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낙태 반대 운동가 릴라 로즈(36)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겸 공화당 대선 후보의 지지를 철회하기로 했다고 영국 BBC가 15일 전했다. 로즈는 낙태 반대를 외치는 단체 '라이브 액션'의 창업자로 젊은 데다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이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런데 지난 10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겸 민주당 대선 후보와의 첫 TV 토론을 지켜보며 트럼프 후보가 낙태 반대에 대한 신념과 약속을 담대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법적 장치를 만들겠다고 약속하지 못한 것에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고 지지를 철회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트럼프 후보는 민주당이 극단적인 낙태 정책을 밀어붙인다고 비판했지만 전국적으로 이를 금지하는 법안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고, 대신 각 주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방관자 자세를 취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를 체외 수정(IVF) 지도자라고 표현해 이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로즈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을 실망시켰다는 것이다. 로즈는 트럼프의 토론을 "시청하는 일이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는 트럼프의 대통령 임기 내내 고무돼 있었고, 그가 지명한 대법관 3명이 전국적 차원의 낙태 반대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는 데 일조했을 때 열렬히 지지하고 환호했다.
그런데 이제 트럼프 후보가 노선을 틀자 환멸에 빠지게 됐다. 세 번째 백악관 도전에 나선 그는 지금은 모두를 만족스럽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연방 낙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서명할 것이라고 힌트를 줬다가 나중에 한 발 물러섰다. 그는 또 로 대 웨이드이 "아름다운 것"에 진 뒤로 주 차원의 규제가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임신 초기의 낙태까지 금지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규정했다. "선거를 이기기 위해" 더 신중한 스탠스를 취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지난 여름 민주당 전당대회(DNC) 중인데 트럼프는 온라인 성명을 통해 미래 행정부는 "여성들과 그들의 생식권을 중히 여길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표현은 전형적인 프로 초이스(pro-choice, 친선택) 활동가들이 쓰는 말이었다. 로즈를 비롯한 낙태 반대 운동가들은 스스로 프로 라이프(pro-life, 친생명)활동가를 표방해 왔다. 이에 따라 지난달 말 로즈는 100만 이상 팔로워들에게 트럼프가 그를 향해 표를 던지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로즈는 지난 12일 BBC 인터뷰를 통해 “트럼프가 해리스보다 낙태에 덜 찬동하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면서도 "우리 운동의 목표는 덜 나쁜 후보들이 무엇을 내세우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목표는 후보들이 친출산(pro-born)을 위한 투사가 되도록 돕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낙태 반대 운동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 중 한 명인 로즈는 트럼프의 새 전략에 잠재적인 문제가 있음을 감지해낸다. 트럼프가 낙태에 온건해지려 할수록 사회적 보수 기반으로부터 스스로가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면도날 차이로 승부가 갈릴 수 있는 선거에서 이들 유권자들이 11월 대선 날 투표소에 가지 않고 집에 머무르면 트럼프의 백악관 재입성은 불가능해진다.
법사학자이자 미국 낙태 논쟁 전문가인 메리 지글러는 “이런 전략이 먹히면 당신은 모두에게 조금씩 점수를 따게 된다. 그리고 먹히지 않으면 당신은 모두에게 아무 것도 따내지 못하고 만다”고 말했다. 트럼프 캠프는 BBC의 즉각 코멘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2016년에도, 그리고 2020년에도 사회적 보수 기반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는 낙태 반대 활동가들을 끌어안고 그들의 운동을 지지했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연례 낙태 반대 시위인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Life)에 함께 했다. 그는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 전혀 하지 않던 방식으로 사회적 보수 진영에 가세했다고 지글러는 말했다. 그녀의 말이다. "내 생각에 트럼프는 앞의 두 대선 레이스 때는 이 운동이 없으며 정치적으로 죽은 상태가 될 것이라며 훨씬 끌어올 것이 많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결과 이들 유권자들은 트럼프에 압도적인 표를 몰아줬다. 2020년 트럼프는 미국에서도 사회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유권자로 여겨지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84% 표를 받아 2016년의 77%를 훨씬 웃돌았다. 그런데 트럼프는 2022년 중간선거 때 공화당의 저조한 지지율에 거듭 고전을 면치 못했고 낙태 접근을 허용하는 방안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높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해서 이번에는 그 주제를 부드럽게 다루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올해를 시작하며 공화당의 프라이머리 선거 때 그는 (임신) 6주차 낙태 금지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모든 이를 기쁘게 하는 전국적인 기준을 찾겠다고 약속했다. 지난해 그는 "양쪽 이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름을 넘기며 백악관에 들어간 뒤 낙태에 대한 진정한 입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많이 나오자 트럼프는 제대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는 낙태를 위한 전국적인 '기준'을 원한다고 암시했지만 그 뒤에는 어떤 약속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주 정부들의 낙태 정책에 대한 진실성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낙태를 둘러싼 여러 주들의 싸움에 개입하며 때로는 사회적 보수 지지 기반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는 플로리다주의 임신 6주차 낙태 금지에 반대한다면서 "6주 이상은 필요하다"고 말해 그 주에서의 낙태를 보호하는 11월 주민투표에 찬성 표를 던지겠다고 시사했다. 하루 뒤 낙태 반대 활동가들이 압력을 행사하자 그는 반대 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갈짓자 행보는 주요 낙태 반대 동맹들과의 관계를 긴장에 빠뜨리고 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낙태 반대 조직 가운데 하나인 '스튜던트 포 라이프'의 크리스탄 호킨스 의장은
“우리 학생들과 우리 운동의 연결을 끊는 것”이라면서 “내가 그 캠프에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이 전략은 승리의 전략이 아니란 메시지”라고 단언했다.
사회적 보수 운동 안에서 같은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낙태에 관한 한 중간은 없다. 트럼프는 어쩌면 새로운 누군가를 끌어들이지 못한 채 꼭 투표하는 유권자들을 잃을지 모른다.'
플로리다를 중심으로 한 낙태 반대 그룹 '리버티 카운슬'의 창립자인 맷 스타버 의장은 “프로 라이퍼들이 낙담하는 것은 트럼프가 머릿속으로 좀더 온건한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솔직히 그런 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과 함께 하는 다른 유권자들 사이에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가 이 일에 끼어들지도 않는다"고 단언했다.
트럼프가 사회적 보수층이 그의 정당을 떠나는 광범위한 스케일의 탈출이 빚어지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볼 수는 없으며, 스타버와 호킨스 모두 여전히 트럼프에 한 표를 던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선거에서 아주 얇은 차이로도 승부가 갈리고, 한 줌 밖에 안되는 주에서의 승부로 대선 승부가 갈린다. 해서 몇몇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낙태 반대 유보가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본다.
공화당 전략가인 존 피허리는 미국 선거인단의 14%를 차지하는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80%정도가 투표소에 나와 트럼프에 표를 던져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피허리의 말이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이 해리스에게 한 표를 던질 위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짜 위험은 그들이 투표하지 않는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1만 표정도면 판도를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그런 위험 때문에 대다수 낙태 반대 지도자들은 트럼프 지지를 철회한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하는 일을 내켜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실 그 운동의 몇몇은 로즈의 입장에 절망감을 토로했는데 트럼프가 이상적인 후보는 아니지만 해리스보다 자신들의 소명에 더 나은 인물이라고 말한다.
'스튜던츠 포 라이프'의 호킨스는 점점 더 해리스에 관한 메시지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팔로워들에게 해리스 정부가 들어서면 낙태 숫자는 늘어나는 것과 별개로 끼칠 수 있는 해악이 트럼프의 어떤 실책보다도 클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가 트럼프 행정부와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안다”면서 “프로 라이프 활동가들이 하는 일처럼 아기들이 태어날 권리가 있는데 죽어간다고 믿으면 난 도덕적으로 가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로즈는 그녀의 입장이 해리스와 프로 초이스 어젠다를 돕는 일이란 비난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에게 토론이 낙태에 이르고 도널드 트럼프에 이르면 좋은 것이 좋은 게 아니다.
“당신 같은 많은 사내들이 이런 일을 듣고 오면, 카멀라 해리스가 재앙 덩어리란 이유로 사람들이 외출하길 원해 기쁜 마음으로 트럼프를 찍고 오면 난 고통스러운 일이란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진실을 얘기해야 한다. 낙태란 인간의 아기를 무고하게 살해한 것이다. 우리는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