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 왕건.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 데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 가운데 한사람이 바로 도선국삽니다.
고려사 첫머리에 보면 왕건이 고려를 세우게 된 내력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여기에도 도선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선은 왕건의
아버지에게 왕건이 태어날 집터를 정해주었다고 하는데요. "내년에 귀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을 왕건이라고 지으시오.
" 이렇게 왕건의 출생과 고려건국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을
전해주었다고 전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왕건이 17세때 도선은 직접 송악으로 와서 왕건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출사치진' 군대를 지휘하고, 진을 치고,
'지리천시지법' 유리한 지형과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는 것,
'망질산천 감통보우지법' 산천의 형세를 파악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대로라면 도선국사는 왕건의 출생부터 교육까지 전과정을
도맡았던 스승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되도록
도와준 은인인 셈이죠. 왕건의 출생과 성장을 적은 이 고려사의 기록은
신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
자들까지 있습니다.
전남 광양에 있는 백계산 자락.
도선국사가 살던 절이 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지금은 인가가 들어서있지만 이 일대가 바로 도선이 중창했다는
옥룡사가 있던 자리랍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오던 옥룡사는 1878년 화재로 폐사된 이후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부도터가 발견되었는데요.
규장각에는 목판본으로 된 도선의 비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도선이 입적한 해는 898년 72세.
고령의 나이에 죽은 옥룡사 무덤의 주인과 비슷한 나이로 추정됩니다.
사실 그동안 도선에 관한 확실한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도 아래서 발견된 도선의 유골은 천년전 도선의 존재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이 부도옆에는 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도는 그동안 비문으로만 남아있던
도선의 비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증겁니다.
도선에 비문을 보면..
'연좌망언 삼십오년' 옥룡사에서 35년간 참선하면서 수도를 한 고승이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 '음양지리' 그러니까 풍수지리를
배운 내력과 왕건의 고려창업을 예언하는 그런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비의 뒷면을 보면 이 비를 건립하게 된 내용에 대해서 적고 있는데 '천덕이년 봉선'
그러니까 1150년 고려인종때 국가에서 왕명을 받아서 세웠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도선국사비는 도선이 입적하고 250여년이 지난뒤에야 세워진 것입니다.
월출산 자락에 있는 성기동 유적지는...
백제 왕인박사와 함께 도선의 출생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도선의 어머니는 꿈에 광채나는 구슬을 삼키고 도선을 잉태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곳은 사람이 안 살고 성인이 태어난 유적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보호하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도선이 태어난 마을 인근에 있는 월출산 도갑사.
도선이 개창했다고 전해지는 사찰입니다.
도갑사 국사전에는 도선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데요.
조선 세조때 그려진 영정을 최근에 모사한 것입니다.
15살에 출가한 도선은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를 시작.
스무 살 되던 해, 도선은 승려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합니다.
전남 곡성에 있는 동리산 태안사.
통일신라때 고승 혜철대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이곳에서 도선은 스승 혜철대사를 만나 새로운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무설설 무법법이라는 화두였습니다.
"불법이 무어냐 하면 우선 뜰앞의 잣나무라 한다든지 마른 똥막대기다 한다든지
그런 화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설설이니 무법법이니 하는 것
은 하나의 화둡니다. 그걸 알아채면 견성, 성불한거죠."
도선은 바로 이곳에서 선종에 입문한 것입니다.
어려운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라 참선과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
이것이 바로 선종.
선종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수 있다는 사상으로..
당시 불교계의 새로운 종교운동이었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선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우선 불교라는 하나의 종교선으로서 실천성이 없는
그런 불교를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불교는 대단히 혁명적인 개혁입니다.
이것을 그당시 교학승들이 이론에 치우쳐있고, 권위주의 명예 집단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런 것을 타파하고 순수한 불교의 근본정신을 뒤돌아보자는 운동의
모티브가 되어졌다, 그래서 이것은 개혁도 보통 개혁이 아니라 혁명적이었다,
이렇게 볼수 있는겁니다.
도선의 스승이신 혜철대사는 우리나라에 선종불교를 들여온 선승이십니다.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그곳에서 유행하던 선종불교를 접하게 되시고..
그가 귀국해서 창건한 태안사는 우리나라 선종불교가 태동한 중심지였죠.
혜철을 비롯한 당나라 유학승을 중심으로 선종은 전국적으로 확산.
당시 신라불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종을
대신해서 새로 일어난 선종은 중앙, 즉 경주에서 발붙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각 지역에 거점을 마련해서 사찰을 짓고 활동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보니까
각 지역의 유력자들, 흔히 호족이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과 직접 연결을 맺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선종은 경주가 아니고 각 지역에서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여러 세력가들의 정신적인 중심지 역할을 했달까 이렇게 말할수 있습니다.
무설설 무법법의 깨달음을 얻은 도선은 15년간의 운수행각에 들어가십니다.
운수행각이란 참선으로 깨달음을 얻은 선승들이 전국 산천을 순례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으로.. 도선은 이 과정에서 신라말 혼란스러운 사회현실과 민심을 직접
보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죠.
서른일곱살 되던해, 운수행각을 마친 도선은 옥룡사를 중창하고 35년간 머물면서
인근에 4개 절을 창건한다. 바로 독자적인 옥룡산문의 출발이었던 것 입니다.
도선은 참선으로 불법을 깨달은 선승이었습니다. 제자가 수백명이나 되고
그가 창건한 절이 너댓개나 되는걸로 봐서 당대에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해서 도선은 입적후 선사라는 칭호를 받습니다.
도선은 고려시대에 더 높게 평가를 받습니다. 고려 현종은 도선을 선사에서
대선사로 한단계 더 올립니다. 숙종은 왕사, 인종은 국사로 추증합니다.
이 '국사'는 국가에서 승려에게 주는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신라의 승려를
고려시대 국사로 추증한 경우는 원효, 의상, 도선 이렇게 세사람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도선은 사후에 원효나 의상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았던 것입니다.
현재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도선의 유작은 없습니다.
고려사에는 도선이 썼다는 책이름이 곳곳에 기록돼 있는데요.
옥룡기, 도선답산가, 도선비기, 송악 명당기, 도선밀기 등 다양한 비기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기는 고려중기 이후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거의 대부분이 후대인들이 부풀리거나 과장돼서 그 원형을 알수 없다는 도선비기.
그러나 고려사에는 비기의 내용을 짐작할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고려 숙종때, 김위제는 수도를 옮기자는 상소를 하며 도선비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도선은 고려가 개국하고 160년이 지나면 한양에 도읍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도선의 비기에 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내용은 송악명당설에 관계된 내용입니다.
송악의 지기가 쇠해서 도읍을 옮겨야 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를 보면
아무래도 도선은 송악의 명당에 관계된 얘기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들이 굉장히 많은데 도선이 지었다고 나오는 구절을
보면 주로 국도나 도읍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특히 명당의 규모가 상당히
큰것에 대한 얘기들이 많은데 그것은 책이 현존하는 책이 없긴 하지만 당시 도선이
생각했던 도읍으로서의 입지, 이런것들을 한반도 전체를 거시적으로 살펴서 이런
것이 도읍이 될만하다는 생각이나 이야기를 남겼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원형은 베일에 가려져있지만 도선비기는 실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거죠.
사람이 병들면 침이나 뜸질로 치료하듯이 산천의 문제점도 절이나 탑을 세워
고치고 보완하는 것이 바로 풍수의 대가였던 도선이의 비보사상입니다.
풍수적으로 완벽한 터를 찾기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드센 곳이 있다든지 해서 어떤
실제적인 장소에 가서 결점이 있는 부분이 많은데 그런 결점이 있는 땅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써야될 경우에는 여러 가지 보완조치를 해야되는데 그런 것을 통틀어서
비보라고 할수 있죠.
비보는 도선풍수 사상의 핵심인 것입니다.
여기가 자연지형의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는 지리산에서 도선이 이인을 만나서
산천순역의 흐름을 배웠다고 하는데 도선은 모래로 산천순역의 형세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도선이 창건했다는 사찰이 무려 3800개나 된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을 그대로 다 믿을수는 없겠지만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에 비보를 많이 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땅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혼란기 민심을 모으고, 국가를 통합하는 구심점이었던 도선의 비보사상.
왕건으로 하여금 도선의 비보사상을 활용해서 고려 통일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게
하였던 겁니다.
풍수는 도선이래 천년동안 우리 생활 깊숙히 자리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풍수는 조상의 묘자리를 잘 써서 자손이 복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변해왔습니다. 그러나 원래 도선의 풍수는 이런 이기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도선이 살았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불법과 땅의 힘에 의지하면서 믿고 살았습니다.
불교와 땅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이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살고있는 이 땅을 다시 보고 환경을 가꾸면 좋은
터가 될수 있다는 그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겁니다.
그가 살았던 후삼국의 혼란기-
그의 사상은 태조왕건의 통일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통일을
이루려면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으로 갈라져있는 다양한 세력을 어떻게
포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묶을수 있었던 힘. 그것은 바로 도선의 비보사상이었던 것입니다.