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그거 목걸이 아니냐?"
"남자가 무슨 목걸이를 하고 다녀?"
"쟤 정말 이상하지 않아?"
초등학교 3학년 어느 겨울날, 묵주를 목에 걸고 교실에 나타난 나에 대한
친구들 반응이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목에 걸고 다녔기에
내 입장에서는 얘들이 이상해 보였다.
당시 나는 내로라하는 대형 종합병원에서도 병명을 밝혀내지 못하는
감기류(類)의 정체불명 질환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진찰을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누워 자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병원에 가지 않는 날에는 하루 종일 누워서 책을 읽으며 보냈다.
아래 골목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가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해주는
학교 시험지를 풀기도 하고,
가끔은 선생님이 우리 집을 찾아오셔서 만나기도 했다.
그 때 항상 내 곁에서 떠나지 않은 친구 중 하나가 묵주였다.
아직 첫영성체도 받지 못했지만,
묵주기도를 할 줄 알고 있었기에 머리맡에 놓여있는 묵주를 들고
성모송을 외면서 한 칸씩 한 칸씩 나아가는 재미가 쏠쏠했기 때문이다.
묵주는 장난감이기도 했다.
목에 걸면 목걸이, 팔에 차면 팔찌가 되기도 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발목에 걸어 보기도 했다.
그럴싸한 발찌로 변신한다.
돌돌 말아서 십자가를 세우면 무덤 모양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묵주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성모님께 원했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나의 건강회복을 간절하게 원했고,
부모님과 형제들은 물론 내가 알고 있는 이웃의 안녕까지도
주제넘게 원하고 바랬다.
이렇게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묵주가 중학교 진학 이후
건강을 되찾으면서 점차 멀어졌다.
하루 종일 목에 걸고 팔에 차던 묵주가 어느 날부터 내 몸에서
사라지면서 나의 일상에서 성모님도 예수님도 조금씩 잊혀졌다.
중ㆍ고교 질풍노도 시기에는 주일마다 성당에 가야 하는
나와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왜 부모님의 종교를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가'하는
반항심도 가졌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것 역시 신앙의
성장통으로 귀엽게 눈감아 주셨다.
세월이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내 몸에 묵주가 돌아왔다.
첫 아이의 첫영성체 교리 덕분이다.
친구 아빠의 손가락에 있는 묵주반지가 좋아보였던 아이가
"아빠도 묵주반지 껴"하는 한 마디에 바로 다음 날
우리 부부는 묵주반지를 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묵주반지. 참 오래 전부터 내가 끼고 다닌 것처럼
손가락에 쏘~옥 들어갔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그동안 이기적이었던 나의 몸과
마음을 성모님께서 모두 용서해주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기적인 나는 염치도 없이 오늘도 묵주를 돌린다.
그리고 성모님께 당당하게 청한다.
"우리 가족과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성모님의 자녀로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과 지혜를 내려 주소서. 아멘.”
심승훈(바오로, 월간 '서울사랑' 편집장)
첫댓글 잠시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구나 싶네요. 그래도 지금은 부모님께 감사합니다. 하느님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