몫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자손이 기업을 분배 받은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셉 자손이 받은 기업 분배의 문제점
1)기업분배의 서열
가나안 땅 기업을 분배할 때 서열상 요셉의 기업분배가 유다 다음으로 두 번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기에 문제가 됩니다. 물론 그렇다면 요셉을 생각하기 전 유다가 첫째로 기업을 분배받은 이유부터 생각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12아들을 차례로 축복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르우벤이 서열상으로 장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말미암아 장자권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이 시므온과 레위인데 이들은 세겜 족속을 기만하여 몰살한 책임 때문에 야곱의 분노를 사므로 이들 역시 장자권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넷째 아들 유다가 장자권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창48:8-12). 사실 따지고 보면 유다 역시 장자권을 차지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자부 다말을 취하여 베레스와 세라라는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창38:12-30). 하지만 야곱은 이것을 괘념하지 않고 유다를 사자에 비하고 왕권을 상징하는 홀과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할 것을 예언함으로 왕의 지파 곧 메시아의 조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창49:8-11). 이리하여 12 형제 중 유다가 사실상 장자권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수아가 기업을 분배할 때 서열상 첫 번째로 유다가 선정된 것입니다.
한편 요셉이 두 번째 서열로 기업 분배 대상에 오른 것은 창세기 49장의 축복서열과는 관계없이 야곱의 선정에 따라 된 것이 확실합니다. 물론 창세기 49장에는 출생 서열로 축복하였기 때문에 11 번째에 해당하나, 그 축복 내용은 유다 다음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창49:22-26). 하지만 요셉은 출생 당시부터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인정한 사실은 그에게 채색 옷을 입힌 데서부터 표면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창37:3). 야곱의 이런 처사는 아들 많은 집안에서 채색 옷을 입히므로 장자권을 선포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셉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야곱이 네 아내 중 라헬만이 자신이 선택한 사랑하는 아내였기 때문에 실제로 라헬에게서 낳은 첫 아들이 요셉이었으므로 야곱의 선정에는 오류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형들이 채색 옷을 입은 요셉을 시기하여 죽이려하기까지 한 것을 보더라도 이것이 장자권의 상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며, 또한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고 그 옷을 벗겨 염소피를 묻혀 그 증거물로 삼은 것을 보더라도 형들의 입장에서 이 옷이 장자권의 상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37:23,31-32).
2)요셉이 두 몫을 받은 이유
야곱은 마지막 열두 아들을 축복하기 전 창세기 48장에서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였습니다.
창 48:5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창 48:6 이들 후의 네 소생은 네 것이 될 것이며 그들의 유산은 그들의 형의 이름으로 함께 받으리라
이로써 요셉을 장자로 삼으려던 야곱의 꿈은 요셉의 실종으로 일시 좌절된 듯하였으나, 야곱이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으로 이주하여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을 보면서 두 몫을 축복함으로 야곱의 본래의 이상이 실현되었다고 봅니다. 두 몫을 받은 것은 장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상 오묘한 신학적 원리가 함축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요셉이 유다 다음 두 번째로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은 이유를 보게 되며, 레위 지파가 땅의 분배에서 제외됨으로 가나안 땅은 12지파에게 분할 된 것을 보면 타당성의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3)에브라임의 우선권 문제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 에브라임이 차자임에도 불구하고 기업 분배 서열상 우선권을 차지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여기에도 역시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역시 창세기 48:5-20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므낫세가 형으로서 먼저 언급되고 있지만, 창세기 48:5절에서는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우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요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아버지 야곱 앞에 갔을 때 장자는 오른쪽에 세우고 차자는 왼쪽에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장자에게 오른편 손을 얹어 축복기도를 해 줄 것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어긋맞겨 축복하였습니다. 요셉이 이것을 시정하고자 했지만 야곱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창 48: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야곱은 두 손자를 처음 상면하는 순간에 왜 에브라임에게 우수의 축복, 즉 장자의 축복을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을 앞둔 노 족장 야곱의 축복과 미래가 창창한 의인 요셉의 요구 중 하나님의 누구의 손을 들어 주셨습니까? 야곱의 손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야곱이 연세가 많아 정신이 혼미하여 잘못 축복한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라고 하여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 축복은 400여년이 지난 후에 그대로 적중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의 축복은 죽기 바로 전의 것이라도 성취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시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축복의 결과로 요셉 자손의 축복 중 에브라임이 므낫세를 앞질러 기업을 분배받게 됨으로 야곱의 축복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2. 요셉 자손 기업의 경계(16:1-4)
유다 자손이 남부의 좋은 땅을 받았다면 요셉 자손은 중부의 좋은 땅을 분배 받았습니다. 요셉 자손의 기업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양분되었으나, 제비 뽑음은 요셉 자손의 기업이라는 한 제비에서 두 지파가 나왔던 것을 봅니다. 즉 에브라임이 남쪽을, 므낫세가 북쪽을 차지한 것입니다. 칼빈은 “그 형제들이 서로 이웃하여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감복할만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라”하였습니다.
요셉 자손의 기업의 경계는 남쪽은 단과 베냐민에 접하고, 북쪽은 아셀과 잇사갈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에 비하여 경계가 확실하지 않으며, 그 지역 내에 성읍들이 생략되고 있음도 다르게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 수록된 요셉 자손의 경계 개관은 여리고 동편인 요단강에서 시작하여 여리고 지나고 중앙 산지를 거쳐 벧엘에 이르고, 거기서 서편으로 야블렛과 벧호론과 게셀을 지나 바다 즉 지중해에 미치는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지만 요셉 자손의 경계가 유다자손처럼 명확하지는 않으나, 가나안 땅 전체 중 중앙부의 요지를 차지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를 두 아들이 각각 남북으로 분할 배분하여 오래 전 야곱의 이상을 성취시켰다는 사실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임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에브라임 기업의 경계(5-10)
5절은 에브라임의 남쪽 경계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1-3절에서 보인 바를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5절은 그 보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 의하면 남쪽과 동쪽은 베냐민과 경계하고 있으며, 서쪽은 단과 경계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언급한 에브라임의 경계에 대한 보충에서는 1-4절의 요셉 자손 경계 언급과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다롯 앗달”이라고 한 것과 2절의 “아다롯”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다롯”을 “아다롯 앗달”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5절에서 “윗 벧호론”은 3절에서 “아래 벧호론”이라 한 것인데, 이는 동일한 지명으로 윗동네 아랫동네와 같이 구분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 16:6 또 서쪽으로 나아가 북쪽 믹므다에 이르고 동쪽으로 돌아 다아낫 실로에 이르러 야노아 동쪽을 지나고
수 16:7 야노아에서부터 아다롯과 나아라로 내려가 여리고를 만나서 요단으로 나아가고
수 16:8 또 답부아에서부터 서쪽으로 지나서 가나 시내에 이르나니 그 끝은 바다라 에브라임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이 이러하였고
수 16:9 그 외에 므낫세 자손의 기업 중에서 에브라임 자손을 위하여 구분한 모든 성읍과 그 마을들도 있었더라
에브라임 지파가 받은 기업이 적어서 므낫세가 적게 받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답부아를 비롯한 그 주위의 성읍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것은 보기 드문 형제애를 과시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수 16:10 그들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오늘까지 에브라임 가운데에 거주하며 노역하는 종이 되니라
에브라임 지파가 기업 분배에 있어서 유다 다음으로 특권을 받아 누리게 된 사실과는 달리, 영토 서남 끝에 있는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종으로 부리는 과오를 범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다지파가 여부스인을 멸하지 못한 것과는 다른 케이스입니다. 유다는 멸하지 못하였으나 에브라임은 멸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명을 어긴 것으로 큰 잘못입니다. 이는 저들을 종으로 삼아 저들의 노역을 통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탐욕 때문인 것으로, 이것이 일시적인 도움을 주었을지 모르나, 저들과 교류하는 중에 점차 우상 숭배에 감염되는 이국문화에 접하게 되고, 결국 이로 말미암아 후일에 에브라임이 주도하던 북 왕국 이스라엘이 속히 부패하여 남 왕국 유다보다 먼저 망하게 되는 원인 제공의 작용을 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일시적인 우리 자신들의 편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오늘의 가나안 족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훈을 각자 받아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요셉 자손
수 16:1-10
오늘날 교회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교인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해주려고 애를 쓰는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막연하게 바라본다거나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회의를 가지기도 하고 의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자신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믿음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올 때 결국 교회라는 단체에 그 영양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해주고 믿음의 삶에 대해서 보람과 기쁨을 갖도록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게 될 때 교회에 대한 투자에 보람을 갖게 되고, 교회의 외형적인 변화를 통해서 믿음의 현실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교회'라는 의식이 인간들에게 쌓여감으로서 보여진 것은 교회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인식을 해버리고, 내 교회가 쇠퇴하는 것은 곧 그리스가 쇠퇴하는 것이고, 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잘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잘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영광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것으로 인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교회와 연관되는 것일 수밖에 없고, 헌신 역시 교회와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 보이지 않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운 교회라는 단체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자기 교회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뒤바뀌고 믿음이 뒤바뀌고 하나님의 영광이 뒤바껴 버린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결코 이 세상에서 가시화되고 현실화되어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 은혜, 성령, 은사, 축복,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삶과 몸을 통해서 체험하려고 하고 실체화하려는 시도를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교회에서의 행위들이 거의 모두 여기에 목적을 두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교회 행사에 더 매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수련회니 기도회니 하는 교회 행사를 하면서 손을 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종이 쪽지에 자기 죄를 적어서 불에 태우는 행사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변화가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자극해서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력을 가지게 함으로서 내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공했던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일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역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 믿고 있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사람들을 붙들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음을 교회 생활로, 축복은 세상에서의 소유의 증가가 성공으로, 은혜 받음은 병고침이나 인격의 변화로, 성령 충만은 열심과 봉사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 그대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느낌도 없고 감정의 변화도 없고 그저 밋밋하기 짝이 없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회의감이나 의심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뭔가 은혜를 받았고 성령이 충만하다면 행동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사단의 시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초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실제 체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힘이나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어졌다면 그것이 기적이고 은혜이며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미 그것으로 믿음이 주어진 것이고 은혜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무엇을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믿음이 주어지지 않고 은혜 안에 있지 못한 자들이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믿음을 도와준답시고 교회에서의 종교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같이 지옥을 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매료된 인간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민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하나 해도 그결과가 내가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현실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새로운 생명보다는 만원 짜리 한 장이 더 쓸모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돈입니다. 결국 오늘날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계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입니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올해 달력 밑부분을 보면 이런 성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는 말씀을 적어 놨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정신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해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날까지 이 정신은 여러분에게서 사라지면 안됩니다. 신자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의미에는 또 다른 물음을 적어 놨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달력이 눈에 보일 때마다 이 물음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인간은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습니다. 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리에 속한 자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우린 항상 보이는 것에 이끌리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 자신을 점검하라고 그러한 문구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며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응에서 그러한 글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부자는 모두가 다 행복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란 남보다 나은 여건에서 편리하게 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천국으로 들러가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분명 보이는 것을 축복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하는 하늘의 복도 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보이는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천국 가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망하는 자로 마쳐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지금 당장 세상의 복을 받으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어느 인간도 세상의 복을 근거로 해서 믿음이 향상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가령 만원을 십일조 했을 때 십만 원이 복으로 돌아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애초의 생각대로라면 십만 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만 믿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만원해서 십만원 받았으니까 십만원 하면 백만원 받겠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시간 기도해서 복 받았다면 2시간 기도해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 지파에 대한 땅 분배입니다. 땅 분배에서 특이한 것은 요셉 지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파는 모두가 한 지파당 하나의 몫이지만 요셉 지파는 두 몫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받은 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요셉의 믿음과 연결시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가는 고통을 받았는데도 믿음을 변치 않고 여자의 유혹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식에게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이 주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우리 역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믿음이 변치 않고 죄를 이기고 살아가면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내려지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IMF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교회에도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교인들도 헌금을 하는데 부담을 가지게 되고 자연히 헌금이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때 목사들로서는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조한 것이 어려울 때일수록 헌금을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께 헌금함으로서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남들보다 더 많은 복으로 갚으신다는 거짓말을 눈하나 깜짝안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 교회에 정신 팔린 목사가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있기나 하겠습니까? 오직 내 교회 부흥되고 크게 되는 것만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에 나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모두가 교회와 연관된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자손이 남보다 많은 두 몫을 받게 된 것은 두배의 축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무엇을 통로로 해서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요셉 자손을 다른 자손들과 달리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 자손에게 특별히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요셉 자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로 집중시켜서 뭔가 보이실 것이 있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지 요셉 자손만 특별 대우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요셉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 자손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 48:22절에 보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한 축복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야곱이 축복한 대로 요셉 자손에게는 다른 자손보다 더 많은 두 몫이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야곱이 축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이 축복한 대로 움직이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곱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형제가 살아난 것입니다. 요셉의 희생은 자기를 희생하심으로서 고난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을 축복하는 것은 복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야곱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할 때 우수로는 장자인 므낫세에게 좌수로는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얹어서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요셉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반대로 해버립니다. 우수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우수를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손이 바뀌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9)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야곱의 행동입니다.
야곱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칙을 알았습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의 자리에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 자손에게 두 몫의 땅을 주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셉 자손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세상에서 높은 자, 지배하는 자, 힘있는 자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없는 약자보다는 힘있는 강자로 사는 것이 더 멋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지배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은 세상의 것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세상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아무리 마음에 담아두고 바라본다고 해도 세상의 형편이나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고 하늘을 소망하고 살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꾸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되는 것을 꿈꾸며 삽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오직 희생과 섬김을 말할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인해서 죽은 자에서 산자로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죽을 때가지 이것이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세상 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세상 원리가 심판의 근거가 될 날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미리 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유익의 달콤함에 빠져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달콤함이 언젠가는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얼마나 달콤함에 빠져 살았겠습니까? 돈의 위력을 실감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희생이나 섬김이란 단어는 전혀 모른 채 섬김 받고 지배하는 재미에 세월 흐르는 줄 몰랐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죽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세상을 지낸다고 해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잠시 동안의 세상은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곧 그런 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의해서 고통에서 건짐 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섬김 때문에 산 자 된 것을 안다면 그가 어찌 섬김 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교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부흥시켜주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온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시지 다른 하나님은 모두 우리에게는 우상일 뿐입니다.
요셉 자손이 받은 두 몫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유독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 두게 하셔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물으실 때 여러분의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는 자가 참으로 복안에 있는 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그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 원리에 충실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의 원리에 충실하며 하늘의 원리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올 한해도 여전히 보이는 것들이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근심과 염려에 빠지기도 하고 곤란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만 들이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수도 있고 의심이 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이 참된 복이며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