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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간 19번이나 뺏고 뱃긴 661고지 전투
십이당산(삼봉산~마륜산 270고지),의상대 뒷산인 661고지(미군은 전투산이라 부름),여항산,서북산,야반산,옥녀봉 등 함안지방 남서쪽 산악지대에서 주로 인민군과 미군간에 교전이 있었다. 방어 보루여서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전략요충지였다. 수천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다 |
661고지 바로옆 격전지다 보니 미군이 동료 전사자분들을 땅에 묻고 후퇴한것 같음
소나무 뿌리가 다 보일많큼 유해 발굴함
낙엽 쌓인 급경사 내리막길과 잡목사이로 다음 등산로를 잠시 이탈
알바를 하고 다시 원위치로 와서 길찾아 갑니다.
미군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에 유해발굴단(JPAC)을 창설해 ‘조국은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라는 구호 아래 지구촌 어디라도 유해를 찾아 나서고 있다. 미국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국민이면 끝까지 국가 차원에서 책임진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미국은 지난 2003년 10월 JPAC(합동전쟁포로 및 실종자확인사령부) 를 창설했지만, 이미 1973년부터 유해 발굴 작업을 해왔다. 그러면서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Until they are home)’를 모토로 내세웠다. 참고: 한국은 전사자 유해 발굴 10% 미안수준
“미군은 6.25전쟁시 한강으로 추락해 숨진 유해를 찾기 위해 한강 밑바닥까지 샅샅이 뒤져 감동을 준적이 있으며, 특히
마중오신 동국님을 만나 장고개를 지납니다.
이곳은 얼마전에 유해 발굴을 한곳으로
진동- 여항산-전투산-삼봉산 라인 모두가 피의교전 장소 입니다.
하나 하나 헤집고 다니다 보니 등산화와 등산바지는 떨어지고
게티고개 도착
기차 철길을 건너고
호국길에 필요한게 있나 없나 지원오신 헤이 보스톤 대장님
그리고 지원차량 인천의 동국님
두분 정말 소중한 분들이며 이번 산행길에 많은 도움 감사 드립니다.
산마실님 지원 후원금 감사드리구요
다시 가시밭으로 들어와 낙엽 쌓인 삼봉산을 오릅니다.
삼봉산 태극기는 바람에 날리고
삼봉산 정상석
다시 급경사 내리막길을 미끄지듯 내려와서
남해고속도로 봉산고개를 지납니다.
천제산
봉산고개
남해고속도로
다시 잡목속으로
온통 청미래 가시덩쿨 오르막입니다.
이후 정상석도 없고 특별한것 담을 만한것도 없고 ...
천제산 내려와 법보사 경내로 들어와 법수면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동국님이 해주신 저녁식사로 배를 채우고 다시 갑니다.
처녀 뱃사공 노래말이 고갯마루
임도와 차로를 지나 화개 지맥길로 갑니다.
우리가 걷는 모든길은 6.25당시 군군과 북한군이 싸운 교전지역이라 특별한 산길은 없고
생각대로 그리고 느낀대로 걷고 상상만 할뿐
사람 다니는 등로가 얼마나 반가운지
낙동강이 지척인 용화산 정상석
화개지맥길을 따르다가
우리는 도흥마을 낙동강 뚝방길을 잠시 걷다가 극락사 뒷산으로 오릅니다.
이길은 북한군이 점령했던 산길입니다.
강건너는 창녕군 남지
남지는 박진지구 돌출부 전투로 유명한 곳입니다.
새벽길에 토갱이 눈처럼 빨갛게 충열되고
졸린눈으로 잠시 동국님 차안에서 김치찌개로 허기를 면하고 다시 낙동강 남지 대교를 건너 갑니다.
강바람은 옷깃을 더욱 싸메게 합니다.
구 남지대교
전쟁 당시 북한군이 민간인들 옷으로 갈아입고 남지 대교를 건너오자 미군이 포탄을 투하 다리가 끊어집니다.
많은 민간인들이....
남지읍을 지나 이제 화왕지맥길로 들어 갑니다.
도초산 정상에서
평화로운 남지읍 야경
화왕지맥길 이곳도 등로가 별로죠
들째날 아침해는 뜨고
준희선배님 글
삼돌이님도 보이고
성사고개로 가는길
치열했던 교전 잔소
어봉리능선
이이목 나루터로 들어온 북한군들이 이곳에서 미군들과 치열한 교전을 했습니다.
박진지구 전적비에서본 가야할 마루금 |
박진지구 전적비 |
박진전쟁 기념관에서 |
박진 전쟁 기념관에서 |
박진교에서본 북한군 진지 지역 갓등산 방향 |
좌측은 북한군 진지 지역 우측으로는 미군 진지 지역 |
남지 박진전투 전적비에서
전투 상황도
남지지구 1차전투:50년 8월 6일
인민군은 새벽 0시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지점에 한명의 척후병도 내보내지 않아서 일어난 전투
어봉리 능선
멀리 화왕산이 보이고
6.25전쟁 61주년 당시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다부동전투 마산 전투산 전투(661고지).영천전투.안강-기계전투.
박진나루터 전투다.
박진지구전투는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의 치열한 전투
이곳이 무너지면 밀양과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보루인셈이다.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물따라 사단병력이 떠내려간곳 이며 박진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과 함께 합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진지구 교전장소 구진산
성사고개
빛바랜 유해 발굴지의 무명천
유해 발굴 한곳은 이렇게 무명천으로 ...
어봉리 능선의 전사자 유해 발굴지역
지금까지 호국산행을 하면서 수천기 이상의 유해 발굴 장소를 지났습니다.
전사자 모든 유해가 발굴되어 국립공원에 안장되었으면 하고 간절한 바램을 해봅니다.
가람고개(두곡마을)
두곡지구 전투(클로버 전투지역)8월 7일-14일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클로버 고지 전투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이름)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잎고지 후면에서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북괴군
제4사단의 총퇴각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다음날 해병대와 제34연대는 강변에서 합류했으나 강 차안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적 제4사단의 도강 인원은 3,000명 미만이었고 강 차안에서 미군들은 1,200여구의 적 시체를 매장했다.
34문의 포와 수 백정의 자동화기 그리고 수천의 소총을 유기 함으로써 서울 사단의 호칭을 받았던 적 제4사단은
사실상 이 날짜로 소멸된 것이었다.
가람고개
고개넘어 두곡마을
이제 화왕지맥길을 버리고 큰갓길산 분기봉에서
우린 유어면으로 가는 마루금으로 갈아 탑니다.
전사자 유해 발굴지역
진실재
어봉리능선- 유어면가지 마루금 모두가 치열한 교전 장소
왼쪽은 시남리방향
오른쪽은 유어면 가는길
우측편마을은 유어면
그리고 낙동강
한발 한발 소중한 발걸음을 위해서
좀 다른 유해 발굴지역중 하나
동료 전우가 전사하자 작은돌을 모아 무덤을 만든후 다시 흙으로 묻었는지
작은돌들이 기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어면 가는 낙동강
우리는 우측이 산길로
좌측은 이이목 나루가 있는곳 멀리 북한군 진진가 있던 진등산 방향
이이목 나루터 소개
1950년 8월, 고곡리 남곡국민학교에는 미 제3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8월 6일 새벽 1시, 불시에 이들 미군은 인민군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4.2인치 박격포대가 습격을 받아 순식간에
분산되어 버렸다.
"박격포대와 대대본부가 병력 미상의 기습을 받고 분산되었다."
습격 사실을 제3대대장 진즈 페레즈 중령이 미 34연대장 찰즈 E. 뷰참포 대령에게 새벽 2시에 보고했는데 그때까지도
인민군이 낙동강을 건넜다는 도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장은 습격 사실을 보고 받고는 일선 중대
에 연락했으나 별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고서 적당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을 보면 이이목나루의 도하는 칠흑 같
은 한밤중에 일어났으므로 어느 중대에서도 적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 도하를 상당한 시간동안 몰랐던 것 같다.
L중대로부터 "중대 좌익에 적의 공격이 있어 일부가 밀렸다." 하는 보고가 들어오자, 연대장은 박진나루로 인민군이 도
하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월하리 박진나루는 자동차를 건네줄 수 있는 큰 나루로 인민군이 가장 먼저 도하하리라
예상하고서 미군이 굳게 지키고 있었던 곳이었다. 연대장은 아침에 제1대대로 하여금 반격하게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인민군은 8월 6일 새벽 0시에 시남리 이이목나루{烏項津}로 도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인민군 주력부대가
도하하리라 예상했던 유어면 쪽은 경계가 철저하여 유어면 부곡리 마수원 여눕나루로 도하를 시작하자마자
백사장의 지뢰밭에 걸려 100여명이 죽었으며 곧 미군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조명탄이 터지고 미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격으로 도하는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이목의 도하는 미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순조롭게 진행 성공하였던 것이다.
강을 건넌 방법은 근처에 배가 있었을 리 만무했으므로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아마 미군은 이이목나루나 시남고개에
감시병을 배치하지 않았던 것 같으며, 지형지물을 이용도 못했고, 현지 지형에 관한 지식도 없었던 것 같다.
인민군은 강을 건넌 후 옷을 입고 소대 단위로 정적에 잠긴 수개리 쪽으로 남하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영산이었다.
공용 화기는 없이 개인 화기만 가지고 있어 미군이 지키고 있는 고지를 공격하지 않고 피하면서 3km나 골짜기를
내려와 남곡국민학교에 있던 박격포대를 공격했던 것이다
처음 도하지점이 시남리 이이목이란 전사의 기록과는 달리 미처 피란을 못나가고 있었던 주민들의 증언을 들으면
이이목 뿐만 아니라 월하리 마을앞 모래사장으로도 많은 병력이 도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낙서면 전화리에서 월하리 조금 북쪽 모래사장 사이에는 그 당시 가물어서 강물이 줄어 그 강폭이 좁아져 있었으며
강물도 그리 깊지 않고 얕았다고 한다.
당시의 상황도를 보면 도하 지점이 두 곳으로 표시되어 있어 주민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 주민들이 목격하였다는 인민군의 도하는 어쩌면 새벽 0시에 감행된 최초의 도하라기보다 그 후인 새벽의 도하를
본 것이 아닌가 한다.
북쪽에서 흘러오던 낙동강이 이이목에서 서쪽으로 굽어 흐르며 우리 읍을 감싸 돌아 흐르는 지형을 당시
작전 군인들은 [낙동강 돌출지역]이라 하였고 전투 참가 장병들은 [낙동강 시절]이라 불렀다고 한다.
붉고 노란 신호탄이 심야에 공중으로 오르고 인민군 4사단 16연대 병력의 도하가 시작되고서 우리 고장 지역 일대의
전투는 40여 일 간(1950. 8. 6∼9. 15) 지속되어 마을이 불타고 가산은 풍비 박산 되면서 수많은 피란민과 함께 인명
피해가 엄청났던 포격과 폭격이 시작되었다
박진 전쟁 기념관에서
진창마을과 화왕산
드디어 유어면 도착
이곳에서 식당에 들어 점심식사를 합니다.
이제 낙동강 뚝방길입니다.
뚝방길 끝부분 저앞에 보이는 산까지
한시간 거리
지나온 산길과 뚝방길
잠시 앉아서 휴식을..
전화도 하고 문자도 보내고
유어교에서 다시 가시밭길로 들어 갑니다.
이곳역시 교전장소 입니다. 전사자 유해 발굴 많이한곳중 하나
가다보니 임도가 나오고
잠시 임도로
임도가 끝나고 다시 가시밭으로
가야할 마루금
우린 다시 이방면으로 갑니다.
화왕산
동산리 고갯마루
이방면에 도착해서 어느식당에 들러 저녁식사를 합니다.
추운데 돌아 다니다가 포근한 식당에 들어오니 온몸은 피로로 누적되어
일어서기가 싫어 집니다.
겨우 등산화를 신고
부엉이 소리 들리는 차도로 쉼없이 지나갑니다.
구지 초등학교앞에서 동국님이 끓여주신 떡라면을 먹고
왕령지맥길의 대니산으로 다시 이동
대니산 야경
겨우 대니산에 올라 다시 가시밭길로 내려 갑니다.
찬바람은 불고 ...
현풍에 도착 어느 김밥집에 들러 대구 훈아님과 같이 식사를 합니다.
배는 고픈데 맛이 없어 겨우 겨우...
다시 길을 나서니 지옥같은 밤이 우릴 기다리고
비슬산에서 현풍으로 이어지는 쌍산능선을 오릅니다.
참나무 낙엽길, 오르막 내리막 그리고 전날 내린눈
바람은 불고 영하 7도 라지만 체감온도는 더 춤게 느껴진다.
집으로 가고 싶지만 지나온길이 아까워 다시 올라갑니다.
오르고 올라 720봉 분기점에서 달성 터널로 가는 된비알 내리막 능선을 지나게 되는데
지난번에 붙여둔 시그널이 모구 훼손되어 난감하게 됩니다.
내리막 능선길에 여기 저기 흩어진 또다른능선들
그리고 눈이 쌓여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모르겠다.
절벽길같은 길을지나 겨우 마루금을 찾아 진행 합니다.
야간에 길찾기 ...
옥포면에 도착해서 동국님이 해주신 아침식사로 배고픔을 해결하고
마지막 왜관으로 향해서 낙동강 둑방길로
앞은 대구 화원유원지
강경보와 우리가 올라야할 모암산
화원 유원지 안의 전쟁 기념비
좌측은 달성 습지 우측은 성서공단
3일간 우릴 경호 해주시는 인천의 동국님.
마중 오셨습니다.
강창교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성서공단
대구시와 낙동강
지나온 뚝방길.
좌측은 앞산 -청룡산
인증사진
이제 강경보 둘레길로 갑니다.
하트섬
영벽정
강경보 둘레길
둘레길에 잘 정돈된 나무계단
멀리 강경보
이제 왜관이 지척입니다.
해넘이는 시작되고
발걸음은 가볍게
여유
일몰과 가야산
성주대교
성주대교 건너 화목정에서
동국님이 차려주신 마지막 식사를 하고 대구훈아님과 꺼미님과 같이 동행 합니다.
지나는길에 특별한 정상석이 없어 빠르게 진행 사진은 없지만
칠곡군계길로 금무산지나 왜관공단-파산 그리고 왜관 호국의 다리에서 새벽 0시 30분경
끝맺음을 할수 있었습니다.
육신사 뒷편 육신정에서
고생하신 산대장님과
왜관 호국의다리에서
대구 훈아님.인천이 동국님.저.산대장님. 꺼미님
혹한의 산길에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 동국님이 경호를 해주셨기에 쉽게 걸을수 있었습니다.
클럽 10주년 신년 특별산행 6,25전쟁 62주년 호국산행
두사람이 가기위한길이 아니였기에 많은 분들의 마음을 소중하게 가슴에 담아 진행한 호국산행길 그길은 수많은 전사자분들의 유해 발굴지역이며 아직도 전사자 분들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첫날 주야간 영하 7도 둘째날 주야간 영하 7도 마지막날 영하 3도 산길 80% 가시잡목길 정상석이 없고 야간 낙동강가 뚝방길 그리고 지방도 몇번 지나면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기까지... 같이 즐겁게 진행해주신 산너머 대장님 식사때마다 지원해주신 인천의 동국님 지도와 차량 지원해주신 악마님 바쁜일중에 잠시 나와주신 헤이보스톤 대장님 즉석 후원금 보내주신 산마실님 마지막날 같이 호흡을 맞춰주신 대구 훈아님.꺼미님 그외 주,야로 격려의 글을 보내주신 소중하신분들 님들이 계셨기에 거친산행 아무탈없이 잘 마무리 할수 있었습니다. 그간 답사는 모두 22회 지나는길에 마을 촌로분들께 그당시 이야기를 바탕으로 최대한 낙동강 전선 마산-왜관길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소중한 분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신년 호국산행 190km 관심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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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와~~정말 대단대단 하시네요 . 무슨 말이 필요하겟씁니까
대단하신 용기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며..함께 하실수 있었던 분들과 지원해 주신분들
문자로 용기주신분들까지~~다 같은 마음으로 하셨기에 가능하시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그 차가운 곳에 잠들어 있은 호국용사들께도 경의를 표하며.......
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넘 무섭습니다.. 넘 대단하셔서요..
잊혀진 전쟁의 아픔 ...
전사자 유해 발굴지역을 가 보시면 가슴속으로부터
뭉클한 무언가가 올라옴을 느낍니다.
올해 6.25전쟁 62주년에 맞춰 꼭 그러한곳에 가보시길 바래보며
나라사랑속에 숨져간 넋을 기억해주실...
글 감사합니다.
역사적인 길이군요. 긴긴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오래전 희미한 흔적이 이제는 유해 발굴지역이라는
가슴아픈 길로 우리가 찾아야 할길이라 생각합니다.
힘들때 한번쯤 이러한길로 걸어 보시면 기운이 날듯하네요
글 감사드립니다.
새해 호국산행이란 어렵고 힘든 의미있는 산행을 하셧네요
자꾸만 잊혀져 가는 전쟁의 아픔
배병만님의 글과 사진 다녀오신 힘든 여정으로 나라 사랑이란 어떤것인가 생각해봅니다
일찌기 존경하고 있었지만 정말 대단한 감동입니다
수고하신덕분에 많은 공부를 하게됨니다
감사합니다
뜻깊고 의미있는 산행입니다
이런 산행이야말로 아우님과 J3가 아니라면 감히 엄두도 못낼 산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산행기를 읽는동안 내내 숙연한 마음과 비통한 마음이 무겁게 가슴을 짖눌렀습니다
그 먼길 고생하였다고 표현하기 조차 부끄럽지만 아우님 같은 산꾼이 있어 다행이고 영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