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초상화
최양업 신부님은 장마때에는 사목 순회를 할수 없으므로 7월 한달 동안에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베티에 머물러 계셨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베티 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의 성무활동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이곳에서 쓰신 여덟번째 편지를 번역 원문 그대로 옮겼습니다.
출처- 너는 주초놓고 나는 세우고 - (정진석 옮김, 현 추기경님)
최양업 신부님의 친필 서한
수신처 르그레주아 신부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선교회 극동 대표부의 책임자 신부였다
조선신학생 세명이 그곳에 도착 하였을때 대표 부에 임시로 신학교를 설치하여 실제로
그들의 교장이요, 사감이요, 교수로써 모든것을 돌보아 주셨던 스승신부였다
베티성지 ...........최양업 신부님 동상
여덟번째 편지
- 절골에서 1851년 10월 15일 (베티 교우촌)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조선에서 신부님께 두번째 편지를 씁니다.1850년 5월 10일 신부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금년 2월에 받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제 편지를 신부님께서 받으시기를 간절히
희망했었는데 이제 신부님께서 그것을 받으셨다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연락원들이 매달 신부님들에 대한 소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날이 언제쯤이나 올까요?
모든 분들이 지금 편안히 지내고 계시는 지요?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이
무사하시고 만사에 편안히 지내고 게시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가련한 우리조선 포교지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의 인자로 그럭저럭
잘 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전국적인 박해에 들볶이지는 아니하고 그런대로 안정을 유지하고 편안히 지내고있습니다
금년에 별로 칭찬 받을만한 내용이 없는 짧은 편지를 보내드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짓이 되겠습니다만은 한마디도 없이 잠자코 있지는 못하겠고
신부님께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년에는 지난해보다 일찍 10월부터 공소순회를 시작하여 저희 관할 구역 전체의
순회를 8개월 만에 끝마쳤습니다.
짧은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전교길에서 겪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서 열심히 일으키고, 성사를 받고 감격해 하는 모양은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우리교우들은 이런 천상 보화를 얻기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아끼지 않습니다.
베티성지........... 최양업 신부 성체거양중
공소 순회를 하려고 길을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마터면 공소순회 여행을 중단할뻔
하였습니다. 어떤 여관집 주인 내외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그여인이 밉살스러운
자기남편을 골탕먹이려는 심보로 그가 여관에 12명의 서양 사람들을 유숙시켰다고
떠벌렸습니다. 즉시 여인과 남편이 체포되어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서양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비밀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일어날것이라는 공포가 전국적으로 퍼졌고 그래서 저는
공소 순회를 일단 중단하고 조금 안전한 고장으로 피신할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후 그허황된 소문은 가라앉았고 지나친 공포도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극히 놓으신 하느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히 공소순회를
마쳤습니다. 작년에는 사탄이 너무나 큰 소란을 일으켜서 저는 부득이
교우촌을 두군데나 순회하지 못하였는데, 금년에는 사탄이 저에게 마주쳐 오지
않았습니다.
다블뤼 신부님은 언제나 신병을 앓아서 여러 교우촌을 순회할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약한 어깨에 힘에 겨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공소를 급하게 순회하느라고 통상적 성무를 너무 서둘러 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강론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저의 관할 신자들은 깎아지는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수 없는 깊은 골짜기 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제가 담당하는 그러한 공소, 즉 교우촌이 자그마치 127개나 되고
그러한 촌락에서 세레명을 가진 이들을 다 합하면 5936명이나 됩니다
한공소에 고해자가 40명 내지 50명이 있어도 그들 모든 신자에게
하루 안에 고해성사를 다 집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반면에 고해자가 두명이나 세명밖에 없는 공소에서도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묵어야합니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한밤중에 공소순회의 모든것을 끝마치고 새볔 동이 트기전에 그곳을
떠나야합니다.
초평공소 .............성모님 상
교우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느곳에 단지 두집이 있었는데 , 한집은 가족중에
일부만 신부였고 한집은 가족전부가 외교인이었습니다.
신자는 겨우 세명인데 남자가 한명이고 여자가 두명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집을떠나 멀리 가서 성사를 받고 올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양반 신분이어서 집 밖에 나가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에 이 두 여교우들은
성사를 받은 지가 여러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가야만 했으나
그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한가지 계책을 궁리해냈습니다.
외교인 집의 남편에게 그럴듯하게 어떤 사업을 제안하고서 얼마동안
외출시켰습니다. 그 외교인이 집에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어 제가 그 여인들에게 갔습니다. 제가 도착하자 신자들이 손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외교인 집의 여자들에게
하루동안만 집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 비어있는 그 외교인 집을 임시 공소집으로 차리고
밤중에 외교인들이 잠든 동안에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할일을 꾸미는 때에는 악의에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하여
비신자들에게 여러가지 거짓말로 폐를 끼칩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즉시 천주교를 비난하거나 그 자리에서 모두가 순교로 끌려 가고야 맙니다
신부님이 이 이야기를 들으실 때 우리의 성사 집행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짐작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채지 못하고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배교하거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전혀 내색을 아니하고 삽니다.
신자들은 자기들이 신자인 것을 남이 눈치채지 못하게 살고있으므로
비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비신자에게 직접 교리를 설교함으로서 전교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더구나 사제들로 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는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은 가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 신자들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비신자들은 천주교의 진리에 관하여 떠노는 소문을 듣거나 또는
신자가 당한 어떤 환난등의 사건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감동을 받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교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여 신앙을
가지게되고 신자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초평공소........... 초평저수지를 지나며.......... 순례 이동중
조씨라는 매우 지체높은 양반이 입교한 사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으나, 그때에는
천주교를 한낱 지극히 사악하고 반란을 선동하는 종교로만 알고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을에서 멀지 않은 (충청북도 보은 지방의) 멍에목이라는
한 산골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있었습니다
그양반이 신자들이 사는 근처 골짜기에 살고 싶어서 집을 지으려고
그곳에 왔습니다. 그때마침 우연히 신자마을이 몽땅 화재로
타버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조씨가 보기에 신자들은 조금도 근심하거나 마음이 동요하는
빛이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서도 신자들이 평온한 낯으로 태연하게 있는 것을 본
조씨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신자들이왜 그러한지
그 이유가 몹시 궁금하여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물었더니 신자들은 (양반이 질문한 까닭에 평민이
대답하지 않을수가 없어서) 여러가지 말로 대답은 하였으나
신앙에 대한것 만큼은 털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답이
신통치 않았습니다.
베티성지............ 최양업신부님 성당겸 신학교
조씨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이 사람들이 모슨 도를
믿는구나 하고 눈치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화재를 당하고도
그렇게 태연할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때서야 신자들은 어쩔수 없이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 과연 우리는 천주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나
모든 일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좋으신 하느님께 항상 의탁하며 그분의
측량할수 없는 안배를 칭송할 뿐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조씨가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만족하여 곧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하고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우며 천주교회 법규를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넘어야 할 태산이 너무나 험준했고, 깨뜨려야 할 장벽이
너무나 두터웠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위패를 많이 모시고 있었고
친척들과 친지들도 많았습니다. 그는 이 모든것에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최후의 악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선 온집은 식구들을 이런 핑계 저런 구실을 대어 여러 곳에 분산시키고 나서
자기는 산골에 지은 그 집에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몇몇 신자들을 데리고 자기가 전에 살던 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외교인들이 보기에 우연히 화재가 발생한 것을 믿게끔 꾸미고
그 집과 우상들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씨는 마치 실성한 것처럼 꾸미고 사회생활을 떠나
친척들과 친구들과의 교재를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 나는 이제부터 이 세상에서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게 되었으니
여러분도 모두 나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해 주십시오"
하고 선언하였습니다.
베티성지.......... 무명 순교자 묘..
제가 그 교우촌에 가서 조씨에게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오로 사도가 처음에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으나, 개종하여
주님의 사도가 되고 특히 이방인들을 가르친 뛰어난 스승이되셨습니다
당신도 온 집안과 친지들 중에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십시오"
하고 책임지웠습니다.
조씨에게 동생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로 부터 추앙을 받는 학자요
높은 벼슬 자리에 올라갈 희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씨는 동생을 신앙의 첫번째 동참자로 만들고 싶어서 그를 신자들에게
인도하여 천주교 교리를 배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동생은 자기의 세속적 지식만을 과신하고, 진정한 지혜를 듣거나
이해 하려하지 않고 또 비록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갖 오류와
기만의 궤변으로 천주교 교리를 뒤엎으려고 기를 썼고, 오로지
자기 형 바오로를 배교시킬 일에만 골몰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법도에 따라 동생들은 맏형을 아버지 대신으로 공경하여야 합니다
바오로는 형이기 때문에 동생은 형에게 난폭한 행동은 전혀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더 음흉하고 더 강력한 압력을 썼습니다
동생은 자리에 누운 후
" 나는 형님이 천주교를 배교하겠다는 맹세를 하기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습니다"
하고 굶기시작하였습니다. 단식한지 8일이 지나자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바오로가 다급히 달려가서 동생에게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 왜 이다지도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 내가 멍에목에 가지 않기를
네가 원하는 것이냐? 그럼 내가 그리로 안갈터이니 안심하여라
어서 일어나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목숨을 회복하여라"
고 타일렀습니다.
사악한 동생은 되살아 나기는 했으나 자기의 먼저번 계략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고서 자기 형을 입교시킨 신자들한테
분풀이를 하였습니다. 그러고서 그는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악으로
엄포를 놓았습니다.
" 나는 포졸들을 불러 너희를 몽땅 잡아 결박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고발하겠다."
고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애써 시작하였던 농사일을 팽개쳐 버리고 공소집을 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시 참혹한
궁핍속에 빠졌습니다.
백곡공소 입구를 지키고 있는 박 바르바라, 윤바르바라 순교자의 묘
이처럼 변변치 않은 사소한 원인이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는 날마다 큰 걱정거리가 생겨납니다. 비신자들은 신자들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을 더 잘 소상히 듣고 알며 신자들을 더욱
쉽게 의심합니다. 그들은 모함과 악의에 찬 중상의 소문만 들을 뿐이고
진실은 한마디도 듣지 못합니다.
비신자들 사이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은 신자들의 체포,투옥, 형벌,사형등
처참한 이야기 뿐입니다. 또는(부유하였던) 신자들의 집안이
몰락하여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산다는것, 사람이 살수없는 산속이나
산골짜기에 숨어서 비참하고 치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모든 공적 사회 생활에서 격리되고 백성으로서의 제사와 가정 생활을
포기하고 산다는것,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로 부터 버림을 받고 잊혀져
산다는것 등등 입니다.
비신자들 사이의 이러한 험담은 날이 갈수록 더 커져서 증오와 멸시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어떤 신자든지 불행히 다른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지면 주변 사람들 전체가 온갖 방법으로 신자들을 괴롭히려
달려듭니다 . 신자들을 불경스럽고 불충한 자들로 여겨 그들한테서
전염되지 않으려고 기를 씁니다.
" 신자들은 부모와 친척도 몰라본다. 제사와 위패도 배척한다. 금수만도 못하다
삼강오륜도 벗어난 놈들이다"
이렇게 신자들을 욕하고 증오합니다.
이런 공적 박해와 위험 외에도 흉년이 닥치면 신자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집니다. 우리 형제들의 처참한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1839년 박해 때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기아와 추위때문에
죽었는지 이루 헤아릴수가 없습니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그 재난의 여파와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당시 그들이 겪은 이야기를 들을때 저는 동정심의 고통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어집니다. 조선에서는 온간 법률이나 관슴이나
풍속이 한결같이 오로지 천주교 계명의 준수를 저지하기위하여
제정된 것 처럼 보입니다.
초평공소............ 초평저수지 ..............순례 이동중........
중략....
금년에는 하느님의 허락하심으로 다행히 연례 공소순회를 일찍 마쳐서
잠시동안 휴가를 얻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렵니다.
순교자들의 행적을 여러 증인들의 말을 토대로 하여 정확한
진실을 기록 하려 합니다.
저의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제공한 증언들도 포함하여,
순교자들과 함께 살았던 증인들, 또한 순교자들과 함께
감옥에서나 형벌을 당할때, 함께했던 동료들로부터 들은 증언들
그리고 순교자들이 순교하기 전에 살았던 생활에 관한 증언들을
가능한대로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고 충실하게 서술하도록
제 능력껏 힘쓸 작정입니다.
이 삼천리 강토를 아름답게 꾸민 수많은 순교의 꽃들 중에서
어느꽃다발을먼저 신부님께 드릴까요?
자식된 도리로 보나 신부님의 관심사로 보나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당연할 줄로 압니다.
저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이고 저의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 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고결하고 부유한 신자 부모한테서 출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아버지 (최인주) 는 첫번째 박해(1791년) 때에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 되었습니다.
그는 순박했고 신심이 뛰어났습니다. 가난한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미리 알아서 구제의 손길을 펼치는 자세도 유별났습니다.
자기 집 종들에게 자기들을 영감님이나 마나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세 아들에게 3가지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로 무엇을 줄때 거저 주어라.
보증을 서거나 혼인 중매를 절대로 서지 마라.
이웃들과는 항상 화목하게 지내라.
는 3가지였습니다.
1801년 박해와 주 야고보 신부님의 순교후 최 프란치스코 집안은
재물과 비신자 친척들과 상종함으로 점차 천주교 계율 준수의
열심이 식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과
순박을 애호하면서도 강력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연풍성지 중앙제대 십자가..........
프란치스코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기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진 것 때문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부모와 형제들을 권고하여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고향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졸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아무 소용이 없자
한층 더 용감한 행동을 시도하여 혼자 집을 떠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집에는 모친과 세 형제와 네 누이들과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긴 편지를 써서 집안의 한 아이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후 엿새 되는 날에 펴 보라고 하더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신앙을 열심히 실천하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몰래 빠져나왔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집에서 안 보이자 가족들이 수선을 떨며 찾는 바람에
아이가 프란치스코의 편지를 내 보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들이 그 편지를 읽자
온집안 식구가 대성통곡하였고 대책을 세울수가 없어서
어찌할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형제들이 프란치스코를 찾아 나서서 그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족전체가
만장일치고 합의하여 고향과 친척과 재산등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가족 전부가 왕도(서울) 로 이사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집에 신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3년이 지나자 이웃 사람들한테 신자집이라는 것이
탄로되어 관가에 붙잡혀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지중에 세력있는 고관들이 프라치스코 집안을 외교인들의
술책으로부터 구출하려고 세도와 압력으로 그들의 주동자를
중하게 처벌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안을 들은 프란치스코는 악을 악으로 갚거나
박해자들을 폭력으로 격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합치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친지의 도움을 사양하고
산속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이 산골에서 저 산골로 이사다니면서
그들의 손으로 가시덤불과 돌자갈밭을 개간하여
연명해나갔습니다.
그들은 과거에는 부자였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진하여
이러한 궁핍과 재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더욱 철저하게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고 만족해 하며 살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 서원으로 나날이 더욱 열심하여졌습니다.
비록 한문 교육을 별로 받은 바가 없었으나,
자주 깊이 묵상하고 신심독서를 함으로써 열렬한 애덕과
하느님 신비에대한 해박한 지식을 얻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열변과 달변으로 천주교 진리를 강론하거나
강의를 하였기 때문에 박학한 신자들이나
유식한 사람들 까지도 그의 강론을 들으러 왔고,
매우 까다롭게 꼬치꼬치 따지는 비신자들 까지도
그의 변론에 설복되어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밭에서 일할때나 집에서 일할때나, 길에서 누구와 담화를 할때나
항상 천주교 교리와 심산 사정에 대한 이야기만 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가면서
힘차게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가꾸는 일이나 , 세속적인 평판이나
세속적인 관심이나 현세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하였습니다.
해미성지....... 진둠벙... 순교자의 기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을 보러 갈때에는 물건 중에서 제일 나쁜것이나
흠이있는 것을 골라서 사옵니다.
왜 그런짓을 하느냐고 나무라는 사람들에게는
" 제일 나쁜 물건을 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겠소?
그런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장사군이
어떻게 살아갈수 있겠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그의 애덕은
자라나서 재난이 닥쳤을 때는 영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어느해 추수할 무렵 굉장한 폭우가 쏟아져서 곡식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가 그러한 재난을 당하여 눈물로 탄식하며
실망하고 있을 때에 프란치스코는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얼굴을 보여주었고,
오히려 평소보다 명랑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기는 교우들에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같이 설명했습니다
" 무엇때문에 이렇게 절망에 빠져있고,
이처럼 비탄에 잠겨 있습니까?
모든일이 하느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일이 다 하느님의 안배대로 되는 것임을 왜 믿지 아니합니까?
우리의 탓과 게으름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면 모르거니와
하느님의 섭리고 추수를 망친것인데 슬퍼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흉년이 되면 프란치스코는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장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과일을 추수할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습니다.
매일 규칙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아니하였고,
아침 저녁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 공동으로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안양의 수리산) 교우촌의 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가 유기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인근지방에 살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피신하였습니다.
신자들은 박해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지쳐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매장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서울에서 50리 떨어진 자기마을에서
신자들을 권고하여 의연금을 거두고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많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찾아 매장하고,
또한 불쌍한 교우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였습니다
남한산성 동문............ 수구문....이곳으로 순교자의 시신을 버렸다.
집으로 돌아온 프란치스코는 자기 마을 신자들에게도 순교를
준비시킬때가되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신자들을 모아놓고 열성적인 말로 격려하면서
용감히 순교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거룩한 의무에 전심하고 있던 어느날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포조들이 문밖에 와서 주인을 찾으므로
프란치스코가 그들 앞으로 마중나가며
"어디서 오셨습니까?"
하고물었습니다. 포졸들이
"서울에서 왔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그러자 프란치스코는
" 어째서 이리 늦게오셨습니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초조하게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잠시좀 쉬시고
새벽에 식사를 해서 기운도 돋구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질서 정연하게 떠나도록 합시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반갑게 맞이하는말을 들은 포졸들은
감탄하여
" 이사람과 가족들이야 말로 진짜 천주학쟁이다.
이런사람들이 달아날 염려는 조금도 없다.
우리는 안심하고 잠을 좀 잘 수 있겠다."
고 말하고는 교우들을 묶지 않고 풀어 놓은 채
모두가 한적한 곳에 가서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동안에 신자들은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고
프란치스코는 모든 신자들을 권명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렸습니다.
포졸들이 잠에서 깨어나서 식사를 마치자
프란치스코는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어 포졸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다 입혀주었습니다.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40명이 넘는 남녀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음 오랏줄에 묶이지 않은채 길을 떠났습니다
앞에는 남자들이 큰 아이들을 데리고 걷고
그 뒤에는 여자들이 젖먹이를 등에 업고 걸었습니다
해미성지.......... 십자가를 가슴에 묻은 순교자...
때는 마침 7월이라 찜통같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작열하는 뙤약볕 아래 걸어가자니 이내 모두가 지쳐버려
일행은 노인이거나 젊은이 이거나 터벅터벅 느릿느릿
걸을수 밖에 없었고, 지쳐빠진 어린이들은 울음보를 터뜨렸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앞장섰고 그 다음에 일행이 뒤따랐으며
포졸들은 맨 뒤에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길을 가는 동안 내내 구경꾼들이 이 기이한 무리의 행진을 보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혹은 불쌍하다고 혀를 차며 한숨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열 맨 앞에 서서 가던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는
이런 요란스러운 모든 소음을 덮어버리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용솟음 치는 용맹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오 산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생각합시다"
하고 격려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줄곧 일행을 돌아보면서
더 열렬한 목소리로 격려 하기를 계속 하는것이었습니다
이런 열렬한 애덕에서 나온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교우들은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가까이에 이르자 포졸들이 신자들을 5명씩
오랏줄로 묶었습니다,
5명씩 한무리가 되어 서울 한복판 큰길을 지나
감옥으로 향해 갔습니다.
이렇게 오랏줄에 묶인 여인들은 어린애들을 업거나 팔에 안고
갓난아기들에게는 젖꼭지를 물린채 끌려갔습니다.
이처럼 처절한 관경을 보는 구경꾼들은 증거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던졌습니다
외교인들 중에는 너무나 끔찍하게 여겨
" 이 몹쓸 모진년들아, 이 인정사정없는 독한 년들아, 그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죽음을
자청하러 간단 말이냐?"
하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해미성지....... 끌려가는 순교자..........
프란치스코는 아내 마리아와 다섯 아들과함께 갔는데,
큰 아들인 야고보가 열 네살이요, 막내가 겨우 두살이었습니다
마침내 옥문이 활짝 열려 저의 가족을 받아들임으로서
이런 악담을 벗어나게하였습니다.
그러나 옥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도둑들과, 무서운 쇠사슬 이었습니다. 감옥으로 인도된 그들은
도둑들의 감방으로 투옥되었습니다.
이튿날 부터 프란치스코는 맨 먼저 법정으로 끌려나가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판관들이 그에게 배교하라고 다그치자 그는 심문하는 자에게
"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저는 결단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렇게 대답하자 팔주리와 다리주리의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팔과 다리뼈가 어그러졌고 곤장을 110대나 맞아 온몸의
살이 한치도 없이 성한 데가 없이 뭉그러지고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은채 감방으로 운반되어 왔습니다
이처럼 어른에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40여명이
모두 고문을 받았는데, 모두가 끝까지 항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편태와 곤장의 고문을 받아
정신과 의식을 잃은 상태의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안믿겠다는 말 한 마디만 하라고 옆에 서있던 고문자들이
을러댔습니다. 그러면 초죽음이되어 자기들이 무슨대답을 하는지
알수가 없게된 그들은 관원들이 불러준
배교의 말을 받아 그대로 중얼거린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즉시 자유로운 몸으로 석방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제 동생 야고보도 곤장 3대를 맞을때 까지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고문에 못이겨 정신을 완전히 잃고 아무 의식이 없을때
배교의 말이 나왔습니다. 고문자 들은 야고보가 의식이
깨어나도록 약을 주고 풀어주었습니다.
어농성지........... 고문당하는 순교자.....
첫번째 심문이 다 끝나자 관원들과 포졸들은 관청에 모여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러고서 프란치스코를 감옥에서 불러내어
천주교 책 한권을 내밀면서
" 여기 네가 믿는 천주교 책이 한권 있는데, 네가 읽는 것을
우리가 듣고 싶어서 이렇게 모였으니 한번 읽어봐라"
고 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여 마치 잘 차린
흘륭한 잔친에 초청 받은것 처럼 기뻐하며 웃으면서
책을 펴들고 목청을 가다듬어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가 하도 열심으로 하도 감격적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가 읽는 것을 듣던 외교인들이 모두 벌떡 일어나
그 처참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속에서 조차 그렇게도
자유롭고 깨끗한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천주교를 자발적으로
극구 찬미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읽기를 끝마친 다음에 포졸들이
마리아에게 책을 주면서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글을 읽을줄 모른다는 핑계로 읽기를 거절하자
관원들은
" 아니 저렇게 훌륭한 회장 부인이 글을 읽을줄 모른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
고 빈정거렸습니다. 프란치스코는 40일 이상 참혹하고
혹독한 고문을 헤아릴 수 없이 여러차례 당하였으나
끝까지 요지부동한 항구심으로 견디어 냈습니다.
그래서 고문자들은 그에게 바윗덩어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박해 중에 이러한 별명이 붙여진 찬란히 빛나는 순교자가
두분 있었습니다. 즉
프란치스코와 조신철 카를로 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함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기가 죽을 시간을 미리 예언한 대로 1839년 9월 12일에
감옥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하여 서른 여덟에 나이로 운명하였습니다
수리산 성지..........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 묘......
(저의 어머니) 이 마리아는 조선의 유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명 배출 되었습니다
그중에 한분이 단원 이존창 이었습니다. 그는 첫 선교사 신부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기전에 시골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제의 직분을 집행했던 분입니다.
1784년에 일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나온 천주교 서적들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터득한 이벽으로부터 부탁을 받은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그곳 주교님을 찾아갔습니다.
북경 주교님은 이승훈을 반갑게 맞이하고 그에게 주요한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천주교 서적도 주면서 조선에 들어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북경에서 조국에 돌아온 이승훈은 열성은 많았으나,
교리에 대하여는 무지한 탓으로 조선에서 천주교회를 잘못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여러 사람을 사제로 만들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이존창 이었습니다.
이존창은 후에 이와같은 일이 잘못임을 깨닫고 뉘우치면서
영화로이 순교하였습니다.
이존창의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즉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두 명의 사제들이 탄생된 것입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조모이고
(최양업 신부님의 모친)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여사울 성지......... 단원 이존창 생가터
이 마리아는 4남 6녀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 여덟살때에 프란치스코와 결혼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 간에 불화없이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가운데 험한 산 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하였는데도 이 모든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갈때나 먼길을 걸을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 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오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주었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 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남편을 여의고 살아남는것 외에는
아무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포졸들이 집을 덮쳤을 때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남은 물건들 중에 무엇이든지 좀 좋은 것들을 모아서
쌌습니다. 그리고 포졸들에게 기쁜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여
먹였습니다, 포도청으로 출발하던날 일행은
벌써 떠났는데, 마리아는 어린것들을 데리고
먼 길을 걸어가야 하므로 그 준비를 위해 집 안에서
물건을 조금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포졸 하나가 마리아에게 접근하여 점잖지 못하게 치근거리며
"다른 이들은 다 떠났는데, 너는 왜 꾸물거리고 서있느냐?
가기 싫은 것이 아니냐?"
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관원이 여자에게 짓궂게 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겨 엄중한 소리로
"당신은 누굽니까? 당신은 정말로 망측한 사람이군요.
내가 가거나 말거나 당신에게 무슨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내가 가고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안가는 것이 내 자유인데
도데체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남편과 내 자식들이 갔는데, 내가 왜 안간단 말입니까?
당신은 상관말고 당신 갈길이나 가십시오."
하고 그의 야비한 행동을 나무랐습니다
포졸이 떠나가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일행을 뒤쫓아 갔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마리아는 남편과 큰 자식들과 격리되어
여인들 감방에 갓난 아들과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다음날 다른 이들과 더불어 법정에 섰습니다
문초와 고문을 받았습니다.
주리를 틀려서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지고
팔과 다리가 부러져 유혈이 낭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용감하게 증언하였습니다.
연풍성지 형구돌............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저 작은 구멍으로 목이 매어져 죽임을 당했을까?
이런 육체적 고문 외에도 가장 큰 마음의 고통은
갓난 아기에 대한모성애 였습니다.
갓난 아기가 젖을 달라고 하는데 젖은 안나오고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데 먹일 것이 없어서
엄마의 눈앞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란치스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줄곧
꿎꿎이 버티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가 극도의 고문을 받은 끝에 마침내 죽고
또 어린것이 더러운 감방에 축 늘어져 누운것을 보며
자식에 대한 그릇된 자비심으로 마리아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곤장에도 칼에도 용맹하였으나 자식에 대한 애정에는
약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살덩어리아와 핏덩어리들이
더럽게 흩어져 있는 감옥에서 마리아는
마음과는 달리 거짓말로 배교한다고 한마디 함으로서
현세적, 영신적 구원을 함께 도모해야겠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중의 나약함을 다시 구제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마리아가 배교하여 풀려나 집에 가있는 동안에
맏아들 최 토마스가 모방신부님의 주선으로 마카오에 보내져
라틴어 공부를 하고있다는 사실을 탄로난것입니다
이때문에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 즉 형조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 갇혀있던 용감한 신자들이 마리아에게 배교를 취소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말에 감동되어 마리아는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불충실한 배교를 용감히 취소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내고 또 모정에서 오는
모든 나약한 생각을 끝까지 물리쳤습니다
해미성지........ 자리갯돌... 여러명의 병사들이 순교자를 들어올려 돌에 매쳐서 처형했다
이 재판소에서 마리아는 자기 아기가 기아와 비참으로 말미암아
눈앞에서 죽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두 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마리아는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한 달 이상 감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갇혀있는 그리스도의 포로들을 위하여 시중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죽는 날까지 지켜보면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상급 재판소인 형조에서 관례대로 세 차례의 고문을 당한후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사형당할 날이 가까워 오자 평온한 모습으로 야고보를 불러
마지막 훈계를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들 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도록 타일렀습니다.
베티성지........... 제대앞 성모님상.....
사형집행인들이 십자가 형틀을 만들고 감옥 전체가
형구돌로 가득찼습니다
마리아는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야고보에게
어머니를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같이 감옥에 갇혀있는
증거자들에게 작별인사를 드리고 떠나라고 명했습니다
마리아는 야고보에게 최후의 형벌을 행하는 형장에
따라오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나이어린 야고보는 보호자도 없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고아로 남겨질 어린 세동생들을 거느리고
살아야될 처지에 있었는데 마리아가 형장에서 그 어린 야고보의
모습을 보고 서 모정에 끌려 약해지고 마음이 흔들려
최후의전투를 맞이하기위한 준비가 덜 된 모습을
남에게 보여줄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영생의 작별인사를 하고서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야고보는 최후의 형벌을 받고 순교하는 현장에 있어야하는
감옥의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조심스럽게
지켜줄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다른 6명의 증거자들과 함께
순교로 개선할 십자가 형틀에 올라갔고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로 형장에 이끌려 나갔습니다
그녀는 휘광이의 칼을 받고 1840년 1월 31일에
서른 아홉의 나이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습니다
이제 편지를 마치면서 경애하올 모든 신부님들에게 지극히 겸손되고
정에 넘치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가련한
신자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중에 기억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
지극히 미약한 조선 대목구의 교황 파견선교사 최 토마스가 올립니다
첫댓글 너무나 좋은 자료 잘 가져가서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