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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희 폴라나흐트 팀은 드디어 폴라나흐트의 첫 번째 개발일지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처럼 단발적인 티저가 아닌 이 모드의 전체적인 로어를 간단히 정리하여 세계관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폴라나흐트: 혁명의 잔재들은 기본적으로 1848년의 독일 3월 혁명의 대성공과 그 뒤를 잇는 자유주의 사상의 황금기, 그리고 1차 대전을 거치며 스스로 무너져내리며 위기의 시대에 도달하게 된 1933년을 배경으로 하는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대체역사 모드입니다.
유럽
1848년 3월 죽은 줄로 알았던 프랑스의 자유정신이 다시금 온 유럽을 강타하였고 여러 지역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건 자유주의 정부가 일어섰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던 것은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운동과 합스부르크의 붕괴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독일인을 제외한 신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헝가리인들의 독립전쟁과 이탈리아에서의 봉기, 그리고 독일 민족주의의 물결까지 합쳐지면서 어이없게 무너져 내렸다.
이에 탄력을 받은 프랑크푸르트 의회와 자유주의자들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해 황위를 거부하고 이를 진압하려던 프로이센의 군대를 격퇴하였고, 새로운 오스트리아 대공과 함께 자유주의 입헌군주국 - 독일 연방을 건국하게 되었다.
어이없게 무너져 내린 합스부르크는 유일하게 그들을 폴란드 해방의 지도자로 여긴 폴란드인들의 보호 아래 남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입헌주의를 받아들이는 조건 하에 오스트리아를 보전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결국 독일에서의 주도적인 위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탈리아는 혁명의 물결 속에서 북 이탈리아를 차지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기원으로 하는 북이탈리아 왕국과 주세페 마치니의 로마 공화국은 프랑스군의 진압 시도를 격퇴하며 혁명을 보존하였고, 반도 내 최후의 반동세력이던 양시칠리아 왕국은 가리발디의 활약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누구도 주도할 국력을 가지지 못한 이탈리아는 대타협을 통해 이탈리아 연맹을 형성하였고, 불완전한 리소르지멘토로 남게 되었다.
이로서 데카브리스트의 난의 실패로 반동적인 정권을 유지한 러시아의 패권 아래 놓인 동유럽만을 제외하고 전 유럽은 자유, 평등, 우애의 기치 아래 재편 되면서 이 세계의 역사는 우리 세계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이후 1870년대에 이르러 사그라든 자유주의의 기치 대신 새로이 일어난 민족통합주의와 실지회복운동의 열풍을 등에 업고 출범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국가인민당 정부는 프랑스의 영향권인 룩셈부르크 공국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도발했으며 이 과정에서 발발한 독일 - 프랑스 전쟁은 대독일의 진정한 통일로 마무리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로 집중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오스만의 발칸반도를 분할하며 독일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후 벨 에포크라 불리우는 평화의 시대가 잠시 동안 유럽에 도래하는 듯 했으나 이는 루마니아의 극우 테러단체가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국가 해방을 주장하며 헝가리 공화국 성 이슈트반 성당에 가한 폭탄테러로 참혹하게 끝이 났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은 루마니아는 테러리스트의 신병과 수사권을 요구하는 헝가리의 최후통첩을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발발한 대전쟁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및 러시아를 주축으로 하는 협상국과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국이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가리지 않고 전세계를 전장 삼아 약 4년간 치뤄진 처절한 혈전의 순간이었다.
프랑스는 전쟁 초기 독일 연방의 비 프로이센계 군대를 강력한 공세로 격파하며 라인 공업지대와 벨기에 왈롱지방을 점령하며 선전하였으나 독일의 수도 프랑크푸르트를 앞에 두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서 전장은 끔찍한 참호전으로 변화하였다.
참호전에서의 계속된 출혈과 러시아와 이탈리아가 내부 반란으로 무너지는 악재가 거듭되며 전세는 역전되었고, 아헨 전투로 영국과 독일의 이격된 전선이 하나로 합쳐지며 패전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내 승리한 동맹국은 헤이그에서 맺어진 평화협정에서 프랑스에게 치명적인 요구들을 함과 동시에 다시는 대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국제연맹을 창설했다.
기나긴 대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 들어선 사회민주당 정부는 루르 공업지대를 잃고 파산직전이던 크루프를 인수해 국영중공업 분데스베르케Bundeswerke를 창립하여 재건작업을 가속화했다. 이로 인해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전역에 호황이 계속되자 세상은 얼마간 평화를 되찾는 듯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영제국은 그들이 탄압한 식민지인들의 분노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또한 1918년 선거에서 아일랜드를 사실상 장악한 신페인과 IRA는 1년간의 준비 끝에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한 봉기를 시작했다.
이어서 1919년, 영국의 영향권에 속해있던 아프가니스탄은 내부불만을 돌리기 위해 인도의 불안을 포착하고 기습적으로 인도를 침공하며 또 다른 반역을 시작했다.
아프간 전쟁은 영국에게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대전쟁의 끔찍한 피해 속에 영국 본토를 잠식한 반전여론은 본토에서의 징병을 원천봉쇄했고, 영국은 아프간에 투입할 병력을 매우기 위해 인도 제국에서의 강제징집을 결정했다.
대전쟁기의 일방적인 강압정책, 불합리한 세율, 점점 더 줄어드는 지방정부의 권리, 그리고 인도의 영혼이었던 마하트마 간디의 체포 및 압송에서 비롯된 간디 처형 오보와 시위대 유혈진압과 같은 여러 복합적인 사건의 결과, 이는 1920년부터 2년간 진행된 인도 혁명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오직 침략자 영국을 물리친다는 일념 하에 단합된 인도에서 벌어진 또 다른 전쟁은 끝내 벵갈과 남인도 일부를 제외한 곳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인도에서의 패배로 로이드 조지 총리는 사임을 선언했고, 대영제국은 식민지인들에게 2번째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영국의 보석이었던 인도 식민지가 붕괴하자 영국 주식시장은 치명적인 주가하락이 계속되었고 대전쟁의 피해를 아직 수습하지 못한 상태의 불황 속에 발생한 이 사건은 곧 위태롭던 영국의 경제를 파괴하며 범세계적인 공황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줄줄이 파산하는 영국의 기업들을 분데스베르케가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고 이는 독일에게 독보적인 경제 호황을 선사하였다. 그러나 이런 공격적인 확장은 영-독 관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두 국가 간의 국민감정은 바닥 끝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독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분데스베르케는 과잉확장과 방만한 경영을 감당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경영진이 이를 각종 어음과 정계 인사들과의 유착을 통한 지원금, 분식회계로 당장의 문제를 덮으면서 사태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1923년 새롭게 집권한 국민자유당-진보인민당-젠트롬 연정이 시장의 형평성을 이유로 시행한 반독점법과 27년에 진행된 분데스베르케의 민영화는 분데스베르케와 경영진들의 정경유착과 심각한 분식회계를 독일 전역에 들어냈다.
일명 "분데스베르케 쇼크Bundeswerkekrise"로 기록된 이 사건은 얼마안가 1929년에 벌어진 분데스베르케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부실기업체의 버블 붕괴로 이어져 관련 기업들의 연이은 도산과 함께 분데스베르케와 로비 혐의로 묶여 있는 라이히스탁의 거의 모든 정당들의 위신추락을 야기 했으며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출범한 국민자유당 단독내각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존하여 개입을 최소화한다는 최악의 선택지로 독일의 경제가 완전한 폐허가 될 때까지 방관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1933년, 분데스베르케 쇼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독일 내각은 국민적 분노에 시달리고 있으며 경제 붕괴 속에서 영국의 내부불안은 더이상 종 잡을수 없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동유럽에서도 대전쟁이 만든 흉터들이 나타났다.
브레스트-리토포스크 조약으로 구 러시아제국의 서부영토에 진주한 독일은 발트,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했고,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대전쟁을 거치며 얻어낸 영토들로 폴란드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사민당 내각은 동유럽 각지에서의 신탁통치를 통해 지역을 안정시킨 후, 그들 스스로가 선거를 통해 길을 찾아나가며 소련과의 국경에 긴밀한 관계들로 완성된 완충국을 조성하고자 하였고
얼마안가 이루어진 총선을 통해 리투아니아에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사보이아 왕조가 군림하는 왕국이 형성되었고 이어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서도 총선이 이어졌다.
그러나 독일의 지원 하에 세력을 넓혀가던 벨라루스의 자유주의자, 군주주의자들이 총선에서 우세를 점하자, 벨라루스의 볼셰비키들은 총선의 무효를 주장하며 예상치 못한 사태를 야기했다.
볼셰비키들이 부정선거를 일으키며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키자 자유주의자와 군주주의자들 역시 그들과의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벨라루스는 갑작스러운 혼란기에 돌입했고, 이를 틈타 막 적백내전에서 벗어난 소비에트 러시아는 명목상 벨라루스 볼셰비키들을 보호하기위해 벨라루스에 선전포고하였고 리투아니아 왕국이 벨라루스에 가세하며 동유럽전쟁이 발발했다.
점점 치열해지는 전쟁 속에 폴란드 역시 벨라루스에 가세하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시작하자, 또 다른 대전쟁을 바라지않았던 독일과 국제연맹의 중재로 인해 동유럽전쟁은 양쪽 모두 큰 출혈만 입은 공허한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동유럽전쟁 기간 동안 벨라루스는 군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정부를 구성하며 입헌군주국이 되었고, 전후 섭정의회가 동유럽전쟁의 우방으로써 관계가 돈독해진 리투아니아의 사보이아 왕가를 군주로 선출함으로써 리투아니아-루테니아라는 신생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후 유럽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무렵, 프랑스는 헤이그 조약의 천문학적인 금액의 배상금과 폭주하는 파리의 실업률로 인한 이도향촌 현상으로 극우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의 확장과 함께 지방 퇴역군인들의 주도로 생디칼리슴 공동체가 생겨나며 서서히 전화의 상처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헤이그 조약의 군축으로 실업자가 된 장 프랑수아 드 라 로크는 고향 브르타뉴에서 악시옹 프랑세즈 공동체에 합류했으나 얼마안가 유대인들에게 동조했단 이유로 추방당하며 악시옹 프랑세즈의 이념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고향에서 쫓겨난 라 로크는 이후 포슈와 페탱을 중심으로 한 군부 인맥을 통해 샤를 드 골의 도움을 받아 파리에서 퇴역군인들을 모아 또 다른 극우단체인 불의 십자가단에 들어가 단기간에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해 불의 십자가단을 장악하여 총재에 오르게 되었다.
라 로크는 자신이 불의 십자가단에서 가지는 지위를 활용하여 비슷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던 드골과 조르주 발루아와의 협력을 통해 합법정당인 프랑스 사회당을 결성하여 순식간에 세를 불려나갔으며 독일의 분데스베르케 사건이 프랑스에게까지 여파가 미치며 기존의 인민전선이 독일 부역자라는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급속도로 지지를 잃기 시작했고 라 로크의 사회당은 악시옹 프랑세즈와의 연정으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후 악시옹 프랑세즈가 왕정복고, 반유대주의 등의 "돌발행동"을 거듭하며 스스로 민의를 져버리자 라 로크와 군부는 협력하여 악시옹 프랑세즈를 압박하고 교황의 단체 파문을 결정타로 악시옹 프랑세즈가 몰락하면서 라 로크의 사회당은 프랑스의 단일집권 정당으로까지 성장하게 됐다.
이후 1931년 치러진 전쟁영웅 페르디냥 포슈의 국장에서 팡테옹에서의 라 로크의 연설을 통해 지지세를 확고히 확인한 사회당은 '국가재건 비상대권 위임 법안'을 통해 프랑스를 장악하며 제4공화국을 끝내고 프랑스국을 선포하였다.
32년에 구 동맹국의 경제혼란을 틈타 라 로크는 헤이그 조약에서의 비무장지대에 대한 조약을 재협상해내는데 성공하자, 더 이상 프랑스에서 라 로크와 사회당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게 되었다.
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미합중국은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잠깐의 공황만이 존재하였을 뿐 대체적으로는 북미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멕시코의 캘리포니아 매입 협상 결렬로 발발한 1846년의 미국-멕시코 전쟁은 미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으나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북부 주와 남부주간의 노예제 갈등의 뇌관으로 작동했다.
미합중국이 새로운 영토를 얻어내자 의회와 민중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19세기 북미를 뜨겁게 달군 노예제 분쟁에 따라 자유주가 되느냐 노예주가 되느냐에 온갖 이목이 집중되었다.
49년에 당선된 휘그당원 멕시코 전쟁의 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는 서부 준주들을 주로 승격함으로써 주 정부가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식의 해결을 제시했으나 이 방안은 남부 주를 중심으로 한 의회의 강력한 제동과 남부 지도자들의 연방 탈퇴 협박으로 인해 순식간에 흐지부지되었고, 연방주의자들이 극적으로 구상한 타협안 역시 각종 악재가 겹친 결과 무산되어버리면서 남북 간의 긴장상태는 점점 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걸어가던 미합중국의 남북관계는 결국 1859년, 중간선거에서 남부 민주당이 대패하게 되자 수많은 남부 주들이 노예제 존속을 위해 연방을 탈퇴하면서 아메리카 연합국이라는 독자적인 국가를 성립을 시작으로 남북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남부의 연방 탈퇴로부터 1년도 체 안 되어 연합은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의 포격을 시작으로 미국 사상 최악의 전쟁이었던 남북전쟁의 개막을 알렸다.
로버트 E 리 장군의 남군이 전역에서 연전연승하자 연방정부에 대한 불신이 강해진 미 서부에서는 또 다른 분란의 씨앗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으로부터 고작 2년 전에 벌어진 마운틴 메도우 학살로 연방정부와의 관계가 극악까지 치달은 끝에 데저렛은 몰몬교도들의 신정통치국가인 데저렛국을 선포하며 연방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고, 남군과 데저렛에 크게 고무된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및 워싱턴, 통칭 서부 3개주 역시도 지속적인 주 승격 거부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연방정부에 대한 자유 주를 선포하며 새크라멘토에서 태평양 합중국을 선언하며 또다른 분리주의자의 등장을 워싱턴에 알렸다.
이러한 내부의 혼란 속에 마비된 북군은 빅스버그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남군에게 연패하였고, 리의 군대는 테네시에서의 승리 이후 필라델피아로 행진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를 달렸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연방이 시행한 징병법이 뉴욕에서의 폭동을 촉발시키고 남군이 64년 1월에 얼어붙은 델라웨어 강을 넘어 필라델피아를 포위하자, 결국 남북전쟁은 북부의 처절한 패배와 함께 끝이 났다.
남북전쟁은 북아메리카 전역에 커다란 파동을 몰고 왔다.
처절한 패배를 맛보았던 북부는 공화당에 의해 약 20년간 이어지는 군정체제가 이어졌다.
한편 뱅크스 행정부의 부통령, 뱅크스 대통령의 사임 이후 대통령직을 지냈던 에이브리엄 링컨은 무능한 연방정부에 대한 실망감, 정치 원로들의 추악한 행태에 크게 실망하여 아우구스트 윌리히, 호레이스 그릴리와 함께 1869년, 미국 최초의 좌익 노동자 정당 사회민주당을 창당하여 북미 좌익의 태동을 알렸다.
사회민주당의 등장과 연방정부의 끝이 없는 친기업적 행보, 반자유주의적 정책들은 국민들의 의식을 크게 끌어올렸고, 이는 지속적으로 기성 정치인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으나 우파들의 지속적인 실책과 악재로 인해 결국 백악관은 사회민주당의 손에 떨어졌다.
사회민주당은 기존의 군사, 경제적 제재 위주였던 대남정책을 식민지민 자극, 연합에 적대적인 열강들의 포섭 등의 방법을 통해 연방을 조여 왔고, 이는 연합-스페인 전쟁에서의 적절한 뒷공작과 줄다리기를 통해 쿠바 민족주의자들을 자극시키며 결실을 이루어낸다.
그러나 연방정부는 관타니모만 상륙을 통한 선제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남부와의 외교적 기싸움 끝에 끝내 먼저 한발을 빼며 쿠바 문제에서 남부에게 패배했고, 이는 사회민주당의 일시적인 하락세와 더불어 백악관이 또다시 휘그당에게 넘어가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후 운명의 1912년, 유진 데브스를 대선주자로 선출한 사회민주당은 휘그당 급진파와의 합작을 통해 휘그당으로부터의 정권탈환을 이루어냈고, 데브스 행정부는 반전주의, 미국 통합의 불필요성을 강조하며 연방 사상 유래가 없는 급진개혁을 시작해갔다.
민주당, 휘그당 등 의회 각지의 보수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독점법, 노동관계법 등의 강경개혁을 밀어붙이던 유진 데브스 대통령은 남북갈등에 지친 시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이어서 1915년 선거인단제도 폐지,1916년 여성참정권 승인 등이 이어졌으며 1914년 유럽에서 일어난 대전쟁에서도 데브스 대통령은 먼로독트린과 본인의 평화원칙에 입각하여 중립을 선포하며 내부개혁 의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민주당의 행보는 그 과격함만큼이나 기성세대와 기성정치인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결국 1920년, 휘그당과 민주당은 사회민주당과 데브스를 막기 위해 워런 하딩과 A.미첼 팔머를 각각 대통령 후보와 러닝메이트로 선출하며 대항했고, 사회민주당의 허버트 후버 대 휘그당-민주당 연합의 워런 하딩간의 싸움은 불과 몇십만표 차이로 하딩의 승리로 끝났고, 기성세대와 정치인들의 보루로써 하딩 행정부가 출범했다.
하딩행정부는 데브스 정부의 여러 급진개혁들을 취소, 철폐하면서도 외교 정책을 유지하는 방식을 통해 인기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권 초기의 흐름을 잘 유지하는 듯하였으나 정권 말에 일어난 티팟돔 스캔들을 시작으로 이어진 비리폭로와 실책들로 하딩 대통령이 뇌출혈로 쓰러지게 되고, 이를 이어받은 팔머 대통령 권한대행은 외교 강경책으로의 회귀, 안보라는 명목 하에 급진국 설치를 통한 극단주의자 탄압 등의 행보로 자유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이어가면서 이는 휘그당-민주당 연합의 결별과 팔머의 민주당 탈당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팔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급진국장 에드가 후버와 보수주의적인 장성 존 조지프 퍼싱과 함께 민주당, 휘그당, 사회민주당에 이은 4번째 정당인 극우정당 미국당을 창설하며 미국의 4당제를 성립시킨다.
팔머의 임기가 끝난 후 이어진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의 라폴레트가 승리를 거두며 정권은 다시 좌익으로 기울어지는 듯 보였으나 라폴레트가 취임식조차 하지 못한체 지병으로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와 그 자리를 이어받은 러닝메이트 버튼 K. 휠러의 조촐한 성과로 인해 사회민주당과 휠러는 28년 대선에서의 재선에 실패하고 휘그당의 앤드류 멜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게 된다.
좌파에 대항한 연합으로서의 위치를 강조한 멜런 행정부는 휘그당, 민주당, 미국당 3대 우파 정당들을 결집시키며 자유주의, 친기업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통해 임기 초의 경제호황을 만들어냈고 미국은 광란의 20년대 말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독일 연방에서부터 시작된 분데스베르케 쇼크, 이어진 유럽 경제 불황과 그 여파는 얼마안가 미국을 급습하기 시작했다.
분데스베르케 쇼크는 뉴욕 증권 시장을 강타하며 대공황의 아메리카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점점 악화되어가는 경제 상황 속에 위기를 거듭한 맬런 행정부는 끝내 32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출신의 중도파 개혁가인 허버트 후버에게 패배하였고, 곧 있을 후버의 대통령 취임식은 북아메리카의 운명을 결정할 중대한 사건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한편 남아메리카에서는 1848년 혁명의 유산이 대양 건너 브라질의 국민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황제에게까지 이르게 되면서 브라질은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페드로 2세와 그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시장을 개방하고 시장 규제를 줄이면서 혁명 이후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나갔고, 10년간의 개혁 이후 브라질은 더욱 안정적이고 산업적으로 크게 성장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삼국동맹전쟁에서 승리하며 브라질의 새로운 경제적 능력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고, 1870년대에 노예해방까지 이루어지며 브라질 제국은 3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되었다. 도시의 건물들은 더욱 높아졌고, 강철 선박들이 만들어졌으며, 철도가 전국을 연결했다.
19세기 말 브라질의 라틴 아메리카의 유일한 맹주 위치를 굳혀준 2차 플라타 전쟁과 왕정의 힘을 시험했던 1889년 쿠데타라는 두 개의 난관을 극복해냈다. 새로운 세기가 되고 대전쟁이 일어나자 브라질의 국제적 열강으로서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반대편에서는 페루-볼리비아 연합이 지역 강국으로 성장해나갔다. 1836년 설립된 페루-볼리비아 연합은 바로 칠레의 침공을 겪었지만, 결국은 1839년 연합 전쟁에서 승리하며 연합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그 후 아타카마 사막을 두고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연합 사이에서 벌어진 태평양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페루-볼리비아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1920년대가 되면서 남미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 가운데에는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와 정치적, 경제적 불평, 그리고 이름뿐인 민주주의가 존재했으며, 이에 대한 반발은 새로운 혁명적 운동으로 이어졌다. 페루-볼리비아 연방의 아야 데 라 토레와 그가 이끄는 아메리카인민혁명동맹(APRA)로부터 시작된 “남미식 사회주의"는 급진적 사회 개혁, 대중주의, 그리고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이러한 움직임은 여러 국가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1924년 페루-볼리비아에서 아야 데 라 토레가 집권한 것을 시작으로 1928년에는 급진적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연정이 아르헨티나의 정부를 장악했고, 1932년 칠레에서는 군부 쿠데타 이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는 등 남미의 혁명은 계속해서 진행 중에 있다.
아시아
1851년 6월, 프랑스의 흑선이 요코하마 근해에 정박하고, 이로써 체결된 불일통상수호조약을 계기로 에도 막부는 본격적인 개항을 실시하게 됐다.
허나 굴욕 외교와 급격한 개항 시도는 외세에 굴복하는 막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고, 신분제 아래 숨을 죽이던 하급 무사들의 탈번이 잇달으며 정국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도막 세력은 존황양이의 기치 아래 조슈 번을 중심으로 집결, 막부는 분큐의 정변을 거쳐 이들을 중심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데에 성공하는 듯 했으나, 1862년 7월, 도막파가 하마구리 어문 근방으로 시가전을 일으키며 궐기(7. 15 정변), 황거를 장악하고 막부 세력을 교토 내에서 일소하는 데에 성공한다.
진주쓰 전쟁에서의 승전을 통해 막부 세력의 잔당마저 격퇴한 신정부군은 1863년 11월, 대정봉환을 실시하고, 이듬해 5월, 메이지 천황의 즉위와 동시에 메이지 유신을 선포하였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외세와의 대립을 겪으며 그 전력을 실감한 신정부 내부에서는 해외 사절단으로 파견된 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개국 여론이 확산, 이로써 전면 개국이 선언되지만, 개국 시도와 더불어 복합적인 이해관계가 얽히며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사족 반란이 발생, 정국의 혼란은 가속화되었다.
허나, 1866년 세이난 전쟁에서 사쓰마 번의 세력을 대거 진압함과 동시에, 대규모 사면령을 반포하여 반정부 세력을 포섭, 혼란을 일소하며 일본의 개국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1866년 태평양 합중국의 정부선이 청을 방문하여 돌아가는 와중에 평양에 기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들은 조선의 개항을 유도하기 위하여 평화적인 접근을 시도하였고, 태평양 합중국은 이를 바탕으로 조선과의 지속적인 통상을 이어갔다. 이는 조선이 서구에 갖는 저항심을 낮추는 계기가 되었고, 태평양은 조선에 서양 사상이 유입되는 또 다른 창구가 되었다.
이후 일본은 제국을 표방하며 국가를 서구식으로 개편하고 군사력을 대거 증강한 일본은 류큐 왕국을 병합함과 동시에 조선 문제에 개입하고자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 내 개화 사상가들을 통해 조선의 독립개화파들에게 접근하여 이들을 후원하고, 이들로 하여금 정변을 계획토록 하니 이는 갑신정사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내 일본의 후원을 받은 급진개화파들은 갑신유신을 일으켰다. 조선은 태평양과의 지속적인 교류로 인해 서구 사상이 어느 정도 확산되어 있었으며 이는 급진적인 개혁을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증가로 이어졌고, 갑신유신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때마침 청불전쟁으로 청군이 정변에 대한 초기 대응에 실패하게 되었고, 조선은 깁홍집을 필두로 하는 내각을 출범하였다. 이후 명성황후, 민씨들을 포함한 기성세력은 대부분 권력에서 축출 및 숙청되어 일본은 조선 내 친일 정권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제 1, 2차 아편전쟁을 겪으며 동방의 대국, 청의 민낯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외세는 총칼을 앞세워 탐욕스런 혀를 청에 들이밀었다. 베이징 조약의 체결 이후로 중국 내부에서는 굴욕을 벗어던지기 위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1년 후 함풍제가 사망하자 공친왕, 서태후, 동태후 세 명은 신유정변을 통해 삼두정치를 마련하고 한인 신사층을 대거 등용하면서 양무운동의 엑셀을 밟았다. 그러나 청불전쟁 이후로 공친왕은 무너졌고, 동태후는 서태후에 양보하면서 서태후가 정권을 장악했다.
갑신유신의 성공으로 조선에서 친일정권이 수립되자,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강경대응을 주장한다. 그러나 청과 일본군의 충돌에서 청이 저지당하면서 변법개화파가 완전히 정권을 붙잡는다. 이에 청은 흥선대원군이라도 재차 압송하여 조선 개입 가능성을 유지하고자 하나, 개화파에서 이를 용인하지 않으면서 한성 시내에서 대치가 계속된다. 이내 우발적인 총성은 양국 간 긴장의 폭발을 일으켰고, 전면전으로 번지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내 양무운동의 미진은 청의 패배를 초래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청의 패배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입헌의 승리,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의 붕괴로 받아들여졌다,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비롯한 유신파는 광서제에게 중용되어 빠르게 변법을 추진하고 나서나, 이는 서태후의 공격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량치차오는 이를 계기로 중국인의 노예근성에 대한 비판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목을 매달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은 남만주에서 일본의 이권을 제한했다. 이는 곧 러시아와 일본의 갈등을 암시하는 것이었고, 만주와 조선에서의 분쟁은 일본의 선전포고를 자아냈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산발적인 교전, 양국 간의 경제 위기는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게 옭아맬 뿐이었지만, 이내 미국의 중재로 일본의 사실상 판정승으로 마무리된다. 이는 청에게 있어 입헌운동의 촉매제가 되었으며 반대로 일본에 기대를 안고있던 많은 중국인 혁명가들에게는 제국주의적 행보에 실망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태후가 죽고, 광서제가 서거하면서 푸이가 즉위한다. 섭정 짜이펑은 헌정내각을 구성하나 이는 황족내각으로 불리며 많은 개혁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와중에 보로운동은 철도 노동자들의 시위를 촉발했다. 이러한 와중 시위 진압을 위해 후베이성의 군세가 쓰촨으로 진입하면서 우창에서 봉기가 터져 나왔다. 혁명은 빠르게 퍼져나가서 청 정부로 하여금 위안스카이에게 진압을 명했으나 그와 쑨원은 협상을 통해 중국 최초의 근대적 민주공화국이 세워지게 된다.
신해혁명 이후로 위안스카이의 독주는 많은 지지자들의 상실을 일으켰고, 위안스카이로서는 오히려 자신감을 얻게 하였다. 계축전쟁 이후로 그의 가장 큰 경쟁자 국민당은 축출되었고, 주안회가 그의 눈과 귀를 가리고 황제 즉위를 독촉하자 량치차오와 차이어를 필두로 한 이들은 홍헌체제가 선포되자 남방에서 그에 반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중국인의 인격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기치를 들고 일어난 전쟁은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종결되었고, 북양정부에서는 돤치루이와 리위안훙이 협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북양군의 계속된 움직임은 결국 량치차오의 실망을 자아냈고, 호국군은 서남에서 북양정부에 협력하는 남방의 군벌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돤치루이가 의회를 폐지하고 독재를 이어나가자 남방에서는 호법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국민당은 광둥에서 재기하여 호국군과의 협력을 시작하였으며, 이를 통해 동맹회가 결성되었다. 북방에서는 일본 제국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고 중국에 만주 지역의 보호를 위한 이권 쟁취를 요구하였는데, 이를 돤치루이 정권이 거부하면서 남만주 일대에서 교전이 일어난다. 5.4운동으로 국내 여론이 폭발하고 여러 외교적 활동이 재개되면서 일본으로서는 적당히 타협할 필요성이 있었는데, 만주 지역에서 친일 군벌의 기반을 다지고 만주 전체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얻어내면서 만주사변이 마무리된다.
이후 북양군벌들이 지지를 상실하였고, 직예가 정권을 잡은 이후로는 펑위샹이 핍궁사건을 일으켜 북방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자 쑨원의 서거 이후 자리잡은 왕징웨이 정권은 북벌을 개시한다. 그러나 북벌은 소련이 극동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고, 군 내 파벌 갈등, 대중 선동의 실패, 전술적 패배, 동맹회 내부에서도 협력의 부진 등의 이유로 북벌은 조기종식되며 국민당과 호국군 사이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1928년 펑위샹이 서북 지역에서 피습당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국민군은 지도력의 공백으로 여러 성에서 통제력을 잃어갔고, 눈앞에 있던 중국의 통일 (특히 국민당 주도로)는 요원해지게 된다. 북방에서 중국은 난립상태를 맞이하게 되었고, 남방은 내부 문제가 심화되어 북방과의 경쟁에서 재차 밀리기 시작한다.
대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제국은 동맹이었던 영국의 참전 요청에 따라, 프랑스령 미크로네시아 식민지 확보를 위해 동맹국의 편에 가담하였다.
대전쟁 속의 일본은 전쟁 자체에서는 선전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그러지 못하였다.
대전쟁에서 공격적인 영토 확장을 밀어붙이던 군부는 군부에 제동을 걸려 시도한 의회를 기습적 쿠데타로 제압하였고, 일본은 향후 10년간 지속되는 군부 통제파와 군부와 결탁한 재벌들의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섰다.
하지만, 통제파의 과격함은 곧 군부내각의 불안정으로 돌아왔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또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재벌들의 요구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고 노동자들을 극한까지 착취한 일본은 1929년, 압제에 종말을 고하는 일이 발생했다.
조슈 벌 중심의 경직적 군정체제와 의회의 사실상의 마비, 극심해진 노동자 착취는 곧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연합시켰고, 막부시대와는 달리 근대화된 일본의 발전상황은 일본의 전통적 관념들을 하나하나 부숴버리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흐름에 올라타 빠르게 성장한 일본의 반정부 세력들은 장기간의 준비 끝에 반란을 통해 그들의 자유와 평등을 되찾으려 했으나, 군부 역시도 강력한 탄압으로 대처하면서 일본 혁명은 잠시 주춤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황태제였던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에 의해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1928년부터 육군대학에 입학한 신임 장교였으나 그는 얼마안가 당시 청년장교단 사이에서 유행했던 키타 잇키의 국체개조론과 사회주의 사상에 유혹되었고, 그는 얼마안가 천황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자라는 직위에 힘입어 동기들 사이에서 수장과도 같은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일본의 내부 불안이 심각해짐에 따라 통제파 내각은 이 젊은 사회주의자 황태자를 아직 생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전을 위해 사단장의 직위까지 진급시켰고, 이는 곧 군부에게 비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반정부주의자들의 혁명이 시작되고 그것을 무참히 진압하는 군부에 크게 실망한 야스히토는 곧 자신 휘하의 병사들과 동기생 장교들, 통칭 황도파라 불리는 이 파벌들을 이끌고 군부의 압제를 끝내기 위한 구국의 결단을 내린다.
야스히토와 황도파는 빠르게 의회의 군부를 제압하기위해 내각 관저로의 공세를 개시하면서 혁명세력과의 직접적인 협력을 선포하였다. 군부내각은 황도파에 의해 전부 사살당했고, 얼마안가 그들은 황거로의 공세를 시작하였다.
승패가 황도파와 혁명세력 쪽으로 기울무렵, 통제파는 근대 일본 자체를 지배하던 이념이자 그들 스스로의 정통성 그 자체이던 히로히토 천황을 사수하기위해 급하게 진압군을 황거 방어에 투입하면서 천황을 황거에서 탈출시켜 마이즈루 항구로의 도주를 시작했다.
황도파의 가세와 더불어 중앙지휘계층의 붕괴, 야스히토라는 인물 자체의 상징성은 자칫 실패할 수도 있었던 일본혁명의 정세를 180도 뒤집었다.
정권유지의 희망을 잃은 일본 해군의 주도로 군부는 타이완으로의 도주를 계획했다.
일본해군은 가용 중이던 모든 함정을 총동원, 연합함대를 집결시켰고, 각지의 항구에서 피난민들과 반공주의자, 천황과 생존한 내각인사같은 망명자들을 규합해 타이호쿠를 향한 망명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그저 군부를 몰아내기 위해 출발했던 일본혁명은 히로히토 천황과 군부의 망명, 타이호쿠에서 이어진 히로히토 천황의 혁명세력 반대선언 등으로 인해 분위기는 완벽하게 역전되었다.
자신의 형의 (자의였던 타의였던)추악한 도주는 야스히토와 황도파, 키타잇키주의자들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기 충분했을 뿐더러 야스히토 스스로가 실망스러운 형을 대신해 천황에 즉위하여 키타주의에 입거한 극단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친정을 펼치게 할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일본 혁명은 열도에 일본 사회주의 제국이라는 기형적인 공산국가를 탄생시켰고 이는 대한제국과 같은 극동의 여타 비사회주의 국가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의 혁명 이후 대한제국은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급진개화파의 후신 세력인 유신회는 갑신유신 이래로 대한제국에서 권력을 유지해왔고, 그들의 친일,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1919년 3.1 민주운동과 제국보안법 문제를 시작으로 신진세력이 그들을 공격하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내 일본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신한청년당을 필두로 유신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였고, 유신회는 이에 저항하려 하였으나 황제였던 이우는 신한청년당을 지지하면서 황제의 지지와 민의를 잃은 유신회는 실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반 유신회 세력들은 신한청년당 주도의 연정을 형성하였다.
당장 존속 위기의 기로에 놓인 대만의 구 제국 세력은 열강 각국의 지지 아래, 일부 조항을 수정하여 극동 공화국, 옛 종속국이었던 대한제국 등의 극동 국가들을 포섭하여 대공(對共) 방위체계를 구성하게 되었고(하얼빈 조약), 특히 혁명당시 쓰시마를 확보하여 보호해줬던 대한제국과의 협력을 중시한 망명일본은 한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해 그들과의 공생관계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혁명의 충격은 극동 내에 끊임없는 여파를 일으키며, 만주파의 태동과 30년 한국 혁명의 발단으로 작용하였으며, 대외적 방편들이 무색할 만큼 내부로부터 작용하는 극동 정세의 변동을 막아낼 수 없었다.
모드 미니갤
https://gall.dcinside.com/mini/board/lists?id=polarnacht
모드 디스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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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오면 꼭 할게요!
저도 제 모드를 플레이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너무 기대되요
감사합니다
붉은 일본이라니 이건 귀하군요
국가사회주의 일본이라니 ㄷㄷ..
오 이번에는 그동안 설정 모은건가요 ㄷㄷ
그렇습니다
다음 개발일지부터는 인게임 내용이 들어갈 예정이라 이번 개발일지에서는 시작 시점 이전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개발일지로 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