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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恨中錄]
“내 붓을 들어 한의 세월을 기록하다.”
*역사적 사실에 의한 픽션입니다.*
#.6 새로이 부는 바람
궁 안에 사람은 열(十)이 있어도, 보는 눈과 듣는 귀는 백(百)이 있다 하였다. 궐 안 궁녀들 사이에 쉬쉬하는 기색들이 일파만파 퍼져가고, 그들 입에서는 동궁전의 이름들이 자주 오르내렸다. 궐 윗전 어르신들의 의향이 그러하거니와, 세자가 곧 후궁을 들이려 한다는 소식들이 공공연하게 떠돌던 찰나, 그 소문은 좋은 입방아거리가 되어 궁내를 휘젓고 다녔다.
“얘, 저 아이가 그 아이야.”
“‘이향’인가 하는 그 아이? 어머 어쩜 동궁마마께서도 저런 볼품없는 아이를.”
“아직 모르는 일이잖어.”
“한낱 침방나인이 동궁에 불려갈 일이 뭐가 있겠니? 그 연유도 아무도 모른다잖아.”
“어머 그럼 정말..”
“이 참에 나도 침방으로 보내달라 떼나 써볼까보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큭큭.”
무수리 둘이 한참 서서 호호거리다 사라졌다. 모른 채 지나쳤지만, 참새처럼 속닥이는 말소리에 조심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이향의 귀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담기었다. 궐 안을 흉흉히 떠도는 유언비어들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저 동궁전의 상궁 마마님네가 이르시던 대로 조용히 함구하며 생활하고 있었던 것을. 이미 이 소문이 빈궁마마의 귀에 들어갔을까 내내 노심초사였다. 다만 소문이라도 어찌 그 분께 누를 끼칠 수가 있으랴. 두 분 마마께서 그리 금슬이 좋으시고, 이 미천한 것에게 그리도 상냥하셨던 것을. 그러나 어린 마음에는, 당장 침방 상궁마마께 불려가 어찌된 일이냐며 단초라도 당할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포옥- 한숨을 내쉬며 오늘 하루도 제발 조용히 지나가달라 하늘에 원망하는 눈빛을 보내었다.
힘없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쪽문 앞을 지나가는 이향, 그 문 뒤에 듣는 귀가 또 하나 있었으니.
“.....궐 안에 소문이 떠돈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먼.”
“마마, 철없는 것들의 입방아이오니 괘념치 마오소서.”
“지아비의 일을 모른 채 하는 부인네도 있다더냐.”
“마마..”
“동궁전 아랫것들은 잘 단속하였던 것인가.”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빈궁의 이렇듯 노여운 모습은 처음인지라 정상궁이 적잖이 당황하였다. 평소의 상냥한 언질도 없이 홀연히 먼저 자리를 뜨는 빈궁의 동태에 정상궁이 황망히 뒤를 따랐다.
동궁마마께오서 후궁을 들이신다 하더니, 요 며칠 전 어린 침방나인 하나가 동궁에 드나드는 것을 누가 보았다더라. 그 아이가 동궁에 다녀온 연유는 아무도 모르고, 지나가는 말로 물어도 그곳에 간일은 없다 부인하기만 하니 일의 정황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뿐 일 것이라 하더라. 보잘 것 없는 침방나인이 하마 동궁마마의 눈에 들었겠는가.
떠도는 소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저러하였다.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지아비에게 먼저 후궁을 들이시라 청한 것이 바로 나 이거늘. 그리 언질을 드린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 일이거늘 어찌 이만 일로 속이 꼬이겠는가. 다만 그 말이 들어가 한번쯤은 상념 해야 할 상전들의 속내도 모르고 철없이 구는 궁인들의 언동에 속이 상하였다. 후궁을 들인다는 것이 그 이에게도 내게도 예민한 일이거늘, 이 근본 없는 소문에 그 이가 근심할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심기가 불편한 듯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돈다하여 조찬도 제대로 들지 아니하였거늘, 깊은 곳으로부터 속이 체한 듯 편치가 못하였다.
“대비전으로 가자.”
예로부터 어른들의 말씀에는 독이 될 것이 없다 하였다. 왕실 제일의 어르신인 대비께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볼까 하였다. 찾아뵈올 때 마다 손녀딸을 대하시듯, 친조모인 양 사근히 대해주시는 그 옥음을 들으면 마음이 좀 가라앉을 듯도 하였다.
//한중록 恨中錄//
“그래, 부러 이 뒷방 늙은이를 찾으셨습니까.”
“어찌 그리 하문하시옵니까. 마마.”
“호호, 나 또한 그 소문을 일찍이 전해 들었지요.”
“신첩이 우매한 탓이옵니다.”
“그래, 동궁께서 그 아이를 부른 까닭은 빈궁께서도 참으로 모르시는 일입니까.”
어찌 모르겠는가. 그 일을 설명하자면 잠행을 나갔던 일 까지 모두 털어놓아야 하는 것을. 더구나 그 잠행에 빈궁 또한 동행하였을 뿐더러, 사사로이 부부인의 탄일을 핑계로 하였다는 것을 아시면 경을 치실 것이 자명하였다.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빈궁은 정말 모르는 것일 터,
그것이 뜬소문이 아닐수도 있겠습니다.”
마치 대비가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음흉이 그 속내를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하였던가. 빈궁이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그저 앞에 놓인 다기만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명쾌한 답이라도 얻으려 온 것은 아니었으나 조금이나마 나아질 줄 알았던 기분은 영 풀리지 아니하였다. 대비가 빈궁의 수심에 가득찬 얼굴을 보며 자애로이 웃는 얼굴로 보드라운 손을 마주 잡았다.
“한갓 뜬소문에 이리 시름을 하시니,
장차 큰 그릇이 되실분이 어찌 이리 심약하시오. 빈궁.”
“면목이 없사옵니다. 마마.”
“소문이라는 것이 원체 급히 퍼지듯 급히 사그러드는 것이 아니오,
다기에 담긴 이 홍화차를 다 마시고 나면 잊어진다 생각하십시다.“
대비가 그리 웃으며 차를 권하였다. 사실 그 속내는, 차라리 이리 해서라도 동궁이 후궁을 맞아들여 하루라도 일찍 세손을 안아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손녀딸 같은 빈궁 앞에서 그리 털어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의지할 데가 없어 이 초라한 대비전에 들렀겠는가. 윗전을 생각하고 가장 큰 어른을 살필 줄 아는 그 효성이 기특하여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아니하였다.
대비전을 나서고 보니 시경이 벌써 유시(酉時, 17시부터 19시)에 가까운지라 저녁 수라를 들 시간이 되었다. 정상궁을 일러 저하께오서 퇴청하셨는지 알아보라 명하니 곧 다녀와 이르기를,
“저하께오서 오늘 경연청에서 늦으실 듯하여 먼저 저녁 수라를 젓수시라 하시옵니다.”
“그러면 수랏간에 일러 내 저녁 수랏상은 차릴 것 없다 이르게.”
“마마, 어찌 수라를 거르시옵니까.”
“종일 속이 답답하여 체기가 있으니 바람이나 좀 쐬었으면 싶네.”
빈궁이 평소보다 느릿한 속도로 경회루가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대비마마의 말씀을 들은 뒤로 마음은 좀 가라앉았건만, 어찌 자꾸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핑핑 도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내색을 하면 어의를 부른다 어쩐다 법석을 부릴것이 자명하니 그저 조용히 바람을 쐬고 나면 나아질까 하였다.
큰 못 가운데 널찍이 남은 터만 소실 전 경회루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제법 큰 규모였으리라고 미루어 짐작할 뿐, 보지 않은것은 쉬이 그려내기가 어려웠다. 사람의 마음도 그러한 이치이던가. 그 이의 마음이 기쁘건 슬프건 간에 보이지 않아 그 크기가 얼마 만큼인지 알 수 없으니. 차돌로 꾹 눌러놓은 듯 가슴이 이리 답답한 것은 그 때문인가도 하였다. 어쩌면 대비마마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라, 결코 뜬소문이라 단정 지을수도 없는 것을.
궐 안에 들어선 여름도 그 생기로운 몸부림에 한창이었다. 궁 안 곳곳의 나무들이 맘껏 기지개를 켜는 듯 그 생기를 뽐내어, 이제 두어 달이 지나면 색색의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할 것이었다. 새빨갛게 물들어 그 자태를 보기만 하여도 붉게 타오르는 듯하는 가을이 올 것이고,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오면 그리 좋아하던 눈이 내릴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서로 마주보고서도 웃기만 하던 순수했던 시절 마냥 새하얀 눈이.
//한중록 恨中錄//
“어찌 동궁이 비어있느냐.”
“빈궁마마께오서는 대비전에 듭시었다가 지금은 경회루에 가신줄로 아옵니다.”
“시경이 얼마쯤 지났느냐.”
“신시(申時, 15시부터 17시)가 조금 못되어 대비전에 드셨사옵니다.”
“신시라. 허면 저녁 수라는 드시고 다시 나가셨단 말이더냐.”
“수라는.. 준비치 말라 명하시어...”
쯧쯧. 하고 세자가 혀를 찼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의 잠행 이후로 빈궁의 낯빛이 좋지 않아 염려하였거늘 수라를 거르겠다는데도 몽매한 것들이 그리 따랐다 진언할 뿐이니 답답하다 하였다. 빈궁을 가까이 모시는 정상궁은 무얼 하였단 말인가. 내 먼저 수라를 젓수시라 명한 것이 잘못되었다 후회하였다. 생각보다 경연청에서의 논의가 일찍 끝나 이리 잰걸음으로 돌아왔거늘,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기다리시라 할 것을.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이 혹여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경회루로 갈 것이니라.”
세자가 바삐 걸음을 옮기자 한상궁을 비롯한 아랫것들이 분주히 뒤를 따랐다. 해는 벌써 저물어 내관이 호롱불로 그 앞을 비추는데, 서두르는 마음에 그 불빛마저 발길에 채이는 듯하여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빈궁이 어딘가 편치 못한 것이 분명하였다. 항상 먼저 새벽같이 일어나는 빈궁의 부지런함에 그 사람의 잠든 모습을 본 일이 몇 번 되지 않거늘, 잠행을 다녀 온 이후로는 동시에 눈을 뜨고 오늘 아침은 동궁을 나설 때 까지도 곤히 잠들어 있어 아랫것들에게 깨우지 말라 엄히 명을 하였었다. 어의를 불러 진맥케 할 것을 생각이 짧았다 후회하였다.
“미천한 것이 어찌 동궁마마께 꼬리를 쳤누?”
이제 저 중문을 나가 모퉁이를 돌면 경회루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거늘, 지나치는 전각 뒤편 어두운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자의 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내인(內人, 상궁과 무수리의 중간 품계)의 날카로운 목소리 하나가 귀에 거슬려 고개를 돌리는데, 뒤따르던 아랫것들의 눈치가 안절부절 하였다.
“생김을 보아하니 변변치 못한것이 한심도 하구나.
그래, 동궁마마께오서 너를 불러 무슨 말씀을 하시든?“
“동궁에 간 일이.. 없다 하질 않았습니까..”
“보는 눈이 수십이고 듣는 귀가 수백이야,
거짓을 고하려거든 상궁마마를 불러 단초를 하시라 진언할테다.“
“이미 궐 안에 소문이 파다한 것을 모르느냐?
우리만 알아두고 발설치 않을테니 어서 말해보라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자가 듣자하니 일의 정황을 알 듯 하였다. 아마도 나이가 의젓한 내인 여럿이, 일전에 내가 불렀던 침방나인 하나를 두고 저리 못된 짓거리를 하는가 하였다. 호롱불을 든 내관은 고개를 조아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한상궁은 말없이 한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상궁은 저들이 하는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으렸다.”
“마마, 무지한 것들의 입놀림에 어찌 귀를 기울이시옵니까.”
“나를 농락할 셈이더냐. 궐 안에 파다한 것은 또 무엇이더냐.”
상전의 지엄한 분부를 어찌 거역할 수 있으랴. 한상궁이 마지못해 입을 열어 며칠 전부터 궁에 떠돌던 해괴한 소문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빈궁께서도 아시는 일이냐 물으니 그러한 줄로 아옵니다, 하고 되돌아오는 대답에 세자가 실로 허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궁인의 눈과 입과 귀가 무섭다 하여 무엇이 무섭다 함인가 모르고 있었거늘, 이리 당하고 보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함이 정확하였다.
그 사이에도 내인들의 찢어질 듯한 목소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들어대니, 가뜩이나 불편한 심기에 세자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한낱 계집아이들의 말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다.
“어찌 계집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단 말이더냐.”
“세....세자저하....!!....”
침방나인이라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을 눈에 그렁그렁 매달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구석에 서 있고, 그 보다 너댓살은 더 되었을 법한 내인들이 팔짱을 끼고 섰다가는 세자의 불호령에 화들짝 놀라 연신 굽실거리기에 바빴다.
“어찌 어린 나인 하나를 두고 이리 못된 짓거리들을 일삼느냐 묻고 있음이니라.”
한상궁의 미간이 보이지 않게 찌푸려졌다. 이만 일은 그냥 눈을 감으시고 넘어가셔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이 소문이 정말 뜬소문처럼 가라앉을 것이었다. 이리 하시는 처사가 오히려 또 다른 소문을 낳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였다. 지금 소문의 주인공인 세자 저하께오서 또 다른 주인공인 침방나인 아이의 편을 들고 계시지 않은가.
“저하.. 소인들은 그저 궁금한 것이 있어.. 묻고 있었을 따름이옵니다...”
“답해 줄 것이니 내게 묻거라.”
“.........”
“내게 물으라 하지 않느냐!!!”
저하.. 하고 나즈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자가 비로소 평정을 되찾았다. 이것저것 한꺼번에 신경 쓰이는 일이 많으니 괜한 것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싶었다. 애시당초 빈궁을 뫼시러 가는 길이었거늘. 한상궁이 부른 것인가 하여 돌아보매, 그 자리에 선 것은 곱디고운 연꽃이었다.
“저하....”
첫댓글 너무 재밌어요 흑흑. 빈궁이 오해를 했을듯. 허허
안녕하세요 윤설희님★ 새로운 독자님 뵙게되서 기뻐요^^ 부족하지만 관심가져주신 만큼 더 정갈한 글로 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꼬릿말 감사해요^^
왠지 빈궁이 임신했을것같아요~~ㅎㅎㅎㅎㅎㅎㅎㅎ 아닌가?
안녕하세요 얄루우우님★ 앗, 예리하신 지적>_< 아님, 내용이 너무 뻔하게 흘러가는걸까요;;ㅎㅎ 담편에서 확인하시면 될 것 같아요^^ 꼬릿말 감사합니다^^
오오 흥미진진^^ ~~ 빨리 7화 읽으러 갑니다^^
안녕하세요 안녕녕하세요님★ 짧게나마 남겨주시는 꼬릿말 쎈쓰^^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