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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루카 16,1-8
사제가 박해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집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당신 집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청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성령으로 이뤄지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곳에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약삭빠른 집사처럼 된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 집사로 계속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기 전의 집사처럼 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사제가 되어보니 신자 중에서도 성령의 은총을 약삭빠르게 잘 사용하는 집사가 있는가 하면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사제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 저를 맞아줄 신자들이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는 신자들이 대부분 성직자를 죽이기 위해 찾았습니다.
그만큼 은총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중세 교회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 ‘종교 재판관’ 부분입니다.
‘대심문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심문관은 당시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돌아오시다가 대심문관을 만나 갇혀서 재판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마지막에 대심문관에게 마치 유다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입을 맞춥니다.
이 상징적 행위는 목매달아 죽은 유다처럼 종교가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는커녕 그것을 더 늘렸고, 인류의 영적 왕국에 영원히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라시어,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포로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처럼 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고마워서 자유롭게 자신을 받아들일 친구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종교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빵에 대한 유혹을 이긴 것을 비난하면서 중세 교회의 부유함을 통해 인류를
교회가 배를 불리게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 발 앞에 놓고 우리에게 ‘우리를 너희의 노예로 삼아 먹이라.’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빵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자비는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 재판처럼 종교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줄 때
그들은 신비로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쫓겨났을 때 자신들을 자유롭게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들에게 완벽히 통제되는 사람들로 만들려는 시도이고,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성직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을 관리하는 집사는 자신이 사제라면, 만약 사제 옷을 벗었을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약 자유를 빼앗는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신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어 신자들이 죽이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주문모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은총을 받으니 은총의 관리자입니다.
박해 시대가 되었을 때 자신을 숨겨줄 친구를 그 은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청지기만이 끝까지 주인이 칭찬해주며 자신의 집에 살게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8일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초기 교회 이방인들의 사도요 최고 목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충실했으며, 모범적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첫 번째 독서 필리피서는 그런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심 이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는 매사에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내걸며 복음 선포에 매진했지만, 자신의 의식주는 스스로 일을 해서 해결했습니다.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동시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목자로서 교우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과 당당함이 돋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생활은 조금도 따르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했다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도 언행일치되는 그의 강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서한 한 구절 구절에는 당당함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필리 3,17)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구체적인 삶이 그랬기 때문에, 그리도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당당함 뿐인가요? 바오로 사도가 초세기 이방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했는지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을 대하는 사목자로서의 자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친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표현들은 힘겨웠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마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길 청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1주간 금요일 강론>
(2024. 11. 8. 금)(루카 16,1-8)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집사(관리자)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1ㄴ-8).”
1) 어떤 부자가 집사에게 ‘해고’를 통보한 일은,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주인의 통보는,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하느님의 통보와 같습니다.
그런데 ‘청산’하라는 말은, 장부를 정리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장부 정리를 할 시간을 주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오늘 밤’에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통보도,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적어도 몇 시간은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처럼 미리 통보를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갑자기 떠나는 것처럼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장부 정리는, 즉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늦출 수가 없습니다(루카 12,25).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2) 비유의 표현만 보면, 집사는 단순히 ‘먹고 살 길’을 찾으려고 장부 조작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된 사람이 장부 조작을 통해서 더 많은 낭비를 하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보다는 뜻을 생각하면, 집사의 행동은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일 수 있고,
단순히 먹고 살 길만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처벌을 피하려고 노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에 ‘이자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 23,20-21).”
비유에 나오는 집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고리대금 사업을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거슬러서 이방인들과 동족들 모두에게서
높은 이율의 이자를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부당하게 받은 돈은 자기가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동족들의 이자는 없애 주고, 이방인들의 이자는 깎아 준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에게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람들로부터 얻게 될 것입니다.
빚진 사람들은 빚이 줄어들어서 좋아하게 될 것이고, 집사 자신은 주인의 처벌도 피하고,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서 먹고 살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었으니, 집사가 한 일은 ‘잘못을 고쳐서 바로잡은 일’, 즉 ‘선한 일’이 되었습니다.
3) 그러나 집사가 한 일을 ‘회개’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집사의 모습 자체가 회개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리함’과 ‘신속함’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말씀은, “먹고 사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너희는 왜 이렇게 굼뜨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은,
세속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을 영리하고 신속하게 하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더 신속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집사(관리인)입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인생 전부, 목숨까지도......
누구든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인생 전부를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내 인생은 분명히 ‘주님의 것’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믿고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나의 책임이고, 또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