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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청할 것입니까?>
기도해도, 기도해도 아무런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방이 꽉 가로막힌 거대한 벽 앞에 마주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하느님께 외쳐 봐도 감감무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감감무소식인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부모님들, 때로 자녀들의 얼토당토 않는 무리한 요구 앞에 어떻게 처신하십니까?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녀의 안녕과 유익, 성장을 위해 때로 부모님들은 마음 쓰라리지만 No!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리는 청원 앞에 늘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의 간절한 청원조차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치워 달라’는 예수님의 청을 끝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우리의 청원은 하느님의 응답을 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문제에 대한 보다 성숙하고 이성적 전망을 갖추기까지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겸손의 덕을 쌓아나가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올리는 청원 가운데 우리 각자가 노력해야 할 부분에 대해 책임감을 지니게 되기까지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준비시키십니다. 결국 당신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결국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식별력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청할만한 기도의 대상인가 아닌가를 식별하기 위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만물 전체를 다스리시는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각자의 사소한 일상사까지 책임지지 않으십니다.
인류 전체를 생각하셔야 할 너무나 바쁘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가 재미로 즐기는 스포츠 게임의 승패에까지 관여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닌 조그마한 부동산의 가격상승까지 책임지실 수 없습니다. 내 불찰로 인해 야기된 작은 질병까지 좌지우지하실 분이 결코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세상에 왔지만 언젠가 다시금 그분께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 나약한 존재입니다. 생로병사의 흐름 안에 때로 건강하지만, 때로 아프기도 하고, 때로 기쁜 날도 맞이하지만 때로 고통스런 날도 맞이합니다. 높이 높이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심연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질 때가 있습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주님 밖에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노년기도 맞이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 앞에서 이런 커다란 인생의 흐름을 편안한 마음으로 수용해달라고 청하는 기도야말로 정말 중요한 기도입니다.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도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찾게 해달라는 기도,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우리 삶의 자세를 낙관적, 적극적, 긍정적으로 변화시켜달라고 청하는 기도야말로 하느님께서 기쁘게 응답하실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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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갈라3,1-5 루카11,5-13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입니다.
매일 겸손히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자가 진정 수도승입니다.
어제 2012년 10월10일은 독일 오틸리아 수도원에서 개최된
베네딕도회 20차 오틸리아 연합회 총회에서
요셉수도원이 전폭적인 지지로 자치수도원의 승격이 결정된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총회에 참석한 50여명의 각 수도회 대표들의 축하인사를 받으며
큰 기쁨이 파도처럼 일렁임을 느꼈습니다.
총회가 시작되기 전 총회를 진행하는 독일 수사님은
친절 가득담긴 활짝 핀 웃음으로 저에게 이마를 가볍게 대며 인사했습니다.
“Are you ready?… Good luck!”
또 함께 식사하던 어느 아프리카의 신부님은 저에게
“You are Mzee(엠제)”
라 하며 엠제는 스왈리어로
Old Man(장로)로 wise man(현자), honorable leader(존경하는 지도자)라
풀이해 줬고 저에게는 역시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Thank you for your help(당신의 도움에 감사합니다).”
축하해 주는 모든 수도형제들에 대한 제 대답은 이 짤막한 대답뿐이었고,
수도원 설립 후 25년 동안 계속 수도원과 동행해 주셨던
주님과 은인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도 이 하나뿐일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의 도움이, 착한 형제자매님들의 도움과 기도가 아니었다면
어제의 경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일에 영광 받으소서!”
새삼 겸손보다 큰일을 이루게 하는 것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부족해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함께 겸손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노력할 때
하느님은 늘 도와주심을 믿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나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항구한 믿음의 자세를, 겸손한 기도의 자세를 말해 줍니다.
오늘의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며 살아갈 때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십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요
성령의 도움 있어 백절불굴의 믿음의 삶입니다.
이러니 성령보다 더 좋은 하느님의 선물은 없습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욕심을 버리고 서두르지 말고
소처럼 하루하루 뚜벅뚜벅 충실히 살아가게 하는 성령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모든 것은 하느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부단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며 살아가게 하는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두이십니다.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이지만 이루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총회에 참석한 어느 신부님의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할 수 없고,
우리는 할 수 있는 것만 한다(We can't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can)’라는 체험적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성령의 선물을 주시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수도원 설린 25년 기념 화보집에 실린 회고사에서 인용했던
저의 좌우명과도 같은 자작애송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힘차게 하늘 향해/담벼락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1,68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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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칼라티아 3,1-5
복음 루카 11,5-13
언젠가 자전거로 논두렁을 지나고 있었는데 들판에 세워둔 많은 허수아비를 보게 되었습니다. 허수아비를 보니 예전 생각이 많이 나더군요. 하긴 예전에는 이런 허수아비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허수아비 찾기도 쉽지 않지요. 그 이유는 요즘 참새들이 영약해서 허수아비가 있다고 곡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랍니다. 심지어 허수아비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참새도 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참새에게 처음부터 허수아비가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허수아비를 세워 두었던 것이지요.
아마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무서워서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가만히 보니 사람과 너무나도 다른 것이지요. 조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과 달리 이 허수아비는 너무나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다가섰고 결국은 허수아비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가까이 갔기 때문에 허수아비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불안하다고 또 힘들다면서 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많은 이들이 각종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불안은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즉, 문제의 해결은 바로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은 비유 말씀을 전해주시지요. 계속해서 졸라대면 귀찮아서라도 빵을 내어 주는 친구의 모습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 끊임없이 매달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 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참새가 조금씩 허수아비에게 다가서면서 불안감을 없애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조금씩 다가서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들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 다가서는데 있어 특별하고 거창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께 무조건 매달리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아는 우리들보다도 훨씬 더 자비롭고 사랑 가득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불안하십니까? 또 힘드십니까? 아직도 내 자신이 주님 앞에 나아가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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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간 목요일>(2012. 10. 11. 목)(루카 11,5-13)
<기도>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12)"
사람들이 자기가 바라는 것을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좋은 일이지만,
'자기가 바라는 것'이 '좋은 것, 선한 것'인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에게 좋은 것이고, 자기에게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청하겠지만,
정말로 좋고 선한 것인지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생선을 주려고 하시는데 뱀을 청하고
달걀을 주려고 하시는데 전갈을 청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 자기가 청하는 것이 자기에게만 좋은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인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성경 잠언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께 두 가지를 간청합니다.
제가 죽기 전에 그것을 이루어 주십시오.
허위와 거짓말을 제게서 멀리하여 주십시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 30,7-9)."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과 모두에게 좋은 것과
자기에게 좋은 것이 일치되는 기도가 좋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좋은(선한) 것'이라는 말에는
'가장 좋은(선한) 시기'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기도가(소망이) 이루어지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이 아주 빠르게 올 수도 있고, 아주 더디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라는 말씀은,
'끈질기게 기도하면서 하느님을 귀찮게 하면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응답을 주실 때까지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고 기다려라.'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기도를 귀찮아하시는 분이 아니고,
인간들이 끈질기게 청한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뜻과 다른 응답을 주실 분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좋은 시기'에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또 '좋은 것'이라는 말에는 '좋은 방법'도 포함됩니다.
하느님은 '좋은 시기'에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인데,
그 방법도 '사람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실 때,
어떤 경우에는 말씀만으로 고치시고,
어떤 경우에는 복잡한 동작을 통해서 고치시고(마르 8,23-25),
어떤 경우에는 병자를 만나시지도 않고 치유의 말씀도 없이(루카 7,1-10)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의지만으로 고쳐 주십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정리하면,
사람이 바치는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방식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할 때에는
자기의 사정을(또는 소망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고,
무엇을, 언제, 어떻게 주시든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라자로가 병을 앓다가 죽게 되었을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라고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은,
사람이 해야 하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들까지 다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민족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해야 합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한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빈말이 될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속담 그대로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살려달라고 울부짖자(탈출 2,23)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산 기간은 무려 430년입니다(탈출 12,40).
그들은 430년 동안 살려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청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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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억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기억 하실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시합 응원에서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표현했고 그 희망이 기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야고2,4).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11,9-10)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을 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물결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5,14-15).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66장 18절을 보면 “나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주께서는 아니 들어주셨으리라”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27-30)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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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든 이로운 것을 주려고 합니다. 하물며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거절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그 청을 들어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청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집요한 친구의 비유에서처럼, 무엇을 청할 때 끈기 있게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곧, 어떤 사람이 벗에게 먹을 빵이 없다며 줄기차게 졸라 대면 마침내 그 벗은 밤중이라도 일어나서 먹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황혼기를 맞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자신의 여생이 좀 더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고달프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가 하느님께 부탁드린 것은 복권에 당첨되게 해 주십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권 당첨을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고 또 바쳤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고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참다못한 그가 마침내 좌절과 절망 속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하느님, 제발 저 좀 봐주십시오!”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나 좀 봐주라. 제발 복권 좀 사거라.”
사람이 문 앞에서 오래도록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누군가 깨어나게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로 청함과 동시에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감은 입 안으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간청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에야 주님께 청하는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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