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마태오 18,19ㄴ-22
우리는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오늘은 남북통일 기원 미사입니다.
남북통일은 우리가 하는 것일까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선물의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선물을 주십니다.
동서독의 통일되는 과정을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통일은 정말 선물과 같이 왔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귄터 샤보프스키 의원이 동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동독인들이 해외여행을 위해 비자를 더 쉽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여행 규정을
발표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샤보프시키는 일설에 의하면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새로운 규정의 세부 사항과 시기에 대해 충분히 설명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자회견에서 한 언론인은 샤보프시키에게 새로운 규정이 언제 발효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자기 발표문을 여기저기 뒤적이다가 다소 불확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지체 없이 즉시 발효됩니다.
이 발언은 틀렸으며 동독 정부를 포함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해당 규정은 즉각 시행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순차적으로 시행되도록 의도됐습니다.
샤보프스키의 성명은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수천 명의 동베를린 주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과할 것을 요구하며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갑작스럽고 대규모의 인구 유입에 대비하지 못한 국경수비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명확한 명령도 없이 늘어나는 군중에 직면한 그들은 결국 문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이 물결은 더는 막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이후 몇 달 동안 협상과 외교적 노력이 강화되어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통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선물처럼 통일의 물꼬가 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북한 주민들이 수없이 철책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기쁘게 맞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내가 왜 그 많은 통일비용을 내야 하느냐며 통일을 반대합니다.
앞으로의 치안과 전체적으로 나라가 가난해질 것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결혼도 안 하고 자녀를 낳지 않아 소멸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되면 새롭게 국민들의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통일비용이 많이 든다고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북한과의 대립으로 우리가 소비해야 하는 군사비용이나 핵무기의 위협과 같은 감정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도 관광적으로도 기대되는 이익도 엄청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북한을 이용하기 위한 것 아니냐, 우리가 북한이 불쌍해서 통일해주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의 고마움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존심을 비굴해지느니 죽는 것을
선택합니다.
로마에 끝까지 맞서다 나중에 집단으로 자살했던 마사다 항쟁을 생각해봅시다.
아니면 영화 ‘300’에서 자신은 관대하다는 페르시아 장군에게 목숨을 잃더라도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스파르타 군인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북한에게 다가갈 때는 우리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선물로 통일의 물꼬가 트일 때 서독인들처럼 기쁘게 동독 사람들을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너 나 아니었으면 거지로 살았을 거야?”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 사람과 살겠습니까?
통일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이 통일이 우리에게 더 좋다는 전반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오면 내분이 없이 바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통일이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고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것이 더 좋다는 믿음이 먼저 있어야 그 선물도 받을 수 있습니다.
분명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독에서는 통일의 이점이 어려움보다 크다는 것이 전반적인
공감대였습니다.
북한 주민들이 몰려올 때 우리가 기뻐 뛸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통일의 준비가 된 것이고 이때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5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오 18,19ㄴ-22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해야 가능합니다!
또 다시 민족 분단이라는 우리의 가슴 아픈 현실을 돌아보고 기도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 돌아왔습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는 넘어야 할 산봉우리가 한두 개가 아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시니, 오늘 모두가 합심해서 더 간절히 기도해봐야겠습니다.
같은 피를 물려받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동포인 남과 북이 갈라서서,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한지 벌써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살아가지만, 심리적으로는 지구상 가장 멀리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너무 낯선 존재, 이질감이 커져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 남북한 동포들이 다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고민거리이자 역사적 과제가 한 가지 있으니, 분단고착화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분위기의 배척이요, 남북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무감각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남북 분단 이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니, 이제 사람들 머릿속에 통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보다, 그냥 이렇게 살아야 되는가 보다 하는 의식이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분단의 고착화와 남북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반민족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통일은 자신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입지와 기반을 흔드는 일이니, 결코 있어나서는 안 될 일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눈만 뜨면 어떻게 해서라도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을 조장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강론>
(2024. 6. 25. 화)(마태 18,19ㄴ-22)
<‘서로’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1) 신자들 사이에 분쟁이 생긴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가 했던 말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1코린 6,1)”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1코린 6,5-8).”
여기서 ‘불신자들, 이교도들’을 ‘다른 나라’, 또는 ‘외세’로 바꾸면, 이 권고는 우리 민족의 문제에도 잘 적용이 됩니다.
<‘어찌 이교도들에게 가느냐?’ 라는 말을, ‘어찌 무력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2)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라는 말은,
불의와 악을 방관하거나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형제애를(사랑을) 먼저 생각하라는 권고입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8-39).”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이 가르침에 대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도 힘들지만, 국제 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특히 남북문제에서 실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은,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3) 남북문제의 해법은 “서로 용서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긴 한데, ‘서로’ 라는 말에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남의 일’이라면 ‘서로’ 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 용서해야 한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한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남북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예수님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사용하신 표현일 뿐입니다.
뜻으로는 ‘네가 먼저’입니다.>
그는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용서하는 것, 또 그는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는 나와 화해하기를 바라지 않아도 내가 먼저 그와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만이 용서와 화해를 실현하는 방법입니다.
개인의 사적인 문제에서도 그렇고, 국가 간의 문제에서도 그렇고, 특히 남북문제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언제나 항상 ‘내가 먼저’입니다.
4)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이렇게 긴 세월 동안 간절하게 남북통일을 염원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도 왜 통일이 되지 않는 것인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마음을 모으고 있는가?”
전 국민이 정말로 한마음으로 평화를 원하고,
통일을 원하고, 화해를 원하는가?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평화통일이 아니라 무력통일을 주장하는 자들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사실 통일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제대로 모으지 않고 있는데, 무슨 염치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도
심각하게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면, 우선 먼저 예수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 일은 ‘우리의 회개’이고,
‘나의 회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