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일정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7년조,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열전 계백편에서 발췌
1) 관직 달솔(2등관) 계백장군은 5천의 병력으로 황산벌에서 방어할 것을 의자왕으로
부터 명령을 받음
2) 이미 신라군과 당군은 탄현과 백강을 지난 상태
3) 계백은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라는 절망감에 빠짐
4) 그리고 집으로 달려가서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하면서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임.
5) 계백은 미리 중요한 지형을 차지하고,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 채 전투테세를 완비함.
6)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들이 세갈래(3道)로 진군하여 황산벌에 도착함
7) 계백 전투직전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
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라고 군사들을 격려
8) 신라군의 4번공격을 잘 방어하여 신라군 퇴각으로 승리함
9) 신라 김흠순 장군 아들 반굴이 단기로 돌격하여 이를 전사시킴
10) 16세 화랑인 관창이 다시 돌격해와 이를 생포, 투구를 벗기고 확인
11)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탄식하면서 관창을 되돌려 보냄.
12) 관창 재차 돌격해 옴으로써 사로잡아 목을 배어 돌려보냄
13) 이에 흥분한 신라군 총돌격
14) 병력부족으로 패배, 계백 전사,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됨.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 본기와 열전내용을 간추려 시차별 전투일정을 요약한 것입니다.
여기서 계백장군의 행동이 과연 후대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장수인가? 심히 의심이
됩니다.
유학자 권근이 “계백(階伯)이 명(命)을 받들고 장수가 되어 군사를 이끌고 장차
출정(出征)할 즈음에 먼저 그의 처자(妻子)를 죽였으니 그 무도(無道)함이 심하다.
라고 꼬집었듯이 장수가 전투도 해 보지도 않고 미리 패배할 것을 겁을 내어 자신의
처자식을 죽인 행위는 계백의 장수된 자질을 심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후 전투 직전에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
하였으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든지 적은 군사로써 승리한 사례를 알고 있음에도
미리 겁을 먹은 행위는 그 용렬함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처자식은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이끄는 부하들의
가족은 적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해도 괜찮다는 뜻인가?
스스로 패배를 인정, 승리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 되었으면 스스로 자결하여 자신의 군사
들이 투항이나 아니면 계속 전투를 할 것인지? 스스로 병사 자신들의 목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아량조차 베풀지 못함으로써 이것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행동으로 대부분 휘하 군사
들이 몰살하였으니 장수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참담하게도 수많은 생명을 잃게 만드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미리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여 세곳에 진영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미 병법에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적진을 앞에 두고 내부 단결에 문제가 생겨 좌평 충상과 상영등이 항복하는 사례
가 발생된 것은 5,000의 결사대 전멸이라는 말은 후대가 지어낸 조작이라고 보여집니다.
사료 어느곳에도 전멸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병법에 익숙한 자가 적의 분노를 자아낼 만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보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일순간에 패배하였으니 과연 장수의 자질이 있는지?도 심히 의심됩니다.
이는 관창의 목을 베어 되돌려 보낼 것이 아니라 사로 잡아 백제군의 갑옷을 입히고 군문
앞에 묶어서 기다렸다면 신라군이 저토록 광분 했을까요?
적이 모공을 쓰면 같이 모공으로 대처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지략과 대처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순진한 것인지?
그리고 장수의 의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니 상승장군으로써의 자질 부족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해 놓고서는
전투직전에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라고
하여 네차례의 전투를 잘 방어했다가 관창의 용감함을 보고는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전쟁을 지휘
하는 총사의 의지가 이토록 오락가락 흔들려서야 부하들의 사기를 꺽는 것 이외 다른 무었
이 있겠는가?
만일에 계백장군이 진실로 영웅호걸이었다면 고구려 영류태왕이 의자왕 보다도 정사를
훨씬 덜 어지럽게 햇음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 장군은 과감한 결단으로 혁명을 일으켜
백제보다도 10배에 가까운 당의 대군이 침략 했음에 1,2차 고당전쟁에서 당의 야욕을 꺽은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충과 흥수 같은 충신들을 귀양보내고 간신들에게 놀아나는
의자왕을 혁명으로써 제거하지 못한 계백의 무능력은 이와 같이 증명? 이 됩니다.
----- 나름대로 정리한 계백장군 비틀기의 모델입니다------------------
만고의 충신이자 명장으로써 추앙을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우리들의 조상들을
후손들의 말장난으로 이처럼 비틀고 꼬아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일조를 한다면
과연 역사의 왜곡되고 부풀려진 업적의 거품을 제거하는 참신한 비판이 되겠는지요?
비록 계백장군뿐만 아니라 을지문덕 장군 역시 사료가 턱없이 부족한 마당에
얼마든지 이러한 말장난으로 폄허 시키기는 별로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그 비판 내용이 궤변일지라도……
역사지식이 부족한 어린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한 이러한 궤변들이
우리 역사학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첫댓글 저 논리에 따라 을지문덕 장군 비틀기를 해보렵니다. 1. 여세를 몰아 수나라를 정벌하지 않았으므로 후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당나라가 일어나는 배경을 마련했으니 역적이다. 2. 주화파를 주장하는 고건무를 비롯한 대신들을 일찍이 숙청하지 않아 후에 혼란을 야기시켰다. 뭐... 더 있을까요? ^^;; 아무튼 말이면 다 되는 부류들 정말 비호감입니다.
인물 개개인에 대한 평전이나 평가가 한국학계에서는 부족한 편이죠. 관련 사료가 적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이런 식의 다소 기막힌(?) 발상이 등장하면 혹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물며 자료도 적은 상태에서 추론에 의존한 이런 분석이라면 더욱더 문제가 많을 것 같네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상황에서 정황근거를 갖고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원...거시기하네요...
가장 존경하는 계백 장군을 누가 이딴식으로 표현합니까? 정말 싫네요. 전쟁 전에 처자식을 죽인 것은 투항 없이 전쟁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임을 누구라도 알텐데. 그리고 승전국이 신라인 관계로 얼마나 폄하되어 전해졌겠습니까?
계백장군은 사료가 적은 만큼이나 폄허된 사례 또한 거의 없습니다...주로 김유신 장군, 무열왕 김춘추, 연개소문 장군등이 극단적인 평가대상이었지요!.. 다만 조선시대 유학자인 권근이 처자식을 죽이고 전쟁터로 나선 계백장군의 행위를 비난했을 뿐 그래도 마지막까지 순절한 부분은 명장 답다고 논평을 하였기에 전체적으로는 폄허된 것이 아니지요..몇줄 사료를 도용하여 고의적인 폄허목적으로 비틀면 반론하기가 난해한 그럴듯해 보이는 궤변으로 실상은 순엉터리이지요...이런짓은 무학대사님 말씀대로 부처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눈에는 돼지 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말씀이 바로 그해답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백제군 병력이 진짜 5000일까 싶습니다. 좌평이라면.. 백제 최고등급이잖습니까? 그런데 장군과 좌평이 가는데 고작 5000명이라고 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항상 생각하지만.. 황산벌 전투에서의 백제군의 규모가 지나치게 적다는 느낌이 항상 의문이라서 말입니다. 아무리 중앙군에 병력이 없어서로니 동원병력이 예상되는것이 3~5만명수준이잖습니까? 그렇다면 중앙군을 3만명으로 두어도 절반씩으로만 나눠도 1만 5천 최저 계백군이 이끌수 있는 병력은 1만명이 될수 있는데도 5천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좀..중앙군이 규모가 5만명이라면.. 거의 못해도 1만 많게잡으면 2만명이 동원될수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당군이 13만 대군이긴 합니다. 그지역 지역군까지 합친다면 중앙군+지방군까지 총 3만명은 동원할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최소한 5만 대군이 가는데 좌평까지 합쳐서 1만명이 안간게 이상하다 봅니다. 백제군의 중앙군 규모를 3~6만명급 수준으로 잡아도 말이죠.
충상과 상영이 좌평입니다. 그런데 백제본기에서는 의자왕이 달솔 계백에게 병력 5,000명으로 황산벌 방어 명령을 내립니다...그런데 3군영으로 나누었다니 좌평 충상, 좌평 상영, 달솔 계백 이런 식으로 나누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중군, 좌,우군으로...그런데 계백 진영은 순절하고 나머지 진영 수장들은 항복을 하였는데..이것이 미스터리입니다...보통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가 포로가 되면 병졸들은 살려준다 치더라도 수장들은 살려두는 법이 없는데..좌평과 충상은 얼마안되어 신라에서 관직을 받은 것으로 보아 4차례 전투중에 이미 2군데 진영에서 투항의 의사를 밝혀 내통한 것으로 추론 됩니다...
따라서 계백이 이끄는 진영에 집중적으로 공격을 함으로써 결국 턱없이 부족한 계백의 진영이 속절없이 무너지지 않았나 추론 됩니다...사료대로라면 계백이 직접 왕으로 부터 명을 받았다면 중군의 총사로써 2,000~3,000명, 비록 직급은 높다고 하나 총사 임명을 받지 못한것으로 사료되는 좌평 충상과 상영이 1,000~1,500명씩으로 지원부대 형식의 좌, 우군을 맡았다고 보여집니다. 의직 장군은 당군을 방어하기 위해 약 2만정도의 군사를 이끌고 기벌포쪽을 맡은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말씀 감사합니다. 소호님.
그가 죽고 나서 계백 가족들이 자결한 것을 당대 기록의 오기나 시차로 인해 후세에 오인하여 계백이 가족을 죽이고 전쟁에 나갔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 님의 말이 맞는것 같네요..그 생각은 못했는데
만일 이도형님 말씀대로 가족들이 스스로 자결하였다면 굳이 사료의 열전에 실릴내용이 못되지요..가족을 먼저 베고 전장에 임하는 계백장군의 의기와 충정을 높이 평가하였기에 그런 내용이 실린 것이지요..본문은 그런 내용을 역으로 교모하게 비틀어버린 내용이므로 현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계백장군은 과연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전장에 나섰을까요?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신라군을 막아내겠다는 처절한 투혼을 갖고 임했을까요? 처자식을 죽이고 전장에 나선 행위는 안정복의 말처럼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극약처방이었을까요?
설사 5천군이 아닌 그 이상의 군대였다고 하더라도 가족을 죽일정도로 극적인 상황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을 격퇴한다 할지라도 결국엔 백제가 당해낼 수 없다는, 즉 이미 백제의 국력이 많이 기울어졌다는것 즉 매우 불리한 상황을 암시하는것입니다. 또한 계백의 부대는 분명 나당연합군과 비교하여 매우 불리했던것은 분명했던것으로 보여지며 이런 불리한 상황에 맞서 5만대군을 4차례나 격파한점은 그가 분명 비난을 받을만큼 무지막지한 인물은 아닌것으로 보여지는것입니다 .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것 만큼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은 장군으로써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뿐더러, 백제의 존망이 황산벌에서 결정되는판에 자신을 비관하여 자결하거나 항복하였다면 결국 자신의 나약한 판단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는 비난을 한몸에 받았을 것이므로, 이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불리한 상황에서 끝까지 적에게 대항한 계백의 충성심을 높게 사야할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한 달램의 수단으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사기를 돋군 것 뿐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백성을 희생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개념이었는데 위 글은 인권존중사상이 깔려있는 듯 합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가족들을 죽이면서까지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려고 했던 계백이 관창을 보면서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봐야 됩니다. 계백이 정말 바보고 생각없는 지휘관이라도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사기올리려고 했는데 출전하고서 부하들 사기 다떨어지라고 저런말을 진짜 했을까요? 그가 진짜 바보였던것일까요?.... 전 아무리 봐도 역사를 편찬한 주체가 신라이기 때문에 저런 말을 억지로 넣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앞뒤 문맥이 너무나 어색하지 않나요?
오히려 신라의 김유신이 "백제와 대적할 수 없겠구나. 고작 5천으로도 이정도이니 몇만이면 어떻겠는가?" 라고 해야 하는게 문맥상 더 맞을듯... 사실 관창을 한 번 살려보낸 것도 김유신이 노리는 것을 계백이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랑자살돌격이야 김유신이 제일 잘써먹는 전술인데 계백이 그 효과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계백이 저런말을 부하들 앞에서 하는건 김유신이 노리는 효과 +@를 해주는 결과죠. 계백이 초짜장수고 바보장수고 등신장수였다면 가능하겠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정도 바보장수가 4번 이겼을리는 없고,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5만으로 5천한테 4번 진 신라 입장에서 황산벌 전투를 그대로
역사책에 남기면 사실 엄청난 챙피가 아닙니까? 특히 패배한 기록엔 인색한게 역사인데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비록 4번 졌지만 화랑관창이라는 영웅 때문에 결국 승리 할 수 있었다는.. 다소 신화적인 요소를 끼어넣어서 5천한테 개쪽 당한걸 약간이라도 희석시키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실제로 사람들이 황산벌 전투를 이야기하면서 "5만으로 5천도 못이겨? 김유신 등신 아니야? 신라군은 죄다 오합지졸인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 보단 "계백 대단하네. 어떻게 5천으로 5만을 상대했지? 역시 계백장군이야!" 라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요. 언제나 승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승자를 합리화 시켜주는게 역사라는 걸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유인궤님 사료를 개인 감정적보다 객관적으로 해석 하시는게 옳을듯 합니다. 황산벌 전투는 불과 하루 이틀만에 끝난 전투입니다. 님 처럼 사료를 감정에 집착해서 해석하시면 위의 본문처럼 궤변과 저질이 됩니다..그리고 님의 주장 처럼 챙피한 것이라면 승자 입장에서 뭐하러 수치스럽게 전투에서 4번이나 패했다고 전합니까? 그냥 "계백의 5천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사비성으로 진군하였다"라고 기록하지요...
사료적으로 신라의 5만 대군은 정예병(精兵)입니다. 4번의 전투는 계백의 방어막을 뚫고 사비성으로 진군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일단 奇攻法으로 돌파를 시도하면서 백제군의 대응방법을 탐색한 후에 正攻法으로 돌파한 전투이기에 초반 4번의 패배는 공격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지 무슨 5천대 5만 대군이 맞붙어서 4번이나 패했다고 생각합니까?..그런식으로 패했다면 아무리 관창이 아니라 대중상이 그런식으로 죽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루 이틀만에 돌파가 되는지요?.무슨 대조영 드라마 각본도 아닌데....쩝!
저보고 개인감정적이다 주관적이다 하시는데 저도 일부분 인정합니다. 그런데 소호금천씨님도 그리 객관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님께서도 항상 신라의 입장에서 사료를 바라봅니다. 그건 객관적인건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공법으로 전초전 및 탐색전해서 4번 진건 뭐 진거 아닙니까? -_-;; 그리고 탐색전과 전초전만 4번 할 정도로 신라 입장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약속날짜 못지켜 소정방한테 대판깨지는 김유신인데... 전초전만 4번해서 지고 마지막 정공법 해서 이겼다고 하는건 약간 무리가 있듯이 보이네요.
황산벌전투에 대해서는 평지전투다, 산성전투다, 신라군5만이 다 정예는 아니다, 지금 학계에서도 이견이 많은 주제인데 소호금천씨님께서는 4번의 전투는 기공법으러 전초전 및 탐색전 양상 그리고 마지막 승리는 정공법으로 승리, 이게 마치 사실인것처럼 쓰시는데 앞에 "제 의견으로는" 이라는 말을 붙여주셨으면 합니다. 사료상에 절대 그렇게 안나와 있고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근데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료를 잘 안살핀 분이나 황산벌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이 있으면 그게 "사실" 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소호금천씨님께 한마디만 묻겠습니다. 실제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신라와는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런 정도이니, 황차 장정들은 어떻겠는가?" 란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안했을것 같습니까?
삭제된 댓글 입니다.
소정방이 사비성 함락 이 후 뭐 땜시 신라를 공격 하려합니까? -_-;; 나중에 고구려 정벌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데;; 백제 정벌 목적 자체가 고구려를 후방에서 공격 할 수 있는 안정된 기지 확보이유였습니다. 소정방이 신라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라군의 피해를 적다고 하시면 너무 근거가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유신이 진짜로 당군을 공격하려 했을까요? 김유신 열전에 실린 그게 정말 사실인지는 생각하는 사람 맘이겠죠 뭐...
김유신 열전 다시 읽어봤습니다. 당이 신라 멸하려 계획 했고 신라가 먼저 선수쳐 당을 공격하려 계획 했다는 그 이야기 말이죠? 근데 전 그게 사실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중국측 사서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군대가 파견 된것은 당나라 자신들의 이익 때문도 있지만 신라측에 파병 요청에 의한 파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연히 당은 신라의 상국이었고 국력면에서는 상대도 안됐습니다. 약속날짜 안지킨것도 신라 잘못이고 전시 상황이면 당연히 군법으로 다스려도 전혀 문제될것이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연합군 내에서 신라와 당은 절대 동등한 위치가 아닙니다. 신라왕 김춘추가 일개 총관 취급을 받는데
말이죠. 그리고 신라본기나 김유신 열전보면 소정방이 맨날 김유신한테 발리는데 소정방은 당나라 내에서도 명장 이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고 경험만은 노련한 장수입니다. 근데 이사람이 김유신한테 맨날 겁먹고 무서워하고 그럽니다. 김유신과 소정방의 관계나 신라가 당을 공격하려 했다는 그런 기사들은 왜곡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라가 당군의 파병을 얻기 위해 할짓 못할짓 다했는데 당군을 공격하려 했다고요? 그것도 백제가 갓 멸망 된 시점이고 아직 잔여세력들이 엄청나가 많이 남아있는 그런 상황에서요?
자포자기라...... 전장에 나가는 장수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나갔다. 무전신현님 말대로 하면 계백은 욕먹어도 싼놈이군요. 나라의 운명을 건 싸움에 자포자기 심정으로 나갔으니... 죽어라 싸운 건 뭐 될대로 되라 이 심정으로 한건지.... 자포자기로 처자식 다죽이고 싸움터에 나간 계백, 죽어라 싸우는 부하들 앞에서 신라 소년이 이정도이니 우리 신라 이길 수 없다라고 말한 계백. 욕 먹어도 할 말 없겠네요 뭐...ㅋ
이런 식의 '비틀기'라면 이미 조선초 권근씨가 했던 건데요. ㅎㅎ 600년이나 지난 유행이라 별로 재미가 없네요.^^ 글쓰신 의도가 뭔지는 알겠습니다만 단단히 헛짚으셨습니다. 사료를 삐딱하게 분석하는것과 이런 식의 '비틀기'는 근본적으로 다른 겁니다. 사료 삐딱하게 보기는 이 카페 주인장 선생님의 전문사항이기도 하지요. 사료는 삐딱하게 보지 않으면 그 사료를 쓴 사람의 의도에 말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님! 글쓴 의도를 잘아신다면서 단단히 헛짚으셨다는데..헛짚지 않은 님의 고견을 들어야 하겠군요!..그리고 사료를 삐딱하게 보지 않으면 그 사료를 쓴 사람의 의도에 말려들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럼 어디 계백 열전의 사료를 가지고 님께서 삐딱하게 보는 주장을 해 보시지요..어디 한번 제대로 다리를 짚는지? 구경한번 해봅시다..답글 치고는.....ㅉ.ㅉ
또한 여기 주인장이 무슨 사료를 삐딱하게 보는 전문가입니까? 그의 저서인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을 수차례 정독을 해보았지만 어느 한 구석에서도 그렇게 삐딱하게 사료를 해석해 놓은 것을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삼국사기 연개소문 열전이나 고구려 본기 기록이 중국 사서에 너무 의존되어 있는 그 부분에서 당시 전쟁사에서 납득이 될 수 있는 사항으로 수정 재해석해 놓은 것일뿐!.. 다른 멋대로 삐딱하게 분석해 놓은 것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슨 말을 하시는지? 도대체 님의 주장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김유신 관련 기록에 대한 '수정 재해석'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상당 부분은 소설에 가까운 구라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기록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은 '2차 주필산전투'와 '요택 추격전'을 재구성하면서 '연개소문의 전략'이라는 역사상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측의 일방적인 기록에 대한 '삐딱한' 접근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수정 재해석'이 바로 삐딱하게 보는 겁니다. '삐딱하게 본다'는 말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매사를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과 거짓'으로만 양단하려는 소아병적 흑백논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은 삐딱하게 볼 만한 '꺼리'도 없습니다. 그냥 신라인들이 깊은 인상을 받은 적장에 대해 짤막하게 적어놓은 기념적 글귀에 불과하며,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데 가치가 있는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계백이 처자를 죽이면서 '살아 적의 노예가 되느니 죽어서 쾌하라'라고 하는 비장미 넘치는 캐간지 대사와, 병사들 앞에서 '오월의 고사'를 들먹이며 일장 연설을 하는 부분에 등에서는 그 최초 기록자의 기가 막힌 상상력에 감탄을 할 뿐입니다. 거의 나관중 뺨치는 소설가였던것 같아요. ㅎㅎ 화랑세기 위서론자들의 논리를 빌려와 적용하면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은 그야말로 완벽한 '위서'입니다.
님에게 보이는 것은 사료나 또는 남의 저서나 글에대해 자신의 생각과 틀리면 완벽한 위서이고 구라와 삐딱한 것으로 밖에 볼줄 모르니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습니까?? 님의 댓글에는 비록 시각이 틀리나 한번쯤 공유하거나 이해해 보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군요...앞으로는 본인의 글에 조잡스럽고 저질스런 단어들이 들어있는 답글들은 정중히 거절합니다,,,"부처눈에는 부처님이 보이고 돼지눈에는 돼지만 보일뿐!...무학대사曰"
김유신 관련 기록에 대한 '수정 재해석'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견해에서 본다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의 상당 부분은 소설에 가까운 구라입니다..무슨 이런 억지가 있는가?? 김유신 관련 기록을 수정. 재해석을 똑바로 하면 누가 뭐래요?..완전히 재해석한다는 짓이 폄허와 비난으로 일삼으며 시궁창에다 몰아 넣을려는 짓을 허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어디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이 그런 식으로 재해석했나요???...무슨 소설이 사료의 원본을 일일이 인용 주해까지 달면서 구성되는지요??..수 많은 역사소설을 읽어 보았지만 그렇게 사료를 필요 문장에 직접 인용하거나 주해를 달아 놓은 소설을 본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