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고려 의종)이 즉위한 지 4년(1150)이 되는 10월 신유일에, 신 유청(惟淸)에게 분부하기를, “생각건대 선각국사의 높은 도덕이 장하여 국가에 공업(功業)이 가장 깊으므로, 우리 선왕께서 여러 번 봉증(封贈)을 더하여 극도로 존중하였으나, 그 행적을 지금까지 문장으로 전하지 못한 것을 짐(朕)은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인고(仁考, 부왕 인종)께서 벌써 너에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이 계셨으니 공경히 할지어다.”하셨다.
신이 이 분부를 듣고 황송히 여기고 집으로 물러나와, 그 초고를 만들어 그 사실의 상세한 것을 얻어, 이제 차례대로 기록한다. 국사의 휘는 도선(道詵)이요, 속성은 김(金)씨이며, 신라국 영암(靈岩) 사람이다. 그 선대와 부조(父祖)는 역사에서 기록이 빠졌다. 혹은 그가 태종대왕의 서손(庶孫)이라 한다. 모친 강(姜)씨의 꿈에, 어떤 사람이 광채 나는 구슬 한 개를 주면서 삼키라 하였는데, 삼킨 후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도록 매운 것 비린내 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오직 독경과 염불에만 뜻을 두었다. 이미 젖 먹을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아주 달랐고, 어릴 때 장난을 하든지 울 때에도 그 의향이 마치 불법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음이 있었다. 그의 부모가 반드시 명승(名僧)이 될 줄 알고 마음속으로 중이 되기를 허락했다. 나이 15세가 되자 총명하고 숙성하며 겸하여 기예(技藝)에 통하였다. 월유산 화엄사(月遊山華嚴寺)에 가서 머리 깎고 불경을 읽었는데, 한 해도 채 못되어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문수(文殊)의 미묘한 지혜와 보현(普賢)의 법문(法門)도 모두 깊이 깨달으니, 여러 학도들이 놀라고 칭찬하여 귀신 같은 총명이라 했다. 문성왕(文聖王) 8년(846)은 20세였다. 갑자기 생각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서 고요히 살아야 할 것인데 어찌 문자(文字)에만 부지런히 종사할까보냐.’ 했다.
때마침 혜철대사(惠徹大師)가 서당지장(西堂智藏) 대사에게 밀인(密印)을 전해 받고 동리산(桐裏山)에서 법석(法席)을 여니 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대사가 선문(禪門)에 가서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지장대사가 그의 총명함을 가상히 여기어 지성으로 가르쳤다. 무릇 이른바, 말 없는 말과 법 없는 법을 가르치니 환하게 깨달았다.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대사가 이미 깊은 이치를 통달하고는 거처하는 곳이 일정치 않았다. 연하(煙霞)를 밟고 천석(泉石)에 앉아 그윽함을 찾고 절승한 데를 따라 일찍이 게으름이 없었다. 혹은 운봉산 밑에서 도굴을 파고 참선(參禪)도 하고, 혹은 태백산 바위 앞에서 띠집을 짓고 여름을 지내기도 했다. 이름이 널리 퍼져 전국에서 숭배하였으며, 도를 행하는데 감응(感應)이 있어 신기한 자취가 자못 많았으나, 요긴치 않은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
희양현(曦陽縣) 백계산(白鷄山)에 옥룡(玉龍)이란 옛 절이 있었다. 대사가 돌아 다니다가 여기에 와서 그 그윽한 경치를 좋아하여 집을 중수하고, 깨끗하게 평생을 마칠 뜻으로 혼자 앉아 있으면서 말을 잊은 지가 35년이나 되었다. 이래서 사방에서 학도들이 구름 모이듯 그림자 따르듯 하여, 제자 된 자가 수백 명이 되었다. 근기(根機)는 차별이 있으나 한 비로 널리 적시어 눈(目)만이 부딪치고 마음으로 전하여 제자들은 텅 빈 그릇으로 왔다가 배워서 꽉 채워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 헌강왕(獻康王 875~885)이 그 높은 덕을 숭배하고,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여 한 번 보고는 기뻐하여 궁중에 만류해 두고, 항상 현묘(玄妙)한 도리로 왕의 마음을 개발(開發)시켰다. 얼마 안되어 성 안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아 간청하여 본 절로 돌아갔다. 갑자기 하루는 제자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나는 장차 갈 것이다. 대저 인연을 타고 이 세상에 왔다가 인연이 다 되면 가는 것은 이치의 떳떳한 것이니 어찌 싫어 하겠는가” 하고, 말을 마치자 가부좌(跏趺坐)하고앉아서 입적(入寂)하였다. 때는 당나라 광화(光化) 원년(신라 효공왕 2년, 898) 3월 10일이다. 향년(享年) 72세이다. 사중(四衆)들이 눈물을 흘리고 부모를 생각하듯 의심하듯 하면서 앉은 시체를 옮기어 절 북쪽에 탑을 세웠으니 유언(遺言)을 따른 것이다. 효공왕이 듣고 슬퍼하여 특별히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주고 탑 이름을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했다. 제자 홍적(洪寂) 등이 스승의 높은 행적을 전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눈물을 머금고 표문(表文)을 올려 기록해 주기를 청하므로, 왕이 서서학사(瑞書學士)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碑文)을 지으라고 명령했으나 마침내 돌에 새기지 못했다.
처음에 대사가 옥룡사(玉龍寺)를 중건하기 전에는 지리산 구령(甌嶺)에서 암자를 짓고 있었는데, 이상한 사람이 대사의 앞에 와서 뵙고 말하기를,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근 수백 년이 됩니다. 조그마한 술법이 있으므로 대사님에게 바치려 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뒷날 남해의 물가에서 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역시 대보살(大菩薩)이 세상을 구제하고 인간을 제도하는 법입니다.”하고 온데 간데 없어졌다. 대사가 기이하게 생각하고 그가 말한 남해의 물가를 찾아갔더니, 과연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의 형세(形勢)를 보여 주었다. 돌아본 즉 그 사람은 없어졌다. 그 땅은 지금 구례현(求禮縣)의 경계인데, 그 곳 사람들이 사도촌(沙圖村)이라 일컫는다. 대사가 이로부터 환하게 깨달아 음양 오행의 술법을 더욱 연구하여, 비록 금단(金壇)과 옥급(玉笈)의 깊은 비결이라도 모두 가슴 속에 새겨 두었다.
그 뒤, 신라의 정치와 교화가 점점 흐려져서 위태하고 멸망할 조짐이 있었다. 대사가 장차 천명을 받아 특출한 자가 있을 줄 알고 간간이 송악군(松岳郡 지금의 개성)에 가서 놀았다. 때마침 우리 세조(世祖 고려 태조의 부친)가 송악군에 살림집을 짓고 있었다. 대사가 그 문앞을 지나다가 하는 말이, “여기는 마땅히 왕이 될 자가 날 것인데 이 집을 경영하는 자는 알지 못하는구나”하였다. 마침 계집종이 이 말을 듣고 들어가 세조에게 알리니, 세조가 급히 영접해 오게 하고, 들어가 그가 시키는 대로 고쳐 짓게 하였다. 대사가 다시 하는 말이, “고친 뒤 2년만에 반드시 귀자를 낳으리라” 하고, 한 권의 책을 지어 봉하여 세조에게 바치면서 하는 말이, “이 글은 장차 그대가 낳을 아들에게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장년이 되거든 주라”했다. 이 해 신라 헌강왕이 새 임금이 되니 당나라 건부(乾符) 2년인데 4년(877)에는 우리 태조가 과연 앞서 말한 그 집에서 태어났다. 장년이 되자 그 봉해서 준 책을 받아 보고 천명(天命)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알고 도둑들과 포악한 무리들을 없애버린 다음 국가를 처음 이룩하였다.
생각건대 신성한 태조께서 어찌 일찍이 천하를 얻겠다는 마음을 처음부터 두었겠는가. 그 어지러운 것을 숙청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백성을 잘 살 수 있는 데에 올려 놓고, 커다란 업적과 아름다운 덕택이 한없이 전하게 된 것은 □, 하늘은 덕 있는 자를 돕고, 백성들은 인자한 임금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 성스러운 시대를 창업(創業)하여 조용한 가운데 정해진 운수를 받은 것은, 그 원인이 모두 우리 대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대개 그 공로와 사업의 높고 빛남이 이렇게 대단하니, 마땅히 크게 포양(襃揚)하고 높게 봉증(封贈)할 것이므로 현왕(顯王)은 대선사의 증직이 있었고, 숙조(肅祖)는 왕사의 호를 더했으며, 우리 성고(聖考 지금 임금의 돌아간 아버지) 공효(恭孝) 대왕에 이르러서는, 선왕들의 공로를 기념하는 덕화를 보답하려는 뜻을 더욱 선양(宣揚)하여, 드디어 선각국사(先覺國師)로 봉하고 또 사신을 보내 본사 영당(影堂)에 예로써 고하고, 지금 왕께서 또 그 사적을 새겨서 오랫동안 전하도록 명령하니, 장하심이 다시 더 할 나위가 없도다.
신이 일찍이 시험 삼아 말하기를, “대개 제왕(帝王)이 장차 일어날 때에는 그 신령스러운 위력과 기염(氣焰)은 반드시 남을 움직이고 울렁거리는 힘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높은 재주와 절등한 식견이 있는 자가 수 없이 일어나, 혹은 앞서고 혹은 뒤서서 쓰여지는 법이다. 대사가 태조왕께 대해서 그 사업이 심히 위대하였다는 것은, 태조가 탄생하기 전에 먼저 알았고, 그 효력은 자신이 죽은 뒤에 시행되게 되었으니, 그 신기하게 맞춘 것과 가만히 도운 뜻이 도저히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아, 대사의 도(道)가 그 극치에 나아간 것은 불조(佛祖)와 합치되고, 행적에 나타난 것은 마치 장자방(張子房)이 신(神)에게서 글을 받은 것과 같고, 보지대사(寶誌大師)가 앞으로 닥칠 일을 예언함과 같고 일행(一行)이 술수(術數)에 정통한 것과 짝이 되리로다. 대사가 전한 음양설(陰陽說)은 세상에 많이 있어, 뒤에 지리를 말하는 자들이 다 숭상한다.
명(銘)하기를, “과거의 모든 부처는 미묘한 법이 있다. 문자로 기록한 것도 아니요, 사수(思修)에 따른 것도 아니다. 초연(超然)이 바로 진심(眞心)을 가리키며 일념이 천겁(千劫)이다. 오직 우리 국사는 넉넉하게 그 지경에 들어갔다. 잘 배움은 배움이 없는 것이며, 참으로 공(空)한 것은 공(空)이 아니다. 정법안(正法眼)을 갖추었으니, 4방으로 열리고 6모로 통했다. 오직 그 나머지 실마리로 술법에 뜻을 두었다. 시초(蓍草)로 점치지 않아도 미리 아는 것이 무궁하였도다. 옛 나라가 흔들리고 새 운명은 아직 감감했다. 끝나기 전에 끝날 줄 알았고, 오기 전에 올 것을 알았다. 글을 지어 미리 바쳐, 국가의 복이 시작되었다. 주(周)나라 만들 듯, 한(漢) 나라 일으키듯, 손바닥 가리키듯 환히 보았다. 성인(聖人)이 일어나서 왕위를 이어 받을 제, 미리 기대하고 부탁한 것이 모두 나에게서 나왔다. 사람들은 세대가 달랐으나, 일은 오늘에 부합되었다. 특수한 공로와 거룩한 실적이 산하(山河)와 함께 했네. 3백년 지난 오늘 그 모습 보는 것 같다. 높은 유촉(遺躅)을 우러러보니, 하늘을 흔든 듯 헌걸차다. 옛 사당에 비를 새겨 천추에 알리노니, 듣거라, 산신령은 게으름 없이 수호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