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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역사기행 [중구/운남] 놋그릇에 담긴 바른정치의 표상, 양주성금속비(梁柱星 金屬碑)
길손旅客 추천 0 조회 94 11.11.28 10:1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국난의시대, 모범의 관료를 기리다.

양주성 금속비(梁柱星 金屬碑)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동 444-3

 

국난의 시대,

한 마을에서는 의식있는 관료의

바른 정치로 감동한

주민들이 스스로 사용하던 놋그릇을

모아 세운 금속비가 자리한다.

작금의 시대에 필요한 인물,

금속비속, 담긴 뜻을 새기어 본다.

 

 

영종철점제사 양주성 금속비(永宗僉節制使 梁柱星 金屬碑, 인천시기념물 제13호)

 

 

고종12년(1875년), 일본군함 운양호(雲陽號)사건이 발발하며 영종진에 대한 포격으로 일대는 쑥대밭이 되는 일이 발생되었다.

이에 조선은 같은해 인천부를 방어영으로 승격시키고,

강화 유수부에 속하던 영종을 인천 방어영에 예속시켜 10월 2일 홍문관 제학이던 양주성을 영종 첨절제사로 임명하였는데, 양주성은 재임기간 중 새로운 방어영을 완성시켰으며,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시켜 군비확충 강화에 주력하는등의 영종 방어에 기여한 공적이 큰 인물이다. 또한, 재임 중 주민들을 위한 배려등의 위민에 대한 뜻을 기려 주민들은 정성을 다하여 세운 공적비로 돈이 아닌 놋그릇등을 모아 세운 금속비다.

높이 91cm, 폭 31cm, 두께 3cm의 규모로 원래의 자리는 운남동 지석묘에 자리하였으나 인천공항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어 관리하고 있다. 금속비 주위로 13여개의 공덕비들을 모아 놓았는데 양주성금속비와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의 비석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해군기지사령관들의 비석이다. 

 

운양호사건(雲陽號事件, 1875년9월20일),

고종12년(1875년), 조선식민지화의 발판이 된 사건으로 조선이 처음 맺은 불평등 조약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 개항의 시발점이 되었음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에도 불평등한 조약을 맺게 되는 단초가 되는 사건이다.

일본은 당시 사가의 난과 대만정벌에 종국하고 있을 무렵이다. 1875년에 이르러 조선의 문호개방이 늦어지자, 해군 차관의 명령에 따라 이노우에요시카 함장의 운양호와 두척의 군함을 몰고 조선의 연해에 정박하며 한척은 부산항에 정박하며 함포시위를 벌였으며 운양호는 영흥만까지 북항하여 해로를 측량한다는 구실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에 정박하여 있다가 먹을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연안을 정탐하면서 강화 초지진의 포대까지 접근하기에 이르렀고, 조선군은 접근금지의 경고에도 불구 더 가까이 접근을 하자 초지진의 포대에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운양호에서도 이를 빌미로 근대화 된 무기로 포격을 퍼부으며 초지진을 파괴하였으며,

이들은 근대화 무기를 앞세워 영종진에 이르러서 다시한번 맹포격을 가하고 특전대를 상륙시켜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16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대로 35문, 화승총 130여정등의 무기등을 약탈당했던 사건으로 일본군은 단 2명만의 경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자신들이 서구열강에 문호를 개방당했던 사건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먼저 공격을 가한 조선으로 책임을 돌리면서 무력을 배경으로 한 개항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더욱 개방의 압력을 더하여 군함 5척이 강화도에 정박하며 일본은 전권대사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며, 포격에 대한 힐문과 개항요구를 강요하기에 이르렀고, 조선은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로조약 체결교섭에 응하였으며, 이듬해 1876년 음력 2월 3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기에 이른다.

일제식민의 시대의 시발을 알린 사건, 운양호사건.

강화도 조약의 체결을 만들어 낸 불평등 조약으로, 이를 계기로 조선은 또 다른 서구 열강에도 문호를 열게 되었으며 많은 불평등 조약을 감수해야 하는 국난에 들게 되었다.

 

 

 

 

영종대교를 건너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첫 나들목을 벗어나 만나는 운남동의 마을에 자리한 금속비다.

아파트 숲과 교회의 틈바구니에 웅크리듯 모여 있는 작은 공간에 13개의 공덕비와 함께 놓여져 있다.  

운양호 사건의 뒷 수습책으로 양주성은 영종철점제사를 지내며 밖으로는 국방의 중요성을 알리면서 안으로는 위민정책을 폄으로 없던 살림에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주민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던 녹그릇을 모아 세운 금속비다. 국난의 시대, 일제치하의 전초가 된 사건으로 나라가 엉망에 이르니 민초들의 삶이 어찌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으로도 되지 않는다.

 

작은 야화에 불과 할 수도 있는 양주성 금속비,

그 작은 금속비 속에 숨은 당시의 정치관료의 행적은 지금의 정치인들에게 꼭 필요한 마음과 행동이지 않을까?

이익에만 집착하는 정치인들, 스스로들만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작금의 상황은 당시 운양호 사건이 터질때와 진배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더 큰 세계 시장과의 싸움이다. 이러한 때, 금속비속에 담긴 고귀한 뜻을 이어 받았으면 하는 바램은 그저 바람결의 낙엽일뿐일게다. 

그러하다 하여도 금속비의 뜻은 그재로 이어져야 한다.

한번은 보고, 만나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려야 한다. 금속비 가는 길에 작은 이정표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그 일중 하나이며, 잘 관리되어 있는듯 하지만 주위의 정비 또한  세심함이 필요하다 싶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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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28 11:25

    첫댓글 새로운곳을 잘 보고 갑니다 아주 중요한곳이군요 우리나라 최근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곳 감사합니다

  • 작성자 11.12.05 08:33

    잘 관리를 해보겠다고 한곳에 모아 놓았는데..
    참 허전하더군요.
    그래도 그리 관리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릴 지경입니다.^^

  • 11.11.28 19:51

    길손님
    첨보는 동네라
    눈이 휘둥그레...
    이런곳도 있다는 사실을
    잘 보고갑니다.

  • 작성자 11.12.05 08:34

    아파트들과 교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습니다.
    마치 셋방살이 하듯 말이지요.
    옛 숨결은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은 아쉬움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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