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 박(朴). 호 무학(無學)·계월헌(溪月軒). 삼기(三岐:陝川郡) 출생. 18세에 소지선사(小止禪師)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혜명국사(慧明國師)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서 수도하다가, 1353년(공민왕 2) 원(元)나라 연경(燕京)에 유학하여 그때 원에 와 있던 혜근(惠勤)과 지공(指空)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56년 귀국하여 1373년에 왕사(王師)가 된 혜근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1376년 혜근이 회암사(檜巖寺)에서 낙성회(落成會)를 연 때 수좌(首座)로 초청하였으나 사양했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어,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고 회암사에서 지냈다.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漢陽)을 오가며 지상(地相)을 보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찬성하였다. 1397년(태조 6)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우고, 1402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이 있다.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1327∼1405)
조선초기의 고승. 성은 박씨.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삼기 (三岐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 인일(仁一)의 아들이다. 1344년(충혜 왕 5) 출가하여 소지(小止)의 제자가 되었으며,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 법을 배우며 부도암(浮屠庵)에 머물렀다. 1346년(충목왕 2) <능엄경>을 보다 가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때부터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 (金剛窟) 등에 머무르면서 불도를 닦았다.
1353년(공민왕 2) 원나라 연도(燕 都)로 가서 인도승 지공(志空)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다. 이듬해 법천사(法泉 寺)에서 나옹(懶翁)을 만났는데, 나옹은 그가 큰 그릇임을 간파하였다. 그뒤 무령(霧靈)·오대산 등을 거쳐 서산(西山)의 영암사(靈巖寺)로 나옹을 찾아갔 으며 그곳에서 몇 해를 머무르면서 수도하였다. 1356년 나옹을 하직하고 귀 국하였으며, 나옹 역시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元曉庵)에 머물렀다. 1359년 다시 나옹을 찾아가자 나옹은 법을 전하는 표시로 불자(拂子)를 주었다. 그뒤 나옹이 신광사(神光寺)로 자리를 옮기자 찾아갔다가, 그곳 대중 속에 그를 꺼 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살았다.
1376 년(우왕 2) 회암사( 輦輹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그를 불러 수좌(首座)로 삼 고자 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였다. 그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명산을 유력 (遊歷)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공양왕이 왕사로 삼고자 하였으나 끝내 응 하지 않았다.
1392년(태조 1) 겨울, 태조는 그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전불심인 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 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 者)'라는 호를 내렸다.
이때 태조에게, 유교는 인(仁)을 말하고 불교는 자비를 가르치지만 그 작용이 하나라는 것과,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필 때 백성의 어 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수 있음을 설법하였다. 그리고 죄를 지어 옥에 갇힌 사람들을 용서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줄 것을 청원하였다. 태조는 그 청에 따라 죄수를 방면하였고, 그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1393년 왕도(王都)를 옮기려는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 등을 돌아다니며 지상(地 相)을 보고, 마침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는데 찬성하였다. 1397년 태조의 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壽塔)을 세웠으며, 1398년 용문사(龍門寺)로 들어가서 살았다.
1402년(태종 2) 왕명을 받아 회암사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사 퇴하고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년 금강암으로 옮겨 그곳에 서 나이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인공음(印空音)>1권이 있 었다고하나 전하지 않으며,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1권도 발견되지 않 고 있다.
현존하는 분명한 저서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가 있다.
*** 무학대사 이야기 ***
이성계는 전주 사람인데 함흥으로 갔다. 당시 나옹대사가 상좌승인 무학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한 산소 자리를 가리키며 그 윗터는 왕휘지지이고, 아래쪽은 장상(將相)이 날 자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런데 마침 이성계의 집 청지기가 그곳을 지나다가 그 말을 듣게 되어 이성계에게 전하자 이성계는 나옹대사를 찾아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러나 나옹대사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때 나이 어린 무학대사가 스승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그곳에 쓰고 세월이 지나 왕이 되었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송도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이성계는 궁궐 터를 잡기 위해 무학을 데리고 한양을 답사하였다. 무학은 지금의 왕십리를 궁궐 터로 잡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검은 소를 타고 가던 한 노인이 소를 툭툭 치면서
"이놈아, 이 무학만치나 미련한 소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무학은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을 쫓아가 절을 하고,
"제발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며 사정하였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며
"여기서 십 리를 더 들어가라."
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십 리를 더 들어간 곳이 지금의 경북궁이다. 그리고 십 리를 더 가라고 했다 하여 갈 왕(往)자 왕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경북궁을 짓는 중에 상량이 자꾸만 무너지는 것이었다. 무학이 고민을 하는데 하루는 밭을 갈던 노인이
"그 터가 학의 형상이니 날개부터 눌러야 한다."
고 충고 하였다. 무학은 날개 부분에 사대문을 먼저 지었다. 그러자 궁이 무너지지 않아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무학은 왕의 스승으로 있었는데 일찍이 태조의 즉위 이전에 태조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즉위를 예언한 승려로 전한다.
무학이 설봉산 아래 있는 토굴에 기거하고 있을 때 하루는 이성계가 찾아와 물었다.
"꿈에 집을 부수고 들어와 서까래 셋을 지고 나갔는데 이것은 무슨 조짐입니까?"
그러자 무학이 축하하며
"서까래 셋을 진 사람은 왕이라는 글자를 가리킵니다"
라고 하였다. 이성계가 또 묻기를
"꿈에 꽃이 거울에 떨어지니 이것은 또 무엇입니까? "
라고 하니 무학이 대답하기를
"꽃이 떨어지면 마침내 열매가 열 것이요, 거울에 떨어지니 어찌 소리가 없으리요"
라고 하였다. < 대동기문 >
<< 태조 이성계 <<==>> 자초 무학대사 >>
태조 이성계 젊은시절.
이성계가 꿈을 꿨다.
그 꿈은 이성계가 어딘가 서있는데 도사가 홀연히 나타나
쇠꼬치를 이성계 몸 3곳에 껴논 꿈이었다.
이런 꿈도 있을까 하고 생각한 이성계는 산에서 도를 닦는다는 무학대사를 찾아갔다.
이성계는 자신의 꿈 풀이를 해달라고 했다.
무학대사는 깜짝 놀라며 이성계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성계가 놀라며 말했다.
"왜 저에게 절을 하십니까?"
무학대사가 말했다.
"조용히 하시오.. 꿈풀이를 해주겠소.
당신의 몸에 쇠꼬치 3개를 꽂았다는건 임금 왕(王)이 된다는 뜻이오...
절대 누설하지 마시오.
그 꿈이 틀어질수도 있으니."
그 해몽은 꼭 들어맞았다.
1392년 고려가 멸망되고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왕이 되었다.
이성계는 왕이 되고 잠을 잤다.
그런데 왕의 옷을 입고 왕관을 쓴 자가 나타나 눈을 무섭게 뜨고 이성계를 노려보았다.
"네 놈이 우리 자손을 모두 죽였으니 어찌 원한이 없으리오!"
이성계는 꿈에서 깨어났다.
"분명 그자는 왕건일거야...
안되겠다. 도읍지를 옮기자!"
안그래도 조선 백성들은 도읍지가 그대로 고려의 땅이라고
흉흉한 일이 벌어질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꿈풀이를 해준 무학대사는 태조의 명을 받들어
도읍지를 찾아떠났다.
그런데 딱 좋은 도읍지가 발견되었다.
계룡산이었다.
태조는 그곳을 도읍지로 정했는데
꿈에서 신선이 나타나 태조에게 말했다.
"이곳은 도읍지로 적합하지 못하니 딴곳으로 옮기거라."
그래서 도읍지 공사는 중단되고 무학은 또 도읍지를 찾으러 갔다.
무학은 그 당시 고려때는 별볼일 없던 한양을 도읍지로 하자고 주장했다.
태조는 한양을 도읍지로 건설했다.
도읍지가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태조가 기뻐하며 말했다.
"도읍지가 완성됐으니 고하를 막론하고 말을 터봅시다."
고하를 막론한다는것은, 한마디로 벼슬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말튼다는 건, 아무리 높아도 농담을 할수 있다는 뜻이다.
태조가 농담거리로 무학에게 창피한 말을 했다.
"오늘 무학대사를 보니, 꼭 돼지같아 보이오."
무학대사는 무안했고, 대신들은 껄껄 웃었다.
무학대사는 그러나 태연한 척하며 이성계에게 말했다.
"전하께선 꼭 부처님처럼 보이십니다."
태조가 말했다.
"과인은 무학을 돼지라고 했는데 왜 무학은 과인을 부처라고 하는것인고?"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껄껄 웃었다
무학대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본래 사물은 눈으로 보는것 보다는 마음으로 보는것이
더 진실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돼지의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님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부처님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성계는 어디에 머리를 부딧친것 처럼 멍하니 서 있더니 껄껄 웃으며
"역시 대사님의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중생을
깨우치는 설법입니다." 라고 말하며 좋아했다.
우리는 모든 사물을 육안(肉眼)으로만 보고 말하느데
같은 사물을 보는데도 수행의 정도에 따라,
지안(知眼:지식의눈)으로 보는 사람,
심안(心眼:마음의눈)으로 보는 사람,
혜안(慧眼:지혜의눈)으로 보는 사람.
불안(佛眼:부처님 마음의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답니다.
우리는 存在의 相 넘어에 內在하고 있는 意識의 흐름을
읽어야 그 존재의 가치를 평가 할 수 있느게 아닌가
.
이처럼 무학은 훌륭하고 겸손한 인물이었습니다.
<<< 참고 사항 >>
신언서판 [身言書判]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몸[體貌]·말씨[言辯]·글씨[筆跡]·판단[文理]의 네 가지를 이르는 말.
身 몸 신
言 말씀 언
書 글 서
判 판단할 판
신(身)이란 사람의 풍채와 용모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첫째 평가기준이 되는 것으로, 아무리 신분이 높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첫눈에 풍채와 용모가 뛰어나지 못했을 경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신은 풍위(豊偉)일 것이 요구되었다.
언(言)이란 사람의 언변을 이르는 말이다. 이 역시 사람을 처음 대했을 때 아무리 뜻이 깊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말에 조리가 없고, 말이 분명하지 못했을 경우,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되기 쉽다. 그래서 언은 변정(辯正)이 요구되었다.
서(書)는 글씨(필적)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로부터 글씨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인물을 평가하는데, 글씨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글씨에 능하지 못한 사람은 그만큼 평가도 받지 못한 데서 서에서는 준미(遵美)가 요구되었다.
판(判)이란 사람의 문리(文理), 곧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판단력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이 아무리 체모(體貌)가 뛰어나고, 말을 잘하고, 글씨에 능해도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능력이 없으면, 그 인물됨이 출중할 수 없다 하여 문리의 우장(優長)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상 네 가지 조건을 신언서판이라 하여, 당나라에서는 이를 모두 갖춘 사람을 으뜸으로 덕행·재능·노효(勞效)의 실적을 감안한 연후에 등용하였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나무아미타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