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마르코 4,35-41
비혼주의: 행복할까?
오늘은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입니다.
세례자 요한 탄생의 특이한 점은 세례자 요한이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 뜻에 봉헌된 나지르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의 이름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며 처음에 의심했던 즈카르야까지도 아들의 사명의 협조자가 됩니다.
그러자 그동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였다가 입이 풀려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 뜻을 따르는 이를 긍정하고 도와주기만 해도 그 사람의 수준이 하느님과 친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즈카르야가 귀와 입이 풀렸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전에는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의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의로움은 양심의 자유에서 나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주님 앞에 나설 수 없었습니다.
의로움은 오로지 하느님 자비에서 옵니다.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고 의로워진 이는 그 받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자녀를 그렇게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오리를 엄마로 착각한 길잃은 강아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미를 잃은 강아지는 착해 보이는 오리에게 다가갑니다.
오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강아지를 태우고 돌아다닙니다.
강아지가 안정됩니다.
강아지는 오리를 어미처럼 따릅니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는 꽤 자랐습니다.
오리는 새끼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오리는 새끼들을 잘 돌보지 못합니다.
그러자 개가 대신 새끼들을 돌봐줍니다.
받은 게 있으니 주는 것입니다.
모기들은 알을 낳아주는 데까지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알을 낳고 그만입니다.
개는 두 달 이상 어미가 돌봐줍니다.
그렇게 받은 만큼만 해 줍니다.
인간은 20년 동안 그렇게 합니다.
그래야 양심의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면 언제 양심의 자유를 누릴까요?
나의 자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 때입니다.
나의 자녀가 신앙이 없고 하느님 뜻에 자기를
봉헌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평화롭다면 나 자신이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에는 일곱 아들을 낳은 어머니가 나옵니다.
이 용감한 어머니는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4세가 자신의 일곱 아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녀는 아들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지키라고 말하면서 하느님의 율법에 충실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그녀는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과 부활의 희망을 상기시켰습니다.
만약 자녀에게 생명을 구하라고 했다면 어머니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나는 너를 하느님 자녀로 낳았는데, 너는 네 자녀까지도 하느님 자녀로 만들지 못했느냐?”라고 혼이 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미혼 남녀 15%는 자신은 비혼주의라고 하고 51.7%는 비혼을 생각 중이라고 하며 결혼을 꼭 하겠다는 청년들은 33.3%였습니다.
부모가 나를 키워주었는데도 나는 자녀를 안 키우겠다고 한다면 이제 부모와의 소통이 단절됩니다.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비싼 핸드백을 들고 맛있는 음식을 찍어 인스타에 올려도 마음은 공허하고 점점 불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원리입니다.
오늘 엘리사벳과 즈카르야가 자기 아들을 ‘요한’이라고 짓는 동시에 그들은 아들을 주님 뜻에 바친 것입니다.
주님 뜻에 바친다는 말은 순교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부모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양심의 평화를 얻습니다.
이스라엘은 왜 자녀 출산율이 1위일까요? 구약시대부터 하느님께 자녀를 봉헌하는 것을
내 행복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사무엘을 주님께 바치기 위해 아들을 청한 한나를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처음부터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고 아들을 주님께 청했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마음에 평화를 얻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를 낳음이 없이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난 자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음을 명심합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루카 1,57-66.80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 세례자 요한!
좀 의아스럽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성인(聖人)들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떤 성인은 대성인(大聖人)으로 분류되어 교회 전례 안에서 대축일로 경축합니다. 축일을 앞두고 9일기도까지 바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전례 안에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입니다.
보통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신 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에 입국하신 날을 축일로 정해 한번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어떤 성인은 여러 번에 걸쳐 축일을 경축합니다.
성모님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 바오로 사도, 그리고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도 축일로 정해 기억하지만, 오늘같이 그의 탄생도 경축합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교회 안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성인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에 충실했는가 하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복음서에 드러난 세례자 요한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예언자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는지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로지 주님의 길을 닦는데 온 힘을 다하기 위해 그는 결혼조차 포기하고 홀로 살았습니다.
지극히 겸손했으며 철저히 순명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주님을 재빠르게 알아보기 위해 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이나 산해진미나 세상의 좋은 것들을 철저히 멀리하고 광야 깊숙한 곳에서 극단적 청빈 생활을 해나갔습니다.
오늘날 우리 수도자들의 모델이요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세례자 요한의 삶에서 두드러지는 측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는 거대한 불의와 구조적인 악 앞에서 절대 침묵하거나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예! 라고 할 것은 예! 라고 하고, 아니오! 라고 할 것은 아니오! 라고 말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 말만 들어도 왠지 그럴 듯 해보입니다.
‘있어’보입니다.
‘나도 그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멋있어 보입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예언을 들으려고 몰려 들었겠지요.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품위 있고 장엄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는 하늘을 찌르겠지요. 추종자들은 늘 나를 큰 스승으로 떠받들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언자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전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밤샘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의 참전달자로 계속 존재하기 위해 부단히 화려한 도시를 떠났습니다.
황량하고 고독한 광야로 계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그의 나날은 그야말로 ‘초근목피’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주식은 날아다니는 메뚜기였습니다.
음료수는 전혀 가공되지 않은 들꿀이었습니다. 그가 걸치고 있었던 의상을 보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무슨 원시인입니까? 낙타털옷에 가죽띠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계속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결한 영혼을 계속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확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온통 만연해 있는 세상의 죄악과 타락 앞에 당당히 맞서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끝도 없는 자기 비움의 삶, 뼈를 깎는 자기 통제의 연속, 자아 포기, 자기 연마, 자기 부정의 나날이 세례자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이었기에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충실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목숨 걸고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철저한 겸손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강론>
(2024. 6. 24. 월)(루카 1,57-66,80)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루카 1,57-58).”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루카 1,63-66).”
1) 우리 교회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요한의 탄생은 메시아 강생의 예고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을 경축하는 것은, 사실은 ‘메시아 강생’을 경축하는 것이고, 이 대축일의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6-8).”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을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참 빛이신 분’(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하는 말입니다.
<옛말에 “달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라고 가리키는데, 보라는 예수님은 안 보고 요한의 손가락만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나를 보지 말고, 그분을(예수님을) 바라보아라.” 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말을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나타내는 말로만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짧은 것입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권고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를 제대로 알고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서 자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등장하시면 자기는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겸손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 세례자 요한의 사명에 대해서, “하느님께서는 왜 메시아 앞에 세례자 요한을 보내셨을까? 그냥 메시아께서 곧바로 활동하셨어도 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효율성을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이 없었어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모든 사람을 회개시킨 것도 아니고,
요한 덕분에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 활동을 쉽게
시작하실 수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3-36).”
이 말씀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구원 사업의 필수 요소는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메시아 예수님보다 예언자 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은 ‘사람들에 대한 배려’ 라는 것을, 즉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메시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3)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필요했겠지만,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필요 없지 않은가? 왜 우리 교회는 아직도 세례자 요한과 그의 활동을 중시하고 있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단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명을 완수하고 떠났지만, 그의 ‘회개 선포’는 아직도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회개 선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업이 아직도 진행 중인 것처럼,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도 아직도 진행 중인 일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이 완전히 확정될 때까지는, 우리는 계속해서 요한의 회개 선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루카 3,7ㄴ-8ㄱ).”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9).”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루카 3,16ㅁ-17).”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