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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 설송도(雪松圖) ~ 능호관(원령) 이인상 선생 작품
<이인상의 雪松圖> 종이에 수묵, 117.2 ×52.9 cm,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린 삶 속의 자존 … 화가의 생애와도 상통! 이인상의 ‘설송도’는 삼엄한 기운이 감돌면서 깊은 속뜻이 담긴 그림이다.
옛날 시인은 시 속에 그림을 숨기고 화가는 그림 속에 시를 숨겼다. 시와 그림은 단짝이라서 시를 읽으면 그림이 보이고 그림을 보면 시가 읽힌다. 그림은 또한 화가의 내면 고백이자 세상에 던지는 교훈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그림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있다. ‘세한도’는 ‘차고 시린 시절을 그렸다’는 뜻이다. 하필 소나무와 잣나무인가. 추사는 “한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고 귀띔한다.
만화방창한 시절에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도 시답잖게 보이는 것이 염량세태다. 하지만 만물이 헐벗는 겨울이 오면 달라진다. 사철 푸른 나무의 진가가 비로소 돋보인다. 따습고 배부른 시절의 윤리는 허울에 머물기 쉽지만 춥고 가난한 날의 지조는 참으로 도타운 것이다. 추사의 소나무와 잣나무는 변심하기 쉬운 세상을 나무란다.
여기 차고 시린 날의 나무 그림 하나가 더 있다. 18세기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이 그린 ‘설송도(雪松圖)’다. 흰 눈을 뒤집어쓴 소나무가 화면 중앙에 꼿꼿이 서 있다. 헌걸찬 기상이 완연하다. 그 뒤로 허리 휘어진 소나무 하나가 보인다. 쓰러질 듯 안타까운 자태다. 한마디로 만고풍상을 겪는 노송의 인내가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들어 매는 그림이다. 이인상은 왜 곧은 나무와 굽은 나무를 함께 그렸을까. 그의 삶을 모르면 속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이인상은 깨끗한 선비였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세상사의 시비에 대해 오불관언하는 풍모가 또렷하다. 수척한 골상에 눈빛은 내리깔았으며 입은 꽉 다물었고 눈두덩은 무척 깊다. 그는 가난했다. 서른이 넘어 친구들이 마련해 준 초가 한 채를 겨우 얻었다. 문설주가 낮아 드나들 때 머리를 숙여야 했지만 이 집에 이름 붙이기를 ‘능호지관(凌壺之觀)’이라 했다. ‘삼신산 중에 하나인 방호산을 능가하는 경관’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인상의 호가 ‘능호관’이다.
이인상은 꽃나무를 아꼈다. 추위를 피하기 어려운 집에 살다 보니 겨울날 자기가 사랑하는 매화분을 친구 집에게 맡겼다가 이듬해 봄에 그림 하나를 그려 주고 되찾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앞서 세상을 뜬 아내를 기리며 그는 이렇게 썼다. “그대는 추운 겨울날 땔감이 모자라도 마당의 꽃나무는 베지 않아 나의 측은지심을 살려주었소.” 아내에 대한 눈물겨운 사랑과 함께 꽃과 나무를 아끼는 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서출이었던 그는 벼슬이 미관말직에 머무르자 배운 자의 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는 ‘세상이 혼탁해서 나를 알아주지 못하니, 때를 얻고 잃음이 아침저녁에 달렸구나’라고 읊었다.
다시 ‘설송도’로 눈을 돌려 보자. 혹독한 겨울의 냉기가 피부에 파고든다. 눈을 뒤집어써도 소나무는 욕되지 않다. 차고 시린 생애 속에서 자존을 지킨 화가의 처신과 닮았다. 굽은 나무는 허리를 잔뜩 꺾고 있다. 문자속이 깊지만 뜻을 펴지 못한 화가의 불우한 운명이 거기에 겹쳐진다. 사람의 한살이가 마냥 곧거나 굽기는 어려울 터이고 삶의 기쁨과 슬픔은 늘 공존한다. 더불어 ‘빼어난 재목은 가혹한 텃밭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이 그림은 말한다.
손철주<미술 칼럼니스트, 학고재 주간>
이어서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유홍준의 국보순례 42]를 소개한다.
눈이 많이 내렸다.
생활에 불편은 많았지만 눈다운 눈이 내렸다는 즐거움도 있었다.
세상엔 눈꽃보다 아름다운 꽃이 없다고 한다.
고궁으로 눈꽃 구경 갔다가 백설을 머리에 인 소나무를 보니 저절로 능호관(凌壺館) 이인상(李麟祥·1710~1760)의 '설송도(雪松圖)'가 떠올랐다.
바위 위에 솟아 있는 두 그루 노송이 눈에 덮인 모습을 그린 것으로, 한 그루는 낙락장송으로 곧게 뻗어 올라가고 한 그루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단순한 소재이지만 화면 상하 좌우를 대담하게 생략하여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동양화로는 드물게 여백 전체를 엷은 먹빛으로 채워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 점 속기(俗氣) 없는 고아(古雅)한 그림이다.
연암 박지원의 '불이당기(不移堂記)'에는 이공보와 능호관 사이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가 들어 있다.
어느 날 이공보가 능호관에게 잣나무 한 폭을 그려달라고 청하자 얼마 뒤 '눈이 내리네(雪賦)'라는 시를 전서체로 써서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부탁한 그림은 좀처럼 보내오지 않아 독촉했더니 능호관은 이미 주지 않았냐고 반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공보가 "그때 준 것은 글씨였지 그림이 아니었네"라고 하자 능호관은 웃으며 "그 글씨 속에 그림이 다 들어 있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문인화만이 지닌 높은 차원의 미학이 들어 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외형적인 형태보다 내면적 진실성을 중시했고, 자연의 아름다움보다는 품격(品格)을 담아내는 데 무게를 두었다고 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능호관 그림의 진수를 잡아내기 힘들다. 당대의 안목들은 우리에게 그의 예술에 감추어진 비밀을 말해주고 있다.
추사 김정희는 그의 그림에서 진실로 주목할 것은 문기(文氣)라고 했다.
김재로는 능호관 그림의 묘처(妙處)는 농밀(濃密)함이 아니라 담백(淡白)함에 있고, 기교의 빼어남이 아니라 꾸밈없는 필치에 있다며 "오직 아는 자만이 알리라"라고 했다.
이어서 [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능호관 이인상 ‘설송도’(2007-02-01)를 소개한다.
※言行一致의 삶을 담은 ‘선비의 자화상’
그림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이다. 특히 문인화는 그림의 소재인 사군자(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빌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
비록 사군자에는 들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나무가 있다. ‘애국가’에도 등장하는 소나무가 그것이다. 우리의 옛 그림 중에서 소나무가 등장하는 그림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그린 나무도 소나무였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겸재 정선의 ‘노송영지도’, 능호관 이인상(1710∼60)의 ‘설송도’, 이재관의 ‘송하처사도’, 북산 김수철의 ‘송계한담도’, 허유의 ‘노송도’, 민화 등에도 소나무가 등장한다.
옛 시인묵객들은 물론 일반인까지 소나무에 의지했다. 소나무는 삶의 동반자였다. 사철 푸른 소나무의 생태에 감동한 사람들이 소나무를 통해 자기심경을 표현했다. 이는 옛 그림의 두 가지 경향, 즉 ‘사실(寫實)’과 ‘사의(寫意)’ 중에서 사의로 소나무를 그리고 대했다는 말이다. 여기서 사실은 실재 있는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뜻이고, 사의는 사물의 외형을 취하되 마음속의 뜻을 표출되게 그린다는 뜻이다. 문인화는 주로 사의적인 요소가 강하고, 화원이나 전문가의 그림은 사실적인 경향을 띠었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능호관은 사의의 대가였다. 미술사가 이동주에 따르면, 원래 우리나라 그림에서는 사의에 비중이 많은 편이 아니었는데, 능호관에 와서 사의적인 그림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설송도’는 능호관의 청정한 인품이 고스란히 담긴 대표작이다.
소나무로 그린 지조와 절개가 이인상의 ‘설송도’이다.
때는 눈 오는 날인데, 날씨마저 흐리다. 화면 가득 두 그루의 소나무가 클로즈업 되어 있다. 한 그루는 화면의 중심에서 기둥 역할을 하듯이 위를 향해 곧게 뻗어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옆으로 비스듬히 눕혀서 교차되게 그렸다(직선과 곡선의 조화!). 또 소나무의 윗부분을 과감하게 잘랐다. 이로 인해 소나무의 곧고 힘찬 모습이 더 잘 살아난다.
이 대담한 화면구성은 능호관의 다른 그림인 ‘검선도’에도 나타난다. 인물의 배경에 이와 동일한 포즈의 소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다.
이 소나무는 ‘홀몸’이 아니다. 등걸과 가지마다 눈이 가득 쌓여 있다. 눈은 엄동설한 같은 거친 세파를 의미한다. 또 소나무는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 바위는 토양의 척박함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소나무는 거친 세파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꿋꿋하다. 속된 일에 물들지 않고자 하는 절개가 느껴진다. 전봇대처럼 직립한 굵직한 등걸은 굳은 지조와 기상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소나무는 한곳에 뿌리를 내리면 여간해서 다른 곳으로 옮겨심기가 어렵다. 그만큼 심지가 곧다. 또 변함없이 푸르다. 듬직하다. 이런 생태가 소나무를 흠모하고 예찬하게 만든다.
삶을 담은 그림, 그림을 닮은 삶!
이 그림의 가치는 능호관의 인물됨에서 극대화된다. 그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효종의 뜻을 받들어 북벌론에 찬성하며, 청나라에 대한 깊은 반감과 청나라 문화의 유입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대부들은 이런 능호관의 배청사상과 지조를 높이 평가하며 존경했다.
또 부와 권세에 굽히지 않는 곧은 성격의 지사였다. ‘능호관’이라는 호도, 가난한 그를 위해 친구들이 남산 기슭에 사준 집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집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경관이, 신선들이 산다는 ‘방호산’을 능가할 만큼 빼어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호를 ‘방호산을 능가하는 아름다운 경관’이라는 뜻으로 능호관이라고 지었다. 그는 이 작은 초가집에서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심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의 신념과 어긋나는 일에는 일절 마음을 두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을 좇지도 않고 바른 길만 걸었다. 그런 모습이 곧추선 소나무의 굳센 기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설송도’는 언제나 꼿꼿하고 원칙을 중시했던 능호관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그에게 그림은 자기수양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강성한 자태의 소나무를 그리며,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을까.
사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런 변화는 인간의 굳은 결심마저 균열을 낸다. 문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성록’을 쓰듯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같은 맥락에서 능호관의 소나무도 치열한 자기성찰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언행일치의 삶이 낳은 ‘그림의 진신사리’가 소나무라고 말이다. 만약 그림이 삶을 담고, 삶이 그림을 닮는다면, 능호관의 그림이 천상 그 꼴이다. 그에게 그림과 생활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생각은 씨앗이다. 그 씨앗은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다. 실천이 뒷받침되지 않는 생각은 공허하다. 실천이 안 된 생각은 ‘작심삼일’로 빠지고, 실천이 된 생각은 ‘작심평생’으로 이어진다. 실천은 생각에 날개를 달아준다. (박현주 기자, 파이낸셜 뉴스 hyun@fnnews.com)
다음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의 화가 이인상에 대한 평을 소개한다. 유홍준은 그의 <화인열전>에서 능호관 이인상(凌壺觀 李麟祥)의 평전을 쓰면서 첫머리 글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만약 그림의 세계에도 바둑처럼 급수가 있다면 조선시대 화가 중에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에 오른 이는 몇이나 되며, 9단 중에서 타이틀을 차지할 만한 기량을 갖고 있던 화가는 누구일까? 또 그림의 세계에도 운동경기처럼 종목이 있다고 할 때 진경산수에서 겸재 정선, 속화에선 단원 김홍도가 금메달을 차지한다면 문인화 부문은 누가 차지할 수 있을까?
나는 단연 능호관 이인상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는 나 개인의 의견만이 아니다. 당대의 평가도 그렇고 오늘날 미술사가 대부분의 견해도 그렇다."
이인상 (1710 - 1760 )의 자는 元靈, 호는 능호관, 寶山子, 鐘岡蟄夫, 雷象觀이며, 본관은 완산(전주)이고 영의정을 지낸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輿)의 후손이나 증조부가 서자인 원대서출이었습니다. 냉혹한 서얼제도의 굴레 속에서 그나마 서얼허통의 추세와 백강의 후예라는 집안배경, 그리고 그의 학식과 인품으로 종6품 음죽(장호원)현감까지 관직생활(1731-1747)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강직한 성격 탓에 관찰사와의 불화로 대판 싸우고 관직을 버리고 雪城에 조그만 정자 종강모루<鐘岡茅樓>를 짓고 은거합니다.
그의 인품을 주변사람들은 한결같이 '개결(介潔)한 선비'라 증언합니다. 그는 원칙적이고 도덕 군자였고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합니다. 그의 주변에는 '國中의 高士'들이 많았기에 그 어울림은 아름다운 이야기 꺼리였다 합니다.
이인상의 예술세계는 높은 격조의 경지를 보여주는데 이는 삶과 예술이 혼연일체된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든 문인화가들은 기본적으로 詩,書,畵가 분리되지 않는 경지를 지향하지만 능호관처럼 그것이 일체가 된 예는 흔치 않습니다. 그는 詩,書,畵,刻 두루 능통했는데 그의 담담하고 진실된 예술세계는 글쟁이나 환쟁이가 범접 못하는 文氣, 格調라는 미적 가치에 있을 것입니다.
秋史 金正喜는 능호관의 예술세계에 대해서만은 한 수 위로 올려보았다 합니다. 추사는 중국에 있는 문인 묵객들과 우리나라의 뛰어난 글씨 탁본을 자주 보내곤 했는데 그의 스승 翁放綱에게는 능호관의 그림을 선물로 보낼 정도로 능호관을 상찬했다 합니다. 추사는 능호관을 이렇게 평하였습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文字香, 書券氣를 갖추고 예서법을 기본으로 펼치는 것이 예서 쓰는 비결이 된다. 근래에 조윤형, 유하지 등 여러분이 모두 예서법에 깊이 통달해 있었지만 다만 문자의 기력이 적은 점이 못내 한스럽고 또 한스럽다. 그러나 이인상의 예서법과 화법에는 모두 文字氣가 있으니 이를 시험 삼아 관찰해봄으로써 그 문자기를 갖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능호관은 특이하게 전서(篆書)에 능하였는데 <전서 8곡병>을 보면 청나라 대가들의 글씨와 비견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필력과 奇勁한 멋을 풍기는 개성이 넘칩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전서의 대가가 있었다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篆刻에서도 또한 당대의 흔치않는 一家를 이루었으니 그의 예술세계의 저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문인화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 <雪松圖>와 <수화한담도>, <노송도>, <수석도>, <장백산도>, <송하관폭도>, <검선도> 등이 있는데, 그 중에 최고의 명작<설송도>를 보면 바위 위로 솟아오른 두 그루의 소나무가 눈에 덮여 있는 단순한 소재입니다. 소나무 줄기를 표현한 것도 치밀한 필법이 아니라 짙고 옅은 먹의 번지기로 소략하게 처리한 담담한 그림일 뿐입니다. 얼핏 보면 작품의 소재나 필법이 다소 심심한 느낌이 드나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심금을 울리는 전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농담의 흔연한 어울림 속에 서려 있는 삼엄한 기상과 탈속한 시정의 높은 격조를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동주 선생의 평을 빌리면 "능호관의 <설송도>을 보면 그림이 澹泊하고 古雅할 뿐아니라 그림의 기술면이 그림 속에서 조금도 강조되지 않고 무슨 묘한 심회랄까 하는 인상이 풍깁니다... 선비 그림의 本道는 그림에 기량, 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봅니다. 소위 화가다운 능숙한 맛이 있어야 그림이 좋을 것 같은데, 선비의 그림은 그런 능숙, 혹은 화가다운 태가 나면 부질없다고 여깁니다. 그림을 못 그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충분히 心意를 전할 만한 기술과 화법의 능숙이 있어야 되지만 그것이 눈에 띄면 안 되고 고결한 선비의 품격을 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림에 능하긴 차라리 쉬워도 능하면서도 능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여느 선비화가나 더군다나 환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이렇듯 고고하고 진실 되며 또한 청절을 지키면서 그 인품을 화폭에 담아 뛰어난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준 능호관이 겸재나 단원처럼 추앙받지 못하고 일반에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예술세계가 아무나 범접하지 못할 만큼의 높은 경지이기 때문이리라.
유홍준은 虛舟 金在魯의 평으로 평전을 마무리 합니다.
"이인상의 妙處는 기름진데(濃) 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데(淡) 있으며, 익은(熟) 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生) 맛에 있다. 오직 아는 자만이 이를 알리라."
※ 능호관(凌壺館) 이인상(李麟祥) 소개
이인상의 본관은 완산(전주) 이씨 밀성군파로 이 집안은 당대의 명문 중에 명문으로 그 문벌을 앞세우기 위하여 다른 전주 이씨와 구별하여 완산 이씨라는 별칭을 사용할 정도였다. 특히 이인상의 고부조인 백강 이경여 이후 이 집안은 크게 번성하였다. 백강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로 친명배청을 주장하여 한때는 심양에 억류된 적이 있는데, 그의 이러한 지조와 정치적 입장은 훗날 노론사회에서 크게 존중받는 바가 되었다. 그리고 백강의 자손들은 크게 번성하여 6명의 정승과 3대에 걸친 대제학을 배출할 정도였으며, 그 종가의 권세에 힘입어 음보가 방계인 이인상 집안까지 내려지게 된다.
이인상의 집안은 이처럼 당대의 명문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서출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민계가 백강의 서자였기 때문에 이인상은 이른바 원대서족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인상이 서출이라고 해서 곧 그의 예술이 곧 서얼신분의 무엇을 대변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예술세계에는 서출의식이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어떤 사대부도 보여주지 못했던 심오한 문인화의 세계에 도달한 것이었다. 서출인 이인상이 신분의 제약을 어느 정도 벗어난 것은 아마도 두 가지 점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해석되는 데, 하나는 그가 명문출신으로 당시 노론의 권세 하에서 높이 추앙받던 백강 이경여의 후손이라는 집안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고, 또 하나는 서얼허통에 점점 관대해지는 당시의 추세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인상의 신분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출일 수밖에 없는 제약이 평생 따라다녀, 결국은 문과에 응시할 수도 없었고, 종6품의 말단을 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런 신분적 제약의 불합리성을 사회적 차원에서 찾아보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져본 일도 없었고, 아직 사회가 그만큼 성숙해 있지도 못했다. 반대로 그는 사대부적 윤리와 기강을 여느 사대부보다도 철저히 지킴으로써 자신의 신분적 열등을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사대부 그 누구보다도 더 사대부적 학식과 교양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그 설움의 피해를 보상받으며 살아간다. 때문에 그는 사대부적 자세라는 규범을 원리 원칙대로 지키며 완고한 성격을 고수하면서, 양반의 신분이면서도 그 체통과 위신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백안시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은사의 풍모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출이라는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한 역작용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