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부자들이여!"
야고 5,1-6; 마르 9,41-50 / 연중 제7주간 목요일; 2024.5.23
부활 시기를 지내고 다시 맞이한 연중 시기에 들려오는 말씀을 알아듣고자,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모범에 따라서, 인간 관계의 복음화 – 세상의 복음화 – 사회 복음화 안에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지닌 중차대한 의미를 이번 연중 제7주간에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과업이 교회와 사회의 복음화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바와 야고보 사도가 강조하려는 바에 부합된다고 보기 때문이고, 이는 교회의 복음적 쇄신과 신자들의 신앙 쇄신 그리고 사회의 인간화 목표를 성취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그 동안 삼 년 가까이 갈릴래아 지방에서 전국에서 모여든 군중을 상대로 가르치셨던 바를 당신 제자들에게 종합하여 요점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는 적대자들이 마련해 놓은 죽음의 올가미가 기다리고 있음을 예상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으로서는 작정을 하고 꺼내 놓으신 말씀 보따리였습니다. 그 말씀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내 백성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면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백성 중 보잘것없어 보인다고 해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지 마라. 그러니 네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면 그 손과 발을 잘라 버려라.”(마르 9,43.45.47.)
이 경고의 말씀으로 우리는 물 한 잔을 주는 선행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보잘것없는 이를 죄 짓게 하는 악행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행에 대해서보다 악행에 대해서 훨씬 더 강력한 경고를 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야고보 사도가 자신의 사목서한에서 신랄하게 경고해 놓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열두 제자 출신으로서 예수님과는 친척 형제지간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또 다른 야고보와 구분하여 작은 야고보라고 부릅니다.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께 대해 냉랭하고 도무지 믿지 않았던 나머지 친척 형제들과도 판이하게 달라서, 정의감과 의협심을 타고 난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인 야고보서 5장에서 부자들과 그들의 재물에 대해서 신랄한 심판의 언어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언어를 간추려 인용하겠습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은 예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다고 해서 무시하고 착취한 벌을 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그대들이 지옥으로 만들어 놓은 현세에서 손과 발과 눈으로 지은 죄의 무게를 그리고 죽기 전에 다가올 지옥의 벌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들을 착취하여 벌어 놓은 그대들의 재물은 썩을 것이고 그 돈으로 장만한 그대들의 명품 브랜드 옷들은 좀먹을 것입니다. 금고 속에 쟁여 놓은 금과 은, 그리고 환금성 보석들은 녹슬 것이며 그대들이 가로챈 노동자들의 품삯이 소리를 질러 하느님의 천사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대들이 단죄하고 죽인 의인들이 하느님 앞에서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야고 5,1-5.)
보셨다시피, 예수님의 말씀도 당신 가르침의 종합이듯이, 사도 야고보의 권고 역시 그렇습니다. 복음화의 종합판은 윤리에서 판가름나고 이는 최고선의 가치 중 평등과 정의의 문제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성령 강림 사건’이라고 높이 평가받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성경을 현대인들에게 알맞게 교회의 가르침을 새롭게 쇄신하면서도 교회의 내적 쇄신과 외적 성찰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일도 그러합니다. 특히 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문 가운데에서 마지막으로 치열한 토론을 거쳐 확정 반포한 사목헌장에서는 먼저 고대교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성서와 성전이 계시의 두 원천임 명시한 계시헌장과, 그 다음 초대교회를 본받아 교회가 하느님 백성이라고 천명한 교회헌장의 가르침을 반영한 제1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제2부에서는 긴급한 사회 현안을 다루고 있는데 그 분야가 가정-노동-문화-경제-정치-평화 등의 세상의 모든 현안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사목헌장은 문명 비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수준 높은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은 제1회기를 마치기도 전에 1963년에 선종하였고, 바오로 6세가 공의회를 성황리에 마쳤는데, 그 뒤를 이은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도 16세 그리고 프란치스코 등 역대 후임 교황들이 반 세기에 걸쳐 공의회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는데, 그 명제가 바로 ‘새 복음화’입니다. 그런데 복음화 제2천년기까지 가톨릭 보편교회를 주도했던 유럽 대륙의 교회들에서 지지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어서 교황청에서는 못내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의 주제와 직결되어 있어서 객관적인 관찰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으로 부유국과 빈곤국의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가운데, 부유한 나라 안에서도 빈부격차는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추세인데, 그 부유한 선진국들은 거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속한 미국과 유럽의 백인 국가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중심으로 한 복음화의 성적표가 국가간 그리고 국내의 양극화 현상인 것입니다. 적어도 이들 부유한 나라들의 교회는 자기네 정부의 정책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의회의 가르침이 별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또한 복음화의 성적표입니다.
그런데 몇 해 전 국제연합 무역개발회의(UNCTAD)에서는 설립 이래 사상 처음으로 예외적인 조치를 만장일치로 단행하였습니다(2021.7.).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이는 반세기 전만 해도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바야흐로 그동안 국가 성장의 모델로 삼아 왔던 유럽 선진국과 같은 대열에 합류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유일한 예외로서,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이 세계 10위에 오르고, 수출액 규모로는 세계 7위에 오른 결과를 반영한 것입니다. 이는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 대단한 국가적 경사였습니다.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경영으로 가난한 나라들을 수탈하고 착취한 죄의 대가로 벌어들인 부와, 이 부를 기반으로 자본과 기술의 우위를 선점한 효과 덕분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고 자력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선진화의 순도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훨씬 도덕적 우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들이 국내에서 보여주는 경제적 불평등 현상까지도 한국은 고스란히 따라하고 있습니다. 불법과 탈법을 마구 저지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번 우리나라 부자들이 선진국 부자들의 악습도 따라하고 있어서, 천민자본주의 구조를 고착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세대를 넘어 고착되어 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고, 선진국이 되었다는 이 나라에서 자신들의 삶은 나아지지 못한 데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서구화를 지난 70여 년 동안 열심히 추진한 결과, 서구적 가치가 대변하는 글로벌한 표준을 어느 정도 따라잡기는 했다고 하겠지만 외적으로만 서구화를 추진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비단 한국의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도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도 아시아에서는 괄목할 만한 교세 신장을 이루어 그동안의 모델이었던 유럽 교회를 따라잡는 서구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의식과 행태도 유럽 신자들을 흉내내는 세속화의 추세도 만연되어 버렸습니다. 그나마 한국 사회는 일부 첨단 제조업 분야와 문화적 한류에서는 물론 시민의식 수준에서 선진국 수준을 넘어 그들 나라까지도 이끌어 가는 선도국이 되고 있는 반면에, 한국 교회는 유럽 교회를 선도하자면 한참 멀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실현되자면 요원한, 공의회의 가르침과 이에 담긴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의 이정표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주목해야 할 요청이 절박한 현실입니다.
요컨대, 공의회가 제시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우리 교회가 가야 할 길은 이것입니다. 믿음은 성경과 복음에 따라야 하고, 전례와 성사는 이 믿음에 따라 활성화시켜야 하며, 전례와 성사에 따라 사회적 실천을 하되 구체적으로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서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에서 특히 우리 교회와 신자들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1987년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이 한 세대가 넘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낡고 진부해진 결과, 새롭게 개정해야 한다는 개헌 움직임이 그것으로서 그 중에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그 동안 바뀐 국민 의식과 드러난 사회 문제들에 비추어 개혁하는 일입니다. 경제 양극화의 주범이 되어 온 부동산 투기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토지 공개념을 헌법에 명시하는 일, 국민 절반 가까이 종사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에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을 정의롭게 확립하는 일, 국민 대다수를 중산층에서 더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 주거와 교육의 과중한 부담을 국가가 덜어주는 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랑의 문명을 이룩하는 복음화 과업에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전해 준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상상이 필요합니다. 이 기억력과 상상력으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회 복음화의 핵심 과제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사회의 일원이요, 깨어 있는 의식으로 행동해야 할 시민이며, 올바른 사회 여론을 형성하여 나라의 정치를 주도해 나가야 할 주권자로서 행동하는 일이야말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도직 활동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의 신앙 쇄신으로 교회도 복음적으로 쇄신될 수 있고, 나아가서는 사회의 인간화와 복음화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