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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40:1-8절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내용분해 : A.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애굽 왕에게 범죄함(1절)
B. 바로가 노하여 두 관원장을 요셉이 갇힌 시위 대장의 옥에 가둠(2-3절)
C. 시위 대장의 명으로 요셉이 두 관원장을 수종듬(4절)
D. 두 관원장이 서로 다른 꿈을 꿈(5-8절)
1. 두 관원장이 한 날에 서로 다른 꿈을 꾸고 해석자가 없어 근심함 (5-6절)
2. 요셉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꿈 이야기를 자신에게 고하게 함 (7-8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여전히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동일하신 우리 하나님께, 우리의 전심을 다하여, 감사와 찬양을 온전히 올려 드리도록 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창세기40:1-8절 말씀으로 요셉과 함께 투옥된 바로의 두 관원장의 꿈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 (Joseph, 1915-1805 B. C.) 이 이방 땅에서, 노예 출신의 죄수라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대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많은 인물들의 인생 역정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반전과 승리의 드라마 중의 하나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흑자는 이것을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가져온 부림절 (the Purim feast) 의 대반전과 승리,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인간 만인의 구원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Resurrection and Ascension) 을 통한 대반전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본 단락에서부터 시작되는 40, 41 장의 일곱 문단이 바로, 요셉이 일련의 꿈 사건을 계기로하여 이방인 노예 출신의 죄수 신분에서 일약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던 과정을 기록합니다. 보다 상술하면 먼저 40:1 -23절은 요셉이 함께 투옥된 바로 (Pharaoh) 의 고위 관료들을 수종들다가 각각 다른 꿈을 꾼,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의 꿈 모두를 하나님의 계시로 정확히 해석하고, 또 그것이 실현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요셉이 그 역시 이상한 꿈을 꾼 바로를 만날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41:1-45절은 애굽의 통치자인 바로가 직접 서로 연이은 7년간의 대풍년과 7년간의 큰 가뭄에 대한 두 가지 꿈을 거듭 꾸고 이것을 요셉이 그 역시 하나님에 의하여 해몽함으로써, 바로가 요셉을 일약 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발탁하게 된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41 :46-57절은 일단 전날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몽대로 먼저 7년간의 대풍년이 계속되었음과 아울러 하나님의 꿈을 통한 계시로 이를 미리 감지한 애굽은 장차 닥칠 7년간의 가뭄을 대비해 막대한 양의 곡식을 전국에 걸쳐 저장해 둔 일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7년 풍년 뒤에 7년 가뭄이 시작되자, 애굽 인근 지방의 사람들이 부득이 식량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물론 이것은 애굽과 인접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야곱 일가 사람들이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식량을 구입하러 올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를 통해 요셉과 형제들간의 형제 상봉과 요셉의 야곱 일가 전원에 대한 애굽 이주 초청 및 그에 따른 야곱 일가의 애굽 이주 등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과정 내지 배경을 자연스럽게 보여 주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같은 40, 41장 두장에 걸친 일곱 문단의 일련의 기사 전반의 의의는 하나님과 요셉의 두관점에서 동시에 이해할 때, 그 입체적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본문을 바라볼 때에 이미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구원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鐘理, Providence) 의 오묘함에 경탄하게 되어집니다. 무룻 꿈(夢. Dream) 이란, 인간의 의지로 좌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는 이같은 꿈이 종종 하나님의 계시 전달의 한 방편으로 사용된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에 있어서는 꿈은 계시 전달의 방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그의 생애의 중대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기록된 것처럼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와 그 고위 관료들의 일련의 꿈 사건 때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뿐만 아니라 아예 원천적으로 요셉이 애굽에 팔려 오게 된 것도, 그가 소년이었을 때 꾸었던 두 꿈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애굽에 팔려 갔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꿈 때문에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기도 하였던 셈입니다. 또한 요셉이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된 것은, 그 개인의 일신상의 신분 상승과 영화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훗날 요셉을 통하여, 장차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이 지상의 유일한 언약 가문이요, 택한 혈통의 무리였던, 야곱 일가 전원이 애굽으로 이주하는 계기로까지 발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넓게 바라볼 때에 요셉의 인생 역정 전부는, 그 옛날 하나님이 구약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최초의 직계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이스라엘 후손의 400년 애굽 생활 예언이 성취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요셉을 둘러싼 각종 꿈 사건들과 이를 계기로 발생한 요셉의 인생의 역경과 이의 극복을 통하여 장차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야곱 일가의 애굽 이주라는 당신의 시대적 섭리를 성취시키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요셉을 중심으로 발생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련의 특별한 꿈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하여, 야곱 일가의 애굽 이주를 이루신 것은, 이 모든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는 사실을 선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한 인간의 일생, 나아가 세계 모든 민족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궁극적 주체(主體)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이 매우 강렬하고도 친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예측하거나 관여할 수 없는 오묘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 나가심도 보여 준다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한 사건의 전모가 완전히 드러난 후에야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언제나 인생의 생각을 뛰어 넘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오묘함은 우리 인생들이, 겉으로 드러난 그 어떤 현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복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신 29 :29 ; 용 9:4; 23 :13-15 ; 마 8:27).
한편 본 사건을 요셉을 중심으로 살펴볼 때에는 고난에 처한 하나님의 종 (the Servant of God) 으로서의 요셉의 인내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종은 반드시 최후의 숭리를 얻을 수 있음이 주로 부각됩니다. 13년이란 고난의 세월은 누구에게라도 견뎌내기 어려운 벅찬 것이었습니다. 이는 짧은 한 세상을 살다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좌절하고 절망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다. 아니 적어도 아직 성장기에 있었던 한 청년에게 있어서는 그 신념과 의지가 흔들리고, 성정 (性情)이 비뚤어지는 것이 오히려 당연할 정도의 긴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요셉은 오히려 주위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가 여호와와 함께 하며 복을 받는 것이 분명할 정도로, 믿음 중에 거하며 이 세월을 인종(忍從)하였습니다. 이것은 물론 근본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먼저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요셉 또한 스스로 언제나 경건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믿음 안에 거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비결의 분석이야 어쨌든 요셉이 십삼 년이란 세월 동안 거듭 닥쳐온 부당한 시련들 속에서도 꿋꿋이 인내하며 고결한 신앙 인격을 쌓아가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고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세상은 그 공중 권세 잡은 사단 (the Satan)의 사주 아래, 하나같이 죄성에 오염되어 있습니다(엠2:2). 따라서 이런 세상에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물길을 거슬러 오르려 하는 어린 물고기에게 닥쳐오는 격랑(激浪)처럼,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고난에 처해 있을 수도, 또는 전날에 고난에 처했었으며 그리고 장차 고난에 처할 수도 있는 우리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본문의 요셉의 모습과 면밀히 비교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반면 고난이 끝내 고난으로만 끝난다면, 이것을 묵묵히 인종하는 것은 무의미하고도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당하는 고난은 공의 (Justice)와 능력 (Power) 과 사랑(Iρve) 의 하나님 안에서 필히 숭리 (Victory) 9} 영광(Glory) 으로 귀결되게 마련입니다. 여기 총리 대신의 자리에 오른 요셉의 모습은, 그 전형적 실례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열조들과 기독교 2000년 역사의 믿음의 선배들은 때로, 자신의 당대에는 시련과 슬픔뿐이며, 심지어는 자신은 순교하는 지경에 처하더라도, 이것이 훗날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가져옴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같은 자신의 고난이 훗날 필히 진리와 복음의 승리로 승화될 것을 믿고 오히려 고난 중에 더욱 순결해지고, 더욱 굳세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실천적 증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승리의 하나님이시며, 기독교(基督敎)는 승리의 종교인 것입니다. 승리의 감격과 가치는 생사를 건 전투에 임해 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의 감격과 기쁨은 숭리를 쟁취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가 사모하는 승리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주어질 승리의 영광과 전리품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쉬지말고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전진해야할 것입니다. 또한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 안에서 함께 고난 받으며, 함께 참으며, 또 함께 투쟁하며, 함께 승리할 성도만이 영적 전우(戰友)인 것입니다.
성도 모두에게 비록, 그 자신은 유약할지라도, 하나님과 그의 군대 안에서 이미 영원한 천국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사실만큼이나 우리의 영혼을 약동하게 하는 진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승리의 환호는 우리 성도의 것입니다. 영광의 문들아 머리를 들지어다(시 24:7- 9). 아멘, 아멘, 아멘!!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효셉을 통해 야곱 가족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보디발의 아내의 모합으로 인해 옥에 갇힌 요셉이 애굽 왕 바로를 섬기다가 잘못을 범하여 그가 갇힌 감옥에 같이 수감된 바로의 두 관원장과 만남으로써, 장차 바로와 대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인한 요셉의 투옥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결과였음을 잘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매순간마다 자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다각도로 인간사에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요셉이 옥에 있는 동안에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두 사람이 왕에게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같은 날 동시에 꿈을 꾸었는데 봉조(夢~~)가 달랐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된 사건들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모두 우연히 발생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벌어진 일들이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감옥에 갇힌 후에 때를 맞추어 바로의 두 관원장이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날 동시에 꿈을 꾸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이 그두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훗날 바로와 상면할 결정적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어찌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요셉과 관련하여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결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야곱의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는 방편으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백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모든 나라와 역사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음을 증거해 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상의 통치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나라와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판단과 계획대로 자신이 인생과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그들의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에는 그것들 역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되어질 뿐입니다. 역사를 이루시는 역사의 주관자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두려워하고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과 말단 공무원 중에 누구를 더 두려워하고 누구의 말을 더 따라야 하겠습니까? 최고 결정권을 지닌 대통령의 말을 따르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과 역사의 최고 결정권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은 세상의 권력자가 더 힘있고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같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르는 것보다 더 유익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가장 현명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 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 두란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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