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지만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이 특징이고 다만 이 법당의 바깥이나 뒤쪽에는 사리탑을 봉안했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5대 적멸보궁으로는 양산의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이다. 이 중 태백산 정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친히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암사의 적멸보궁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 적멸보궁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봉안한 곳이라고 한다.
양산 통도사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금강계단에 모셔져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대산 상원사
고려 때 고승인 일연스님은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오대산을 말하고 있다.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이라고 한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이다.
설악산 봉정암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 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사자산 법흥사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와 세 군데를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으면 그 옛날의 법향이 천수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도량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이다.
태백산 정암사
정암사의 옛이름은 원래 갈래사였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갈래사란 사명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갈래사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대국통을 지낸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란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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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 금강계단
영남알프스산군의 하나인 영축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영축총림 통도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불보(佛寶)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금강계단에 모셔져 있다. 자장율사가 이곳에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의 다른 의미로는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전국의 모든 출가자는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정통성이 인정됨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모든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제도한다’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자장율사가 646년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당나라에서 선량산의 문수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그 화현승으로부터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 1벌을 받아 귀국하여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당시에 계율종의 본산인 통도사를 창건하였으며, 그 사리를 삼분하여 각각 황룡사탑과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이 바로 그 불사리계단이다. 이 불사리계단이 통도사의 큰 특징 중의 하나이며, 이로 인해서 불보사찰의 칭호까지 얻게된 것이다.
보물 제144호로 지정된 금강계단 앞의 대웅전은 인조 23년(1645) 우운(友雲)화상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신 이유로 불상이 없고 대신 거대하고 화려한 수미단(須彌壇)이 좌대를 떠받들고 있다. 통도사는 지금도 많은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통도사 역사의 대부분은 사리신앙을 지키고 가꿔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사리를 봉안하면서 시작된 통도사의 역사는 1300년을 관통하는 전통이요, 우리나라 불교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다른 고통을 감수하기도 하였다.
통도사의 사리는 워낙 귀한 보물이라 사람들이 항상 사리함을 열어 친견하기를 원했었던 모양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옛날 조정의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와서 계단을 예배하고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함을 열어 보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 구렁이가 석함을 지키고 있었으며,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지키고 있었다. 그 후부터는 감히 이 함을 열어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산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을 지휘할 때 왕이 하사한 기를 가지고 절에 와서 사리함에 예배를 하고, 사리를 친견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김이생과 유석은 군사들을 시켜 사리함의 뚜껑을 열게 하였는데 이때 함이 조금 상했다고 한다. 그러자 유석이 수정함을 기부하여 사리를 다시 봉안하였다고 하며, 그 후에도 통도사의 사리는 수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통도사의 사리가 이처럼 수난을 당한 것은 오로지 무지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심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통도사의 사리가 금은보화보다 더 훌륭한 보물’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다만 금은보다 더 좋은 물건이라니 그것이 탐이 났을 것이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고려 때 고승인 일연(一然)스님은 ‘국내의 명산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이요, 불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라고 오대산을 말하고 있다. 오대산은 바위와 암벽이 별로 없는 육산(陸山)이라고 한다. 육산이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흙이 있어서 동물은 물론이고 식물들이 잘 자라는 산이란 뜻이다. 오대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찾아오게 하는 것은 바로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 아래 적멸보궁이 있고 부처님의 정골(頂骨)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적멸보궁이 들어선 것은 자장율사에 의해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이 우리나라의 오대산을 진성(眞聖)이 거주하는 곳으로 믿게 된 것은 중국 오대산에서 정관 10년(636) 입당을 결행, 태화지(太和池)에 있는 문수석상 앞에서 7일 동안 간절한 기도로 만났던 문수 현신(現身)의 깨우침 때문이었다.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설악산 소청봉 서북쪽 중턱에 천하의 승경 봉정암 적멸보궁이 있다.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3.7일 기도를 마치고 귀국한 것은 선덕여왕 12년(643)의 일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했으니, 신라로 돌아온 스님은 우선 사리를 봉안할 곳부터 찾았다.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 9층탑에 사리를 봉안했으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보다 신령한 장소에 봉안하고 싶어 발길을 북으로 돌린 스님은 먼저 금강산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했다. 기도를 시작한지 이레 째 되는 날, 갑자기 하늘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오색찬란한 봉황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스님은 기도의 감응으로 알고 봉황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더니 봉황새는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다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스님은 봉황이 자취를 감춘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니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이 불두암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장율사는 바로 이곳이 사리를 봉안할 곳임을 알고 봉황이 인도한 뜻을 따르기로 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형상을 한 바위 밑에 불뇌사리를 봉안하고 5층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었다. 절 이름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였다.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의 일이었다. 자장율사의 간절한 기도에 의해 절터를 잡은 봉정암은 이후 불자라면 살아 생전에 한 번은 꼭 참배해야 하는 신앙의 성지로 정착되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는 불연이 깃든 성지를 순례하다가 문무왕 17년(667)경 잠시 이곳에 머물며 암자를 새로 지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도 이곳을 참배했으며,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도 1188년이 이곳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수많은 고승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참배하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여기에 부처님의 불뇌사리를 봉안돼 있어서였다. 봉정암은 지금까지 아홉 차례의 중건과 중창이 있었다. 1923년 백담사에 머물던 만해 한용운 선사가 쓴 <백담사사적기>에 따르면 조선 중종 13년(1518) 환적(幻寂)스님이 세번째 중건불사를 했고, 네번째는 명종 3년(1548)에 등운(騰雲)선사가 절을 고쳐지었다. 이어 인조 10년(1632)에는 설정(雪淨)화상이 다섯번째 중창을 했다.
특히 설정화상의 중창 때는 부처님의 탱화를 새로 봉안하고 배탑대(拜塔台)를 만들었으며 누각까지 지었다고 한다. 여섯번째 중건은 정조 4년(1780) 계심(戒心)스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일곱번째는 고종 7년(1870) 인공(印空), 수산(睡山) 두 스님이 불사에 원력을 모았다. 그러나 6.25 전쟁때 설악산 전투로 봉정암의 모든 당우가 전소되어 10년 가까이 5층 사리탑만이 외롭게 서 있다가 1960년 법련(法蓮)스님이 1천일 기도 끝에 간신히 법당과 요사를 마련했다. 현재의 봉정암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5년부터이다. 우리나라 사찰 중에 가장 해발이 높은 봉정암은 기도를 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는 도량으로 유명하다. 자장율사의 창건설화도 그렇지만 이 밖에도 신이한 영험과 이적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자장은 귀국 후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을 지내며 왕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문수진신을 친견하는 꿈을 버릴 수 없어 오대산으로 들어와 모옥을 짓고 문수의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원녕사(元寧寺), 갈래사(葛來寺) 등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도를 했다. 오대산에 월정사와 상원사, 사자산에 흥녕사(지금의 법흥사), 태백산의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등이 창건된 것은 이런 인연에 의해서다. 중대에 터를 잡고 그 위에 적멸보궁을 지은 것도 자장 율사의 간절한 구도심과 관계가 깊다. 오대산은 중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의 오류성중(五類聖衆)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산명(山名)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동대에는 관세음보살, 서대에는 아미타불, 남대에는 지장보살, 북대는 석가모니불, 중대에는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대는 자장이 친견하고자 했던 문수 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었으므로 가장 소중한 정골사리를 이곳 적멸보궁에 모셨다. 중대를 일명 사자암이라고도 하는데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짐승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향각은 조선 초기 태종대에 깎아지른 절벽에 석축을 쌓아 올린 뒤 중건하였다. 보궁의 불사리를 공양하는 분수승(焚修僧)이 머무르는 곳인 탓에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향각 앞에는 참배객의 눈길을 끄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는 근세 고승으로 추앙 받는 한암선사가 서울 봉은사에 머물다가 1926년 오대산으로 거처를 옮길 때 짚고 온 단풍나무 지팡이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 중앙에 우뚝 서있다. 풍수지리를 보는 사람들은 이곳을 일러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천하의 명당으로 꼽는다.
부처님이 계신 적멸의도량 적멸보궁, 보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은 없고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있다. 그러나 보궁 어느 곳에 불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보궁 뒤에 약 1m 높이의 판석에 석탑을 모각한 마애불탑이 소담하게 서 있으나 이 불탑도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어쩌면 이 산 전체가 하나의 불탑이요, 부처님의 진신사리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일찍이 오대산에 오류성중의 진신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그것을 말해준다. 적멸보궁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정근이 행해지고 있으며 매년 음력 4월 1일부터 5월 1일까지 정골사리봉찬회가 주관하는 대법회가 한 달간 열린다. 이 때가 되면 보궁참배를 위해 영동 지방은 물론 전국의 불자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자장율사가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강원도로 올라와 세 군데를 돌며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성스러운 곳으로 지금도 이곳을 찾으면 그 옛날의 법향이 천수백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도량 곳곳에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법흥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중엽,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장이 꿈에도 그리던 문수진신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과 사자산을 오가며 기도를 했다. 자장율사는 이때 당에서 가지고 돌아온 사리의 일부를 기도하는 곳마다 봉안했는데 사자산도 그 중의 하나다.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할 때의 사찰명은 흥녕사(興寧寺)며 우리나라 불교사에 뚜렷한 이름을 남기게 되는 것은 신라 말 헌강왕 때 징효절중(澄曉折中)에 의해 이곳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 들어서면서부터이다.
구산선문은 홍척(洪陟)국사가 남원 실상사(實相寺)에 개창한 실상산문, 도의(道義)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보조체징(普照體澄)이 장흥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한 가지산문(迦智山門), 범일(梵日)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개창한 사굴산문, 혜철(惠哲)국사가 곡성 태안사에 개창한 동리산문, 무염(無染)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개창한 성주산문, 도윤(道允)국사를 스승으로 하는 징효가 영월 흥녕사에서 개창한 사자산문, 도헌(道憲)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개창한 희양산문, 현욱(玄昱)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개창한 봉림산문, 그리고 이엄(利嚴)선사가 해주 광조사에서 개창한 수미산문을 일컽는다. 이 중 가지산문을 개창한 도의국사는 양양 진전사(陳田寺)에서 최초로 터를 닦았으나 제자인 보조체징에 의해 장흥 보림사(寶林寺)로 옮겼갔다.
사자산문은 처음 도윤국사에 의해 화순 쌍봉사(雙峰寺)에서 문을 열었으나 제자 징효가 영월 흥녕사로 옮겨와 가장 번성한 문파가 되었다. 흥녕사에 사자산문이 들어서자 헌강왕은 이 절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보살핌을 받도록 했다. 당시 이 절이 얼마나 번창하였는지는 현재도 남아 있는 안내석탑과 수호불좌상이 말해주고 있다. 충북 제천시 장락동과 영월군 주천면 주천리,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각각 안내탑을 세웠다. 이 가운데 두 번째 것인 현재의 흥녕사지에 있는 것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그러나 진성여왕 5년(891)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흥녕사는 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뒤 고려 혜종 1년(944)에 다시 중건됐으나 얼마 뒤 다시 불에 타는 재앙을 겪은 뒤로부터는 사자산문도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걸었다.
사자산문이 문을 닫은 후부터는 불사리탑을 공양하는 작은 절로만 명맥을 유지해 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大圓覺)스님이 중건을 하면서 법흥사로 사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비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12년에는 산불로 소실되었고, 17년 동안 중건불사를 해서 1930년에 회향을 하자 다음해(1931년)에는 산사태로 옛사지 일부와 석탑이 유실되었다. 할 수 없이 1933년 현재의 절터로 옮겨 1939년에는 적멸보궁만을 중수한 채 간신히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중창불사를 거듭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법흥사에 현존하는 건물은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1968년에 세운 무설전, 1980년에 수리한 노전, 1987년에 건립한 산신각, 1985년에 세운 요사채 2동, 1992년에 세운 대형 객사 등이 있다.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
정암사의 옛이름은 원래 갈래사(葛來寺)였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갈래사란 사명은 이 절의 창건설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갈래사사적기>에 따르면 신라시대 대국통(大國統)을 지낸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에 있는 수다사(水多寺)란 절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꿈에 이상하게 생긴 스님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보자’고 했다. 스님이 대송정으로 갔더니 문수보살이 꿈에 나타나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만나자’고 한 후 사라졌다.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이 바로 그곳’ 이라며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다. 이곳이 바로 갈래사라는 것이다.
갈래사라는 사명에 얽힌 또 다른 설화가 있는데, 자장율사는 처음에는 사북에 있는 불소(佛沼) 위쪽에다 사리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탑을 쌓으면 자꾸 무너져서 기도를 했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넝쿨 세 갈래가 눈위로 뻗어나가 지금의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요사채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스님은 이곳이 바로 절과 탑을 세울 곳이라 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갈래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갈래사는 창건과 함께 3개의 보탑이 세워졌다고 하는데, 북쪽의 금봉대에는 금탑, 남쪽의 은대봉에는 은탑을 세우고 가운데에 수마노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 중 수마노탑은 사람이 쌓은 탑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금탑과 은탑은 도력으로 지은 것이라서 물욕이 많은 중생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창건에 얽힌 설화가 이처럼 풍부한 데 비해 이후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숙종 39년(1713) 자인(慈忍) · 일종(一宗) · 천밀(天密) 등 세 분의 스님이 합심하여 수마노탑을 중수했으나 그 해 8월 벼락으로 파손되자 6년 뒤인 1719년 천밀스님이 다시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정조 12년(1788)에는 취암(翠巖), 성우(性愚) 두 스님이 적멸보궁과 탑을 다시 중수했으며, 철종 9년(1858)에 해월(海月)과 대규(大圭) 두 스님이 다시 원력을 발해 보궁과 탑을 중수했다. 근년에 들어서는 1919년 보룡(普龍)화상이 중창불사를 했고, 1972년 이후는 등각(登覺) ·삼지(三智) ·법보(法寶) ·삼보(三寶) 스님 등이 당우를 고쳐 적멸도량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암사 적멸보궁에도 불상은 없다. 다만 부처님이 앉아 계신 것을 상징하는 붉은 색 방석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을 뿐이다. 사리가 모셔진 곳이 바로 빈 방석 너머 장방형으로 난 창문 밖에 서 있는 수마노탑에 봉안되어 있다. 이 수마노탑을 보궁안에서 직접 바라볼 수는 없고, 탑을 제대로 친견하기 위해서는 적멸보궁 뒤편 급경사를 따라 100m쯤 올라가야 한다. 수마노탑은 모전석재(模塼石材)를 이용한 7층탑으로 높이는 9m 가량이다. 탑신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는 수성암질의 석회암으로 판석의 길이는 30~40cm , 두께 5~7cm 정도다. 상륜부는 화강암으로 조성한 노반(露盤)위에 모전석재를 올리고 다시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설치한 탑이다.
정암사는 불자들의 이 같은 열렬한 신심을 돕기 위해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4분 정근을 실시한다. 그러나 불자들의 지극한 신심은 이것도 모자라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정진이 이어진다.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1977년에 지은 선불장(選佛場)이 있다. 이곳은 정암사 스님들과 참배객이 머무르는 숙소로 쓰인다. 선불장 옆에는 무량수각과 자장각 · 삼성각이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 도량을 가로질러 흐르는 작은 개울 건너에는 아침저녁 예불 때 울리는 범종루가 서 있다. 정암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자장율사 영정을 모신 자장각은 정암사를 더욱 특별하게 느끼게 한다.
첫댓글 저는 참 강원도 산골에 살게되서 참다행입니다 영월군 주천에 있는 법흥사 ~정선에 있는 정암사 그중간에 살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