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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단편소설 [목선]으로 데뷔한 이후 수많은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소설가로 자리한 한승원. 20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남쪽 바다 전남 장흥으로 옮겨가 토굴에 자리 잡은 그는 고향에 빚을 갚는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했다. 소설가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는 그의 살아있는 글쓰기 현장으로 함께 가보자.
말수가 없는 편이어서 어른들이 전라도 사투리로 '가시나' 같다고 하셨어요. 그만큼 순박했고 수줍음도 많아서 사람들이 묻는 말에도 대답을 잘 못했죠. 인사를 할 때도 꾸벅 고개만 숙일 정도로 어물어물하게 행동했던 그런 소년이었어요.
저는 일곱 살 때 학교에 들어갔어요. 일찍 들어간 거죠. 그런데 같은 반에 저보다 나이가 많은, 심지어 다섯 살 위인 학생들도 있는 거예요. 그 시절엔 그렇게 들쭉날쭉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나이 많은 친구들을 따라가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뒤쳐졌어요. 제 힘으로는 아무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따돌림도 당하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굉장히 힘든 시절을 보냈어요. 그런 이유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길들여진 것 같아요.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필기하다가 연필심이 부러지면 옆 친구에게 직접 칼을 빌려달라는 말을 못하고 쪽지에 써서 부탁할 정도였죠. 그렇게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늘 혼자 생각하고 꿈꾸는 시간들이 많았어요.
서라벌예대에 진학한 한 작가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사람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었다. 한 작가는 그로부터 문학 정신은 물론이고 작품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다듬어내는 방법까지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사진의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동리 선생, 그 옆으로 한승원 작가, 전상국 작가다.
고등학교 2학년 초부터 소설 읽기에 빠졌어요. 제가 문예반에서 쓴 장편(掌篇)을 보시더니 지도 선생님께서 "참 잘 썼다"고 칭찬해주셨는데 그게 제 운명을 결정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일 이후로 갑자기 문학 쪽으로 빠져들었거든요.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소설이나 시를 쓰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소설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치르고는 담임 선생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고향으로 갔죠. 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으니까요. 사실 그때 형은 군대에 간 상태였고 아버지께서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거든요. 제가 가서 논농사도 하고 김 양식도 하면서 가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러면서 소설도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주경야독을 하면서 소설가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3년 동안 열심히 농사짓고 김 양식을 하다 보니 안되겠어요. 글을 쓸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대학에 가려고 했는데 막상 마음을 먹으니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었어요. 수학이나 영어는 물론 물리나 화학도 다 잊어버려서 시험을 칠 수가 없었던 거죠. 오직 글쓰기에만 마음을 뒀기 때문에 서라벌 예대의 문예창작과를 가게 됐어요. 거기서 만난 분이 김동리 선생이에요. 그분을 만나 문학의 순수함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김동리 선생은 민족적이고 순수문학의 정신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황토기]라든지 [사반의 십자가]와 같은 작품을 보면 신화적인 모습도 볼 수가 있었죠. 현실 너머의 아름다운 세계를 지향하고 계신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문학의 정신은 물론이고 작품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다듬어내는 방법까지도 말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바로 진학하지 않고 아버지 일만 돕다 보니 제가 왠지 무능력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 당시 처음으로 제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사범학교를 다녔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죠. 그때 저는 실존철학에 빠져있어서 자주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녀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고 상황도 점점 달라지고 그러다 보니 그녀는 결국 제 곁을 떠나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어요.
그 후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몸담게 되었죠. 그 동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교직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소설을 쓰려고 했죠. 그런데 과거에 사랑했던 그 여인의 남동생도 저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거든요. 가끔 그 동생이 제가 있는 곳으로 놀러 왔어요. 그런데 그 친구를 보면 이상하게 속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 거예요.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그런 오기 같은 거랄까요? 그 동생만 다녀가면 마음에 긴장감이 생기면서 책 읽기와 소설 쓰기에 몰입을 했어요. 느슨했던 태도가 비장한 각오로 변했다고나 할까요? 아마도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열등의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저를 있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저는 비록 첫사랑에 실패는 했지만 어쨌든 연애로 인해서 인생이 좋은 방향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후배들에게 연애를 잘해야 한다고 가끔 조언을 하곤 합니다. 연애를 해서 라이벌이 생기면 인생이 발전할 수도 있다고 말이죠. 하하.
한 작가는 교직 생활 중 대한일보에 단편소설 [목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아버지 대신 김 양식을 하면서 새끼 꼬아 김발 엮고, 김 말뚝도 박던 바닷가 갯바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갯마을 이야기였다. 한 작가는 그때 경험한 갯바닥 삶이 자신의 문학의 모태(母胎)가 됐다고 생각한다.
1966년 대한일보에 단편소설 [목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어요. 갯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제가 아버지 대신 김 양식을 할 때 쟁기질도 하고, 새끼 꼬아 김발 엮고, 김 말뚝도 박고 하던, 그런 갯바닥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입니다. 그때 경험한 갯바닥 삶이 제 문학의 모태(母胎)가 되었지요. 그 작품은 단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써 최소한의 인물 배치만 했어요. 세 사람만 등장합니다. 구성도 아주 단순하고요.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등단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일종의 성장소설이죠. 주인공 이름도 승원이에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취주악대(吹奏樂隊: 관악대)가 있었는데 학생들이 돈 대신 보리 닷 되씩을 내서 악기를 마련할 만큼 모두가 가난했어요. 그 시절 보리 닷 되는 엄청난 가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제목도 ‘보리 닷 되’라고 지었어요.
그 시절 저는 퉁소를 아주 잘 불었어요. 그거 하나면 연주하지 못하는 노래가 없을 정도였죠. 그래서 취주악대에 들어가서는 클라리넷을 불었어요. 뭔가 답답했던 마음을 악기를 연주하면서 해소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감수성이 예술적인 재능을 키워주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마 제가 교사가 되지 않고,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밤무대에 섰을 겁니다. 새벽이슬 꽤나 맞고 다녔겠죠.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참 아름다운 추억이에요. 어려운 시기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살았던 그때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 작가는 1996년 고향 장흥으로 내려왔다. 건강 때문에 낙향을 결심했지만, 막상 이곳 생활에 적응하고 느리게 사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소설도 더 잘 써진다고 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의무적으로 글을 썼고, 치열하게 소설을 쓰다 보니 한계점에 이르기도 했어요. 그렇게 살다가는 자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죠. 제 안에 있는 것을 계발하고 여유롭게 책도 읽을 시간이 필요했어요. 느림의 삶을 살고 싶어서 이곳으로 오게 됐죠. 서울과 장흥을 비교해보면 엄청난 속도감의 차이가 있거든요. 여기서는 글을 즐기면서 쓰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소설을 쓰는 일이 스트레스가 되지 않아요. 흔히 사람들이 서울에서 살다가 시골로 가면 자존심이 상할 거라는 잘못된 편견을 갖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각박한 서울 생활을 하다 보면 사고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아요. 반면에 시골에서 살다 보면 느림의 정서가 몸에 배는데, 제가 느려서 재주를 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 재주 넘는 것이 다 보이더라고요. 그제야 깨달았죠. 내가 재주를 넘으면 어지러워서 다른 사람의 재주를 볼 수 없다는 걸 말이죠.
시골에 살면 뒤처지거나 정보가 부족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여기서도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세상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원고는 인터넷을 통해 출판사에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날마다 확인이 가능하잖아요? 글로벌 시대가 좋긴 좋아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모두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니까요. 일단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하고 그것으로 부족하면 인터넷으로 책을 구입해서 읽죠. 물론 제가 인터넷 사용이 좀 서툴러서 직접 주문하지는 못해요. 대학에 있는 조교에게 주문해달라고 부탁하지만, 어쨌거나 참 편리한 시대인 것은 분명해요. 얼마나 빠르고 편한 세상입니까? 그러니 이곳에 있어도 정보에 어둡거나 뒤처지는 일은 없어요.
사실 낙향한 결정적인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어요. 심장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뛰는 부정맥 치유를 위해서였는데 이곳에 내려온 뒤로는 좋은 공기를 마시고 마음도 편해져서 그런지 체중도 불고 살빛도 좋아지더군요. 2004년에는 뒤뜰에 있는 600평 대나무 숲을 차밭으로 만들었어요. 차밭을 가꾸며 오랜 시간 좋은 차를 마셔온 것도 건강의 비법 중 하나입니다.
한 작가가 고향에 내려와 지은 작업실의 이름은 ‘해산토굴(海山土窟)’이다. ‘해산(海山)’은 그의 호(號)고, ‘토굴(土窟)’은 집을 낮추는 의미로 그 속에 들어가 창작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이다. 한 작가는 이곳에서 작품을 쓰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낸다.
해산(海山)은 제 호(號)이고, 토굴(土窟)은 집을 낮추는 의미로 그 속에 들어가 창작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해산토굴(海山土窟)’이 된 거죠. 해산의 뜻을 사전으로 찾아보면 바닷가에 우뚝 서 있는 산이 아닌, 지질학적으로 대양의 밑바닥에서 원뿔 모양으로 1,000미터 이상 우뚝 솟은 봉우리라고 나와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산이죠. 그리고 토굴은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을 낮춰 부르는 말이기도 해요. 저는 집 주변과 바닷가를 산책하고 가까운 뒷산을 오르내리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이곳에서 작품을 쓰고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해산토굴에서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기보다는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는 편이죠.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작가는 고독해야 돼요. ‘절대 고독’이라는 게 있잖아요.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는 고독이라는 짐을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거예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코린토스의 왕인 시지프(Sisyphus)가 가지고 있던 그런 고독 말이죠.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말을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우뚝 서 있을 뿐이란 뜻이죠. 그것은 ‘내가 지상에서 최고의 존재로서 우뚝 서 있다’는 오만의 의미가 아닙니다.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땅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인간인 나는 오직 내 운명의 짐을 혼자서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라는 의미죠.
사람에겐 절박할 때 진실한 삶이 찾아오는데, 제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을 공부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정약용 선생은 타의에 의해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했잖아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제가 집필한 [다산(茶山)]이란 소설은 '다산은 절대 고독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분은 글을 쓰면서 고독을 이겨냈거든요. 저도 스스로를 절대 고독 속에 가둔 뒤 그 감정을 글로 승화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저 스스로를 해산토굴 속에 유배시켰습니다.
개인적으로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분들은 안 만나죠. 직접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도 작업 중이라고 정중하게 말씀 드린 뒤 돌려보내거든요. 그런데 가끔 장흥군청의 문화관광과를 통해서 어렵게 만나달라고 연락해 오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때는 전후 상황을 보고 선택해서 만납니다.
처음에는 장흥군에서 ‘한승원 문학관’을 세워주려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문학관이란 곳은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전시하거나 공개하는 그런 공간이잖아요. 저는 아직 살아있는데다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행적을 기리는 문학관과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건물을 짓고 이 공간을 강당으로 씁니다. 찾아오는 사람과 함께 어울린다는 의미에서 이름도 ‘문화학교’라고 바꿨어요. 때로 강의를 해달라는 청이 들어오기도 해요. 그럼 건물 운영을 위해 운영비를 조금씩 받고 강의를 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오신 분들께는 시인의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을 꼭 해드립니다.
한 작가에게 바다는 생명이자 자기 문학의 발원지이다. 또 바다는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체가 나오기 때문에 바다를 잘 알면 우리 삶의 원형을 알 수 있게 된다고 믿는다. 한 작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바다를 공부해도 영원히 ‘학생’일 것이라고 말했다.
바다는 생명과도 같아요.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생명체가 거기서 나오거든요. 그래서 바다를 잘 알면 우리 삶의 원형을 알 수 있게 돼요. 저는 바다를 ‘우주의 자궁’이라고 생각해요. 지구상에 있는 모든 곳에 물을 공급하니까요. 증발하면 구름이 되고, 육지에 뿌려지면 그게 물이 되면서 순환하잖아요. 제가 소설을 내면 사람들이 “또 바다냐, 그렇게 쓰고도 지겹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저를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 문학의 발원지는 ‘바다’예요. 저에게 바다는 무궁무진한 미지의 블랙박스라고 느껴집니다. 품어내고 품어내도 한없는 이야기의 방주죠. 아마 저는 늙어 죽을 때까지 바다를 공부해도 영원히 ‘학생’이지 않을까 싶어요.
고향도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고향에 살고 있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고향은 태어나고 자란 곳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다와 마찬가지로 순환하는 자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겠지요. 인간이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이 대지인데 그 이전에 모든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 동안 헤엄치다가 나옵니다. 우리의 고향은 어느 한곳만이 아니라는 거죠. 넓은 의미로 생각한다면 인간을 있게 한 우주도 고향이라고 할 수 있고, 좁은 의미로는 작가가 태어난 곳이 고향이고요.
한승원이라는 한 사람의 작가를 만들어준 고향은 조국이고 또 민족이고, 그래서 저는 고향에 빚을 졌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갖고 언제나 빚 갚는 심정으로 글을 쓰고 있어요. 대부분의 작가나 시인들이 자기 고향의 언어로 아름다움을 창조하잖아요. 고향이란 영원히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나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를 있게 한 조국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치는 것, 저에게는 그것이 고향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소설이라고 하면 실록적인 이야기를 쓴 걸로만 알고 있어요. 역사만 살고 작가는 죽어버리는 그런 소설로 말이죠. 저는 소설을 쓴 것이지 역사적인 실록을 모아 놓은, 혹은 야화나 베끼는 그런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현대소설을 쓰듯이 썼거든요.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고, 소설적인 형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역사적인 사실을 쓴 소설이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가리켜 역사소설이라고 하지 않잖아요? 소설 [추사(秋史)] 역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라는 인물을 데리고 와서 한승원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제 작품에서 다룬 모든 분들을 닮고 싶어요. 원효대사(元曉大師)는 삼국 전쟁이 일어났던 한복판에 사셨으면서도 굉장히 치열하게 사신 분입니다. 그 당시 정치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켰던 김춘추(金春秋)나 김유신(金庾信)에 대항해서 전쟁을 일으키지 말고 군대를 불러들이자고 했죠. 살육전쟁(殺戮戰爭)으로 통일이 되는 건 안 된다고 주장했던 분이 원효예요.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 생활을 하셨지만 본받을 점이 많은 분입니다. 그분은 천지우주의 원리에 따라 천하의 인민에게 실행하는 것이 사업(事業)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성인의 뜻에 따라 백성들에게 알맞게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선비가 아니라고 했죠.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실천하는 사업, 그것이 정약용 선생이 말하는 글쓰기의 정신이었고 저도 그 글쓰기 정신을 배워서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소설의 뿌리는 장흥군에 있는 ‘유치면’이라는 곳에서 나왔습니다. 지금은 댐으로 막혀 있지만 6ㆍ25 전쟁 이후 인민군들이 내려와서 3개월 정도 점거했던 곳이죠. 그러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들이 북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미처 돌아가지 못한 부역자들이 유치면 산골짜기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거기서 빨치산 활동을 했고요. 그것이 소설의 배경이에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어느 소년의 이야기죠. 그의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분단의 아픔을 이겨냈던 과정과 나이 일흔 살이 될 때까지의 여정에 대해 이야기해요. 아버지가 칠순 잔치에 온 손님들에게 자기가 살아온 역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죠. 우리의 민족적인 비극이 담겨있는 소설입니다.
그에게 소설은 존재 그 자체다. 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허랑방탕하게 생활하고 방황했을 거라고 한다. 그래서 소설은 자신의 삶이고 글을 쓰는 한 자신은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제 존재 그 자체입니다. 소설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청송감호소에서 갇혀 사는 그런 죄인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허랑방탕하게 생활하고 많이 방황했을 거예요. 저를 시들게 하는 일에 맹목적으로 빠진다든지 잘못된 것에 탐닉하게 되어서 제 인생을 망쳐놓지 않았을까 싶어요. 소설이 저를 구제한 거죠. 제 인품이나 마음씨가 점점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이 되어줬어요. 제 삶이 곧 글쓰기이고, 저는 글을 쓰는 한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제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이 있는데, 모든 소설은 재미있고 쉽고 아름다워야 하며 때론 슬퍼야 된다고 봅니다. 소설이 재미있지 않으면 누가 읽어주겠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등장인물을 내세울 때마다 “왜?”라는 질문을 반드시 떠올립니다. 소설을 쓸 때 “왜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가?” 그 당위성을 확립시키지 않으면 저는 절대 안 씁니다. 왜 하필 이 인물이 등장해야만 하는지, 왜 이 인물로 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깊게 고민하면서 쓰죠. 그러니까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그 속에 시대정신이 담겨 있어야 해요. 우주의 율동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슬퍼야 세상을 제대로 봐요. 원래 기쁨은 붉은색, 슬픔은 푸른색으로 표현되곤 하는데 사람은 슬플 때 더 냉정하게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뜻이죠. 다산(茶山)도 18년간의 유배 생활이 없었으면 그 많은 저술을 내놓지 못했을 거예요. 제 작품에 등장했던 김정희(金正喜), 정약전(丁若銓) 등도 유배 생활을 함으로써 일생일대의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고요.
글쓰기는 저를 치유해주는 방법입니다. 우리 몸은 신화적이고 철학적이고 역사적이거든요. 게다가 우리는 자연과학적이고 인문과학적인 그런 존재잖아요. 그러니 글을 쓰면 제 안에 들어있는 모든 에너지가 글쓰기라는 쪽으로 전부 집중이 되는 거예요. 자연스러운 몰입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네요.
실제로, 몸이 아플 때도 글쓰기를 통해서 아픔을 이겨낸 적이 있어요. 언젠가 지네한테 발을 심하게 물린 적이 있었는데 정말 너무 아파서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견딜 수 없는 통증이었죠. 그래서 책상에 올라가서 글을 써봤어요. 그렇게 집중해서 글을 쓰다 보니 아픔을 잊게 되더라고요. 뭐랄까요. 저 자신을 좀 격하게 표현하자면 글쓰기에 미친 사람이죠.
글을 잘 쓰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해요. 첫째,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글을 끄집어내라’. 둘째, ‘글쓰기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셋째, ‘한승원의 책을 읽어봐라’입니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할 것’, 이 정도가 아닐까요?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발견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것을 통해서 발견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내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잘 몰라요. 가령 숲 속을 걸어가다 꽃뱀을 봤다면 그때야 비로소 내 속에 있던 꽃뱀의 이미지와 현실의 꽃뱀이 서로 만나는 거죠. 꽃뱀이란 소재로 글을 쓸 때 내 속에 들어있는 꽃뱀적인 성질이 기술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려면 늘 스스로 깨어있어야 해요. 즉, 글쓰기란 어둠 속에서 빛을 건져 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진 왼쪽부터 사위 홍용희, 딸 한강, 한승원 작가, 차남 한강인. 부인 임감오 여사. 장남 한동림 씨. 한 작가의 가족 중에는 문인이 많다. 딸 한강과 아들 한동림은 정식으로 등단한 소설가이고, 사위 홍용희 씨는 문학평론가이다. 한 작가는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 자식들에게까지 글 쓰는 일을 대물림 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러면서도 딸 한강 작가에 대한 기대가 크다.
전생에 지은 업이 많아 자식들에게까지 글 쓰는 일을 대물림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꽃씨를 심으면 꽃이 나듯 글쓰기라는 좋은 업을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강’과 ‘한동림’은 저처럼 신춘문예로 데뷔한 제 자녀들입니다. 아이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제 딸 ‘한강’은 무척 섬세한 성격이에요. 전통사상을 바탕에 깔고 요즘 감각을 발산해 내는 작가라고 볼 수 있어요. 작품을 보면 신선하면서도 과거로부터 흘러온 전통에서 멀지 않아요. 전통을 잘 이어받으면서도 신선한 감성을 가지고 글을 써 나가고 있는데, 어떤 때는 그 아이가 잘 쓴 문장을 보면 깜짝 놀라서 질투심이 동하기도 합니다. 자녀들의 작품 활동이 아버지를 게으름에 빠져있지 않도록 촉구하는 계기가 되고는 합니다. 소설가 아버지 밑에서 보고 자란 아이들의 감수성은 저와 또 다를 겁니다. 기대가 커요. 특히 막내는 한동안 만화를 그리다가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는데 다른 소설과는 다른, 전에 없는 소설이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제가 평소 자녀들에게 강조하는 말은 “치열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냥개비를 슬슬 문지르면 불꽃이 튀지 않지만 단 한번이라도 힘을 다해 그으면 불꽃이 튀지 않습니까? 삶도, 소설 쓰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좀 더 치열하게 살아가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치열하게 정보를 얻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거죠. 그렇게 세상을 뚫어보는 거예요. 지금은 독자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좋은 글을 쓰면 독자들이 알아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치열하게 부딪히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는 독자를 무서워해야 합니다. 절대 독자를 우롱해선 안 돼요. 저는 그런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하고 살아왔어요. 그리고 제 소설을 수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 않았어요. 단 한 사람이라도 감동 깊게 읽어준다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더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군자가 책을 써서 전하는 것은 단 한 사람 알아주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다.”라는 말씀을 하셨거든요. 젊은이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소홀히 듣지 않고 깊게 새겨들었으면 좋겠어요.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는 한 작가. 몸이 건강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는 아침 5시 30분에 하루를 시작한다.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고, 또 열심히 쓰는 것이 그의 건강 유지 비결이다.
아침 5시30분이면 기상해서 가벼운 산책 후에 아침을 먹고 1시간 정도 원고를 써요. 점심 먹고 난 후엔 2시까지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죠. 저녁 먹은 후에는 다시 독서와 각종 산문, 자료 조사 등을 한 후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듭니다. 밤새며 일을 하는 습관은 오래 전에 버렸어요. 체력이 받쳐주지도 못하고, 작가로 길게 일하려면 다른 이들과 같은 생활리듬으로 생활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좋은 책을 읽고 즐거운 체험을 하고 자연친화적인 일을 해요. 깊이 생각하는 시간도 자주 갖는 편이에요. 또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쓰기에 매진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특별히 체력을 관리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건강과 글쓰기의 건강은 두 개의 수레바퀴라고 생각해요. 이미 말씀 드렸지만 제가 살아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있는 거라고 말이에요. 이것은 저의 큰 화두입니다. 제가 살아있어야 글을 쓰잖아요? 그리고 글을 써야 작가로서도 살아갈 수 있고요. 생물학적인 생명체와 작가적인 생명체가 공존해야만 제가 살아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물학적인 생명체를 유지하려면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을 게을리 해서는 안 돼요. 몸이 건강해야 글을 쓸 수 있으니까요. 작가적인 생명체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힘쓰는 것도 중요해요.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히 써야죠.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썼는데 저는 한승원 판 싯다르타를 쓰고 싶어요. 석가모니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쓰고 싶거든요. 그래서 지금 구상해서 쓰고 있는 중이에요. 제가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이야기였어요. 석가모니가 젊은 시절에 왜 출가를 했는가에 대한 거죠. 그 출가의 의미가 참 대단하거든요.
출가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스님들만 하는 게 아니에요. 보통 사람들도 다 출가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되거든요. 출가하는 마음, 출가 정신이라는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인식시키고 싶어요. 왕자였던 석가모니가 왕실은 물론 전부 다 벗어버리고 맨발로 세상을 향해 떠나잖아요. 늘 함께 다니던 말과 마부도 버리고 말이죠. 왕이 될 사람이었는데 걸식을 하면서 출가를 했어요.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출가를 꼭 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소설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한번 제대로 풀어보고 싶어요.
젊어서부터 원양어선을 꼭 타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시를 쓰고 싶어했던 친구 한 명이 원양어선을 타러 가겠다고 했어요. 저는 못 갔지만 그 친구는 나중에 무역선까지 타게 됐죠. 제 친구는 바다에서의 모험과 문학적인 경험과 취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거예요. 저도 그 친구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그 친구가 선택한 바다가 바람직한 큰 세상은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어쨌든 그 친구는 원양어선 선원을 거쳐 상선의 선장이 되었고, 5대양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옮겨 다니다가 어느 항구에서 오래 머물렀을 때는 그곳에서 항구 이야기를 시시콜콜 적은 편지와 사진, 선물을 보내기도 했어요. 그러면 저도 그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것처럼 즐기고 그랬죠. 그 친구가 한없이 그립고 부럽기도 했지만, 모든 것을 걷어치우고 원양어선을 타러 가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원양어선을 타고 고기 잡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못 썼네요. 그게 너무 아쉬워요.
깨어있는 소설가, 치열하게 살았던 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소설가 한승원.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고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늘 깨어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소설가로 기억되면 좋겠어요. 제 후배들 중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바로 제 자녀들이에요. 그 아이들이 우리 아버지는 정말로 거짓 없이 착하게 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 후배들도 거짓 없이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저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해서는 전혀 후회가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