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화요일, 빈라덴이 주도한 알카에다 자살 폭탄 테러범들에 의해 납치된 미국 여객기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 두 곳에 충돌했다.
이 공격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백억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무론 세계가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다.
9.11 테러 때 세계 무역센터가 무너진 장소 그 자리에 [911 메모리얼 파크]를 세웠다. 이 [9.11 메모리얼 파크]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 부른다.
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 45분. 92명의 승객을 태운 아메리칸항공 소속 AA11편 점보 여객기가 뉴욕의 최고층(110층) 건물인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 중 북쪽 건물에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어 9시 3분, 승객 65명을 태운 유나이티드항공의 UA175편 여객기가 남쪽 건물로 돌진했다. 모두 보스턴에서 출발해 로스앤젤레스로 가던 중 공중 납치된 비행기들이었다. 쌍둥이 빌딩은 순식간에 불기둥에 휩싸였다. 건물 안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겨우 목숨을 건졌던 이들도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하고 100층 높이의 창문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미국의 심장부 워싱턴에서는 9시 40분쯤 승객 64명을 태운 워싱턴발 로스앤젤레스행 아메리칸항공 AA77편이 미 국방성 청사(펜타곤)에 충돌했다. 청사 앞과 국회의사당 등에서도 폭탄 테러가 벌어졌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도 공격받지 않았던 미국 본토를 겨냥한 사상 초유의 동시다발적 테러였다.
폭격당한 미 국방성 청사
미 연방항공국은 9시 49분 미 전역에 항공기 이륙 금지 명령을 내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0시 정각 피츠버그 동남쪽 130킬로미터 지점에 네 번째 항공기가 추락했다. 승객 45명을 태우고 뉴저지 주 뉴워크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여객기였다. 9시 45분 세계무역센터 남쪽 건물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고 5분 후 이 건물은 무너져 내렸다. 10시 29분에는 북쪽 건물도 완전히 주저앉았다. 이 여파로 인근 빌딩들까지 화염에 휩싸였고, 7시간 뒤에는 47층짜리 부속건물도 붕괴되었다.
국회의사당과 백악관을 비롯한 전국 정부 건물에 대피령이 내려졌다. 유엔 본부와 대형 민간 시설들도 폐쇄되었다. 증권거래소는 즉각 휴장했다. 오후 1시 27분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미 전역의 공항이 폐쇄되었다. 미국 상공을 날던 모든 항공기들은 캐나다로 돌려보내졌다.
이 테러로 90여 개국 출신의 2,750명의 시민들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다. 구조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과 실종자를 합치면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진주만 공습의 피해자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국제금리가 순식간에 하락하고 세계 증권 시장이 한동안 요동쳤다.
9·11 당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패권 추구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세계는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평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견제받지 않는 슈퍼 파워는 오만과 독선으로 흘렀다. 미국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국가는 무조건 적으로 돌리고, 압도적 군사력을 기반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관철시켰다.
서슬 퍼런 미국의 태도에 대다수 국가들이 굴복했지만, ‘미국식 세계 질서’에 대한 불만과 저항도 커졌다. 미국이 오랫동안 개입해 온 중동 지역의 이슬람 국가들은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에 거세게 반대해 왔으나 미국은 종교적,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혀 이를 억압하고 무시했다. 9·11 테러는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반인륜적 폭거였지만, 문제의 발단은 이와 같은 미국의 독선적, 패권적 외교 정책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 앞마당을 처참하게 유린당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응징과 복수를 부르짖었다. 용의자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 알 카에다가 지목되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공화당 행정부의 브레인을 이루던 극우 성향의 신보수주의자들(네오콘)이 중심이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백만장자 집안에서 태어난 빈 라덴은 젊은 시절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이에 맞서 싸우며 ‘아랍의 영웅’으로 부상한 인물이다. 그는 소련군이 철수한 후에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해 중동 지역에 분쟁을 조장하고 이슬람 문명을 오염시키고 있다며 반미 성전(지하드)을 선포했다.
그해 10월 7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 탈레반이 알 카에다와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군사 공격 1개월 만에 탈레반 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나 빈 라덴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제 사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3년 3월 20일 이라크로 쳐들어간 것이다. 작전명은 ‘충격과 공포’였다.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이 9·11 테러의 배후이고, 대량 살상 무기를 숨겨 놓고 있다는 명분이었다. 미군은 가공할 만한 화력으로 이라크 영토를 쑥밭으로 만들며 전쟁을 압도했다.
그해 4월 미군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했고, 부시 대통령은 개전 40일 만에 전투복 차림으로 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에 내려 승전을 선언하는 이벤트를 연출했다. 오랫동안 눈엣가시였던 후세인도 붙잡아 처형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대량 살상 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고, 이라크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거세지면서 내전이 계속되고 자살 폭탄 테러가 빈발했다. 치안은 극도로 불안해졌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폭탄 테러를 통한 저항이 그치지 않았다.
미군 전사자들과 민간인 희생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국제 여론은 더욱 나빠졌고, 미국 국내에서도 반전 여론이 고조되었다. 미국은 2010년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가까스로 수렁에서 발을 뺐지만,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이 쏟아부은 전비는 9,000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썼다. 미국의 잃어버린 자존심과 안전을 되찾기 위해 벌인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체면과 안보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은 국제 사회에서 급속도로 헤게모니를 잃었다. 유엔의 결의도 없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조작해 가며 시작한 반인륜적 침략 행위는 미국의 도덕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프랑스, 독일 등 오랜 우방들조차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를 비난하며 등을 돌렸다.
‘9·11 이후 미국은 더 안전해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미국은 속시원히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이슬람의 반미 정서는 9·11 테러 이전보다도 심각해졌다. 일부 강경 세력으로 구성된 무장 단체들에 의해 자행되던 조직적 테러는 이제 평범한 임신부나 어린아이가 폭탄을 둘러메고 목숨을 던지며 벌이는 일상적 테러로 바뀌었다. 미국인들은 언제 어디서 테러가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전전긍긍하는 ‘테러 노이로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9·11 테러가 벌어졌던 세계무역센터 자리(그라운드 제로)에는 어느새 쌍둥이 빌딩보다 더 크고 위풍당당한 새 빌딩이 세워지고 있다. ‘프리덤 타워’로 불리는 이 건물은 테러에도 굴하지 않는 ‘초강대국 미국’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라운드 제로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해서 새 세상이 열리지는 않는다. 미국을 겨냥한 테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고,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민중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불안하다. 그럼에도 미국의 독주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또 어떤 전쟁이 어떤 민족에게 닥칠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의 천 년하고도 다시 십수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전히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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